심판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신앙기사 2부]

 

혹시 재판을 받아 본 적 있습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은 법정에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고, 죄가 있는 사람은 법정에 서는 것이 매우 두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했고, 판사도 공정한 재판관이 아니라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신앙기사  1부]에 나온 정 목사의 입장이라면, 재심을 간절히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보다 더 억울한 입장에 처해있습니다. 무서운 검사가 우리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승승장구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재판은 실수가 많고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고 공평한 분입니다. 의인에게는 마땅한 은혜를, 죄인에게는 마땅한 형벌을 내리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고,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멸에 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조사하고 심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유능한 변호사의 변론과 의로운 재판관의 판결을 통해 억울함이 풀리는 일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성경에 명시된 구원의 과정인가요? 그렇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재판 과정을 통해 인간의 구원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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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판의 과정​

 

검사의 등장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고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밤낮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의 직업은 우리를 고소하는 일입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를 지었는지 샅샅이 뒤져서 명백하게 밝혀내는 유능한 검사입니다. 거기다가 뇌물도 받지 않고, 있는 죄를 없다고도 하지 않고, 없는 죄를 만들어 내지도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적시해서 최고 형량을 받게 하는 아주 능력 있는 검사입니다. 고소하는 자가 있으니까 법정이 세워지겠죠?

 

의로운 판사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재판, judgment)이 있으리니”(히 9:27).

인간으로 태어난 모두에게 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검사는 사탄인데, 재판장은 누구인가요?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12).

입법자, 법을 만드신 분이 심판도 하십니다. 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재판도 하시니까 공의로운 분이시면 만든 법에 맞춰 하실 것입니다. 재판장이 뇌물을 받고 마음대로 판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행히 법에 근거해서 재판을 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 법에 죄인은 어떻게 된다고 했을까요?

 

피고인의 운명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죄를 지으면 죽는다고 돼 있습니다. 이 사형선고를 면할 방법이 하나 있는데,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용서를 받으려면 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용서를 받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당신, 용서해줄 테니 죽으시오!” 법에 의하면 “사함”(용서)받는 길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음으로써 용서를 받는다면 용서의 대가가 너무 큽니다. 이 재판이 공의롭기는 한데, 자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고 마는 것인가요?

유능한 변호사

​그래서 이 법정에 유능한 변호사가 한 명 등장하는데,

“우리에게 대언자(변호사)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 변호사가 우리를 변호할 때,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첫째는 예수께서 백성들을 위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에 근거해서 변론합니다. 둘째는 보혈의 피로 죄 사람을 얻어 개혁이 따르는 성도들의 참된 회개를 근거로 변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을 앞세워서 나가는 사람은 심판대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보혈의 공로로 용서받은 사람은 넉넉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넉넉히 통과할 수 있는 이 은혜의 기간동안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무혐의, 믿음의 의, 죄의 도말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죄과를 도말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도말하다”(Blot out)는 말은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

죄악을 사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말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의 기록조차 지워 버리시는 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나보다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그런 더러운 기록을 우주에 남겨두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되 완전히 잊어버리고 도말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렘 50:20).

왜 찾지 못할까요? 도말 시켜버렸거든요.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도말 할 테니, 내가 다 잊어버릴 테니 돌아오라!” 호소하고 계십니다. 도말은 “지워 없애다”, “제거하다”는 뜻입니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내도 파도가 왔다 가면 지워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계속 지우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죄가 모두 도말되고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들의 죄는 모두 용서되며, 허물이 도말 됩니다. 이 같은 놀랄만한 기적적인 변화는 단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의”(以信稱義)입니다.

 

구약시대 백성의 죄는 어떻게 도말 되었는가?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10).

이 장막은 구약의 성막 제도를 말합니다. 죄인이 양을 잡고, 제사장은 성소 첫째 칸에 들어가 피를 뿌리고,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로는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합니까?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옛 제도 아래서는 아무리 예물과 희생제물을 드려도 그것을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정결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혁할 때까지”는 언제 입니까? 이 모든 제사 제도를 언제 개혁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구약의 제도는 하나의 표상, 그림자였습니다.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표상으로 보여주신 것인데, 대속죄일에 죄를 도말 했지만, 그 도말은 1년짜리였습니다. 매년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죄의 도말과 승리의 생애

​죄의 도말이 확정되는 사건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하여 연합군에게 중요한 두 날: D-day, V-day

1944년 6월 6일은 연합군이 독일군을 패배시키려고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하던 날입니다. 이날을 D-Day(Decision Day 결정의 날)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결정적인 날입니다. 사탄이 패배했고, 하나님이 승리했고, 온 우주가 죄 없이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다는 확실한 승리가 이루어진 곳이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할 때 우리의 모든 부채가 다 지불됐고, 죄의 도말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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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작전으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연합군은 이날부터 가장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하고 드디어 전쟁이 끝났습니다. 베를린을 함락시키던 그날이 바로 결정적 승리가 성취되는 순간이었지요. 그날을 V-Day(Victory Day)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완전한 승리의 날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D-Day)을 지나 승리의 날(V-Day)을 향해 나가면서 이미 주님이 다 이뤄 놓으신 이 결정적인 구원을 끝까지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지키고 나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루신 승리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주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불변성을 말해 주는 한편,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을 온 우주에 선포합니다.

구주께서 임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사탄의 멸망을 알리는 종이 울렸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용서하고 도말이 확정된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부채를 다 청산하고 죄의 기록들을 도말하기로 확정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이기신 승리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룬 승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의 모든 죄가 다 도말 되었다면 무슨 심판이 필요하느냐?”라는 질문을 합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면, 심판을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되 완전히 잊어버리신다고 약속하셨고, 십자가에서 도말이 확정되었으나 죄의 문제가 개인에게서 그리고 온 우주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죄가 도말되는 것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서 죄가 도말되어 없어지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2. 우주적인 속죄의 필요

어떤 의미에서 이 심판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사탄의 고소로 하나님이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게 됐습니다. 이 심판은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 받을지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이 재림 전 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운가?”라는 도전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모든 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결 행위가 공의로운지 증명해 내셔야만 합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우주세계는 하나님처럼 전지(全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결이 옳았는지, 정당했는지를 우주 앞에서 재심(再審)하게 됩니다.

나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

​개인의 속죄와 도말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죄의 도말은 개인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4).

성소가 정결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성전이 정결케 되는 것뿐 아니라 우주적인 속죄와 도말이 포함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조화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구원 문제에만 집착하면 하늘 성소의 우주적 죄의 도말 문제를 도외시하게 됩니다. 우주적 관점에서의 죄의 도말은 죄의 장본인인 사탄이 제거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모든 죄뿐만 아니라 죄 그 자체가 도말되어야 하는 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속죄사역에는 내가 하는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음을 성소 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뜰에서 어린양에게 죄를 전가하고, 대제사장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 중보하시고 하나님은 도말하십니다.

지상 성막의 구조가 뜰, 첫째 칸, 둘째 칸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죄인은 어디에만 있을 수 있습니까? 죄인은 뜰에만 있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제사장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다음 일은 누가 하는 일인가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우리가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안 든다고 “재림 전 심판”이 없다면서 하늘 성소를 폐지해 버리면 대제사장이 하는 일까지 우리가 다 관여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에 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어린양을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는 일만 하고, 나머지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재림 전 심판을 거부하는 것은 그분의 일을 폐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의인, 악인, 사탄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 12:9).

끝없이 참소하고 끝없이 유혹하는 사탄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인류 역사를 그냥 끝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주에서 완전히 제거 되어야만 이 우주가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사탄이 제거됨으로 온 우주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고 성전이 정결하게 되는 일이 완성됩니다. 그것이 성소 제도에서 아사셀 염소를 대속죄일에 광야로 내보내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구속의 과정이 완전히 끝이 납니다. 모든 죄의 시작이었던 사탄이 마침내 제거될 때에야 비로소 죄가 우주로부터 영원히 도말되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이 구원을 받고!

악인들은 멸망을 받고!

사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오직 그때만 온 우주가 원래의 상태, 즉 죄가 들어오기 전의 상태인 완전한 조화와 통일의 상태에 놓였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지금 누가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준비된 불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판의 불은 사탄을 없애기 위해서 준비한 불인데, 왜 악인들이 거기에 가게 됩니까? 죄와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에 들어가서 태워질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우리는 죄와 이혼하고 예수님과 결혼해서 의의 길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마지막 도말 사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를 위한 변호사

​40년동안 미국에서 사형을 당한 천명의 죄수들을 조사해보니 천 명중 10명이 무죄였습니다. 백분의 일정도가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합니다. 너무 늦게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재판을 잘해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사형장에 갈 때, “재심이 한번 열렸으면” 하고 얼마나 간절히 바라겠습니까!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에 호소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어 어려울 때, 누명을 쓰고 어찌 할 수 없을 그때 매우 유능한 변호사가 무료 변호를 해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재림 전 심판”은 의인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 사방으로부터 “이 사람은 이래서 구원받을 수 없고, 저 사람은 저래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고소와 누명을 받을 때, 악한 세력들에게서 핍박을 받을 때, 예수께서 무료 변론해 주겠다고 나서는 심판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에 가기 전에 사탄의 비난과 고소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회개가 참이었는지 하늘 기록책에서 조사를 하게 되고, 그 심판을 통과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사하고 심판을 한다”는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런 심판은 두렵습니다. 우리를 하늘에 오지 못하도록 트집잡고 감찰하는 숨막히는 심판이 아닙니다. 하늘에 오도록 도와주시는 심판이며 억울함을 풀어주는 복된 심판입니다. 이 심판의 목적은 조사해서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근거로 예수님이 변호하시는 것이 초점입니다. 여기에 강조점을 두면 믿음이 생깁니다. 소망이 생기고 예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강조점을 여기에 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인트를 잘못 찍었습니다. “기록책을 조사하고, 행위에 따라 심판하고” 여기에 강조점을 찍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강조점은 그것이 아니라, “하늘 법정에 우리를 위한 변호사가 계시다!”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옹호하는 것이 재림 전 심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사함과 정결함을 얻은 사람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옷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개의 기록이 없다면 예수님이 변호할 수 있을까요?

 

동일하신 하나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죄인을 만나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따뜻하고 다정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예수님과 하늘 법정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동일하신 분이신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동일한 분이십니다. 지금 하늘 법정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무료 변호를 해 주신적이 있습니다.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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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파 놓은 함정에 이 여인이 빠진 것입니다. 이 여인을 함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무료변론을 자청하셨습니다. 무죄를 입증할 아무런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땅에 뭔가를 쓰셨는데 고소한 사람들, 본인들만 알고 있는 은밀한 죄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깜짝 놀래서 다 도망갔습니다. 왜 도망갑니까? 회개해야죠! 그랬으면 모두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이때 무료 변론했던 예수님이 지금도 하늘 법정에서 뭐하고 계시나요? 우리를 위해 무료 변론해 주고 계십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전담변호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도 있습니까? 우리의 영생을 책임질 변호사가 있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스가랴의 “재판 계시”에서 빛을 보다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고소, 고발, 비난)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슥 3:1-3).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변호사 예수님, 고소인 겸 검사 사탄 그리고 피고인 우리가 서 있는 법정입니다. 사탄이 지금 고소를 하고 있습니다. 고소인이 있는데 어떻게 법정도 안 열고 무사통과 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불의한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을 거쳐야 합니다.

이 재판에서 승소하려면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첫번째 피고는 무죄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두번째 유능한 변호사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세번째 재판관이 공정해야 합니다.

무죄상황이 되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죄 지은 적이 없습니까? 죄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무죄로 만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회개한 죄인은 무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의 죄값을 이미 목숨으로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피를 의지해서 회개했다면 무죄입니다. 예수님은 유능한 변호사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정한 재판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3가지가 다 충족되면 재판을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 9:4).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 43:1)

다윗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다 보니 “주님이 나의 변호사가 되어주세요”라고 간청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변호사)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사탄은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을 참소한 것처럼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고소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그를 “우리 형제들을 참소(무고, 고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계 12:10)라고 말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은 사탄의 이 고소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법정에 반드시 서야 하고 재판 없이 하늘에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탄으로부터 고소당합니다. 지은 죄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재판장님 이 사람은 이래 저래서 안됩니다”라고 할 때 변호사 되신 예수님이 “재판장님, 이 사람이 그런 죄를 지은 것은 맞지만 그가 나의 피를 의지해서 회개했습니다. 제가 그 값을 대신 지불했습니다. 나의 피를 가지고 그를 변호합니다.”라고 옹호하는 것이 재림 전 심판입니다.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6]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슥 3:4-7).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분명 잘못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칭의)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만족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하늘에 가려면 이 재판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넉넉히 승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심판대에 당당히 믿음으로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은 월간지 [열한시 259호 행복한 심판]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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