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시리즈 6권- 영원한 복음
제2부 부자와 거지 나사로
1. 서론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유로써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많은 사람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하여서 사람이 죽은 후에저 세상에 가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셨다고 믿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 성경 절들에 나타나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를 정반대로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께서는 지옥과 천국이 아닌 전혀 다른 교훈을 가르 치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성직자는 이 예화를 문장의 전후 문맥에서 분리해 왔으며,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넣어주기 위한 도구로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 기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 근거한 “회개(?)”가 일시적으로 생길지 모르 지만, 하나님의 품성과 성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하여서만이 참된 회개와 믿음이 생긴다는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본 연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비유가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랜덤 하우스 대학사전(The Random House College Dictionary)에는 비유의 정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간단한 풍류 적인 이야기.” 쿠루던즈의 용어 해설 집(Cruden’s Complete Concordance)에는 이 개념을좀 더 폭넓게 묘사하고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비유는 “어느 다른 곳에서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이 비유 가운데 사용하는 상징(가 시나무에게 왕이 되도록 요구하는 나무들처럼, 삿 9:14,15)과 실제의 상황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비유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든지 간에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경 안에서 수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2. 예수님과 비유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비유의 가치를 잘 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도록 자극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자신이 너무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다면, 듣는 청중 중의 어떤 이들은 곧 말씀을 잊어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 중의 어떤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방법으로 이사야 6장 9절의 말씀을 재인용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라.”(눅 8:10) 쿠루던즈 용어 해설집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실 때에 우리 주님은 자주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진리를 자원하여 알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진리를 가리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다. 진리를 진정으로 갈급한 사람 들은 그 의미를 발견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누가복음 16장 19-31절을 말씀하실 때에 누구에게 말씀하시고 계셨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고 계셨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되기전 14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 는지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라는 말씀을 14절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 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무리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사람 중에 바리새인들보다 더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람들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속임수와 모사로 일관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지혜롭고 진실하게 취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지적하는 말씀을 하시는 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은 비유와 풍류를 사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누가복음 10장 21절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 다.” 마가복음 4장 33,34절에서는 예수님의 교훈이 많은 경우에 비유로 나타났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3.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요점
자, 그러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그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기를 원하셨던 진정한 기별이 무엇인지를 확실 하게 구별하여야 합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 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 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19-21).
이 이야기 가운데 나타나 있는 부자는 누구였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을 받아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롬 9:4). 이 이야기의 나중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말처럼, 유대인만이 “아 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는 이러한 특권을 가지고 있던 국가이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나사로는 영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영적 유산을 나누어 주어야 하였을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유대 인들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적인 부유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혀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이방인들을 마치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도 만족하는 “개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비유는 잘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비유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6,27).
부유한 유대인들은 진리를 나누어 주지 않은 채 보관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붕괴시켜 왔던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잠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교만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 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이러한 엄청난 교만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 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덩이가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2-26).
유대인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좋은 생활”을 즐기었으나 그들의 이웃을 부유케 하거나 축복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는 어떤 보상도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25).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사로에 의해서 상징된 영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의 왕국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이방인들이 부유한 유대인들의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받는 “개들”과 죄인들이 하늘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이 비유는 부자가 그의 형제들에게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 임무를 위해서 나사로를 보내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구하면서 부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눅 16:30). 아브라함은 대답 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 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현상마저도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거절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등한히 여겼던 바리 새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그 후, 얼마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실재 인물인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정확하게 확증시킨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지만, 교회 지도자들과 관리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부활한 나사로를 죽이려고 까지 계획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내세에서 두 개인의 실제적인 경험이라고 잘못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근거로 하여서, 어떤 이들은 지옥의 불타는 고통 속에 던져진 사람들이 영원히 멈추지 않고 불에 타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사용하셨던 이유와 목적을 보지 못한 채, 비유에 나타나 있는 이야기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지금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모두 아브라함의 품 안에 안겨진다고 믿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누구의 품 안에서 쉼을 얻을수 있습니까? 인간 아브라함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천국과 지옥 사이에 실질적인 거대한 장벽이 있다면 어떻게 부자가 아브라함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악인들이 고통 중에 빠져 아우성치고 있는데, 어떻게 하늘에 있는 의인들이 천국의 안락함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비유는 비유로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서 야기되는 또 다른 딜레마는 “빈 무덤의 신비”입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해석된다면, 두 사람 모두 무덤 속에서 누워 있지 않았다는 결론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가지고 지옥과 천국에 갔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그의 눈을 치켜뜨고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쉬는 나사로의 손가락으로부터 떨어지는 물 한 방울로 그의 혀를 시원케 하기를 갈망하는 모습을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의 영혼만이 각각 천국과 지옥에 갔다면, 어떻게 영혼에 눈, 손가락, 혀들이 있겠습니까? 시체가 무덤에 묻힌 후에 천국이나 지옥 어느 곳으로도 옮겨지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중국과 이집트의 고대 왕실의 무덤에서도 여전히 시체가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사람이 죽으면, 종국에는 흙먼지가 되어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4. 비유의 의미
예수님은 사후의 육체적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맡긴 책임과 진리에 대한 청지기로서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별을 듣기를 열망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상 누가복음 16장 전체는 청지기의 직분에 대한 것입니다. 16장 1절에서부터, 예수님은 금전이나 재산의 청지기 직분에 관한 또다른 비유를 주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물질에 대한 청지기 직분을 다루고 나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진리를 부여받은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또 다른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첫 번째 부자 청지기가 자신의 실질적인 부를 불충실하게 다룬 것처럼, 영적인 부활을 얼마나 불충실하게 취급하였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지옥불에 대한 가르침을 주장하기 위해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지옥과 천국의 모습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의 초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옥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악인이 영원한 세대를 통해서 끊임없이 고통당할 것이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은 완전히 멸망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수많은 증거에 어긋나는 원칙을 가르침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손상하지 않으셨습니다.
지옥에 관한 진리는 비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몇몇 성경 절을 찾아봄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 이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6:23). 모든 영혼에 단지 양자택일의 두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놀라우신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의 소망 없이 영원한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악인이 끝없이 고통을 당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영원한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악인이 받을 보상에 대한 분명한 성경 절들을 찾아봅시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시 37:2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 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계 20:9).
이외에도 다른 많은 말씀이 인용될 수 있지 만, 위에 언급한 성경 절들은 한결같이 악인의 최종적인 운명은 죽음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제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악인의 완전한 파멸을 서술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가장 격렬한 어휘를 쓰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명확한 말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 진심으로 갈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을 위한 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불은 너무도 뜨거운 것이어서 그 불에 던져진 모든 사람은 완전히 사라져서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불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예수께서 지옥불이 영원히 타는 불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비유 자체와 비유의 목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배경과 실질적인 강조점을 놓침으로써,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안되겠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시려고 하셨던 교훈을 올바로 이해하여서, 우리 자신의 삶에 그것을 적용시킵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타난 바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을 위한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유산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그들을 가정과 교회로 초청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부유함을 사장한다면, 옛날의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파멸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활동적인 사랑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 과의 관계도 더욱 강하여질 것이며, 더 한층 의미가 부여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무서운 이야기로 만들지 말고, 그 대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5. 참고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 사용된 “세세토록”(영원토록)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다른 유사한 성경 절에서, 이것을 “ 단지 사람이 생존하는 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 굽기 21장 6절(영영히), 그리고 사무엘상 1장 22절과 28절(영영히), 그리고 요나 2장 6절(오 래도록-영원히)을 찾아서 “영영토록”, “영원히”, “영영히” 등과 같은 표현들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찾아보십시오.
“영원토록”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다서 7절을 살펴봅시다. “소돔과 고모라와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영원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영원한 불”이라는 말의 의미가 영원히 불타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타서 없어졌음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히 불타고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면, 지금도 소돔과 고모라 도시는 중동지방에서 불타고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불”이라는 표현은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불로 인하여 완전하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결과가 영원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