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하나님의 은혜가 계명을 폐하는가?

성경공부 시리즈 2권- 하늘의 전쟁

제1부 하나님의 은혜가 계명을 폐하는가?

1. 서론

사탄은 죄를 통하여 세상을 거의 파멸의 지경까지 몰아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법과 제재에 대하여 반항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의 대도시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질서를 깨고 인권을 유린하며 심지어는 생명까지 위협하는 집단적인 폭력들을 지켜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살인, 강도, 폭행들은 이제 21세기 도시생활의 상표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신문을 읽으면서 인간의 삶의 질이 점점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을 실감하게 되며, 어떤 때는 너무나 악화하여 더는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느낌마저 들게 됩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더 난폭하고 괴이한 범죄들이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저 고개를 흔들 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국은 물론, 미국같이 풍요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유산이 있는 나라마저 기본적인 도덕으로부터 그토록 멀리 떠날 수 있는지 이해하기조차 어렵 습니다. 오히려 어떤 비기독교 국가들이,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공언하는 국가들보다 훨씬 그 범죄율과 폭력들이 적은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하게 됩니다. 워싱턴 D.C.에 하루 24시간 동안 보고되는 범죄들이 공산치하 당시의 모스크바에서 일 년 동안 보고되는 범죄보다 잦다고 합니다. 물론 보고하는 방식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여전히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법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정신 자세가 종교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의 교인들 대다수는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 중에서 하나쯤이야 범하는 것이 어떠냐는 사고방식들을 가지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율법의 권위를 약화시키려고 하는 은근한 가르침들이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신학을 통해서 가르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교리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를 가볍게 보게 하며 죄를 별로 탓할 것이 없다고 간주하도록 유도하였습 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죄는 그 흉악성을 잃게 되었고, 젊은이들이나 어른들 이나 할 것 없이 율법을 범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흐름과 생활방식이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남녀가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삶의 방식이 죄로 지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점에서 사소한 물건을 훔치 는(Shoplifters) 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인데, 그들이 속해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하나님의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높이 쳐들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 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십계명인 율법에 대하여 취하여 온 태도를 생각해 볼 때에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큰 교파들이 공식적으로 율법의 권위를 지지하는 태도를 밝혀 왔습니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오류들이 현대 교회에 조금씩 기어들어 와서 십계명에 대한 충성심을 혼돈시 키는 현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서,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심판의 기초인 성경의 말씀들을 연구함 없이 그저 일반적으로 인기 있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논리들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쉽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답하기 위해서 권위 있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 님의 은혜가 십계명을 무효화시키는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십계명 중 그어느 하나를 범해도 괜찮은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구원을 이해하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2. 사형 선고를 받음

성경의 진리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구원에 관한 진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봅시 다. 많은 사람이 죄와 구원에 대한 감정적인 가르침들을 많이 듣고 있지만, 왜죄에 대한 피의 희생제물이 반드시 요구되는가에 관한 성경적인 논리와 이유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이 판사 앞에 서서 자신에게 내려지는 사형선고를 듣는 두려운 광경을 상상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라고 선고할 때에 여러분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왜 두려움과 죄책감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롬 3:23)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 되어 있으므로 아무도 그 의미를 오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란 말은 쉽게 말해서 김씨, 박씨, 이씨, 최씨 등 여러분의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입 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이 사형선고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 세상에는 여러분이 받은 선고와 유죄 판결을 번복하기 위해서 항소할 법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죄 자체가 악하므로 죄를 범한 여러분은 악한 죄인입니다. 요한일서 3 장 4절에는 “죄는 불법(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죄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법을 범한 죄상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법을 범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율법 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 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은 율법 즉 십계명을 범하였으므로, 율법이 범죄자에게 죽음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죄인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범한 율법 앞에서 옳다고 인정(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을 찾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사형 선고가 번복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기의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자기 죄를 속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도 오해할 수 없는 언어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잘 들어보십시오! 행위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진리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십 년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면, 그는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선고 받은 연한만 채우면 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선고된 형을 감옥 속에서 마침으로써 자신을 행위로 구제해 내었기 때문에, 죄 없이 의롭다는 인정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어떤 살인 죄수가 50년의 선고를 받았다면 행위로 의롭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고가 50년이 아니라 사형이라고 간주한다면, 그 죄인이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습니까? 결코안 됩니다! 그가 비록 100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법은 아직 죽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히 9:22-28).

이것이 바로 죄인이 결코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죄의 값은 10 년 징역이나 50년의 강제 노동이 아닙니다. 선고는 죽음이요, 피를 흘리는 일 없이 법의 요구가 충족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뒤엎어질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선언한 사형 선고 역시 취소될 수 없습니다. 죄를 허용하는 것은 우주를 영원히 파멸 시키는 길입니다. 과거의 죄를 미래의 선한 행동으로 지워 버릴 수가 없습니다. 법이 죽음을 요구하는 한, 죄인은 자기의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3. 율법은 아직도 구속력이 있다

앞에서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혼동하고 있는 질문에 답을 하였습니다. 만일 율법의 행위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과연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분명히 이 질문은 초대 교회 당시에도 현저했단 사실이, 바울이 로마서 6장 1절에서 똑같은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나타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다시 말해서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해도 된다는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입니다.

오늘날 상대주의적 윤리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일을 너그럽게 봐주기 위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논리와 정의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죄란 오늘날 많은 신학자에 의해서 현시대에 맞지 않는 구식 법칙으로 취급당 하고 있는 바로 그 십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만당하지 마십시오. 십계명에 기록된 모든 도덕 율법 하나하나는 하나님께서 돌 위에 친히 기록하셨을 그때나 지금이나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불변하며 지속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의 의미를 영적으로 적용하는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게 만드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율법을 준수하는 생활을 볼 수 있게 됩니다.


4. 하나님의 율법: 거울

먼저 율법의 기능이 아닌 것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율법에 죄를 지적하는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능력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의롭게 하고 정결케 하는 은혜가 없습니다. 인간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단 한 명의 영혼도 구원받기에 충분치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 까?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 그것은 값없는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 이니라”(롬 3:20).

이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순종하려고 열심히 애쓰는 행위로 용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께 용납을 받고 호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고 의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정결함을 받아야할 필요를 보여주고 깨끗함을 받을 위대한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해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거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의 기능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3-25).

거울이 우리 얼굴에 묻어 있는 때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 다. 온종일 거울을 들여다본다거나 거울로 얼굴을 문지른다고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울이 하는 일은 얼굴에 묻어 있는 더러운 것들을 보여 주어서 더러운 사람에게 세면대에 가서 세수 하도록 지시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죄인에게 그의 형편을 알려줌으로써 죄인을 정죄하고 참 정결함을 받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도록 지시해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 바울은 이 점을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 율법의 행위 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율법에 관한 문제 중에서 가장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구약은 행위의 시대 이며, 신약은 은혜의 시대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 때문에 구약 시대 사람들은 행위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구원하기 위한 완전 하고 아름다운 한 가지 계획만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행위로 구원받은 자들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입 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영혼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들일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구원을 받은 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한 자들로서,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흠 없는 양을 성소로 가져가서 죽이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는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자는 영원토 록,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높이는 구속의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5. 그리스도의 새 계명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소개하신 사랑의 새 계명을 근거로 해서 십계명을 폐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 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모든 율법의 요약으로서 두 가지 큰 사랑의 율법을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나, 주께서 그것들이 십계명을 폐하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실 때에, 전혀 새로운 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나왔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십계명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하여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레 19:18). 이러한 통찰력 있는 영적 원칙들이 그리스도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잊혀진 바 되어 왔기 때문에, 그러한 가르침이 그들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것처럼 들렸던 것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변경시키거나 대치하려고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 두 사랑의 계명은 단순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간추린 것이라는 사실을 유의하십시오. 마태복음 22장 37-40절은 모든 계명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사랑의 원칙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성경 절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3장 10절에서 다시 반복하여 언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혼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그는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기록한 처음 네 개의 계명들을 순종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나머지 여섯 개의 계명 즉,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의무와 관련된 계명들을 순종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웃으로 부터 훔치거나 그에게 거짓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을 순종하고 이루 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는 것입니 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일 획 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6. 율법 아래 있지 않음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법을 격하시키려고 애쓰는 다음과 같은 변론을 듣습니다. “우 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더는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 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순종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인가요? 이것에 관한 성경 절이 로마서 6장 14,15절에서 발견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쉽게 혼란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어찌하리요?”라는 말을 덧붙 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라는 말입니 다. 그의 대답에 유의해 보세요.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오해함으로써, “은혜 아래 있으니 율법을 범해도 괜찮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바울은 이를 심히 염려하였기 때문에 덧붙여서 설명하기를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법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강력한 언어로 바울은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법을 범할 수 있는 면허증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은 바울의 분명한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는 로마서 3장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을 “하 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법을 범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들은 법을 범하지 않음으로써, 법에 따라 정죄 당하지 않는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요 은혜의 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논증에서 바울은 은혜의 능력이 죄의 세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진리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 니라.” 은혜는 죄의 권세를 누르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케 하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이 주는 죄책감과 그 정죄 아래 있지 않은 이유이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으리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한 살인자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가정합시다. 형 집행 날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법 아래 있는 것이며, 죄책감 속에서, 정죄함 아래서, 사형 선고 아래에서 사는 것입니 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하루 전에, 대통령이 이 죄수의 형편을 재검토하고 난 후, 용서해 주기로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대통령이 그 정상을 참작하여 자기의 권한을 이용해 그 죄수를 완전히 석방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법이 다시는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법률의 고소에 대하여 완벽히 죄 없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로이 걸어나갈 수 있으며 어느 경찰이라도 그를 체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은혜 아래 있고 더는 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법률을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법률을 더 잘 순종할 의무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그 국가의 법을 조심스럽게 존중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까?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기 때문에 율법을 다시는 소용없는 것으로 폐하는가, 라고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대답하고 있는데,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는 율법이 세워지고 재강조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여서 재차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순종하기를 피하 려고 교묘히 이유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 더 이 문제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속도위반으로 경찰에게 붙들린 경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당황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경찰이 법규위반 보고서를 쓰고 있는 동안, 여러분이 정말 급한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설득력 있게 경찰에게 호소했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는 쓰고 있던 보고서 용지를 천천히 접더니 찢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좋습니다. 이번만큼은 용서해 드리지요. 그러나.” 이제 경찰이 말하는 “그러나.”라는 말에는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을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나 다시는 속도위반을 하면 안 됩니 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요. 경찰의 이러한 용서(은혜)가 여러분에게 법을 불순종 해도 좋다는 길을 열어 줍니까? 그 반대로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강하게 재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만일 여러분께서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7. 순종: 사랑의 시금석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깨끗함을 받게 하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제는 법이 필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릅 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고, 정결케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인도해 주는 율법의 감시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그리스도인 경험 가운데서 올바른 위치로 잡아주는 거울의 역할이 항상 필요로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경쟁 속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협력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둘의 참다운 관계를 잘 배합시킨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계시록 14장 12절입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니라.” 믿음과 행함에 대한 얼마나 완전한 묘사입니까? 믿음과 행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성도들 가운데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행위가 사랑의 참다운 테스트(시금석)입니다.
행함은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행 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어떤 남자도 입으로 하는 말로만 가지고 순수한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꽃을 주는 일도 없고, 헌신적인 행동도 없으며, 사랑의 선물도 없다면, 순결하고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러한 남자의 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말과 공언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참 증거는 순종입니다. 요즈음 자동차의 범퍼에 붙어 있는 스티커들은 얄팍한 사랑에 대한 관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미소를 지으세요.”,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경적을 누르 세요.” 등등으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그러나 이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환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미소나 손을 흔드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이 사랑을 환영하지만, 그것이 생활 전체를 뒤흔들고 변화를 요구할 때에는 대다수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고 편안하고 안락한 종교 즉, 자신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길대로 살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줄수 있는 종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는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가 요한일서 2장 4절입니 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이 그러한 확신을 하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성경 에서 가장 확고하고 깊게 수립된 진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하고 말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들을 행한다고 주장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청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주께서는 슬픔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의 확고한 말씀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주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요한이 우리에게 확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리하여 우리는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어떻게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의 생애와는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8.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가능한가?

수 많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은 영적이요,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완전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없다는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견해는 진리입니 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표준인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 까? 돌 위에 열 가지 법을 기록하셔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는 어떤 다른 숨겨진 의미가 있습니까? 십계명에 기록된 “지키 라.”라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의미나 “결코 지킬 수 없다.”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계셨기 때문에 율법을 순종하실 수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만이 단 한 번의 죄도 범하지 않고 사셨던 유일하신 분입니다. 주께서 그러한 완전하고 승리하는 생애를 사셨던 비결이 로마서 8장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점을 놓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육신을 취하시고도 완전하게 사심으로써 죄를 죄로 정하여 우리 속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위의 성경 절에서 사용된 “의”라는 단어의 헬라어 “디카이마”는 문자적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그분께서 쟁취하신 것과 같은 승리를 할 수 있게 하려고 완전한 승리를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마귀를 정복하시고 육신 가운데서도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모본을 보여 주시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 오셔서 당신께서 얻으셨던 승리의 경험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겠다고 제안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힘과 내재하시는 능력으로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 니다(빌 4:13). 누구도 인간의 의지와 능력만으로는 십계명을 지킬 수 없지만, 예수님의 가능케 하시는 힘을 통하여 그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의의 깨끗함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우리 승리의 생애를 위하여 당신의 의를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오셔서, 당신의 생애에서 하늘 아버지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심으로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만 의지하여 사는 자들은 같은 승리가 가능 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9. 율법으로 심판 받음

이제 율법에 관한 마지막 질문은, “사람이 십계명 중 몇 가지를 범해야 죄를 범하게 됩니까?”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0-12).

모든 사람이 결국 위대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중 하나를 범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십계명은 열 개의 고리를 가진 사슬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고리가 깨어질 때에 그 사슬이 망가지는 것입니 다. 율법이 꼭 그와 같습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자들은 십계명으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도둑질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거절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적 질하는 자는 하늘을 유업으로 얻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기를 거짓말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 탐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 습니까? 그 이유는 십계명이 그러한 일들을 금지하고 있는데, 모든 인간은 결국 율법 으로 심판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도 십계명 중 어느 하나라도 고의로 범하면서 하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계명 중 하나를 범하는 것은 모두를 범하는 정신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은 행위를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상에서 사랑을 자격요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또한, “너 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알고 있는 죄를 계속 범하는 것은 저들이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내어 쫓는 것이지, 불순종의 행위 자체가 그들을 막는 것은 아닙니다. 십계 명은 불순종의 동기를 심판합니다. 순종의 동기가 사랑일 때에만, 그것이 하나님께 받아 드려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어떠한 행위도 헛된 것이요,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희생의 효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10. 무엇으로 구속함을 받았는가?

율법과 은혜에 관한 훌륭한 예화를 오래전에 뉴올리언스 노예시장에서 있었던 이야 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명의 목화밭 주인들이 반항적인 음성으로 소리 지르고 있는 한 늙은 흑인을 노예시장에서 경매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한 농장 주인이 경매에 이겨서 그 노예를 자기 마차에 태우고 농장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동안 그 흑인 노예는 반항적인 말투로 새 주인을 위하여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농장에 도착하자, 그 주인은 새로 산 노예의 손에서 사슬을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요, 당신은 다시는 노예가 아니오. 나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당신을 사온 것이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늙은 흑인이 농장 주인의 발 밑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주인님! 나는 당신을 영원 토록 섬기겠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죄의 속박과 정죄와 죽음 가운데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 님께서 희망 없는 노예 상태로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주님께서 큰 희생을 치르신 것은 우리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응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구속 받은 자녀는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이렇게 하셨으니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부터 내 평생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인간이 율법을 범했을 때, 즉시로 죄는 인간에게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고된 죄의 요구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죄는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입 니다. 만일 율법이 폐하여질 수 있었다면, 죄의 형벌도 없애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 불변하는 율법의 권위가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그것을 폐하실 수 없었으며, 당신의 아들까지도 죽음으로부터 구하실 수 없었습니다.

두 형제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아주 좋은 예화가 됩니다. 형은 판사였습니다. 그의 동생이 법을 범한 죄수로 판사인 형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모든 증거를 보아서 자기 동생은 분명히 유죄였습니다. 법정 안에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판사가 이러한 경우에도 의로운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판사가 자기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고 엄숙하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리고는 최고의 벌금 형을 부과했을 때에 법정 안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판사는 즉시로 내려와서 동생을 끌어안으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유죄를 선고해 야만 했단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 벌금을 낼만한 돈이 없는 줄 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벌금을 갚아 줄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그 동생은 형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형벌은 면제받지 못했습니다. 판사인 형은 벌금형을 물어줌으로써, 율법을 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법을 더욱더 높인 것입니다. 그는 법률의 요구는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으며, 또 할 수도 없습니다. 법은 높여져야만 했고, 최고형은 선고되었으며, 형벌에 대한 값은 치러져야 했습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님께서 얼마만 한 대가를 치르셨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당신의 공의만큼이나 완전하신 것에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몸으로 죄의 형벌을 지심으로써 율법을 만족하게 하셨고 죄인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폐하여질 수 없는 십계명의 영속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취하셨던 하나님의 결정을 이해하시 겠습니까? 온 우주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옹호하시기 위해 이보다 더 확신 있고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을 제시할 수 없었 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놀라운 전시 앞에서, 잘못 오도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격하시킴으로써 하나님 정부의 권위를 격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반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싶습니다. 율법을 폐한다고 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의 정부를 대적하는 음모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율법을 들여다보십시오. 율법은 하나님 정부의 기초이며, 그분의 성품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활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여러분의 생활과 양심을 반사시켜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는 그 완전한 표준에 의하여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눈을 그 법을 완벽히 지키신 유일하신 분, 그리고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셨고, 여러분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실 것이므로 여러분은 사도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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