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죄의 역사가 끝마쳐지려면

성경공부 시리즈 2권- 하늘의 전쟁

제2부 죄의 역사가 끝마쳐지려면

1.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만약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지금의 “흰색”은 무슨 색이라고 불릴까요? 만약 흰색만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색을 무엇이라고 생각 할까요? 나무도 하얗고, 풀도 하얗고, 하늘도, 꽃도, 사람도… 모든 것이 하얀 색인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는 우리가 부르는 흰색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의 색”이 라고 부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색깔만 존재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검은 색의 반대되는 것을 흰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만약 검정도, 빨강도, 초록도… 모두 없어지고 흰색만 남는다면, 더 이상 색과 색을 서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흰색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색은 무엇이다” 하는 이해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색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세계 안에서도 흰색이 다른 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흰색은 계속 흰색이지만, 단지 그것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 색”이라고 그 이름만 바꾸어 붙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처럼 악도 없었고, 슬픔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으며, 또한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의로운 일들을 의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악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으며(시 104:5),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나 슬픔을 주는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하여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모든 악을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완전한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들 마음에 이루어 놓으신 사랑을 완전케 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 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습니다(창 2:8,9).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 게, 이 땅의 모든 실과는 너희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이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만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7 참고).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규칙을 만드는 법이 아니고 선택을 주는 법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세계는 완전하여 악의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은 단지 그들의 머릿속에 프로그램된 무의식적 사랑이 되었을 것입니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심어주신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하신 요한 복음 14장 21절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심어주신 그 자유 의지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불법을 가르치지 않는 법

그런데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에 대하여 어떤 의심과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법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불법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만약 불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라고 질문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에덴에 선악과라는 법은 있었으나 이 법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불법을 알게 만들지 않았다고 창세기 2장 9절과 3장 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악과의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였으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몰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악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선도 몰랐 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행동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선”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심으로 그들이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법이 주어 졌다면 일반적으로 이 땅의 법이 갖고 있는 특징처럼 에덴에 서도 법과 불법의 의미가 동시에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법을 만드심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불법이 생겨났다고 상상합니다. 이러한 추측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완전하지 않았다거나,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신 것 같은 결론을 내리게 유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불법을 가르치지 않는 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만드셨던 법은 이 땅의 법과 달랐습니다. 에덴동산의 법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는 것이었고, 그 법을 어긴 결과는 “반드시 죽으리라”였습니다.
이 법을 나누어 보면 “먹지 말라”고 하는 규칙과, 선악과와, 그 규칙을 어긴 결과인 “죽 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다른 과일 나무와 다름이 없는 하나의 나무였기 때문에 다른 나무와는 달리 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며, “먹지 말라”라는 단어는 그 언어 자체로는 악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먹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살인 하지 말라”고 법이 주어졌다면, 살인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었어야 하며, 그것은 곧악을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든지, “도둑질하지 말라” 하지 않으시고 “먹지 말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법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 법은 지금의 법처럼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하나님을 선택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또한 이 법을 어겼을 때 주어진다고 했던 “죽음”이 아담과 하와에게 겁을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죽음을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의 나무가 가을 낙엽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영원한 삶”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언어인 것처럼, “죽음”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다른 세계의 언어 였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는데, “죄”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그 삯(값)인 사망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만약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그 법에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는 의지를 통하여 줄 수 있는 사랑을 아담과 하와가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만드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완전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의 법인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흰색이라면 색의 개념이 없어집니다. 더 이상 서로 반대되는 색들의 세계는 없어지고 자연 색 하나만 남게 됩니다. 장미는 있으나 거기에 있어야 될 것 같은 가시는 없고, 태양은 있으나 해로운 자외선은 없습니다. 사랑은 있으나 질투는 없고, 성공은 있으나 실패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계는 그 반대의 뜻이 완전히 없도록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사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토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이러한 생각을 깊게 하다 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율법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며,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약 1:17)므로 그 말씀인 율법은 그림자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그 완전한 세계로 복귀하게 될 때는 지금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반대개념은 사라지게 되어, 악의 반대 의미로서의 선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흰색”이 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일들에 붙었던 “선”은 없어지게 되고 “자연적인 일” 또는 “당연한 일”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선한 행동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인간으로서 해야 되는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흰색이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흰색은 여전히 그 색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그 이름만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선이라고 부르지 않는 선”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상태였으며 이 땅에서 성화를 통하여 마지막 세대가 얻어야 할 우리 마음의 최종적 목표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심으로 에덴에 다른 색을 만들지 않았음을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그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그 행위가 갖고 있는 본질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마음에 없었으므로 그것이 에덴의 색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선악과는 단지 아담과 하와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서는 안될, 어떤 다른 세계(죄의 결과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만을 주었을 뿐입니다.

3. 거울과 같은 율법의 기능

이제 선이라는 개념은 악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게 되고,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 니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과 불법을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을 통하여 이러한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 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이 죄와 율법의 다른 점을 몰라서 “율법이 죄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율법과 죄가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서 묻는 물음은 그 차이점을 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를 갖고 있느냐” 또는 “율법이 죄를 만드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히 반대합니다. 율법이 죄를 포함하고 있거나, 죄를 만들지 않고, 단지 율법은 내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것이 죄라고 가르쳐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이 죄를 어떻게 짓는 것인지 가르쳐 준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 다. 그런데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를 알았다고 하여 그 거울이 자기 얼굴에 검정을 묻혔다거나 어떻게 묻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거울처럼 우리의 잘못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거울로서의 율법이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악도, 선도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세상에는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불법의 의미가 포함된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타락한 후에, 법의 거울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갖고 있는 악한 본성을 비추기 위하여 “살인”이나 “간음”, “도둑 질” 같은 불법을 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면 이 법이 거울 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므로, 죄가 존재하지 않았던 에덴동산에서는 율법이 오직 사랑을 완성케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율법을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몽학 선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법은 우리에게 단지 당연한 일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 나는 오늘 휴지를 버리지 않았어! 아, 나는 오늘 내 아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나는 오늘 살인을 하지 않았어, 도둑질도 하지 않았다고! 아, 나는 참 선한 일을 했다.”라고 말을 한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자기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그들의 새끼를 양육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당연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율법이 나타나 불법을 행하였다고 선언 합니다. 거울이 없는 물체를 반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법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행하지 않기 전까지는 절대로 불법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법이 있지도 않는 불법을 가르치거나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얼마나 완벽히 반사하고 있으며, 이 계명들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완전케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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