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죄란 무엇인가?

성경공부 시리즈 2권- 하늘의 전쟁

제3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죄” 란 무엇일까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에게 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때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무슨 병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정의하는 데에 따라서 우리의 복음과 신앙과 믿는 바가 달라집니다.
제1부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복음은 다 “죄”에 대한 다른 정의와 이해 때문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에 대하여 연구해 보도록 합시다.

1. 죄의 정의

원죄설 : “죄는 본성이다”라는 정의

첫 번째 죄에 대한 정의는 원죄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바로 죄라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정의는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미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고 정죄 받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지옥으로 갈 본성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잘못된 본성이 있는 그 자체가 죄라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원죄설”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개신교인이 믿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선택 : “죄는 우리의 선택이다”라는 정의

첫번째 원죄설의 정의는 “우리는 잘못된 본성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히 잘못된 행동을 한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는 다릅니다. 우리가 잘못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나는 내 뜻대로 하겠습 니다. 나는 주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계명)을 어기고 자기 뜻대로 한다면, 그것이 자기가 한 선택이고,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죄의 정의”인 “죄는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2. 선택으로서의 죄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복음은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선택으로서의 죄”를 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한 예증을 들어 봅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 와서 털을 비비며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주인을 따라 문을 나설때 갑자기 이상한 성격을 나타냅니다. 수염과 꼬리를 바짝 세우고 날카로운 동물로 변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양이는 본성적으로 자기보다 큰 것이 오면 무조건 도망가고 자기보다 작은 것은 무조건 잡기 때문에, 밖을 나가면 본성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밖에서 작은 생쥐를 잡으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는 생쥐를 금방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다 다시 잡았다 하는 반복을 계속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쥐를 잡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 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물은 다른 창조물(생쥐) 에게 죽기까지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새 땅에 가면 그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고양이가 다시 주인에게 올 때 어떻게 합니까? 콧수염을 바싹 세우고 자기가 생쥐를 잡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옵니다. 그때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만일 당신이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양이를 정죄할 것입니까? 아니면 죄가 없는 것인가 라고 갈등할 것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잘했다고 말하며 다시 그 살인자를 집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자, 여기서 악한 것과 죄에 대한 책임의 차이를 알아봅시다. 이 고양이가 한 일은 악한 짓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너는 죄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 니다. 왜 그런가요? 이 고양이의 작은 두뇌 속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고, 옳고 그름의 차이 또한 없습니다. 그는 그저 타락한 본성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타락한 본성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본성이 말하는 것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에게 타락된 본성은 악하게 있지만, 아직 죄의 책임은 없습니다. 죄를 짓기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스스로가 짓기로 선택 해야 죄가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올바른 죄의 정의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3. 결과와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

창세기 2장 17절은 하나님께서 창조 받은 인간들에게 처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날 바로 죽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아담의 사형 집행이 즉각 시행되지 않았을까요? 그이유는 대속의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의 죄를 몸소 지시고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죄값을 지불하기를 자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절의 전단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창세 전부터 죽음을 당해 오신 어린양”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세 이후로 4000년이 지난 이후에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경우를 대비해 창세 전부터 구속의 계획을 마련해 놓으신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그형벌을 받게 해 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예수님께서 중재자로 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려면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가지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범죄자에게 선고된 운명을 막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정의로서의 “원죄설”은 성경의 구속의 계획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와 에덴동산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은 여전히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는 멸망당하고 정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갚으셨을 때는, 그것은 완전히 갚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더이상 갚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했을 때에 그들은 멸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나쳐야 지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는 그들의 길에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길 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옥으로 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짓밟고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4. 죄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에 대해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 복음 9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걸어가시는데, 눈이 먼 맹인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2절,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들은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눈을 좀 봐,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심판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뜻은, “그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그의 부모 들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모들의 죄 때문에 그는 정죄를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사실과 죄와 혼동 하지 말아라. 눈이 먼 것은 악한 것에 속하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니 다”라고 하시며, 계속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마귀의 역사만 볼 수 있지만, 너희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마귀가 역사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아무나 다 태어나면서 장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됨을 어떻게 취급하셨습니까? “내가 너의 눈을 용서한다”라고 하셨습니까? 절대 그렇게 말씀하 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의 눈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의 눈을 다시 재 창조해주셨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죄악들을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죄란 무엇인가?” 이제 다음 기사에서는 죄와 죄책감, 그리고 유혹과 죄의 차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합니다. 자칫 무거워 보이는 신학적인 논제 같지만, 진실된 그리 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이고, 또 이것에 대해 확실한 이해가 생길 때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함께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5. 죄악과 죄책감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죄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릅니다. 한 가지는 죄악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죄책감입니다. 악은 모든 인간의 본성과 동물들에게 있고, 또 이로 인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야기됩니다. 또한 다른 문제는 죄책감입니 다. 우리는 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죄 받은 죄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두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죄책감을 용서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죄책감을 대신 질 터이니 너희는 자유롭게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책감이 없어질 때, 우리에게 지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 번째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죄됨은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요?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죄된 본성과 죄악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없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없애실까요? 주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이 세상과 우리의 본성을 재창조하심으로 없애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 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바리새인들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러분이 정말 모른다면, 정말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알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남아 있습니다. “빛”은 우리의 죄악들을 깨닫게 하고, 이것이 우리의 죄책감으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빛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순종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죄악이 죄책감이 되는 것입니다.


◈ 이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분명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 야고보서 4장 17절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우리가 여기에 있는 차이를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알아야 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럴 때에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고양이나 어린 아기한테는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야고보서 1장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기에 “자기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다”라는 뜻입 니다. 또한 우리의 죄된 본성과 그 힘에 의하여 우리가 유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6. 유혹과 죄의 차이

1. 유혹
유혹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밖에서 무엇인가 우리를 자극하는 요소가 필요합니다. 보는 것, 혹은 듣는 것 등. 그래서 우리의 내적인 것이 그것에 유혹을 받아서 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적으로 끌리는 것이 없으면 거기에는 유혹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 읽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유혹을 받고 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 인은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자극에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 도인이 믿기를 이 죄된 자체가 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본성이 죄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끌리는 것은 “유혹”이라 말합니다.

2. 죄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유혹 뒤에 옵니다.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곧, 유혹을 계속 품어야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 성경 절을 보면 죄가 성립 되는 데는 단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험담하는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데서부터 시작됩니 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궤휼”은 온갖 형태의 불순을 포함합니다. 불순한 생각이 용납되면 부정한 욕망을 품게 되고, 그 욕망으로 마음이 더럽혀지면 그 정직성도 손상됩니다. 불순한 생각은 죄된 것입니다. 그것은 더럽혀지는 것으로 생각됩 니다.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이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불순한 생각이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일을 더 해야 합니다. 그것을 품어야 됩니다. 그것을 우리의 생각으로 품어야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죄가 성립되는 4단계

01 우리가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 그 어떤 것에 끌리는 단계
02 우리가 그것에 매력을 느끼는 단계 (여기까지는 죄가 아니고 유혹이다)
03 우리가 그 유혹을 마음속에 품는 단계 (유혹을 하나님의 은혜로 물리치지 않고 계속 품는다)
04 죄가 성립된다.


야고보서 1장 14, 15절은 죄가 되는 단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처음에 유혹을 받고, 그 욕심을 계속 품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혹을 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됨과 죄의 책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첫 번째 단계(끌리는 단계)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3번째 단계를 죄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 하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다른 복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죄의 대한 정의(원죄설)는,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은 할 수 없고 그냥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정의를 가진 사람에게 복음은 항상 “용서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항상 용서만 받고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기독교 인들이 믿고 있는,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 마음의 선택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거절할 수도 있고, 또 그분을 거절함으로 인해 치료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용서도 받고 치료함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도덕적 완전함의 유일하고 진정한 표준입니다.
그 율법은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실증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노라”(요 15:10)고 하십니다.
이런 순종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응할 수 없습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우리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보증을 가졌다고 해서이 일을 행할 수 없다고 항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거울곧 하나님의 율법을 들여다볼 때에 놀랄 만한 죄의 깊이와, 범죄자로서의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분의 계명을 능히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주님께서 행하신 대로 자기도 그와 같이 행해야 할지니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 너희에게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이니, 그 옛 계명은 처음부터 너희가 들어온 그 말씀이니라.
(요일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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