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성경공부 시리즈 2권- 하늘의 전쟁

제3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이므로 모든 지성적 존재의 행복은 그들이이 의의 대 원칙에 완전히 일치함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물은 그림자가 전혀 없는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의와 행복만이 있었던 그곳에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변화는 루시퍼가 살고 있었던 하늘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의 지를 악용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들에게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주어진 어떠한 제한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에 관한 지식을 숨기심으로 흰색만이 있는 완전한 나라에 다른 색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고, 선악과를 통해서 그들 에게 자의로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들을 제어하고 억압 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루시퍼는 이러한 사랑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는, 자아의 함정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평화와 자유와 행복은 피조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잘 아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자기 스스로에 정신을 집착하면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경이로운 것이 자기 스스로 생겨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사역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된 듯,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그 번 돈들을 유흥비나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만드는 일들에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루시퍼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능력과 아름다움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의 근원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차츰 잊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든 자아의 감옥에 갇혀서 자아를 숭배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아침의 아들” 루시퍼는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었습니다. 그는 창조주의 어전에 서 있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저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 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 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 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 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 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 다”(사 14:13,14).

의만 존재하였던 하늘에서 루시퍼의 첫 의도가 죄로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로 향하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루시퍼 스스로 느끼게 되었던 감정들과 이론들은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 안에 나타나는 이론들과 유사 합니다. 모든 만물이 우연적인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영혼불멸설과 헬레니즘, 동양철학들이 섞여서 이세상의 모든 것은 스스로 그 힘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뉴에이지(New age) 사상을 만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했던 루시퍼의 야망은 자신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만드신 그 법이 불완전하며 불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 말씀 자체이셨기 때문 입니다(요 1:1절 참고). 루시퍼는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율법으로 완전케 된 사랑을, 자신과 다른 천사들을 억압하는 방편이라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어떻게 하와를 유혹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1-5). 여기서 사탄이 쓰고 있는 논쟁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압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방법인 선악과를 먹는 것을 금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기적인 존재이고 자신은 이러한 잘못을 개혁하는 자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시퍼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법에 실려 있는 공의와 완전케 하시는 사랑을 잊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타락한 똑같은 방법으로 하와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인류를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완전한 의만 있었던 하늘과 에덴에서 루시퍼는 자기 스스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던 죄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시작이 하나님의 법의 불완전함으로 해서 만들어낸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왜 하나님께서 사탄의 세력을 곧바로 진압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불만의 정신이 성숙하여 공공연한 반역의 행동이 나올 때까지 사탄이 그의 반역을 추진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사탄의 계획들이 충분히 발전되어 그것들의 참 본질과 의도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죄의 시작과 그 동기는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다른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존재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흰색만이 있는 세계에서는 색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있으나, 그것을 느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느낌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하지 않은 존재자들은 하나님께서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루시퍼가 만든 그 죄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를 보여주셔야만 하였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공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가 확실히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인 루시퍼는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그는 하늘의 존재자 들에게 큰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하나님의 정부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도 포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가 충분히 발전하기 전에는 이것이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낼수 없었으며 그의 불만은 반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여러 세계의 거민은 그 당시에 죄의 참 성질과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사탄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며, 만일 그를 즉각적으로 멸망시켰다면 사랑에서가 아닌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기만자의 영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반역의 정신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궁한 세대를 통한 온 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사탄이 그의 원칙 들을 더욱 충분히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을 모든 피조물이 바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에 대하여 영원히,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해야만 하였습니다.

2. 구속의 경륜

마태복음 5장 17절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십자가의 의미와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케 하려 함”의 의미는 영어로 Fulfill 이라고 쓰여, “이행하다” 또는 “실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의무나 직무, 법률 또는 명령을 이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곧 그의 말씀인 법을 완전케, 즉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타락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이 피할 길은 없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감추어 오신 하나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 하나님의 사랑은 법으로 서만 나타나지 않으시고 이제 법을 어겨 죄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 된 우리를 다시 죄 짓기 전의 완전한 사람으로 다시 이끌어 오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점이 따랐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은 동일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반대하는 결과를 빚게 되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죄의 결과를 대신 질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한 존재뿐이었습니다(히 6:17,18절 참고). 우리가 큰 죄를 범하면 그 죄에 해당되는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그만한 죄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천사나 인간들 중 하나를 속죄양으로서 대신 죽게 하였다면, 우주의 거민들이 볼 때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의 용서가 단순히 그 죄 된 행동만을 단순히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에서 끝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인간을 죄로부터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해진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 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의 상태를 다시 원상복귀 하시기 위하여 구속의 경륜을 지구의 창조 이전에 이미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신비스러운 “평화의 의논”(슥 6:13)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의 심연에까지 내려 가실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원한 법을 실행하심으로,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 3:16)이었습니다. 오! 구속의 오묘함이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마지막까지 주시는 선택의 자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의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도 완전한 사랑, 즉 자유의지가 선택한 “사랑의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 이었습니다.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더욱 완전하여 졌을 뿐이며, 강제적인 구원은 하늘의 법칙과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향과 관계없이 하늘에 간다면, 하늘은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믿음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 거함 으로, 또 다른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 영원한 안전과 행복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늘에 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즉각적으로 다시 만들어 주셔서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로서 하늘에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재창조하실 계획이었으면, 이렇게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는 죄짓기 전이나, 십자가 후에도 변할 수 없는 하늘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그가 누렸던 자유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의의 줄은 끊기고 인간 안에 온전히 자리 잡았었던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인간은 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었 습니다. 하얀색만 있었던 인간의 마음은 모두 까만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의를 명상하거나 선택할 힘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롬 6:16)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의 첫 번째 단계로서 인간에게 잃어버렸던 그 선택권을 다시 주시려 하셨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는 것이 하늘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암흑만이 존재하였던 인간의 마음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성과 연결이 되어, 끊어졌던 전기선이 연결되면서 불이 다시 밝혀지듯, 우리 마음에 의의 불이 다시 켜지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본부인 “죄의 법”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본부인 “마음의 법”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세워지게 되어,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롬 8:4 참고).

예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된, 타락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탄의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습니다(창 3장, 롬 8:2 참고).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고, 사랑으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가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4. 사탄도 믿음이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갖는 가장 큰 의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발견 입니다. 고행과 자학, 선한 행실로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구교의 잘못된 가르 침에서 방황하던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귀중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개혁자가 나타나 죽음을 불사하고 이 귀중한 진리의 터전을 쌓아 오늘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은 모든 기독교인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바뀌게 되었고,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단순히 하나의 지식적 동의로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귀중한 말씀들이 하나의 위인전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선구자들의 삶의 방식은 실제로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 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심”을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서 인정하는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러한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추측은 한 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완전히 신비 속에 묻어 버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 2장 14절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고, 이 양심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지마는 의를 행하는 자들의 부류에 속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이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탄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이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주”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지식적으로 알거나, 인정만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그 나름대로의 믿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원은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하여 은혜로서 주신 믿음과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마음에 들어와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이 온전한 믿음을 만들게 되어, 이 믿음이 우리의 양심이 됨으로, 우리가 이 믿음의 양심대로 행할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셨다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그분을 믿게 만들며, 그 믿음으로 우리는 속죄함을 얻고, 속죄함의 경험은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하여 그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구원을 주장할 것이지만, 사랑이 충만한 믿음은, 그것이 구원과 관계없다 하여도, 사랑의 행위를 기쁨으로 행할 것입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합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행동이 하나의 벼슬이나 나타내 보이고 싶은 자랑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연의 법칙, 즉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해 지는 업적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행동인 것입니다. 흰색만 있는 곳에서 흰색이 “흰색”으로 불리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무리들에게 선한 행위는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요 14:23)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자 하여 보여주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5.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지체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지금 선과 악의 대 전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수십 억 사람들에게 각각 천사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늘에는 매 순간에도 수십만의 천사들이 자기들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삐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닥다리를 야곱이 보았듯이 우리가 눈을 뜨고 그 천사들을 볼 수만 있다면, 하늘의 구름보다도 더 많은 천사는 그 어떤 비행기보다도 더 빨리 지구와 하늘나라를 순식간에 왕래하며 지구의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사탄의 천사들과 맞서 싸움을 하며 인간을 죄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단 10:12-14)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무엇을 얻기 위하여 온 우주의 거민이 보는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사탄과 그의 천사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그들이 질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왜 그토록 싸움은 치열해지고만 있을까요? 피조물이 창조자와 싸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왜 싸우는 것일까요? 이 싸움이 사탄과 그의 부하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거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이 무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최초부터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며, 그분의 율법에 결함이 있고, 우주의 행복을 위하여 그것들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써왔습니다. 율법을 공격함으로 그는 그 율법의 제정자의 권위를 뒤집어엎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결함이 있어서 변경해야 되는지 혹은 완전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인지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고소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늘의 법이 공평하며, 누구나 다 지킬 수 있으며, 사탄이 내세웠던 주장들의 결과가 어떠한 것들임을 구속의 경륜을 통하여 밝히 나타내셨습 니다. 또한 수많은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과, 언제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증명하셨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3,4).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 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하나님의 남은 백성은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온 우주의 거민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선한 것이요, 축복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선포할 하나 님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이 싸움의 마지막 증인들로서 하나님께서는 한 무리를 인도 하실 것인데 그들이 곧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인” 입니다. 이 사람들은 죄악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마지막 세대를 사는 이 무리는 십자가의 사랑의 힘을 온 우주 앞에 선포할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음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실 것입니다. 사탄은 이 무리를 핍박하여 고통과 시험을 줌으로 욥에게 주어졌던 암흑의 시간을 지나가게 할 것이지만, 이것을 통하여 온 우주는 사탄이 건설하고자 했던 그 정부가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정부의 완전성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옹호하는 작업은 길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됨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고 하나님 자신도 고통을 겪어야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눈앞에서 고통 속에 죽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모든 인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매 순간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주의 영원한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죄의 본질은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법의 필요성과 완전성은 입증될 것입니다. 온 우주는 죄의 결과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완전히 이해될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성을 입증하신그 모본을 인간이 온전히 따르게 될 때에 이 싸움의 끝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40).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6. 저 별을 넘어 어느 곳인가에는

태양계 너머 저곳에, 지구가 속해 있는 이 우주 저 너머에, 저쪽 별 세계 너머 저편 에, 은하수 사이에 펼쳐져 있는 공간 너머,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저 우주 너머 저편, 오리온성좌 너머 저편에 하늘이라 불리는 실제의 장소가 있는 데, 그곳은 천사들의 삶이 있고, 그들의 희망과 기대가 넘치는 곳입니다.

슬프게도 이 곳 지구의 수십억의 인구들은 그 실제적인 장소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린 채 땅만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모든 뉴스 미디어는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마치 서울이나 워싱턴 D.C.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를 그 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의 수도인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비하면, 서울이나 워싱턴 D.C.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매우 하잘것없는 사건들 뒤로, 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무시당한 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전쟁 놀이들 뒤로, 이 우주의 주인을 결정하는 대 쟁투가 뉴스에 보도도 되지 않은 채 끝나 가고 있습니다.

태양계와 별 세계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대 쟁투,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마지막 대 쟁투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잠자는 사이에 조용히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구인 각 개인의 운명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대 쟁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우주 전쟁은 누가 하늘의 보좌에 앉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전쟁이며, 누가 이 우주를 지배하는 진정한 왕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쟁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든지 모르던지 간에, 그리고 우리가 어느 편을 지지하기로 결정하던 간에, 우리 각자는 이 전쟁으로부터 피하여 도망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많은 결정을 통하여 우리는 이 우주의 왕으로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모든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 모든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 모든 긍정적인 사고와 동정적인 마음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기만의 시작이며, 모든 이기심의 원천이고, 모든 파괴의 조종자이며, 모든 부정적 사고와 생각과 감정의 조종자인 사탄이 있습니다.

이 두 존재는 그 성품과 행동과 계획에 있어서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인생의 매순간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의도적인 선택이나 비의도적인 결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서거나 사탄의 편을 지지하게 됩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스타워즈 영화에 의하면, 오래 오래 전에,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악을 대표하는 세력이 선을 대표하는 세력을 공격하는 우주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스타워즈 영화의 이야기가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주 전쟁의 두 세력은 괴물처럼 생긴 이상한 우주인들이 아니라, 하늘의 왕자 예수 그리스도와 루시퍼 라고 불리 우는 천사장입니다.

우주 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육천 년이 흘러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육천 년의 지구 역사 가운데 전쟁의 자취로 깊게 남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통과 질병과 상처, 그리고 긴 전쟁으로 인하여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마침내 이 우주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 우주 전쟁의 종결을 가져오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과 이기심, 빛과 어둠, 진리와 오류, 진실과 거짓, 생명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 전쟁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존재하는 선악 간의 대 쟁투입니다. 여러분은 이 대 쟁투에서 누구의 깃발 아래 서기로 선택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우주 전쟁에서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바칠 것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우주 전쟁에서 부디 살아남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자를 써 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추천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