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과거사위원회 [신앙기사 1부]

성경에서 강조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들 중 하나는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심판인데, 이 개념이 좀 생소하다 보니 많은 분들이 깊은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실제 벌어졌던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아주 쉽게 하나님의 심판 과정을 이해하고 죄의 정결함을 받아 의로운 사람으로 준비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8년 법무부 과거사위원회에서 재조사해야 할 사건 5개를 지정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배우 장자연 사건. 경찰은 단순 우울증으로 단정 짓고 수사를 종결했는데, 이후 고인이 남긴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재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또 하나가 춘천 살인 조작 사건. 1972년 춘천 파출소장의 9살 난 딸이 실종됐습니다. 수사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경찰이 범인을 검거합니다. 검거된 범인은 바로 만화방 주인이었던 정원섭 씨였는데, 교사의 경력도 있고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목회 지망생이었는데, 생활고 때문에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30대 남자였습니다.

만화방에 온 9살 아이에게 “오늘은 TV가 잘 안 나오니까 다른 가게에 가서 같이 보자”고 하면서 아이를 근처 농로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엔 TV가 귀했던 시절이라, 만화방에 TV를 보러 오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만화방 직원들은 정씨가 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걸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현장에서 범인이 흘린 머리 빗과 연필이 발견되었는데, 만화방 종업원은 그 빗이 자기 것이라고 인정했고, 정씨의 아들도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이 본인의 것이고 아빠가 가지고 갔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래서 정씨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무기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수사, 공정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1972년 사회는 유신헌법을 선포하면서 독재와 억압이 가득 차 있을 때였습니다. 대통령은 내무부 장관에게 크게 화를 내면서 빨리 해결하라고 지시했고, 내무부장관은 경철청장을 불러서 10일안에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면 <해고>라고 경고합니다. 그런 배경 가운데서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하는데도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10일째 되는 날 놀랍게도 경찰은 범인을 검거했다고 전격발표를 합니다.

범죄의 조작


영화 같은 일입니다. 대통령의 불호령, 주어진 기간 10일, 10일째 범인 검거. 이 일이 어떻게 이뤄졌을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화방에 오지도 않은 아이를 만화방에 왔다고 정 씨에게 고문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 정 씨가 허위자백을 하게 됩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는 것을 봤다는 증인들도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 한 것들이었습니다. 종업원의 빗도 처음에는 “저는 처음보는 겁니다.”라고 했는데 고문이 이어지자 “제 겁니다.”라고 거짓 진술을 하게 되었고, 그 고문 장면을 눈앞에서 봤던 정씨의 아들도 벌벌 떨며 연필이 자기 것이라고 허위로 말하는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정씨가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 했다고 호소했고, 종업원과 어린 아들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애초 경찰이 현장에서 발견한 연필은 노란색 몽당연필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사는 긴 하늘색 연필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재판 직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정씨 아내에게 아들의 필통을 가져오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늘색 연필을 꺼내 아들에게 이로 물어 잇자국을 내라고 합니다. 검사가 법정에서 아들에게 보여준 연필은 그 필통에 실제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색 연필을 보여주면서 “이 연필 네 거 맞지?”라고 물어보니까, 아들은 당연히 “그 연필은 제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노란색 몽당연필이 아니라 아들 필통에 있던 걸 꺼내 보여주면서 “이것이 네 것이 맞냐”고 질문했으니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말을 한 것이죠.

범행 현장을 최초 발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모씨가 증인으로 출석했는데, 검사가 연필을 보여주자, “저 파란 색깔 아닙니다. 누런색 몽당연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검사가 이씨를 위증죄로 구속해 버립니다. 그리고 구속된 상태에서 다시 법정에 나온 이씨가 증언을 번복합니다. “현장에서 본 것은 노란색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색이 맞습니다.” 끌려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그래서 결국 이 연필이 유죄의 주요 증거가 됐고,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억울한 누명, 기막힌 현실


충격에 빠진 정 씨의 아버지는 쓰러져서 1년도 안 돼 사망했고, 정 씨의 아들은 엄마가 살인범의 아내라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집단으로 맞는 모습을 목격하고, 자기가 한 증언 때문에 아버지가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정 씨의 아내도 이 사건 직후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됐고 가족들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온 가족의 인생이 파탄 났습니다.

정 씨의 교도소 수감생활은 한편의 영화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교사로 일했던 경험으로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시켰고, 군 복무시절 군악대로 활동한 경험을 가지고 교도소 내 밴드를 조직해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정성과 노력이 교정당국을 감동시켜서 1987년, 영원히 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그 교도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가 수감된 지 16년만의 특별사면이었습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다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던 분이 1999년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정원섭 목사는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나는 살인범이 아니다”는 절규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나는 살해된 아이를 본 적도 없으며 내가 한 자백은 모두 경찰의 고문으로 만들어진 허위자백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왜 감옥에서 나온 지 12년이 지나서야 억울함을 말합니까?” 그래서 믿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정 목사는 말합니다. “나는 나를 고문한 경찰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난 후에도 내 아들에게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오명만은 벗겨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진실을 바로잡아 달라고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법원은 그와 증인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고, 뒤틀린 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 목사의 비극이 끝난 것은 참여정부 시대가 되어서 였습니다. 참여정부 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고, 2005년에 정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결과 당시 경찰관이 정 씨를 고문했다는 진술을 하게 되고, 또 당시의 만화방 종업원들을 만나서 경찰과 검사의 감금, 폭행, 회유 때문에 거짓말했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피해 아동에서 발견된 범인의 혈흔이 있었는데 당시 이것을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분석한 결과, 진범의 혈액형은 A형이었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 씨는 B형입니다. 당시 신문기사에도 버젓이 범인의 혈액형은 A형이라고 실렸습니다.

그런데도 정 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경찰, 검찰, 국과수, 법원 모두 처음부터 정 씨가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지만 서슬퍼런 유신시대에 대통령이 빨리 범인 잡으라고 하니까 아무나 잡고 범인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진범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까지 확보한 상황에서도 범인으로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2007년도에 무려 35년 만에 다시 재판이 열렸고 결국 무죄 판결이 선고됐습니다.

가해자의 변명


그런데 검찰이 항소를 했습니다. 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도 무죄 판결이 유지되자 검찰이 상고까지 했습니다. 2011년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이 확정됐었습니다. 참 긴 싸움이었습니다. 이때 정 목사의 나이가 77살이었습니다. 사건 발생 후 39년이나 지난 후, 마침내 억울함의 옷을 벗고 길고 긴 악몽의 터널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는 또 한번 정 목사 가족을 외면합니다. “형사 보상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국가가 수사나 재판을 잘못해서 억울하게 징역살이 한 경우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정 목사와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1심에서 26억원 지급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판결이 2014년 정부에서 법을 바꾸면서 완전히 뒤집혀버립니다. 이유는, “소멸시효 기간이 10일 지났기에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는 것인데요. 원래는 보상 결정이 확정된 날로부터 3년이내에 청구하면 됐는데, 법을 바꿔 6개월로 줄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사건의 경우 보상 결정이 확정된 날로부터 6개월 하고도 10일이 지났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재판은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6개월 내에 마무리할 수가 없는데, 10일이 초과되어서 안 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판결로 정 목사의 아들은 “폭탄이라도 들고 어디든 찾아가고 싶은 기분이었다.”라고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국가가 한 가족의 인생을 망가뜨리고도 10일이 지났기에 “안 됩니다.”라는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지요.

보상금은 0원,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낸 경찰, 증거 조작으로 사형을 구형한 검사, 무죄임을 알면서도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 이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월간지 [열한시 259호 행복한 심판]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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