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힘(‘Elohim)—능하신 언약 체결자 [신앙기사 2부]

제2부 엘로힘(‘Elohim)능하신 언약 체결자 (지킬 약속을 가지신 하나님)

“태초에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첫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엘로힘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 외에도 다른 “엘로힘이 있음을 인정하셨다. 그는 이 말을 각종 신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일반적 용어로 쓰신 것이다.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먼저 엘로힘은 당신께서 출애굽을 주도하셨음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4 계명에서는 자신을 창조자요 안식일을 제정한 분으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통 신이라고 말할 때 혼동이 없는 것처럼 엘로힘이란 말도 성경에서 어느 신을 말하는지 혼동이 없이 사용되고 있다. 문장의 전후 관계가 내용을 분명히 밝혀 주기 때문이다. 엘로힘(‘Elohim)이란 말은 “강하다”란 뜻을 가진 (‘el)과 언약이나 약속을

“맹세하다”의 뜻을 가진 올라(‘olah)에서 왔다. 그래서 (‘El)과 올라(‘olah)를 합쳐서 생각해 보면 엘로힘(‘Elohim)은 피조물들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힘 있는 언약 체결자”란 뜻이 된다.

 

 

1. 복수형엘로힘-단수형 동사 또는 형용사와 함께 쓰인다

 

엘로힘(‘Elohim)은 복수 명사이다. 어미에 –(-im)이 달렸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위엄(威嚴)의 복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엘로힘의 복수형은 신격의 복수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그 이름 속에 삼위일체 교리의 첫 단서가 숨어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복수 인칭 대명사들은 공동으로 확증을 제시한다. 구원의 드라마가 진행됨에 따라 성령께서는 신격을 구성한 삼위(三位)가 누구누구인지를 공개하고 그 각 위(位)가 담당한 기능을 알려주신다. 그러나 창세기를 시작하는 첫 문장의 주어가 엘로힘이란 복수임에도 불구하고 “창조하시니라”는 동사는 단수형이다(창 1:1). 히브리어 문법은 주어와 동사의 수적 일치를 요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엘로힘의 행적을 살펴보면 시종일관 단수형 동사를 쓰고 있다. 이 문법적 변칙으로서 영감의 손가락(참고 눅 11:20; 마 12:28, “손가락”은 “성령”을 뜻함)은 신의 본질을 지적하며, 엘로힘을 구성하는 분들이 하나로서 창조에 임하셨고 그 밖에 무엇을 하시든지 완전한 일치와 조화 속에 하심을 보여준다. 이 진리를 깨달은 솔로몬은 젊은이들에게 “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자들을 기억하라”(전 12:1-히브리 원문)고 권고했다.

이런 독특한 문장 구성의 특례는 존재 동사의 사용에도 나타난다. 이사야는 이렇게 썼다: “Your Makers [is] your Husbands.” 즉 “너를 지으신 자들은[복수] 네 남편들[복수]이시라[단수]”(사 54:5). 여기서 “너를 지으신 자들”은 창조주 엘로힘인 동시에 신랑—남편이 되신다(사 62:5). 이런 은유는 구약에도 있지만 신약에도 몇 군데 나온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으니”(엡 5:23). “보라, 신랑이로다!”(마 25:6). 복수 주어인 “너를 지으신 자들”을 단수 존재 동사로 받은 것은 엘로힘을 구성하는 세 분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을 주목하게 한다. 단수형 타동사 또는 단수형 자동사인 존재 동사의 사용은 엘로힘을 구성하는 세 분이 본성과 존재에 있어서 하나이며 동시에,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엘로힘(복수형) 여호와는 오직 하나[‘ea에하드]인 여호와시니”(신 6:4). 성경 연구에서 얻은 지식으로 우리는 그 삼위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심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구원의 경륜에서 단수형 형용사와 단수형 동사가 복수형 명사인 엘로힘과 어울려 사용된 것은 삼위께서는 한뜻으로 일하시며 세 분의 본성이 동일하심을 의미한다.

 

 

2. 예수는 신격을 완벽하게 나타내셨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성을 받으시고 그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 일은 삼위 중 어느 분도 하실 수 있는 일이었으나 각 위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기로 자원하셨다. “만일 아들 대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영광을 가리어 인생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의 행적과 역사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예수의 모든 행적에서, 또 그가 가르치신 모든 교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듣고 인식하게 된다. 보기나 듣기에나 그 효과에 있어서나 그것은 아버지의 음성과 몸짓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 10:30; 17:1).

“태초에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창조주가 불러내신 모든 만물의 수효와 복잡성을 생각할 때 그 만드신 만물 하나하나와 창조적 언약을 체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에 대하여 연구를 깊이 하면 할수록 더 복잡하고 오묘해진다. 피조물은 하나의 소우주로서 그 각 부분은 다른 부분들과 관련이 있고 그 소우주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창조된 소우주와 어떤 관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천연계라고 말하고 그 상호 관계는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변 천연계의 각 부분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바울은 여기서 달리는 알 수 없는 신격의 본질과 “영원한 능력”과 하나님을, 그가 만드신 피조물의 연구로 알게 됨을 설명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엘로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의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 “나는 빛이라”고 선포하셨다. 빛을 창조하신 엘로힘은 빛의 모든 특성과 힘이 당신 자신의 본성의 일면임을 나타내도록 고안하셨다. 빛이란 엘로힘이 만드신 물질 속에 갇혀 있는 에너지가 발산되는 최고의 형태이다. 빛 에너지는 핵이 폭발할 때 방출되어 모든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멀리 분산된다. 비록 모든 생물이 살려면 빛에 의존해야 하나 빛의 태우는 힘은 보호받지 않은 것들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엘로힘은 빛을 고안하실 때 빛과 무수한 생명체들과의 미묘한 관계를 섬세한 통제 아래 묶어 두셨다. 오늘날 발달한 광학(光學)은 거의 무한한 의미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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