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Yahweh) 여호와—“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 [신앙기사 3부]

제3부 야훼(Yahweh) 여호와—“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 (이상적 재판장)

“나는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이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15).

 

구약에 가장 많이 사용된 하나님의 성호는 야훼이다. 이 이름은 흔히 “여호와(Jehovah)”로 표기되었다. 이 칭호는 히브리 성경에 무려 5,500번이나 나타난다. KJV의 번역자들은 이 말을 GOD (창 6:5) 또는 LORD (창 2:4)로 번역하고 모두 대문자로 표기했다. 그래서 이것은 God (창 1:1)으로 표기된 엘로힘, 엘 또는 엘로아, 그리고 Lord (창 15:2, 8; 18:3)으로 표기된 아도나이와 구분이 된다. 후자의 경우는 첫 글자만 대문자이고 나머지는 소문자를 쓰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참고] 여호와. יְהוָה 예호와, 야웨, 야훼 Yhwh
‘나는 스스로 있는 자’란 말과 같은 뜻을 지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다. 즉 이 이름은 ‘존재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하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로서 하나님의 자존성과 영원 불변성을 강조한 이름이다(출3:14).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명칭은 본래, ‘여호와’의 히브리형 ‘야훼’는 원래 자음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히브리어 4개 자음 문자 ‘요드, 헤, 와우, 헤 곧 ‘YHWH’로 구성되어 있다. 이 네 문자는 하나님의 인격적 이름으로 창 2:4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구약성경을 일관해서 총 6,000여 회 나타난다. 발음하기에는 곤란하나 통칭 ‘야훼’, ‘야웨’ 등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경외심에서 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아도나이’(나의 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했다. 따라서 성경을 옮겨 기록하거나 낭독하는 일을 맡고 있던 서기관들은 이 단어가 나오게 되면 ‘야훼’ 대신 ‘아도나이’라 발음했다. 따라서 결국 ‘여호와’(Yehowah)라는 명칭은 ‘야훼’의 히브리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이 합쳐져 구성되었다. 우리말 ‘여호와’는 헬라어 및 라틴어를 거쳐 정착된 영어 ’Jehovah’의 음역이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한글 번역본의 개역에서 “여호와”, 공동 번역에서 “야훼”, 영역본에 Jehovah라고 음역하고 있지만 그 정확한 발음을 알 수가 없다. 중세 어느 때에 그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히브리 4문자에 대한 정확한 발음과 기원 및 의미는 상당한 논의의 주제가 되어왔다.

야훼(Yahweh)란 이름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다시 소개될 때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엘로힘이란 이름과 함께 나오기 때문에 KJV은 이를 “LORD God”(창 2:4)로 표기했다. 언제든지 성경에 하나님의 새 이름이 처음 나올 때는 반드시 우리가 이미 친숙히 아는 다른 이름과 함께 소개된다. 그래야 우리가 새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이름은 물론 유일하신 신격의 다른 어떤 측면을 나타낸다. 이렇게 소개된 새 이름은 나중에 단독으로 사용되면서 그것이 가진 독특한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성경을 연구하다가 창조의 첫 기사의 첫 주말에 이르면(창 1:1~2:3) “만들어진 것들”(롬 1:20)을 통해 엘로힘의 특성을 상당히 많이 깨닫게 된다. 성령의 인도로 우리가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창세기 2장에서 접할 때, 성령께서는 야훼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다시 소개하신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보다 깊은 차원의 지식을 얻는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성경은 엘로힘과 야훼, 이 두 이름을 나란히 놓음으로써(창 2:4) 두 칭호가 한 분의 것임을 알게 한다.

 

 

1. 야훼의 뜻

 

야훼의 의미와 어원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하신 말씀에서 발견된다. 모세에게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실 때, 엘로힘은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이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15). 그런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존재 동사의 형태 때문에 이 이름은 “나는 곧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되는 자” 또는 심지어 “나는 곧 내가 만드는 대로 되도록 만드는 자”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를 이해하면서 이런 모든 의미의 혼합적 개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야훼란 이름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절대적 존재임을 말할 뿐 아니라 그는 자기의 원하는 대로 자기의 백성이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정해진 이상에 도달하게 만드시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계시한다. 즉 야훼는 절대적 촉진자(促進者)의 이름이다. 히브리어의 “나 존재한다(I am)”는 몇 곳에서 “나…되리라(I will be)”로 번역되었다(창 26:3; 31:3; 출 3:12). 야훼란 이름은 “항상 계신 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 만물을 존재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신 이를 주목하게 한다. 야훼란 이름은 인격적이고 영속적인 하나님, 그러므로 예측이 가능한, 자기 의지를 소유하신, 변치 않고 영원하신 분임을 암시한다. 그의 존재는 질적인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므로 그분 외에는 아무도 “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언명할 자가 없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미덕과 특성의 궁극적 완전이신 야훼는 그러므로 이상적 존재이다. 그가 미칠 수 없거나 결여한 미덕은 없고, 그분 외에는 선(善)이 있을 수 없다. 그의 존재, 그의 의지는 지고(至高)하다.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그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성품을 충만히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신다(벧후 1:4).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거룩하게 될지니라. 이는 내가 거룩함이니라”(레 11:44)는 말씀으로 그는 우리에게 목표를 제시하시며 격려하시고 도전하신다.

 

 

2. 야훼는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고 선언하셨을 때 그는 자기의 성품을 온 인류가 본받아야 할 이상(理想)으로 정하신 것이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실 때 그는 자신의 “형상”을 모델로 삼으셨으므로 인간 남녀들은 그를 전형(典型)으로 삼고 날마다 자라나야 했다. 그러므로 창조자와 본(本)이신 그는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할지니라. 이는 나, 야훼 너희 엘로힘은 거룩함이니라”(레 19:2; 11:44)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모델이신 당신의 형상을 벗어난 인간의 모든 이탈 행위에 대한 심판은 그분만이 하실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야훼의 사자”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조사하러 가는 길에 두 동행자와 함께 그의 장막에 들렀을 때 아브라함은 그가 바로 야훼이심을 알아보고 그를 “온 땅의 심판자”(창 18:25)란 호칭으로 불렀다. 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최초의 사례이다. 야훼는 구속의 역사에서 언제 어디에 나타나시든지 그분은 건설적 비판자 또는 최후의 심판자로서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의 행위를 살피고 시험하시며 표준을 정하시되 모든 것을 당신의 온전하신 성품을 토대로 해서 결정하신다.
유대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 랍비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모든 이름은 그가 이루신 행적의 메아리인 동시에 그 행위의 어떤 국면을 주목하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달리는 헤아릴 수 없는 신격의 특성과 본질, 곧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서 발견된다(롬 1:20)고 간파한 바울의 말은 이 예리한 통찰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야훼”는 예외적이다. 이 이름은 그의 전 존재와 그의 모든 충만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자신을 위대하신 “나”로 소개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가 어떤 분인지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야훼이다”(창 15:7; 출 6:2, 6, 8), “나는 엘로힘이다”(창 46:3)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성경은 그 밖에도 그분이 누구인지, 그분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면 야훼는 자기를 무엇이며 누구라고 말씀하셨는가?
“나는…” [아브라함의] 방패이다(창 15:1), 전능자이다(창 17:1; 35:11), 조상의 하나님이다(창 28:13; 31:13; 출 3:6),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출 6:7, 외 30번). 치유자(출 15:26),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 신 5:9), 은혜를 베푸는 자(출 33:16), 거룩한 자(레 11:44; 20:26),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자(레 11:45), 성결케 하는 자(레 20:8; 21:8; 22:32), 분리하는 자(레 20:24), 구원(시 35:3), 샤론의 장미, 골짜기의 백합화(애 2:1), 죄를 도말하는 자(사 43:25), 처음과 나중(사 41:4; 48:12), 주와 구속자(사 60:16), 선하신 주(렘 31:12) 등, 그 밖에도 많은 이름으로 그는 자기를 우리에게 알리신다.
I AM(나는 존재한다, 나다)은 영원한 임재를 뜻하며,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이다. 그에게는 아득한 옛날의 역사적 사건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먼 훗날의 일들이 현실처럼 생생하다. 우리는 하루 앞을 못 보나, 만일 본다면 우리의 영원한 복리에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신 “나”(I AM)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연습할 기회를 주신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실 때 두렵고 위엄 있는 심판자요, 법을 주신 이일 뿐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동정하는 수호자로 자기를 나타내셨다.”

 

 

3. 야훼의 뜻을 드러낸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와 온 우주로 하여금 그들의 이해력이 미치는 한도까지, 신격의 본질을 어느 때보다도 인격적으로 분명하고 충만하게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히 1:1~3).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특성과 본질 중 어느 것도 충만히 소유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고 바울은 강조했다(빌 2:6). 그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그러나 그는 인류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자기를 “비우사”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그들 대신 죽는 길을 택하셨다. 그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신격의 대권(大權)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자의로 아버지 앞에서 포기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환경 속에 들어와, 죄의 역사가 4,000년이나 계속된 후의 타락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시면서 무죄하신 그분은 사람이 당하는 모든 시험에 부쳐지신 바 되었다. 그런데도 나사렛 예수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에 거하”셨음을 사도 바울은 역설했다(골 2:9).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 되어 동료 인간들과 천사들과 또 온 우주 앞에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인류에게 나누어 주신 신격의 모든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 이전에는 그처럼 찬란하게 그것이 현실로 제시된 일이 없었다. 그가 오신 것은 본향을 멀리 떠나 유산을 모두 탕진해 버린 이기적인 탕자들에게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처럼 그의 인성과 행위를 통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수천 가닥의 빛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그리스도는 크신 “나”(I AM)를 몇 차례 신중히 설명하셨다. 그분은 자신을 “나”로 소개한 야훼이시다. 이 확언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최초로 들려왔다. 다음에 보는 모든 주장과 같이 그는 계속 “나”는 누구인지를 말씀하셨다: 우물가의 연인에게 “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설명하셨고(요 4:25, 26), 세상을 향해 “나”는 그 빛이라 하셨으며(요 8:22; 9:5), 자신 없이 쟁투에 임한 자들에게 “나”는 실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평화의 왕이라 하셨다(눅 4:43; 창 49:10; 요 9:10).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는 언제나 위대한 “나”였다(요 13:19). 그를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온 대제사장과 하속들에게 그들이 찾는 자가 “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는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때 번뜩인 광채가 너무도 영광스러워 그들은 그 앞에 엎드려 죽은 사람들 같이 되었었다(요 18:5, 6, 8—“내가 그니라”고 번역되었으나 실은 “그니라”는 원문에 없는 것을 역자들이 첨가한 말이다). 야훼는 굶주리는 세상에 생명의 떡이 되시며(요 6:25, 41, 48, 51), 앞 못 보고 어둠 속을 더듬는 소경에게 영원한 빛이 되신다(요 8:12; 12:46). 들어오려고 힘쓰는 제외된 자들에게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요 10:7, 9), 방황하는 양들에게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 14). 잃어버린 바 된 세상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요 3:16; 10:30), 무덤에 갇힌 사탄의 포로들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방황하는 순례자들에게 그는 길이시며, 철학자에게는 진리요(요 14:6), 의로운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는 가지들에는 참된 포도나무이시며(요 15:1, 5), 그의 백성에게는 왕이요(요 18:37), 그의 교회에는 구속자와 주이시다(행 9:5; 22:8,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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