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죽은 자의 영들, 그들은 말하고 듣는가?

성경공부 시리즈 6권- 영원한 복음​

제1부 죽은 자의 영들, 그들은 말하고 듣는가?

1. 서론

러시아의 과학자인 알렉산더 보고모렛즈는 사람이 적어도 150살까지는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인체의 조직의 노화 과정을 지연시키는 혈청을 만들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과학자는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해서 세워놓은 목표에 86년이나 모자라는 64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 습니다. 인류는 아직도 삶과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불로초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또한 아무도 죽음의 장막 저편을 건너갔다가 돌아오지 못했으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증거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책,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시대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비밀로 남아 있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펼쳐져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감정과 미신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사람이 사망한 후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공부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대한 대답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면 죽음과 영혼에 관한 모든 다른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 해답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제시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특성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 셨습니까? 사전을 찾아보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운명의(Mortal)”이라는 말이 “죽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을 수 있는 특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는지 아니면 끝이 없는 생명력을 가진 특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하 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욥기 4장 1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생(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영문 흠정역)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바로 여기에 우리가 찾고 있는 답이 나왔습니다. 영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으며, 죽음을 면치 못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님께서는 사람을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본래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특성이 있으십니다. 그분께서만이 불멸의 존재이십니다. 불멸이란 말은 오직 하나 님을 가리키는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단어입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불멸하고 Immortal, 영문 흠정역)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딤전 1:17).

인간 가족은 불멸의 특성을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한 분만이 그런 특성이 있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지으신 분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위대하신 근원이십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습 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Who only has immortality)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전 6:15,16).

그러나 어떤 분들은 불멸의 주제에 대한 다른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가졌지만, 육체 안에는 죽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진 짜” 사람은 육체 자체가 아니라,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죽지 않는 영혼이 아닌가요? 매우 어렵게 들리는 질문이지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성경절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영혼은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영혼이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이 말씀은, 영혼이란 불멸의 특성이 있거나 또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배운 것처럼 “불멸”이라는 말이 “죽을 수 없는”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상, 어떤 영혼이 원래부터 불멸의 성질을 타고났다고 하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열 개 이상의 성경절들이 영혼은 불멸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교사이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영혼은 죽을 수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예수께서는 이러한 명백한 증언을 하심으로써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셨습니다. 영혼은 죽을 수 있으며, 지옥 불에서 멸하여 없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불멸의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에게 꽤 충격적인 진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에 대한 전통 적인 견해가 이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나 “영”이라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인 루아흐와, 네페쉬, 네솨마, 프뉴마, 프슈케가 성경에 약 1700번 이상 쓰였 는데, 그 말이 불멸의 성질을 가졌다거나 죽지 않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언급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사람들은 정말 당황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리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시작된 것입니까? 우리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 “영 혼은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말은 성경으로 부터 나온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상은 이교의 전통이나 신화로부터 나왔습니다. 고대 중국이나 한국, 일본인들의 조상 숭배는 “영혼은 절대 죽지 않는다.”라는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있는 상형 문자들을 살펴보면, 영혼이 불멸한다는 교리가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종교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도에서는 힌두교 인들이 영혼의 윤회설을 깊이 믿고 있습니다. 암흑대륙인 아프리 카의 부두교는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개념을 근거로 갖가지 의식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방 종교는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리스도 인들만이 “영혼은 죽을 수 있다.”라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영혼은 불멸 한다.”라는 가르침을 지지하는단 하나의 성경절도 없기 때문입 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러한 거짓 교리가 누구로부터,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 니다. 창세기 3장 1-4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으로 가장한 사탄은, 하나님께서 “네가 … 정녕 죽으 리라.”(창 2:17)고 하신 경고의 말씀을 부인하면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던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께서는 죄가 죽음을 가져오리라고 경고하셨지만, 사탄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정반대의 말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사탄은 그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거짓말을 퍼뜨려 왔습니다. “영혼은 불멸한다.”라는 사탄의 첫 번째 설교가 수많은 종교인에 의해서 오랜 세월을 통하여 반복됐습니다. 몇년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개신교회의 목사 중 한 사람이 쓴 “죽음은 없다.”라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설교자는 태초에 사탄이 하와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죽은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제에는 여전히 살아서 전에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죽음 이후에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교리는 위험한 것입니까? 네,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그 교리는 그저 거짓말 이상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적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너무도 엄청나고 영원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바 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기만은 인생을 마귀의 영향 속으로 휩쓸려가도록 준비시키는 기만입니다. 우리가 이 방심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항하여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벽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3. 영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죽음에 대한 정의를 가장 명료하고도 간결하게 나타낸 성경 말씀이 솔로몬의 글 가운데 있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 Spirit)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돌아가고”라는 말의 표현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은 그것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흙은 그것이 왔던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죽음은 창조와 정반대입니다. “여 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우리는 시체의 부패 과정을 과학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체의 물리적 구성 성분이 땅(흙)의 구성 성분과 같다는 사실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체가 땅에 묻힐 때, 그 시체는 창조주께서 태초에 땅에서 흙을 취하셨을 때의 그 화학적 요소들을 다시 땅에 되돌려 줍니다.

그러면 신(영, Spirit)이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의 지혜와 과학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것에 대한 매우 중요한 빛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야고 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영혼(Spirit)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여기서 “영혼(Spirit)”이란 말을 성경의 난외주에서 찾아보면 “호흡 (Breath)을 뜻함”이라는 기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데, 이 말의 헬라어 원어는 “프뉴마(Pneuma)”로서 “호흡” 또는 “공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영어로 “Pneumonia”(폐렴)이라는 질병의 이름은 바로 그리스어 프뉴마에서 온 말인데, 폐렴은 폐의 질병 즉, 숨을 쉬는 기관에 이상이 생기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타이어의 한 종류인 뉴매틱 타이어(Pneumatic tires)도 타이어 안에 공기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데, 뉴매틱(Pneumatic)이란 말도 프뉴마에서 파생된 말입 니다. 그런데 헬라어인 프뉴마(Pneuma)에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Spirit)”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성령(Holy Spirit)”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 프뉴마토스(Hagios Pneumatos)”인데, 그의미는 “거룩한 호흡” 또는 “거룩한 영(Holy Spirit)”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같은 헬라 원어를 가지고 있는 “호흡(Breath)”과 “영(Spirit)”이란 말이, 성경에서 종종 번갈아 가며 사용되 었습니다. 욥은 말했습니다. “나의 생명(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영, Spirit)이 오히려 내 코(콧구멍)에 있느니라”(욥 27:3, 괄호 안은 흠정역 성경 번역). 여기서 욥이 “호흡”과 “영”이란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코 안에는 단지 호흡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호흡은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흙+생기(Breath, 호흡)=생령(Living being, 새 흠정역).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성경적으로 두 가지, 즉 흙과 생기(하나님의 호흡)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뜻이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솔로몬이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묘사했을 때, 그는 호흡을 말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호흡(생기)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주신 것이기 때문에, 호흡만이 주신 분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창세기 7장 22절,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에 언급된 생명의 호흡을 난외 주석에는 “생명의 영의 호흡”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말로 죽음을 묘사합니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시 104:29,30). 여기서 시편 기자는 죽을 때에 저희의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하였고, 솔로몬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신(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영을 주셨다고 하였지만, 창세 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 위해 생기(호흡)를 코에 불어넣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와 시편 사이에 존재하는 논리적인 모순을 어떻게 우리가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오직 이두 단어 즉, 영(신)과 생기(호흡)는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번갈아 가며 사용되었다고 이해할 때에만,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두 단어의 헬라어 어원이 같다는 사실 또한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영(신)”이라는 말이 항상 성령을 의미하는 말로써 사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호흡”이 우리가 숨 쉴 때 들여 마시는 일반적인 공기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셨던 생명의 호흡은 인체로 서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특별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읽고 다시 창조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 말씀을 이해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습 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과 완전한 모양을 갖춘 죽은 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에는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심장은 있지만 뛰지 않으며, 피는 있으나 흐르지 않으며, 두뇌는 있으나 생각 하지 않는 죽은 몸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그 몸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하셨습니다. 그분 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 말씀이 가진 중요성을 절대 간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종종 잘못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몸 안에 영혼을 집어넣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단지 한 가지 즉, 호흡 혹은 시편 기자나 솔로몬의 표현대로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몸과 호흡이 합침으로써 사람은 영혼이 되었습니다.

흙(몸)+생기(호흡)=생령(사람, 살아 있는 영혼)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몸 안에 연기 같은 영혼을 집어넣으셨다는 미신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몸 안에는 “영혼”이 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편만 하게 퍼져 있는 이방 종교의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몇 가지 시적 혹은 비유적인 표현들을 제외하고는, 영혼이 육체 안과 밖으로 드나든다고 말한 곳은 없으며, 육체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 곳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 께서 인간을, 몸+영혼=사람으로 만드셨다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의미하는 헬라어 “프슈케(Pseuche)”가 한글 성경에 가끔 “영혼”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혼”이라는 말의 정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영혼은 본래부터 불멸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말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아주 다른 어떤 것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번도 영혼을 불멸이나 죽지 않는 연기 같은 존재로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신 몸에 호흡 혹은 영을 첨가하신 결과로 존재하게된 의식이 있는 생명체를 말합니다. 이 진리를 좀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들어보십시다. 우리 몸을 전구라고 해 보십시 다. 전구는 몸이며, 흐르는 전류는 하나님께서 몸속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을 표상 하고, 빛 자체는 몸과 호흡이 합쳐졌을 때에 사람이 된 영혼을 표상합니다. 즉, 전구+전 류=빛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밝게 빛나는 빛을 볼 때에, 우리는 완전한 창조의 표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스위치를 내려서 불이 꺼졌다고 하십시다.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전류가 전구에 흐르지 않게 되면, 빛은 즉시로 사라지게 됩니 다. 자, 이제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십시다. 몸에서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생령)은 어디에 있습 니까? 부활 시에 인간의 몸에 생명의 호흡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때까지 영혼(생 령)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상하게 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 죽을 때에 모든 것이 어떻게 전에 있던 대로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어 놓았을 때에, 아담은 흙덩어리인 육체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몸에 호흡을 첨가 하시기 전에는 아무런 개성이나 감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몸에 호흡을 주셨을 때에, 사람은 “생령”(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만일 영혼(생령)이 그러한 연합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그 영혼이 사라지는 때는 언제이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그 연합 상태가 깨어지게 될 때입니다.

우리가 판자와 못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망치를 가지고 못을 판자에 박아서 상자를 하나 만듭니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가 아닌 세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판자와 못과 상자 말입니다. 나중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못을 빼어 옆에 놓습니다. 우리는 다시 판자와 못, 이 두 가지밖에 가지고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상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없어졌죠! 왜냐하면, 상자는 못과 판자가 연합된 상태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호흡), 이 두 가지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둘을 합치셨을 때, 사람이 영혼(생령)이라는 상태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죽을 때에 영(신)은 하나님께로 되돌 아가고,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어떤 곳에서도 영혼이 몸 안에 산다거나, 몸 없이 계속 존재한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혼 혹은 생명은 몸 안에 거하 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호흡(생명력)이 인간의 몸에서 제거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죽은 사람의 상태는 호흡이 몸과 결합하기 이전의 상태와 똑같이 됩니다. 그것은 아무 생명이나 의식이나 개성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심지어 동물까지도 “영혼”(한국어 성경에는 “생물”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동물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생명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계 16:3).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전 3:19,20). 물론, 이 말은 사람과 동물이 동일한 최후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 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들에게만 부활과 심판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 다. 그러나 모든 생명력(호흡)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사망 시에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많은 경우에서, 성경은 생명을 영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의인들은 언제 상급을 받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창조와 죽음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공부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죽는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죽은 지 1000년 이상 되는 다윗에 대해서 매우 강력한 발언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행 2:34). 이 말을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 다. 다윗은 종종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죄를 범하였지만,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받고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죽고 난 후 1000년이 지났음에도, 천국에 가서 사는 축복을 즐기고 있지 못했을까요? 베드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29절에서 합니다. “형 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말하기를, 다윗은 지금 자기 무덤 속에 있으며,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흥미로운 사실입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 시던 다윗이 죽은 지 1000년이 지났어도 상급을 못 받고 있었다면, 그때까지 살다가 죽은 모든 다른 선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도 역시 무덤에서 쉬고 있으면서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눅 14:14).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7). 이 성경 절에는 모호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인 언어로서 당신의 재림 시에 있을 부활 때까지는 아무도 상급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이 말은 죽은 의인 중에 아직 하늘에 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죽은 이들은 무덤 속에서 심판과 세상의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마지막 장에 보면, 이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3절에서 이 마지막 날에 있을 상급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묘사했습니 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부활과 함께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51절)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제, 의인들이 받을 상급에 대한 문제는 속 시원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어떻게 될까요? 언제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형벌 받게 됩니까? 그에 대한 놀라운 답변을 우리는 베드로후서 2장 9절에서 발견합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형벌하시기 위해-영문 흠정역)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라는 뜻은 형벌에 처할 심판의 날까지 지켜 두신다는 뜻입니다. (흠정역 참조) 여기 말씀하시기를 심판 날이 올 때까지 어딘가에 지켜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매우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생명 혹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 부활 시에 불려 나올 때까지 무덤에 있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신학이며 매우 논리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명백한 것은 아무도 자신들이 심판받기 전에는 처벌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의는 형벌이 있기 전에 먼저 심판이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이 세상의 심판관이라도 재판을 한 후에 처벌합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의 죄명으로 심판관 앞에 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 판사가, “저 피고를 10년 동안 가두어 두었다가 그의 사건을 재판하도록 하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그렇게 다루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심판은 그저 시시한 삼류 쇼가 되어버리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재판을 받기 전에는 결코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과 악인 모두가 부활의 날까지 무덤에서 잠자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줄 형벌과 상급이 확정된 후에, 그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 불려 나옵니다. 욥은 말했습니다.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음부(무덤)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 겠나이다”(욥 14:12-15).

 

5. 죽음은 잠입니다

다니엘은 욥과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 습니다.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 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그렇게도 많은 영감 받은 저자들이 죽음을 잠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 잠”은 죽은 자의 상태를 가장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피곤한 사람이 밤에 잠자리에 누었을 때, 그는 눕자마자 깊이 잠들고 맙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의 시간은 한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는 죽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1-14).

여기에 죽음에 대한 성경의 진실한 가르 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잠이 라고 부르셨습니다. 잠시 후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인 나사로의 돌무덤 앞에 서서 크게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분께서는 “나사로야 내려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 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하늘이나 다른 어떤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덤 안에 있었습 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사로는 죽음의 잠에서 깨어 밝은 태양 빛 아래로 걸어 나왔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과장된 이야기들이 있지만, 나사 로에 대한 이야기야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장 권위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사로가 나흘 동안 죽어 있었던 사실에는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누이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의 문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반대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 라고 말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마비되었다가 소생한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스러운 광경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나흘 동안 죽어 있던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그가 하늘나라의 영화로운 광경과 영광의 장면들에 대해서 말하였습니까? 그는 하늘에 대해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잠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잠깐 동안 망각의 순간과도 같았습니다.

만일 나사로가 하늘에 있다가 다시 이 어두운 세상으로 불러온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형벌이겠습니까? 만일 그가 하늘에서 의인들이 받을 상급을 즐기고 있었다면, 그는 제발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나사로가 낙원에서 나흘 동안 지냈었다면, 이 지구 세상의 삶은 무서운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더 지긋지 긋했을 것입니다. 만일 나사로가 천국에 가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를 지구로 불러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에 대해 묘사할 때에 사용하신 간단한 용어를 믿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요? 잠자는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죽음을 잠이 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이 잠든 동안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떤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의 의미를 왜곡시켜 버린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신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 니다. 많은 성경 기자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도모(생각)가 소멸하리로다”(시 146:3,4).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자들이 가장 자주 언급한 죽음의 성격은,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의식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계를 대표하고 있는 사상인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있다.”라는 가르침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이방 종교에서 믿고 있는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도 스며들어 왔습니다. 다윗은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생각)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무릇 네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5,6,10).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음은 꿈을 전혀 꾸지 않고 자는 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보다 더 강력한 말과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지혜자인 솔로몬이 하였던 이말들에 필적할 만한 말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다시 말하자면,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계속될 것이니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있고 계획도 있고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음이니라.” 만일 솔로몬이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야말로 죽음에 대한 모든 논쟁은 확실하게 끝났을 것입니다. 누가 그러한 성경절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거짓말 같은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사실에 대해서 거듭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자신 들이 믿기 원하는 것만 믿기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수많은 성경절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은 부모나 목사에게서 배운 빈껍데기 유전을 맹목적 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만일 죽은 의인들이 자신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죽음에 대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6. 죽은 사람들이 정말로 돌아옵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성경의 명백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까? 뿌리 깊은 전통적 편견들이 그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눈으로 보았던 증거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던 사별한 사람과 실제로 대화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죽었던 사람을 만나서 대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죽은 친척들이나 친구들을 만났던 정확한 장소와 날짜와 시간까지 말합니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 죽은 가족을 만나서 대화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확신을 어떻게 꺾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진리가 없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경험을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들이 정신착란을 일으킨 것으로 무시해버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형체들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때, 우리는 그 형체들이 죽은 사람들의 영들이라고 하는 주장을 분명하게 반박할 수 있습니 다. 죽은 사람들은 결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죽은 후에 어떤 의식이 있는 살아 있는 형체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도용하면서 나타나는 이 형체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사탄이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을 때(창 3:4) 사탄은 하나님께서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항하여 도전한 것입니다(창 2:17). 사탄은 수많은 사람 앞에 죽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남으로써, 자신의 말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은 틀렸다는 확신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주어 왔습니다. 눈과 귀의 경험을 성경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도움을 받아서 죽은 영혼을 부르는 전문가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을 이용하여, 사탄은 종종 자신을 그들이 그리워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들을 강신술의 함정 가운데 빠트리려고 노력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만입니까? 오직 자신의 마음을 성경의 진리로 무장한 사람들만이 이러한 기만적인 공격에 대항하여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사탄의 기만적인 강신술에 대한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겠습니다. 저의 친한 친구 하나가 여러 해 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어떤 고립된 선교 지역에서 봉사하는 동안에, 그의 3살짜리 딸이 치명적인 풍토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그 어린 딸을 집 건너편 언덕에 묻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부엌에 앉아 있을 때에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죽었던 작은딸이 방을 가로질러 엄마의 품안으로 확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런 무시무시한 상황 가운데에 처하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어린 딸은 “엄마, 나 안 죽었어! 난 안 죽었단 말이야!”라고 소리치면서 엄마를 꼭 껴안았습니다. 다행히 그 엄마는 죽음에 관한 성경의 진리를 알고 있었 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그와 같은 사탄의 대단한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즉시 기도 하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 형체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오랜 세월 동안에 거듭거듭 계속됐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환각 작용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하는 엉터리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사탄은 매우 자주 자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시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 들의 생애를 마귀의 조종 하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신들이 죽은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매우 유익한 충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죽음에 관한 성경의 참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사탄이 얼마나 쉽게 지배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시 겠습니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안전장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죽음에 대한 오류를 믿고 있는 대부분의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은, 사탄의 기만적인 현시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 때에 거의 완전한 기만과 혼돈 속으로 떠내려갈 것입니다.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은 사람들을 미신과 귀신을 따라다니는 불쌍한 존재로 만들 것입니다.

 

7. 부활 시에 있을 형벌과 상급들

만일 상급과 형벌들이 지금 주어지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혼돈을 가져오겠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부활이 있어야 합니까? 모든 영혼의 운명이 죽는 순간에 이미 결정된다면, 마지막 심판은 삼류 쇼에 지나지 않는 이야 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장례식 때에 사별한 사람들이 이미 하늘에 가 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는 사탄이 하와에게 했던 첫 번째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형체도 없는 영혼이 죽는 순간에 몸을 떠나 훨훨 날아서 하늘로 간다고 말하는 것은 슬픔에 잠긴 유가 족들을 위로할 때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8절 에서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여기에 진실하고도 완전한 위로가 있는데, 우리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그 말이 참으로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앞에 나오는 두 성경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는 방법과 수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록 가운데 “ 그리하여”란 말을 쉽게 간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함께 있을 수 있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작은 낱말을 사용하여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모양과 방법과 수단으로서,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다음에 권면하기를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 어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연기 같은 형체가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따위의 말은 유가족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도 어긋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나 친척들이 죽는 순간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끝없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여러분에게 큰소망과 안위를 줍니까? 사랑하던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자신이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세상에서 겪는 온갖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여러분에게 참으로 큰 위안을 가져다줍니까?

바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부활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사별을 당했을 때 유일한 위로의 근거로서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을 말했던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말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부활이 있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이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모든 죽은 자는 심판의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 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오시기 5분 전에 잠들었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 지의 시간은 순간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께서 과거에 죽었던 모든 사람의 갈가리 헤지고 썩은 시체를 회복시키실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고, 또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또 많은 사람은 깊은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생명의 창조주께서 모든 영혼과 각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카락의 숫자를 세시고, 하늘에 나는 참새들까지 돌보시는 그분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시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기계 들은 꽤 신기한 물건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들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작동을 믿지 못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기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부활의 능력과 같은 놀라운 비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죽은 자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시리라는 것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온 우주와 천연계를 창조하신 그분을 바라보면서….

 

8. 십자가 위의 강도

자, 이제 또 하나의 문제를 풀어 봅시다. 성경에는 아주 소수의 양면성을 지닌 성경 절들이 있는데, 그러한 성경 절들은 그 주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다른 성경절의 빛을 함께 비추어 볼 때에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중의 한 예를 십자가 상의 강도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성경절을 얼핏 읽어보면, 예수께서 죽어가는 범죄자에게 그가 죽은 바로 그 날에 하늘나라로 가리라고 약속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문맥을 앞뒤로 살펴보면, 강도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

이 말씀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 주제에 관해 살펴 보았던 모든 다른 성경절과 상반된다고 생각하십 니까? 이 말은 마치 예수님과 강도가 바로 그날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리라는 것처럼 들립니 다. 다른 성경절들을 통해서, 모호한 부분을 해결하도록 해 보십시다.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 에게 그 말씀을 하신 지 사흘 후에 부활하신 다음에 열려 있는 무덤 가까이에서 마리아를 만나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했을 때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이상한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사흘 전에 그 강도에게 바로 그날 함께 하늘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낙원과 아버지의 보좌는 똑같은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요한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계 2:7)고 말하 였으며,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는 생명수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과 낙원이 동일한 장소임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분명한 사실은,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때까지 당신의 아버지께로 가지 않으셨다면, 사흘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그 날에는 물론 하늘에 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강도에게 하셨던 말씀과 상반되는 듯한 견해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과 강도가 같은 날에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을 안식일에 십자가에 매달려 있도록 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시체를 십자가로부터 끌어내렸습니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요 19:32,33).

예수께서는 예비일인 금요일에 돌아가셨으며, 강도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바로 전까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앞서 언급한 성경 절에 의해서 밝혀집니다. 그들의 다리는 꺾였는데, 아마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거나 그들의 죽음을 촉진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죽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과 같은 날에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께서 강도에게 그날 당신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이 두 가지 신비는 우리가 누가복음 23장 43절의 문맥을 잘 살펴볼 때에 매우 쉽게 해결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두루마리 사본은 한 줄로 길게 쓰여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낱말이나 문장이나 성경절이나 성경 장을 나눠놓은 것이 없었습니다. 1611년 흠정역 성경이 번역되었을 때, 학자들은 낱말들을 나누고, 마침표나 쉼표를 붙이고, 성경 절들과 성경 장들을 나누었습니다. 그 학자들은 필요에 따라서 자신들이 번역하는 말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종종 쉼표를 첨가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그들은 “오늘”이란 낱말 앞에 쉼표를 붙여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 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쉼표는 “오늘”이라는 낱말 앞에 붙는 대신에, 그 뒤에 붙여져야만 하였 습니다. 이런 식으로 올바로 쉼표를 첨가하면, 그 문장은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쉼표를 붙여야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하셨던 말씀이 성경의 다른 모든 성경절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됩니 다.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하자면, 예수께서는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확신을 주노라 – 비록 지금 내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고, 내 제자들은 모두 나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나는 정죄 받은 중죄인의 취급을 받아 죽어가고 있는 지금, 나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것이라는 확신을 네게 주노라.”

이것이 거룩한 성경의 기록을 부당하게 변경시키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번역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원래의 성경 저자들만이 영감을 받은 분들입니다. “오늘”이라는 낱말 뒤에 쉼표를 붙이는 것이, 그 낱말 앞에 쉼표를 붙이는 것보다 성경 원문에 일치하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원문의 문맥상으로 볼 때도 타당하며,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사상과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다 쉼표를 붙일지를 결정하는 일은 대단한 해석 능력이 없어도, 상식과 합리적인 사고방식만을 가지고서도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할 것은, 그 강도가 말한 부탁은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가 거의 죽을 무렵인 그날 당장에 어떤 상급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봉사와 믿음에 대한 보상을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날에 의의 면류관을 고대하는 말을 들어봅시 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재림과 부활 시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회개한 강도와 그리스도의 위대한 종인 사도 바울이 자신들의 영원한 상급에 대한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시는 시점에 두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의 오심과 부활의 아침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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