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누가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였는가?

성경공부 시리즈 6권- 영원한 복음​

제1부 누가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였는가?

1. 진리를 찾는 사람들

시편 43장을 읽어보면, 우리는 다윗이 드렸던 아름다운 기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만일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열심과 소원이 언제나 불타오르고 있어야 합니다. 늘 진리가 무엇인지 찾는 것과 또 찾은 진리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받고 있는 성도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실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입 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심과 소원이 없다면, 진리를 구하는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장 위선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기도한 후, 그분의 응답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르러 왔을때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범하고 있는 죄는, 성경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대로 그들의 경험을 끌어올리는 대신에, 성경의 진리를 그들이 경험하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어떤 가르침도 검증할 수 있는 위대한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입니 다. 모든 종교적 사상, 모든 설교, 모든 충고가 성경 말씀에 의해서 정확하게 판단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진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나 경향이나 느낌이나 전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표준이 되기에는 너무나 미약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해서 신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실함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가르침을 신실하게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나는 플로리다 주에 있는 웨스트팜이라는 도시를 향하여 운전하여 간 적이 있습니다. 밤에 운전을 하였기 때문에 도로 표시와 길 이름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벨리 그레이드라고 쓰인 커다란 도로 표시가 잘 보이는 위치에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엉뚱한 방향으로 운전하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잘못된 길을 신실하고 열심히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운전하였던 것입니다. 그 길이 웨스트팜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고 믿고 갔지만, 실제로 나는 정반대 방향의 길을 운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될까요? “계속 가면 결국에는 웨스트팜이 나올 거야”라고 말하면서 잘못된 길을 고집해야 할까요? 아니면 빨리 자동차를 돌려서 웨스트팜 쪽으로 가는 길을 달려가야 할까요? 지혜 있고, 상식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못을 깨닫는 즉시 차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것입니다.


2. 귀와 눈을 막고 다수결의 원칙을 고집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잘못을 교정하라고 촉구합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통적인 견해와는 크게 다른 진실을 제시할 때 저항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한번 자리를 잡은 견해는, 아무리 논리적이고 성경적으로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바뀌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관한 진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계하며 피하려고 애씁니다. 왜 그러한 반응을 나타낼까요?

수많은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에 관한 지식을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물려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입장에서는 예배일에 대한 진리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는 십계명중의 하나가 일곱째 날을 기억하여 예배일로 준수하라는 계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날과는 다른 날을 예배일로 준수하는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 성경적인 예배일인 일요일을 준수하기로 고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하신 날을제 칠일 “토요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왜 그러한 결정을 할까요? 일요일을 준수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침 받아 왔으며,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을 자신 들의 예배일로 준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군중 속에서 안전감을 느끼는데, 그리스도인도 다수가 믿는 가르침을 아무런 생각이나 판단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안전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와 태도는 정말 안전한 것일까요? 종교적인 문제나 진리에 관한 문제에도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중요한 문제에서도 민주주의 표결 원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No”(아니오) 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기록을 살펴볼 때, 적어도 종교적인 문제에는 다수가 항상 틀려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류와 진리의 투쟁이 사람들 사이 에서 벌어졌을 때마다, 항상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다는 것이 성경과 세상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노아의 때에 된 것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진리가 다수의 사람 에게 거절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눅 17:26). 오직 8명이 홍수 때에 방주 안으로 들어갔었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에도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만이 구원받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계를 볼 때에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매우 유명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제 칠일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고 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이말은, 유명한 목사들과 많은 신학자가 일요일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일요일이 잘못되었 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준수하는 일요일을 성경에서 나오는 빛으로 비추어 보았더니 너무나 형편없는 오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진리는 항상 대다수 군중에게 인기 없는 것으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에도 대다수의 군중은 부드럽고, 쉬우며, 안락한 종교를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칠일인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 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빛에 비추어 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연구한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자를 연구하면서 과연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날로 지키고 있는 일요일이 정말 거룩한 날인지를 시험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해 본 후, 만일 일요일이 성경적으로 구별된 거룩한 예배일이라면, 제 칠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예배일로 지키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올바르게 교정하여 일요일을 신실하게 준수해야만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라면, 하나님께서 예배일로 안수하시고 인 치신 날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해야만 합니다.

먼저,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경이 주일 중 첫째 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그에 관련된 모든 말씀을 연구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만이 가장 정직하고 진실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일요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 절은 모두 합해서 8개에 불과합니다. 이 8개의 성경 절을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 써,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 8개 이외의 다른 성경 절에서 일요일 준수에 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이 8개의 성경 절만이 주일 중 첫째 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독자들에게 질문들을 던져 봅니다. 지금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리가 어떤 것이 되든지 간에, 여러분은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전통이 무엇이 든지 간에 진리를 선택할 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진리가 요구하는 희생과 대가가 아무리 클지라도, 당신은 끝까지 진리의 길을 걸으시렵니까? 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어떤 새로운 진리가 우리 앞에 드러날지라도, 당신은 진리를 받기 위하여 자신의 편견과 사사로운 견해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지금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가운데 여기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성경 연구가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 인지를 분명하게 알지라도, 새롭게 깨달은 진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안식일이 어떤 날이 되든지, 즉 그날이 월요 일이 되든지, 또는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날을 안식일로 구별하여 준수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안식일이 어떤 날이든지 간에 거룩하게 지키겠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일요일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때에, 부디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자세와 마음을 유지하며 진지하게 연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일요일에 부활하심

복음서 중에서 첫 번에 나오는 마태복음부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안식 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Dawn)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 중 첫째 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는 안식일이 끝나가는 시간에 첫째 날이 시작되며, 안식일과 첫째 날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날입니다. 성경의 이 같은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 누구도 첫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것이며, 또한 비 성서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안식일이 끝나고 이어지는 날인 “안식 후첫날”에 여인들이 무덤에 왔는데, 그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음 마가복음에도 사도 마태가 기록한 말씀과 완전하게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이보다 조금 더자세한 장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마가는 마태가 말한 “미명(Dawn)”을“ 해 돋은 때 (The rising of the sun)”로 설명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님께 바르기 위하여 향 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막 16:1-3).

이 성경 절은 앞서 마태가 말한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오해를 깨끗하게 없애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토요일 저녁에 해가 지기 직전이라고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주일 계산법에 따라서, 안식일 저녁에 해가 지면서 한 주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안식일 저녁에 해가 지기 직전에 즉, 첫째 날이 시작되기 직전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다고 착각하는 사람 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여인들이 무덤으로 토요일 밤에 왔다는 일부의 주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가 말한 “미명”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요일 이른 아침을 뜻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에 관해서 신약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세 번째 성경 절은 마가복음 16장 9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약간의 설명을 곁들이자면, 신약 성경에는 부활과 주일 중 첫날을 직접적으로 함께 설명하는 두 개의 성경 절이 있는데, 이 성경 절이 그 두 개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일요일 새벽에 이루어진 부활을 이야기하는 어떤 성경절에서도 첫째 날을 거룩한 날로 취급하지 않는 점입니다. 부활을 기념하여 거룩하게 준수하라는 어떠한 암시적인 기록도 신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4. 주일 중 어떤 날이 참 안식일인가?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장면을 보게 되는데, 다음에 나오는 4개의 성경 절을 주의 깊이 읽어봅시다. “(아리마데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 23:52-54). 나머지 두 개의 성경 절을 읽기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날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십자가의 죽음사건이 “거룩한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불리우는 날에 이루어 졌음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그날을 “예비일(Preparation day)”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날은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54절에 나오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는 말의 의미는, 이제 곧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라는 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예비 일에 무슨 다른 일이 있었습니까?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쫓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눅 23:55,56).

예수께서 돌아가셨던 금요일에, 신실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사용할 향품과 향료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해가 지자 안식일이 되었고, 여인들은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십계명에 나오는 제 칠일 안식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해서 준수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유월절과 같은 절기 안식일을 십계명에 기록된 제 칠일 안식일과 혼돈하는데, 절기 안식일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폐지되었으나, 제 칠일 안식일은 그리스도 교회에 배도가 들어와서 안식일이 사람에 의해서 변경되기 전까지 계속 해서 준수되었습니다. 절기 안식일은 해마다 그 준수하는 날이 변경되지만, 제 칠일 안식일은 언제나 제 칠일인 토요일에 준수되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 절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아침에 무엇을 하였는 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눅 24:1,2).

여기서, 우리는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교회에 가지 않고 무덤에 찾아와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들은 주일 중 첫째 날을 부활절 일요 일로써 성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인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거룩한 날로 성별하였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십자가 주말에 대한 누가의 설명 덕분에,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짜 안식일이 정확하게 어느 날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은 예비일인 금요일이었으며,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여인들이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무덤에서 쉬셨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로 볼 때, 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로 이어지는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한 기록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안식일이 어느 날이라는 사실을 정확한 음성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제 칠일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인데, 그날은 토요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출 20:10).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안식일에 쉬셨던 것처럼, 모든 구속 사역을 마치실 때도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부활절 일요일이라고 부름으로써 특별한 의미를 일요일에 부여하려고 하지만, 성경은 그날을 “주일 중 첫날”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정하는 이러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어떤 사람도 안식일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겨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Good Friday)과 부활절 일요일 사이에 존재합니다. 사도 누가가 3일 동안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을 시간적으로 정확하고 단순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 일지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제칠일 안식일이 달력에서 어떤 날을 가리키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일요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다섯 번째 성경 절을 살펴봅시다. “안식 후첫날 이른 아침에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요 20:1) 여기서도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주일 중 첫째 날이 거룩하거나 특별하게 지정된 날이라는 암시조차 주지 않은 채, 일요일을 평범한 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도들의 모든 기록에서 우리는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표현하는 기록을 찾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5.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도 요한은 20장에서 “첫날”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있는 데,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 의해서 일요일 예배를 입증 하는 성경절로 잘못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문을 걸어 잠그고 모인 이 모임이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한 예배 모임이었을까요? 요한은 그들이 그때 거기에 모였던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무덤이 비게 되자, 유대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고소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제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변명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릴 것을 알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며, 서로 위로하기 위해서 방에 모인 다음에 문을 굳게 닫았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 마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로 보았다는 마리아의 증언을 제자들이 믿지 않았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께서 사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저희 중에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더 라”(막 16:10-14).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우리는 제자들이 일요일 오후에 한 방에 모여서 문을 굳게 잠그고 숨어 있던 광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을 잠근 방에서 가진 그들의 모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찬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때 그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임의 분위기는 무섭고 두려우며, 낙망과 불신의 분위기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불신과 또 그들이 마리아와 동료의 말까지도 거절하였던 것에 대해서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모임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즐겁고 기쁨에 넘치는 예배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8개 중에서 6개의 성경 절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지만, 일요일을 거룩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성경 절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6개 성경 절은 모두 일요일을,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도와 찬미와 휴식의 날로 지정하는 대신에“주일 중 첫날”로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활이 있은 후몇 해가 지난 다음에 복음서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성령께서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들에게 주일 중 첫날인 일요일에 일어났던 부활을 거룩하게 기념하기 위한 기념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하는 일을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으로 정의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6:13). 만일 주일 중 첫째 날을 준수하는 것이 진리에 속한 것이라면,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과 같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냈을 것입니다.

이제, 총 8개의 성경 절중에서 두 개의 성경 절만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나머지두 개의 성경 절에서도 일요일 신성성에 대한 진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연구 조사의 결론을 매우 깨끗하고도 분명하게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더 이상 찾아보아야 할 성경 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 하고 있는 성경 절이 오직 8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 였던 마지막 사도는 바울과 누가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은 그 두 사도가 말했던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6. 존재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의 일요일 모임

고린도전서 16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는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Lay something aside, storing up),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습 니다. 많은 사람은 이 성경 절이 말하는 바를,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어떤 종교적인 예배 모임을 가졌으며, 그때 헌금을 거둔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절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 성경 절에는 단지 주일 중 첫날에 어떤 것들을 저축하여 모아두라는 바울의 부탁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특별 호소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지방이 기근으로 인하여 음식물과 일용품이 부족하여 크게 고통당하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구제물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을 보낼 때까지 음식물과 옷 등을 각자 집에 모아서 보관해 줄 것을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저축하여 두어서(Lay something aside, storing up)”의 헬라어 원어에는 “집에 보관한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요일 예배를 주장하는 신학자들 역시 이러한 헬라어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문제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중 첫날에 정기적인 예배가 개최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이 성경 절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주일 중 첫날에 구제품을 모아서 저축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렸으며, 다음 날인 주일 중 첫날에는 각자가 구제품을 모아두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심한 기근이 내렸었다는 사도 누가의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8-30).


7. 가장 길었던 바울의 설교

이제, 일요일 신성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거로서 제시하는 마지막 성경 절을 살펴봅시다. 사도 누가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신자들과 함께 보낸 매우 극적인 송별 모임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서술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은 사도행전에 기록된이 성경 절을 하나님의 십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차한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드로아 신자들이 베푼 이 송별 모임은 신약 성경에서 “주일 중 첫날”에 이루어진 유일한 종교 모임이므로, 우리 모두는 매우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이 성경 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송별 모임은 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 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 라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 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 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자고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행 20:6-13).

드로아에서 개최된 밤샘 모임에서 몇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로, 이 모임은 바울 자신이나 신자들에게 매우 엄숙하고도 애절한 모임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장 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언적 발언을 하였기 때문입니 다.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분명한 사실은, 이 송별 모임이 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으 며, 바울이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루는 저녁에 시작됩니다. 창세기에서 창조 주일의 날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 날 …” 즉, 하루를 계산하는데 있어서 항상 저녁이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레위기가 묘사하고 있는 안식일 시간대를 보십시오.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레 23:32). 그런데 성경에서 저녁은 어느 시간을 말합니까?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막 1:32).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저물어 해질 때에”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모세는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고 (Sacrifice the passover … at the going down of the sun)”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느헤미야에서, 우리는 안식일의 시작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안 식일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느 13:19). 이 성경 절은 안식일의 시작점이 해가 져서 어두워지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성경 원칙을 바울이 드로아에서 개최한 첫째 날 모임에 적용시켜봅시다.
안타깝게도, 이 모임이 이루어진 밤은 토요일 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안식일 예배를 마친 다음,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한 송별 모임을 그날 저녁에 계속해서 가졌던 것입니다.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끝나고, 안식 후 첫날이 시작되었습니 다. 7일 동안 드로아에서 머물렀던 바울은 안식일에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배로 떠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밤새 강론한 다음, 일요일 아침에 약 20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앗소에 도착하여 배를 탐으로서 그의 동료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마지막이 될 자신의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안식일을 보내고, 이어서 안식일 저녁부터 밤중까지 계속해서 송별 집회를 했던 것입니다.


8. 누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

새 영어성경(New English Bible)에는, 사도행전 20장 7절에 나오는 송별 집회가열린 시간을 “토요일 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집회에 관한 이야기에서, 사도 누가는 가장 중요한 초점을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바울은 안식일과 토요일 밤중까지 계속해서 집회를 인도한 다음, 일요일 아침에 20마일을 걸어서 앗소에 가서 그의 동료와 합류하였 습니다. 그의 동료는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에 먼저 배를 탔으며, 그들이 탄 배가 밤새 운행하여서 앗소에 도착하였을 때, 바울이 승선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일요일 아침에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하였는데, 만일 일요일이 부활절로 신성하게 지켜지는 날이었다면, 바울은 일요일 아침에 그러한 도보 여행을 함으로써 거룩한 날을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떡을 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서 그날 집회는 성찬식(Communion service)이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그러한 견해는 성경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사도 누가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날마다 떡을 떼었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 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바울이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윗 다락에서 성찬식을 하였다는 주장은 성경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함께 나눈 떡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식사였음을 문맥에서 알수 있습니다. “다시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When he therefore was come up again, and had broken bread, and eaten).” 여기서 우리는 떡을 떼는 것이 그들이 먹는 식사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성찬식이었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요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록 그 환송 모임에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기념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임은 일요일을 정기적으로 준수해야 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드로아에서 열렸던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주말 예배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 집회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유두고라는 젊은 청년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일과, 드로아 신자들과 바울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가장 강조하여 기록했던 것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토요일 밤중까지 계속되었던 바울의 설교 내용에 대해서조차 언급하지 않았으며, 토요일 밤 즉 “주일 중 첫날”이 영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관한 어떤 암시도 주지 않았습니다. 누가가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밤중에 집회하다가 떨어진 유두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었지, 그 밤중 집회의 중요성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모든 성경 절을 살펴보았습니다. 8개의 성경 절 모두, 일요일이 하나님이나 제자들에 의해서 거룩한 날로 지정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떠한 지지나 동의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책인 성경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 대신에 인간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에게 밝혀주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은 자신들이 이방 종교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날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일요일 준수 전통에 대한 이야기는 한 예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예화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궁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거대한 궁전 안에서 황제가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한 병사가 어깨에 총을 멘 채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한 땅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병사의 임무에 대해서 궁금해진 황제는 그 보초병에게 왜 여기서 보초를 서고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병사는 대답하기를,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앞 사람 에게 임무를 인수인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보초를 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궁금해진 황제는 그 보초의 상급 지휘관을 호출하여서 그 보초의 임무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지휘관 역시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에 호기심이 동한 황제는 궁전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을 불러서 물어보았지만, 그에게서도 적당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황제는 대장에게 명령하기를, 수많은 군대 기록을 조사하여서 그 병사가 왜 그자리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를 밝히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보초의 임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한 왕비가 왕궁 한쪽에 장미 밭을 가꾸었는데, 어느 날 왕비는 병사에게 장미 밭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잘 지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왕비는 죽고, 장미꽃밭은 없어지게 되었지만, 그 왕비의 명령은 철회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수행되었습니다. 날마다 병사가 정해진 보초 계획에 따라서 그 자리에 파견되었으며, 임무를 하달 받은 병사는 총을 어깨에 메고 아무것도 없는 그 장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어떤 의무가 없음에도, 일요 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명령에 어떤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일요일만 되면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왕궁의 장미 밭이 결국 황폐하여 사라진 것처럼, 일요일 역시 최후의 심판 날에 황폐하여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천부 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9. 신약시대에 지켜졌던 날

일요일 준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성경 절을 살펴본 결과, 우리는 일요일이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의 허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성경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떤 날을 예배일로 준수하였 는지를 확인해봅시다. 제자들과 신자들이 그 당시 일요일을 예배일로 준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떤 날을 거룩하게 준수하였습니까? 사도행전은 그들이 제 칠일 안식일을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켰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종교 집회를 부탁 받았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말씀을 하라 하더라 …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 13:42,44)

이 성경 절에서,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료가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였는데,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바울에게 “다음 안식일에”는 그들에게 설교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 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안식일에 오직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설교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성경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 다음 안식일”에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43절에는, 안식일 예배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이 개종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에 설교를 듣고 개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격려하였는데, 현대 비평가들은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율법주 의자라는 딱지를 붙여줌으로써, 마치 안식일 준수자들은 복음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모든 저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믿음 으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서,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도 없고, 유대인도 없는 곳에서 안식일을 준수하였던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바울은 그리스에서 전도하고 있었는 데, 거기에는 오직 소수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있었을 뿐이며, 더구나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거기서 안식일에 무엇을 하였는지 살펴봅시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안식일에 참석할 교회가 없자, 사도들은 예배를 드릴만한 장소인 강가 기도처를 발견하 였는데, 그곳에 모여 있던 여자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이루어진 이러한 전도 활동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의 헌신과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의 이러한 전도 활동이 주일 중 첫날에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봅시다. 아마 일요일 예배를 주장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성경 절을 일요일 예배를 위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할 것인데, 이런 경우 그들의 주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준수하였던 바울의 모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성경절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식일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더욱더 분명하게 해줍니다.

안식일 준수에 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나옵니다. 바울이 규칙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According to his customs)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안식일마다(Every Sabbath)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하니라”(행 18:4).

이제, 우리는 바울이 그의 생애 동안에 단 한 번도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준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성경 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남겼습니다. “바울이 유대인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Customs,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으니”(행 28:17).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만일 바울이 고의로 안식일을 범하거나 안식일 이외의 다른 날을 준수했다면, 어떻게 그가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규례를 범한 적이 없다고 외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언급한 “조상의 규례”에는 유대인들이 중요시했던 안식일이 물론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상의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 앞에서 외친 마지막 호소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생애를 끝마치는 순간까지 철저한 안식일 준수자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바울의 강력한 호소는 우리로 하여금 일요일 준수가 성경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허상이라는 결론의 정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만일 일요일이 성경적으로 거룩한 예배일이라면, 우리의 종교적 의무는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거의 모든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지지 속에서 일요일을 거룩한 예배일로 준수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참된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인기있는 길이나 가장 편리한 방법을 추구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길을 단순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걷는 사람들입 니다. 이제,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진실을 인정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돌비에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하셨던 제 칠일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을 준수하는 전통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기의 정도나 어떤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성경의 분명한 증거인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모두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지금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출 20:10).
하나님께서 최고의 권위로 선포하신 도덕률을 당신 자신이 스스로 철회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십계명을 오늘날에도 구속력이 있는 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는 반드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안식일 계명인 네 번째 계명을 제하여 주셨 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너무나 경쟁이 심하고 산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제 칠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의심할여지 없이, 오늘날 이 사회를 조종함으로써 안식일을 준수하기 어렵게 만든 장본인은 사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불가 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에서는 토요일에 일해야 한답 니다. 우리 가족을 굶길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대답이 오래전에 산상수훈 에서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여기에 나오는 “이 모든 것”에는 음식과 옷과 직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회사의 규칙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염려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직장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기적을 행해 오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자녀가 직장을 잃어버리는 것을 통하여 진리가 드러남으로써,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간절히 구하는 기도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더 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물질은, 우리가 환경에 상관없이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에 언제나 더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 참된 비결은 우리의 마음에 안식일의 주인인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께서 명하신 단 하나의 계명에 불순종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길,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그러므로 안식일에 관한 문제는 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통하여 순종하는 것과 사랑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하게 되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두 성경 절 아래에 줄을 긋고, 계속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 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기계적이고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순종할 때, 모든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겁고 가벼운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이러한 사랑을 안식일 준수의 기본 정신으로 삼는다면, 안식일은 여러분의 여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기쁜 날이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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