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과 거짓의 전쟁 [신앙기사 4부]

 

“[36]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37).

마지막 시대에는 감추어 졌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무엇이 진리이고 오류인지,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므로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도 의혹이나 의심이 없도록 할 것이다. 은혜의 시기 동안에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의 성품을 보여주셨다면 심판의 때에는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주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실 것이다. 갈멜산에서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한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드러내는 일에 쓰임 받을 사람들! 이 시대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갈멜산에서의 전쟁

 

갈멜산은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가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한 전쟁이 있었던 곳이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신이 참 신이었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게 했던 자가 참 선지자였다.
아합은 정치와 종교가 연합된 힘으로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선택함으로 국가적인 배도를 자행했다. 바알을 숭배하는 대제사장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뒤 음녀인 이세벨의 지휘아래 모든 이스라엘은 바알을 따르게 되었고, 땅을 적시는 이슬과 풍부한 수확을 가져오는 비, 산과 계곡과 시내와 샘들이, 구름과 태양과 바람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임을 잊어버리고, 태양신 바알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배도한 교회는 현세의 축복을 받기 위해 바알의 능력을 의지하고, 타락한 예배 의식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전의 왕들보다 더욱 우상을 숭배하며 가증히 행하므로 악행이 만연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배도한 국가와 교회를 회개시키고자 어떻게 하셨는가?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1년이 지나자, 땅은 불에 탄 것처럼 바짝 말랐고 맹렬한 태양열은 남은 식물마저 태워 버렸다. 시냇물은 말랐고 양떼와 소떼들은 고통 중에 이리저리 방황했다. 한때 비옥했던 들판은 불타는 모래사막과 황량한 광야처럼 되었다. 우상숭배를 하던 숲들은 잎이 다 떨어지고 나무들은 말라빠진 해골처럼 그늘을 주지 못했으며, 공기는 건조하여 질식할 것 같았고 바람에 날리는 뽀얀 먼지가 눈을 멀게 하고 거의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마치 일곱 재앙의 결과를 보는 것 같다. 이런 일을 겪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2]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15]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 15:2,15).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여호와를 떠나면 괴롭고, 돌아오면 평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이렇게 되었구나, 돌아가자!”라고 해야 되는데, 오히려 “엘리야가 바알 신을 노엽게 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됐다. 엘리야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면 바알의 노여움이 진정될 것이다.” 하면서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를 찾지 못하고 대신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가뭄과 기근으로 온 나라는 계속 황폐되고,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도한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저희 마음을 낮추기를 거절하고 엘리야가 이 무서운 형벌을 가지고 왔다는 거짓을 믿고 분노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데,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문제가 있어도 대다수가 따라가니까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공격한다.

“[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엘리야의 말대로 처음부터 하나님께 돌아왔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재난을 직면하고서도 거짓 종교를 믿었다.
드디어 아합이 엘리야를 만났을 때, 첫마디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네놈이냐?” 고난의 책임을 엘리야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때 엘리야가 당당히 대답한다. “내가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기 때문에 괴롭게 된 것 아니오!”
엘리야는 군사들로 호위 받고 있는 왕 앞에서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글자로 읽으니까 그때의 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단호한 소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교인들이 마음 상할까 봐 그냥 부드럽고 달콤한 설교만 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과 인간들을 즐겁게 해서 출세하려는 야망 때문에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평안하다 안전하다 부르짖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설교가 온 세상에 꽉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같은 사람을 찾으신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전할 사람, 비록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평판이 떨어지고,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할지라도 담대히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신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면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희생이 크잖아. 꼭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잖아!” 하면서 뒷걸음질 치고 있지는 않은가!

드디어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 도합 850대 1의 전쟁이 갈멜산에서 벌어진다. 이 자리에는 거짓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아합 왕과 그의 군대, 그리고 모든 백성들까지 불러 모았다. 백성들은 갈멜산 정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도록 산기슭 여기저기 자리를 잡았다. 엘리야는 군중들을 향해 나팔 같은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교회와 국가를 뒤덮은 배도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경고하시고, 책망하시고, 말씀을 듣고 보게 하셨지만 한번 거절하고 두 번 거절하면서 점진적으로 배도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들이 회개를 거절할 때마다, 그들의 양심은 점점 무감각 해졌고, 죄를 가볍게 여길 때마다 점점 하늘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들을 귀가 닫혀버렸기 때문에, 또 바알이 하나님이라 믿고 싶어서 참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완강히 거절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알 신앙은 편했기 때문이다. 순종을 요구하지도 않고, 죄를 버리라고도 하지 않으며,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라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단호한 책망의 말씀들은 듣기 싫었다. 거북스러웠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길을 따랐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지구와 하늘 그 경계선에 와 있다. 이제 몇 발자국만 더 가면 하늘이다. 이러한 때에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엘리야와 다니엘과 같은 예수님의 증인들이 곳곳에서 일어서고 있다. 지금이 여호와를 만날 때이다.
이제 갈멜산 정상에 두 제단이 세워진다. 과연 누구의 제물에 불이 내려올 것인가? 바알의 사제들은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뜯으며, 살을 베면서까지 몸부림을 쳤다. 사탄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도우려고 제단 가까이 왔을 것이다. 기꺼이 제물에 불을 던지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얼씬도 못하도록 그를 막으셨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짓을 하루 종일 목격했다. 저녁이 되자 이제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다시 쌓았다.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도록 도랑을 만들어 흘러넘치도록 물을 가득 부었다. 바알의 사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기에 벌이 임할 것을 알고 두려워 벌벌 떨고 있고, 엄숙함에 숨이 막히는 듯한 침묵이 모두에게 흘렀다.

엘리야는 마치 여호와께서 그 자리에 계시고, 그 광경을 목격하시며, 그의 기도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간단하면서도 간절하게 기도했다.
“[36]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37).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번갯불의 빛나는 섬광과 같은 불꽃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제물을 사르고 도랑의 물을 말리고, 제단의 돌까지 태워버렸다. 타오르는 불길은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었다. 마치 출애굽 당시 그들을 호위했던 불기둥처럼 불은 하늘 높이 올랐다.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엎드렸다. 감히 하늘이 내린 불을 계속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자신들도 그 불에 삼키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부르짖었다.
마침내 백성들은 저희가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 욕을 돌렸는지 깨달았다. 백성들의 분노는 자신들을 범죄로 이끈 바알 사제들에게 폭발되어 그 날에 모인 거짓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바로 이 전쟁이 앞으로 우리에게 재현될 것이다.

 

 

이 시대의 엘리야들

 

계시록 18장에 나오는 천사는 이 시대의 엘리야들이다.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1~3).
이 천사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천사들의 영광으로 세상이 환하여질 때 배도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싫어할 것이며,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교회를 남겨두셨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흔들어 깨워야 하고, 교회는 그 배도를 멈추고 돌이키라고 외쳐야 하며, 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피할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갈멜산 전쟁이 눈앞에 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심판대였다. 누가 참 하나님인가를 보여주었다. 의인은 구원받고 악인은 멸망당했다. 어느 편에 있기를 원하는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넘치는 죄악은 교회가 성경의 표준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오히려 세상 권력과 야합함으로 이르러 온 결과이다. 오늘날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제발 눈을 떠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엄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가장 감격스러워야 하는 그날이 우리에게 재난이 되지 않도록 오늘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함을 입도록 하자.
때가 가깝다. 이러한 시기에 제발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내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해도 마땅히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세상을 깨울 마지막 복음

 

마지막 때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참된 진리의 지식이 전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반드시 드러내실 진리는 첫째,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완성인 십자가와 십계명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는 우리가 계명을 지켜 순종하는 생활을 살도록 돕고 계신다. 둘째, 죄인을 구원하는 성서적 복음에 대한 참된 이해! 셋째, 마지막 선과 악의 대전쟁의 이슈가 되는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에 관한 분명한 이해!

하나님은 죄인이 심판받는 것보다 회개하여 살기를 훨씬 더 바라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죄를 고집한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소멸할 때, 죄인들도 진멸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임박한 바벨론의 멸망을 경고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라!” 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고 요청하신 것은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우리와 가족들이 지금껏 불편함 없이 지냈던 종교조직들과 인연을 끊고 나오라는 예수님의 호소는 우리에게 마치 십자가를 지는 고통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전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가? 역사의 클라이맥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예수님의 호소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거절 때문에 곧 애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순종하는 사람들은 곧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서서 어린양과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많은 진실한 백성이 여러 이유로 바벨론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 체제에서 나타난 “경건의 모양”(딤후 3:5)에 기만당할지 모른다. 어떤 종교 체제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하여 기적을 행할 것이며, 심지어는 경건의 모양으로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성결의 미와 내적인 겸손이며, 외적인 경건과 형식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진리의 능력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상한 심령으로 순종하는 정신이며 교회가 의롭고 정결하게 되는 것을 원하신다. 외적인 아름다움이 반드시 순결하고 고상한 사상의 표현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경건의 모양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을 알지도 못한 채 바벨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바벨론에 있다고 생각지 않지만 사상과 생활이 바벨론과 하나가 되어 버린 경우도 있다.

바벨론은 타락한 종교 체제에서뿐만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바벨론에서 나왔으니 안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바벨론을 타락한 종교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심령 가운데 바벨론의 정신과 사상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내 영혼을 더럽히고 있는 내적인 바벨론에서도 출 바벨론 해야 한다.
지금 종교계에 있는 분들에게 이번 말씀이 몹시 불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참 사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첫째로 삼는다. 이런 사랑을 가진 자들은 명백하게 말함으로써 이르러 오는 불유쾌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진실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영혼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시는 일꾼들은 자신의 평판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경고와 호소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에 자신이 전해야 되는 메시지를 변경하거나 핑계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목회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역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깨닫고 엘리야가 나타낸 용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 목회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엄숙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라고 명하신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견에 좋은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왕들보다 더 크신 분께서 그들에게 말하고 명하신 말을 해야 한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가 되어야 한다.

역사는 늘 기득권 세력과 거기에 맞선 소수의 프로테스탄트, 항거자의 싸움이지 않았는가! 이 시대에 또 종교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교회와 정치의 불륜관계로 맺어진 카톨릭은 한 젊은 프로테스탄트를 죽이기 위해 독일 황제 카알 5세와 협약을 하고 선동, 반역, 불 경건, 이단, 참람의 죄로 고소당한 루터를 보름스 회의로 부른다. 루터가 보름스로 가는 길에 사람들은 “교황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가지 말라”고,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한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하려고 하니 가지 말라”고 말리지만, 루터는 흔들리지 않고 “보름스 시내의 악마가 비록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들어가리라”하면서 보름스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자 그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은 루터의 운명을 슬퍼하며 장례식에서 부르는 만가를 부르며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이 찬송을 작시하여 부른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보름스 의회에 출두한 루터는 이렇게 최후의 진술을 한다. “이제 본인은 대답하겠습니다. 본인의 신앙을 교황이나 국가에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 성경의 증언과 가장 분명한 논리로써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또한 본인이 인용한 성경 구절에 대하여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인의 양심을 승복시킬 수 없는 한, 본인은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양심을 거스려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D’Aubign’e, b. 7, ch. 8).

나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루터와 같은 심정으로, 보름스 의회에 출두한 루터와 같은 심정으로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이시여 기독교회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추천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