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호 매일의 만나

 

1. 성육신과 성소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지으신 지상 성소는 하늘 성소의 그림자이자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지어야 합니다(히 8:5 참조). 왜냐하면 지상 성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표상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모든 기구와 재료와 모형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구세주의 역할을 담당하시는지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성소 봉사의 모든 부분은 예수님의 각 사역의 부분들을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성소 뜰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 사역을 상징해 주는 것이고, 성소 첫째 칸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에서 이루시는 중보 사역을, 성소 둘째 칸 즉 지성소는 구속 사역의 마지막 심판과 죄를 도말하시는 사역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용서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우주 천사들 앞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심판의 과정도 포함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천국 복음의 계획들을 설명해 주기 위해 고안된 이 성소 제도는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소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사실입니다. 완전한 구원이란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죽지 않고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인들에게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소 제도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 앞에 나아가기 위해, 즉 지성소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기 위해, 죄는 어떻게 용서받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떻게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어, 결국에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입니다.

 

2. 성소의 첫 번째 계단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성소의 경험은 죄를 지은 사람이 희생양(혹은 염소나 비둘기)을 흠 없는 것으로 고르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어졌고, 그의 마음에는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만 서려 있게 됩니다. 그는 행복하지 못하고 생애에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에게는 용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그 순간 그가 성소를 향하여 바라볼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이 지성소 위편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되고 회개하는 죄인들을 오라고 초청하시는 사랑의 이끄심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성소 뜰의 번제단에서 타오르는 연기가 하늘을 향하여 치솟는 것을 보면서 양을 끌고 가서 지은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희생 제사를 드리고 나면, 자기의 죄도 마치 저 타오르는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지고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성소를 바라보는 순간 성령께서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끄시려고 감동케 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죄인이 양을 고를 때에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흠 없고 정결한 것으로 준비해야만 합니다. 양을 고를 때, 상처가 있는지, 절지는 않는지, 눈이 멀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흠 없는 제물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죄인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순전한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레 1:3).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순전한 회개의 동기로 열납될 수 있는 제물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고후 7:10). 이처럼 지은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슬퍼하는 참된 회개의 제물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도록 준비하는 일이 성소로 가는 첫 번째 계단이라 하겠습니다.

 

3. 성소로 나아가는 길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성소 제도의 목적으로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역을 상징해 보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요, 두 번째는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는데 어떠한 경험을 하면서 어린양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약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소를 볼 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以信稱義)’의 과정을 보다 밝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죄인이 양을 끌고 성소를 향해 갈 때는 겸비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양을 끌고 가는 사람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다보면서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양을 끌고 가지?”라고 속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부족한 것과 죄인인 것을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인정하며 나아가는 경험을 갖게 합니다.
성소로 나아가는 죄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먼저 흰 세마포로 만든 성막 울타리와 번제단에서 타오르는 연기, 그리고 성소 위에 떠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입니다. 그것은 이 죄인에게 큰 소망을 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저 성소 뜰에 가서 양을 제사로 드리기만 하면 나는 저 하얀 성막 울타리처럼 깨끗한 의로 감싸이고, 나의 죄악들은 저렇게 연기처럼 태워져 없어질 것이며, 드디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입구 즉 성막 문은 홍색실, 청색실, 자색실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흰색)로 수놓아 만들어져 있습니다(출 38:18). 이 중 청색은 성경에서 항상 순종을 상징합니다(민 15:38~4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법을 기억하여 순종하라는 표로 그들의 옷소매에 청색 술을 달고 다니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 청색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상징합니다(요 14:30, 31).

 

4. 그리스도의 의의 옷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8)

성막의 홍색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속죄를 위한 희생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붉은색 물감은 그 당시 ‘스칼렛’이라고 불리는 붉은 벌레를 말려서 채취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벌레’ 같은 생애를 사신 후 속죄의 붉은 피를 흘리심을 상징합니다.
자주색을 채취하려면 그 당시 지중해 속에 사는 특수한 조개들을 많이 캐내야 했는데, 그것들을 말려서 자색 물감을 만들어 냈었습니다. 이 물감은 귀족들이 입는 옷에만 물들여졌습니다. 귀족이나 왕이 입는 한 벌의 옷에 자주 물감을 들이기 위해서 수많은 조개를 캐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비싼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주색은 청색과 홍색을 섞으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와 성령의 힘을 의지하여 사는 우리의 순종의 생애가 우리를 자주색이 상징하는 하늘의 왕족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무언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휘장들의 기본 바탕은 가늘게 꼰 베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다른 색깔의 실을 다 뜯어낸다고 할지라도 바탕이 하얀 베실 인 것처럼 속속들이 순결하고 깨끗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생애와 성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얀 베실로 짠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합니다. 또한 성경은 “내가 너를 권하노니…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계 3:18)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5. 십자가는 속죄의 시작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해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죄인과 그가 끌고 온 양을 보고 희생 제사를 맡은 제사장은 먼저 양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하는 일을 합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목사들은 교인들의 회개 경험이 진정한 것인지를 알아보며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다음 제사장은 죄인이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죄인의 죄가 양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그저 덮어주시고 잊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죄 없는 구세주가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지만, 그 대가는 구세주의 십자가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해 죄를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면서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실 정도로 계명을 어긴 죄를 그냥 묵과하실 수가 없으며, 계명을 파하실 수가 없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그 양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그를 위해 속죄하는 중보의 기도를 드린 후에야 속죄함이 있다고 합니다.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해 속죄한 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 4:26, 35).
이처럼 속죄는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작된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제사장이 죄인에게 속죄의 과정을 잘못 가르쳐 준다면, 그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채, 마치 구원이 이루어진 양 안심하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들어온 자유주의 사조인 신신학(New Theology)의 치명적인 무서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6. 번제의 의미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9)

번제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친다는 헌신과 봉헌의 의미로 드려지는 제사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번제를 하루에 두 번씩 즉 아침과 저녁에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러한 생애를 살기를 바라신다는 의미로서, 번제는 하나님 백성들의 생각과 말, 행동과 가장 깊이 숨어 있는 동기까지도 정결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번제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와 거룩한 생애를 유지하는 성화는 동시에 시작되는 것이며, 그 성화의 경험은 매일 지속해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가르쳐 줍니다.
물론 성소의 제사들이 구세주의 희생과 대속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인 동시에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믿는 자들의 생애의 단계들을 상징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헌신과 봉헌을 뜻하는 제사로써 죄를 용서받은 자가 온전히 자신을 굴복하여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회개와 굴복의 경험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번제를 드릴 때는 흠 없는 제물로 드려야 하며, 그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며, 또 그 제물을 끌고 온 죄인 자신이 자기 손으로 그 동물을 칼로 죽여야 합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자기의 죄가 혹은 우리의 죄과가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찔러 죽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희생 제물의 피를 번제단 주위 단 사면에 뿌리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온 세상에 효험이 있다는 보혈의 능력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요, 나아가서 주님의 피는 우리를 구속할 뿐 아니라 땅을 저주의 세력에서 구속하여 해방한다는 예증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7. 진리로의 개혁은 굴복으로부터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번제의 희생 제물을 죽인 후에는 그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인데,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욕구와 명예를 위해 살아온 교만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을 위해 다시 살아가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번제는 회개하며 나아오는 죄인의 참된 중생의 경험을 설명해 줍니다.
그다음에는 제물의 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르고 나서 그 속에 있는 내장들과 모든 창자까지 끌어내어 맑은 물로 씻는 일입니다. 일일이 내장들을 물로 씻으면서 철저한 굴복의 경험을 하도록 고안된 것이 바로 번제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깨끗이 씻고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두 다리를 자르라고 하셨는데, 머리는 우리의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들과 동기와 묵상들까지라도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의미하며, 두 다리는 우리의 사는 생애와 겉으로 보이는 행위들을 맑은 물, 즉 성령과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어 진리대로 개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모든 부분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웁니다. 그때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죄인이 온전히 굴복하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는 냄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기가 타는 냄새를 맡을 때에 역겨운 기분을 가지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기름이 타는 냄새를 흠향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죄를 포기하고 나오는 것처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없습니다.

 

8. 참된 칭의의 경험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굴복과 회개와 죄를 버리는 일이 일어날 때 칭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신학은 우리가 진리를 인정하거나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믿게 될 때 칭의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용서로 구원은 따 놓은 것이고 조금씩 성장하며 점점 더 좋아져 나간다는 식의 가르침은 참된 칭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참된 칭의의 경험은 죄의 힘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그와 같이 깨끗하게 씻은 상태를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움으로 매일 유지해 나가는 생애를 성화라고 하며, 성화에는 거룩해지는 일과 아울러 양적으로도 성장해 나가는 완숙된 경험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경험입니다.
물론 실수로 연약하여 넘어지는 죄들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와 도움이 다 마련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인이 회개할 때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셔서 의롭게 재창조해 주시면서, 참으로 그 속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아직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덮어서 칭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거짓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칭의에 대한 오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인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로 대표된 사람들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진리를 옹호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합세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신 반석 위에 떨어짐으로 저희의 옛 성질을 깨뜨려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또한 돌밭에 떨어진 씨로 묘사된 무리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말씀은 받았으나 그 말씀의 원칙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즉 진정한 굴복과 회개의 경험이 부족한 것입니다.

 

9. 번제와 아브라함의 믿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번제에 쓰이는 동물들을 가져다가 배를 가르고 두 쪽을 내어 땅 위에 늘어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의 불로 그 가운데로 지나가시면서 그 번제들을 직접 태워 주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을 받으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던 사실을 미루어 아브라함은 번제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과 오래 사귀는 세월 동안 자기의 불신과 실수를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으며 주의 명령이 아무리 엄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며 온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사실 이삭을 통해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고 분명히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불가능에서 아들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도 그가 어떠한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 곧 야고보서가 말해 주듯이 행함으로 증명하는 믿음, 즉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헌신하면서 순종하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모든 죄를 승리하고도 남음이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배운 자들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요, 또한 참된 하나님의 백성, 곧 참된 교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0. 거룩한 산 제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자신이 바로 번제물이라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을 들은 이삭은 늘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버지를 보아 왔고 그런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잘 배워 왔습니다. 떨리는 아버지의 손을 도와서 자기를 묶도록 한 다음에 단 위에 드러눕는 이삭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음의 손으로 칼을 들어 아들을 향하여 내리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시면서 수양을 대신 번제물로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장소가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대하 3:1).
하나님께서는 예표와 약속을 통해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갈 3:8)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믿음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이삭을 대신해 번제로 드린 어린양 역시 우리 대신 희생 당하기로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을 예표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죽을 운명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시며 죄인에게 “살라, 내가 대속물을 찾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동시에 복음의 실재를 마음에 새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시련의 어두운 날 동안 그가 참은 고통은 자기의 경험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 가르치신 무한하신 희생의 위대성을 깨닫게 하시려고 허락된 것입니다. 어떤 다른 시험도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영혼에 고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1. 여호와 이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전쟁, 곧 구속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지구는 온 우주의 교과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의 결핍을 보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그가 언약의 조건을 따르지 못했다고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를 고소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하늘 앞에서 그분의 종의 충성을 드러내 주심으로 완전한 굴복만이 받으시는 바 된다는 것을 증명하시고 또한 구속의 계획을 더욱 분명히 저들 앞에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희생이 요구되었는데, 온 하늘은 아브라함의 확고부동한 순종을 경이와 감탄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온 하늘이 그의 충성을 칭찬함과 동시에 사탄의 고소가 거짓됨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에게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순종하는 생애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 온 하늘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하신 어린양이 이삭 대신에 드려졌을 때, 천사들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의인들이 결국에는 어떠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인가에 대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사랑하시는 독자, 예수님을 제물로 보내신 것처럼 구원받은 죄인이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의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구속 받은 인간은 거룩한 자들과 다시 이웃하여 지낼 수 있도록 안전해졌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12. 화목제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찌니”(레 3:1)

성소 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 옛날의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 화목제는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로써, 이는 감사제인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서원(서약)을 드리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이 화목제는 번제와는 달리 성만찬의 의미를 가진, 즉 그 제사에 포함된 인물들이 그 희생 제물의 고기를 같이 나누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그 희생 제물 전체를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완전히 불태워 버리는 반면에, 화목제는 그 희생양의 고기 중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은 단 위에서 불태워 버리고, 제일 많은 부분을 희생을 드리는 사람에게 돌려주며, 제사장에게는 그 양의 가슴과 오른쪽 어깨와 두 뺨을 주게 됩니다(레 7장 참조).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은 희생 제물의 기름만 잘라 내어 번제단 위에서 태우게 되어 있는데, 동물의 기름은 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시 37:2).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의 고기의 일부분을 먹되 그날 온 식구들이 함께 모여 나누어야 하였습니다. 남은 것은 그 이튿날까지는 먹을 수 있었으나 삼 일째는 먹지 못하였으니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 삼 일에 부활하실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식구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희생에 동참함으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침 받기 위해 이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바 되었는지를 깨닫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소망이 걸려 있으며, 우리 삶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13. 화목제물의 의미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화목제에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분깃입니다. 화목제에 있어서만 그들은 예식을 집행하는 제사장에게 세 부분, 즉 앞가슴과 오른쪽 어깨, 그리고 양쪽 뺨을 도려내어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레 7:28~32 참조).
먼저 앞가슴 부분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개하며 나아갈 때 두 손을 벌리시고 그분의 가슴 안으로 우리를 끌어안으시며 환영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는 자녀들이고 하나님께 용납받는 자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오른쪽 어깨(한국어 성경에는 오른쪽 뒷다리로 번역이 되었으나 실상은 오른쪽 어깨가 더 올바른 번역임)를 떼어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이후에는 우리의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서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사 9:6). 이 말씀처럼 우리의 생애는 예수님의 어깨 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 제물의 양쪽 뺨을 도려내어 드리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생애를 바치고 헌신한 후에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에 성경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화목제는 참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의 경험을 너무나 잘 요약하여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경륜을 이렇게 자세하고도 실제적인 실물 교훈을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14. 속죄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를 드릴 때 성소 뜰 안에서 죄를 정결케 하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피와 불과 물이었습니다. 피는 죄를 그 마음과 동기부터 씻어 주고, 불은 그 죄를 태워 없애며, 물은 그 죄의 생애와 행동을 씻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레위기는 생명이 그 피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피는 우리의 혈관을 따라 돌면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는 반면에, 온몸에 쌓여 있는 불순물을 다 받아서 걸러내는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과 복음의 능력이 임할 때는 우리의 죄가 나가고 정결케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소 뜰에서 행해지는 제사 중에서 희생 제물의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 제사장에 의하여 뿌려지는 것은 속죄제 뿐입니다. 피가 성소의 휘장 앞에 뿌려지는 것은 우리가 고백한 죄가 영적으로 하늘 성소의 기록책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가 하늘 성소로 옮겨지지 아니하면 중보 기도를 통한 죄의 용서가 있을 수가 없으며, 우리가 용서받는다고 해도 우리 죄의 기록은 우리가 죄의 도말을 받을 때까지 하늘 성소에 남아 있게 되어 대속죄일에 죄의 도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속죄제는 죄지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로서 가장 중요한 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죄 없는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실물 교훈을 통해 죄인에게 실감시키는 제사입니다. 피는 그 생애에 따라서 가치가 생기는 법입니다. 죄를 지은 우리의 피는 죄를 속하는 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죄 없는 피가 우리 죄를 대신해 흘려짐으로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15. 질서와 공의를 중시하는 하나님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시 37:20)

속죄 제물은 가죽 안과 내장에 붙어 있는 기름만 잘라 내어 번제단에서 태우고 그 나머지는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 태우는데, 기름은 악인과 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를 태워버리지 아니한 악인들은 새 예루살렘의 진 밖에서 유황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속죄 제물 중 제사장이나 혹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하였을 때에는 수송아지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것은 제물 가운데서 가장 값비싼 것이었고 지도자의 죄는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온 백성이 다 함께 지은 죄와 같이 중하게 취급하신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이 배도하면 온 백성이 따라서 배도하게 되며 함께 멸망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엄숙한지 항상 자신을 돌아다봐야 하는데, 교인들에게 잘못된 복음을 가르쳐 놓으면 온 교회가 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도자가 진정한 의미의 속죄제를 경험해야 백성들에게 올바른 속죄의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의 족장 중 하나가 범죄하였으면 그다음으로 비싼 숫염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고 평민이 범죄하였을 때에는 암염소나 양을, 아니면 형편에 따라서 비둘기를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같은 죄라도 책임 한계에 따라 다르게 취급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맡은 직분과 의무의 중요성에 비례하여 그들의 죄의 심각성도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속죄제는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유일한 제사인데, 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서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나서 중보 기도를 드림으로 죄인의 죄가 용서받는 제사는 이 속죄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에다 피해의 보상을 더 해 준 제사이고, 번제나 화목제는 그 자체가 죄를 속하는 제사일 수는 없으며, 속죄제를 드린 후에 같이 드리는 헌신과 감사의 제사들입니다.

 

16. 속죄제를 통한 믿음과 회개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차츰 신뢰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며 같은 의미로 회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너무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목격하며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이해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자기의 악함을 자복하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속죄제는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되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셔야 하는지를 보여주심으로 인간이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게 하시는,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키시기 위해 고안된 제사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 한 것같이 할 것이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해 속죄한 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 밖으로 가져다가 첫 번 수송아지를 사름같이 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레 4:13~21)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속죄제를 통하여 우리가 죄를 포기하고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17. 오! 그리스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속죄 제사를 지낼 때,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나 온 회중이 다 함께 범죄했을 때 그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 앞에 피를 뿌리고 제사장이 중보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평민이나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그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죄가 성소 안으로 옮겨질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제사장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해 기도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면 그 죄가 양에게 전가되는 것이고, 그 죄인이 양을 죽인 후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곧 그 핏속에 죄인이 고백한 죄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개인이 속죄제를 드릴 때는 피가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번제단 주위에 뿌려지고 나머지는 단 밑에 붓게 되어 있었습니다. 대신 제사장이 양의 고기를 조금 떼어서 먹음으로 죄인의 죄가 제사장의 몸으로 전가되어 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죄인의 죄와 자신의 죄를 위해 기도할 때 죄인 역시 성소 밖에서 간절한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죄제는 어린양이 표상하는 메시아가 전혀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그 죽으심과 상하심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고 나음을 받게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죄인 스스로 양을 죽일 때 죄 없는 양(메시아)이 자기 대신 무참하게 죽어야만 자신의 죄가 사하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게 되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기쁘게 순종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고안하신 이유이며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8. 그리스도의 죽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구속의 경륜 중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는가?’ 하는 문제는 특히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가 지은 죄 그 자체가 되셔서, 죄인이 받아야 하는 심판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짐에 따라 하늘 아버지에게서 분리됨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느끼셨던 말 할 수 없는 번민에 대하여 우리는 희미한 개념 밖에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타락한 인간을 위해 죄가 되셨고 이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거두어 짐을 느낄 때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비통한 탄원을 하셨습니다.
영원히 신비로 남게 될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예수님께서 하늘의 존귀와 위엄을 버리고 죄 된 세상에 오셔서 그분이 구하고자 오신 자들에게 무시와 멸시와 배척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렇게 신속하게 끊어진 이유는 육체적 고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무겁게 짓누르는 인류가 저지른 죄악의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신 죄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임재가 그분을 떠나고 절망이 그분을 짓눌렀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고통의 부르짖음이 나올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의혹이 운명 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했고, 그분은 자신의 무덤의 입구 너머를 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즉 그분이 정복자로 무덤을 나설 것과 아버지께서 그분의 희생을 받으실 것이라는 밝은 희망이 그분에게 제시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서 세상의 죄를 절실히 느끼셨습니다. 죄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불쾌하심과 그에 따른 형벌, 즉 죽음이 이 놀라운 흑암을 통해 인식할 수 있었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19. 그리스도의 죽음(2)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하여 제한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형벌 중 작은 부분만을 당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고난의 전 과정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가납하심의 증거를 가지셨으며 부활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장래 영광의 계속적인 증거를 가지셨다고 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과 직면하고 계셨을 때, 죄가 하늘 아버지의 목전에 너무 가증하므로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혹시 자신을 영원히 버리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뇌로 뼛속 깊은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죄인들에게 내려질 때 죄인들이 느낄 그 절망을 느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담당하기로 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지금까지 주셨던 가납하심과 인정하심에 대한 확신을 이제 제거하셨음으로, 믿음과 희망이 그리스도의 숨이 끊어지는 고통 가운데서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때 세상의 구세주는 지금까지 그분을 강건하게 하여 온 여러 가지 증거, 즉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수고를 가납하셨고 그분의 사역을 기뻐하셨다는 과거의 기억을 의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고통 가운데 그분의 고귀한 생애를 마치시면서, 오로지 믿음만으로 그분이 항상 즐겨 순종하던 하나님을 의뢰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짓누르는 흑암에 둘러싸여 좌우편 어디에도 명확하고 밝은 희망의 빛줄기로 격려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동정하는 천연계에까지 느껴진 그 두려운 흑암 가운데서 구주께서는 그 신비의 쓴잔을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습니다. 장래에 대한 희망과 승리의 확신도 없이 주님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20. 그리스도의 죽음(3)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 40: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죄를 버리고 다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제의 경험인데, 만일 우리가 아직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직도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2천 년 전에 자기가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죄의식들을 대신 지시고 느끼심으로 그분의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우리의 죄가 그분을 찔러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천천히 신음하시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크게 소리 지르시고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로마병이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예수님께서 심장이 터져서 돌아가셨다는 과학적인 증거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자비와 은혜의 시간이 지난 마지막 심판 때에 죄인이 느끼게 될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분이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인류의 대리자이며 죄가 되셨던 그분에게 아버지의 분노를 가져오게 한 죄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 우리가 계속하여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으로 계속 죽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그치고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거기에 감동되어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21. 성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히 10:16)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돌비를 주실 때 번개와 우레와 지진과 흑암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실 때 십자가 주위에 번개와 우레와 지진과 흑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새 언약을 세우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옛 언약의 마음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현시하심으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그분의 율법을 기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에 너무나 감동되어 우리의 마음이 녹을 때에 새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는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죄제의 이해에서 볼 때 죄는 성소 뜰에서 끝나는 것이고, 이곳에서 모든 죄는 고백 되고 버려져서 의롭게 되는 상태를 가리켜 칭의(稱義)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소 뜰에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사람은 드디어 믿음으로 제사장을 따라 성소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동행하는 성화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성소 안에는 죄를 속하는 제사가 없으므로 성화의 과정에서 연약하여 실수하거나 범죄한 사람들은 성막 밖에서부터 다시 양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린 후 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해 죽고 다시 살아나는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아무리 번제단에서 칭의의 경험과 더불어 성소로 들어가 성화의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가 있기 때문에 성화의 경험은 매일의 경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소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소홀하기 때문에 거짓 구원에 대한 오해가 편만하게 퍼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2. 참 이스라엘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갈 6:15, 16)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사람 마음의 태도에 달린 것이지 그 조건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스라엘이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이 언약을 그들의 생애에 이루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을 성경은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언약을 이루는 교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의미는 참으로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인데, 우리가 진정으로 개심하게 될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심령이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지만,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마음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도 일치됩니다. 이 강력한 변화가 죄인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거룩함으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낡은 방법들, 유전적 기질들, 이전의 습관들은 버려야 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동기와 취미와 성향을 갖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애가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진정한 개심은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유전적이거나 습관화된 성향들을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진정한 개심의 경험은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속죄제의 경험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의 새 언약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6)

하나님의 복음은 이론으로 전달되고 가르쳐지지만, 그 복음을 전달하는 자나 전달받는 자나 그 복음대로 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타락한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즐기는 새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창조의 신비입니다.
죄인들을 이러한 영적인 재창조의 경험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고안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없으며,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매일 주님의 은혜로 유지해 나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나의 구원을 위해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그분의 율법을 기록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대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됩니다. 심판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하늘을 그리워해서만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다시는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 새 마음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 제사를 통해 갈보리의 십자가를 볼 수 있게 되고 거기서 우리는 새 언약의 경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경험하며 매일 상기하지 아니하면 다시 똑같은 죄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성화의 삶을 등한시 할 때, 그 유혹의 힘이 다시 기세를 회복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매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4. 성령의 선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힘이며 능력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사랑의 나무를 생기게 하거나 자라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때만 살며 자라납니다. 또한 사랑은 행동 없이는 살지 못하며, 모든 행동은 사랑을 증가시키며 강화하고 확장합니다. 사랑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큰 악을 정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강하고 힘이 있습니다. 사랑의 영향력은 녹이고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구세주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불길은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독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게 하며, 또 우리를 순결하고, 고상하고, 세련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믿을 때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매일 믿는 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심으로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좇아 살고 싶은 간절하고 자원하는 소망을 갖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복음의 능력을 통해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즉 믿음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25. 속건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 24)

속건제와 속죄제는 거의 같은 제사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속건제는 성물이나 남의 물건을 침해하거나 손해를 입혔을 때 드리는 제사로써 용서를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림은 물론이고 그 침해한 물건을 도로 갚아 주어야 하며 거기에 오분의 일의 값을 더 얹어서 주게 되어 있습니다. 성소의 거룩한 성물을 범하였거나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빚진 사람에게서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받아내는 행위)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어버린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의 일 중의 하나라도 범하여 범죄하면 그 물건을 변상하고 오분의 일을 더하여 주어야 하며, 또 희생 제물을 가져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속건제입니다(레 5:14~19; 6:1~7 참조). 이 속건제에서 우리는 알고 범한 죄를 위한 용서의 규정에 대하여 희미한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원래 성소의 제사는 모르고 죄를 지은 자가 그 죄에 대하여 깨닫게 될 때 드릴 수 있도록 제정된 것입니다.
반면에 알고 범죄했을 경우에 대한 용서의 절차는 먼저 죄인은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하며(민 5:6, 7), 그다음에는 그 당사자(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잘못을 고하고 보상해야 하며(민 5:7) 그리고 하나님께 속건제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레 6:6). 그 후에 그는 용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레 6:6, 7).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을 때 자신이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인데, 이는 그가 거짓말하는 죄와 게다가 이웃에게 속한 물건을 내놓지 않으므로 도적질을 하게 되는 이중 범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의적인 죄의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경우에 맞게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마련하신 제사 제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6. 물두멍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성소 뜰에 있는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전 봉사를 시작할 때와 끝마칠 때, 그리고 희생 제물을 드린 후에 특히 성소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손과 발을 씻게 되어 있던 커다란 물 담는 기구입니다. 이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놋은 특별히 정결한 여인들의 거울들로 만들어졌습니다(출 30:18; 38:8 참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정결한 여인의 태에서 출생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아울러 우리의 성품과 마음을 비춰 주는 자유의 율법을 물두멍이 상징하고 있습니다(약 1:23~25, 고후 3:17, 18).
물두멍에서 씻는 경험은, 거울을 보고 죄를 느낀 자가 그 안에 담긴 물 즉 물이 상징하는 성령과 말씀의 역사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는 경험을 영적으로 상징합니다. 피 흘림은 한 번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즉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매일 씻고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죄를 씻는 경험이 생기자 하늘에서 성령의 은사가 기다리는 제자들 위에 풍성하게 내린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을 거쳐 성소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물두멍에서 알고 있는 모든 죄로부터 마음을 온전하게 씻는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오순절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있었고 또한 죄를 씻는 완전한 회개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성소 봉사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십자가와 오순절의 성령의 은혜가 선제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라 성화의 경험을 하기 위해 믿음으로 하늘 성소로 따라 들어가는 우리에게도 십자가 밑에서 우리 자신이 죽고 죄를 회개하며 더 나아가서 성령의 은혜로 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27. 정결의식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성소 뜰에서 우리의 죄를 없애는 세 가지 방법은 희생 제물의 피와 번제단 위의 불과 물두멍 안에 들어 있는 물입니다. 피는 우리의 몸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줍니다. 그러나 피가 우리의 모든 세포마다 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는 동시에 돌아올 때는 거기에 있는 모든 찌끼와 불순물을 빼내오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불은 죄를 태우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죄의 소욕을 태우는 정결의 역할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물은 우리 몸의 겉을 씻는 것처럼, 우리의 행실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고치고 씻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를 구원 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고 말했습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번제단의 네 옆면에 있었던 나중에 갖다 붙이게 된 고기비늘 같은 모양의 놋 판들에 관한 일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모세의 사촌 형제였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그에 합세한 250명의 족장이 반역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땅이 꺼지게 하여 심판하신 후에 그들이 가지고 봉사하는 일에 사용했었던 놋 향로들을 가지고 오게 하여 쳐서 판을 만들어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반역의 정신을 물두멍에 와서 성령의 녹이시는 은혜와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진리의 가르침으로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 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능력입니다.

 

28. 성화의 경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성소 뜰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바라보며 거듭나고 죄를 깨끗하게 씻은 바 된 죄인은 성소의 첫째 칸 안으로 들어가서 거듭나고 깨끗하게 된 양심을 계속하여 성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구원이란 한 번 받았다고 영원히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울러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난 특별한 변화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매일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주님 안에서 거듭날 필요가 있으며, 매일 구원의 경험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받게 된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의지를 항상 주님께 바쳐야 하며,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과 노력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의지를 굴복시키는 노력 없이 아무도 구원을 지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조건은 성소 뜰에서 칭의를 통해 갖추어지기는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소를 통과하여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종결지어야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참된 복음이 바로 성소 제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은혜가 마련된 것이요, 구원이 준비된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 편에서는 믿는 일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하시면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9. 우리의 구원을 이루자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 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거나 구원을 인 치실 때 이 땅 위에 사는 당사자의 협력과 헌신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내부적인 시험과 이 세상에서의 유혹에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무리 철저히 개심했을지라도 이미 구원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범죄해도 안전하다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소망과 믿음을 가지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다는 것을 알 때라도 우리는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견디는 사람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만족한 상태에서 장성한 자가 되기 위해 향상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런 잘못된 구원관을 품을 때 경계와 기도 그리고 더욱 높은 표준으로 전진하려는 열렬한 노력을 위한 경건한 동기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문들을 통해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기까지는 자기의 영생을 장담할 만큼 거룩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가서 제일 먼저 영원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란 칭의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이전에 그 심령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십니다.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보유하려면 계속 순종해야 하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활동적이며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해 그 영혼을 순결하게 해야만 합니다.

 

30.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8)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이 마음의 모든 육신적인 정욕과 탐욕 등 경건치 못한 충동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 자체가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함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할지라도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내적으로 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즐거움과 평안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불안과 죄책감이 영혼 속에서 숨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성화가 수반되지 않는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칭의에서 구원의 자격은 갖추었기 때문에 성화란 그저 좋은 열매 이상의 의미는 없고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라고 하는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거짓 안전을 느끼게 하는 사탄의 기만인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성화)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라고 성화를 구원의 일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소 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취급하시고,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청사진입니다. 죄인이 성소 뜰에서 칭의의 경험을 했을 때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맞지만, 성소 첫째 칸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금촛대(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상징함)와 떡상(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과 분향단(제사장의 중보의 기도를 상징함)의 경험을 통해 칭의의 경험을 유지할 때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성소 뜰은 칭의를 가르쳐 주고 성소의 첫째 칸은 성화의 과정과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을 가르쳐 줍니다.

 

31. 성소의 기구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죄인이 성소 뜰에서 속죄제를 드린 후에 죄인은 믿음으로 제사장을 따라 성소 첫째 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촛대가 있고 오른쪽에는 떡상이 있으며 정면 휘장 앞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을 유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의 계시인데, 사실 이 방법밖에는 우리의 구원을 유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소 뜰에 있는 기구인 번제단과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어졌고, 성소 안의 기구들인 촛대, 떡상, 분향단 그리고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는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순금을 만들 때에도 놋과 마찬가지로 망치로 쳐서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곧게 펴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쳐야 하는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금은 믿음을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때문에 오는 시련들을 통해 잘 다져진 믿음을 가리키며, 불순물이 없는 순전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생애를 상징하기 위해 기구들을 순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반면에 놋은 동과 주석의 합금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주석을 죄로 상징했습니다.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사 1:25). 이 말씀에서 ‘혼잡물’은 영어로 ‘Tin’이며 한국어로 직역하면 ‘주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과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게 하심으로 죄인들이 가지고 온 죄, 즉 혼잡물을 성소 뜰로 가지고 들어와 용서받고 씻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려고 성소 뜰의 기구들을 혼합 금속인 놋으로 만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물이 없이 깨끗해진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화의 과정을 상징하기 위해서는 순금으로 성소 안의 기구들을 만들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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