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아! 거기에서 나오라! [신앙기사 3부]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계 18:4,5).

각 시대마다 사람들에게 빛과 특권, 즉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주어졌고, 여러 해 동안 자비로 간청했으나 멸시와 거절을 당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딛 2:11)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인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를 악용해 왔고, 그동안 호소했던 경고를 거절했으므로 마침내 심판의 날이 도래했다. 마지막 호소인 “내 백성아, 나오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눈물의 탄원을 거절하지 않고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바벨론에서 나오라

 

바벨론은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영적 간음에 끌어들였고, 부와 사치로 자신의 세력에 잡아 두었다. 예수님은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라고 호소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바벨론에서 나오라”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바벨론에 있는 것인지, 그래서 나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는 왕들과 음행했다. 교회와 정부의 이 같은 결탁은 수많은 순교자를 유발했다. 우리는 지난 교회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안다. 이 역사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서는 마지막 때에 용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더불어 싸운다고 했다. 아마겟돈 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싸움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이란의 중동전쟁도 아니며, 진리와 거짓의 싸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어린양을 진실히 따르는 무리와 용의 정신에 지배된 무리와의 싸움이다.
계시록 17장의 음녀는 그 이마에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의 어미”라 기록돼 있다(17:5). 우리는 “바벨탑”이라 할 때의 그 바벨인 고대 제국의 바벨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바벨이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하나님의 문”이다. 그러나 바벨탑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인간이 고안한 종교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최초의 바벨탑을 쌓던 어느 날, 일꾼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언어의 혼잡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리하여 “바벨”이라는 단어는 “혼잡”이란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음녀 바벨론은 자신을 하나님의 문, 아니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문으로 주장하고 있다. 라틴어로, “엑스트라 에클레시암 논 살루스 에스트”(Extra ecclsiam non salus est), 즉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구원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라는 주장이 수 세기에 걸쳐 로마 천주교회의 공식 교리로 신봉되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이 사상은 박해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되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린 끔찍한 참상은 약 600만을 학살한 나치도 아니고, 약 30만 명 이상을 학살한 아프리카의 검은 히틀러 ‘이디 아민’도 아니고, 교황의 천주교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최소 5천만에서 1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 당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교회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카톨릭의 교리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는 이 사상이 종교재판의 근거가 된 것이다. 13세기 카톨릭의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단자들은 처형해야 한다고 지지했다.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도 “배교자들을 신체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권리가 교회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단자들을 고문하고 화형에 처할 교회의 “권리”는 사실상 연옥과 지옥이라는 비성경적 교리의 끔찍스러운 결과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문을 자행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고문자라고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는, 교회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종교 재판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와 교회의 불륜 관계 속에서 종교 재판소가 탄생한 것이다. 서로의 뒤를 봐주고, 서로 유익이 되는 것을 취한 결과 살인과 만행이 만연하게 되었다.

 

 

음녀들의 어미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 바벨은 하나님의 문이 아니라 혼돈의 장소다. 바벨론은 진리와 거짓을 혼합시켜 사람들에게 대혼란을 야기시켰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면서도 교회의 결정이 성경과 다를 때는 교회의 결정을 성경보다 큰 권위로 존중한다.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면서도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삭제하고, 넷째 계명을 변경했다. 이 종교 세력에 대해 계시록 17장은 “큰 바벨론, 음녀들의 어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음녀가 있고, 음녀들의 어미가 있다. 카톨릭 교회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모든 교회의 어미라고 칭하고 있다. 음녀의 딸이 처음부터 음녀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바벨론이요, 음녀요, 적그리스도”였던 교회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나와서 개신교회로서 갓난아기의 발걸음을 시작했다. 그런데 매우 슬픈 얘기지만 이 딸들도 결국 음녀의 전통을 이어받아 어느 날 바벨론이 되고 말았다. 예언대로 카톨릭은 음녀들의 어미가 되고 말았다.
카톨릭 교회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훌륭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가난한 나라에 가서 학교와 병원도 세워주고, 과부와 고아와 노숙자들을 지원하는 많은 단체도 가지고 있고, 난민과 소외된 이들을 얼마나 잘 보살펴주는가? 또한, 어떤 면들에서는 성경의 지식을 여러 이단과 이교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해오는 일에서도 일익을 담당했다. 그들의 활약과 공로를 인정한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인류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변경과 잘못된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조직은 하나님의 율법을 변경했고,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는 심판과 중보의 사역 대신 다른 교리를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교리 수호를 위해 신실한 성도들을 학살했다. 과거의 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는가? 그랬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과거에 그랬고, 현재도 그러며, 미래에는 “짐승의 표”로 온 세상 성도들의 피에 취하게 될 것이다.
음녀의 딸들은 처음에는 음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뛰쳐나왔다. 루터는 하나님의 진리인 3대 강령을 재발견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오직 성경만이 궁극적인 권위”이며, 믿는 자는 모두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이 그 3대 강령이다. 칼빈은 사제나 성자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시는 카톨릭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었다. 웨슬리는 구원이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대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예정설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제한 없이 부여되는 것이라는 자유 은혜의 진리를 재발견했다. 개신교의 발걸음을 떼었던 이들은,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의 진리의 빛 속에서 환하게 빛났다. 오늘날 우리는 이 개혁자들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일이지만 요한계시록 13장의 참상은, 음녀와 그 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하게” 할 것이다(계 13:16,17). 카톨릭과 개신교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핍박하게 될 것인데, 그 일은 먼 미래에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개신교도 카톨릭만큼이나 편협하기 그지없었다. 그들도 세속 정부의 힘을 빌려 같은 개신교인들을 화형 시키는 등, 어미가 했던 가공할 정도의 잔혹한 행위들을 반복했다. 개신교가 그렇게 잔인한 행위들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신교의 신학 내에도 하나님께서 이리 태우고, 저리 태우고, 뒤집어 태우면서 영원히 지글지글 고문을 가한다는 이교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고, 아울러 여러 세기에 걸쳐 세속 권력과의 불결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천주교와 개신교는 하나가 되었고, 온 세상의 정치적 지도자들까지 교황의 권세에 굴복하고 있다. 계시록에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른다는 예언이 성취되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개신교에 들어온 면죄부

 

오늘날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회에 하나님을 섬기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정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벨론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가 십계명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목사나 신부들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복음을 무시하거나 퇴색시키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도 면죄부를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마치 면죄부처럼 “그저 믿기만 해라. 교회에 잘 나와라.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해라. 그러면 만사형통이다.” 이것이 면죄부와 무엇이 다른가!
이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배도한 교단에 소속된 주님의 신실한 백성들을 일깨워 그들이 처해있는 심각한 위험, 곧 바벨론의 마지막 범죄에 가담하고 있는 위험과 바벨론이 당할 재앙의 고통을 알려주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계신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결정을 유보한 사람들이 설 수 있는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두 무리만이 존재한다. 한 무리는 하나님의 인을 받은 무리요, 한 무리는 짐승의 표를 받은 무리이다. 한 무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무리는 그리스도를 피해 숨는 사람들이다. 계시록 14장에는 두 추수가 나오는데, 한 무리는 황금 들녘에 알곡으로 익은 곡식이요, 한 무리는 진노의 포도주 틀에 밟힐 포도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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