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나이(‘Aḏonay)—주인과 남편 [신앙기사 4부]

제4부 아도나이(‘Aḏonay)—주인과 남편 (정혼한 남편)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도나이 엘로힘]”(시 38:15)

 

영어 성경 KJV 구약에는 간혹 하나님의 칭호를 “Lord”로, 즉 첫 글자 “L”만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 “-ord”는 소문자로 표기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아도나이(‘Aḏonay )를 옮긴 것이다.
아도나이란 말은 아돈(‘aḏon)이란 말에서 왔다. 아돈은 “굳게 다지다,” “결심하다,” 또는 “지배 아래 두다”의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왔다. 이 말은 또한 돈(don), 즉 “판단하다” 또는 그 연장으로 “지배하다”의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다. 아돈(‘aḏon)은 “주인”(왕상 16:24) 또는 “주(sir)”(창 43:20)로 번역된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주인”(master) 또는 “주”(lord)로 번역되었다. 사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는 “남편”을 의미했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아돈이 영어의 mister와 같이 쓰인다. 아돈은 “선생님” 할 때처럼 존칭어로 쓰인다(예: 창 43:20의 “sir”와 창 24:9의 “master”). 여호수아는 “온 땅의 주” 즉 아도나이란 어휘를 사람으로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께 적용했다(수 3:11, 13).

 

 

아도나이가 인류에게 소개되다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우리가 아도나이를 처음 만난 것은 아브람과 사래의 신앙 경험 초기의 일이다. 아브람은 하늘의 부름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이주했고, 롯을 구출한 후 멜기세덱을 만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에게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의 후손이 나서 광활한 대지를 유업으로 받고 그의 가문을 이을 것이며 그 후손이 크게 복을 받아 세상을 복되게 할 것을 약속하신다. 세상을 복되게 할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확약을 들은 아브람은 불평조로 볼멘소리를 한다: “아도나이(내 주) 야훼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나이다!”(창 15:2). 아도나이는 이때 처음 보인 후 자주 시편과 선지서에 나타난다. 그러나 모세 오경(五經)에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야훼라는 새 이름을 소개할 때 영감은 그 이름을 이미 알려진 엘로힘이란 이름과 함께 제시했다(창 2:4). 그래서 우리는 엘로힘과 야훼가 동일한 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어떤 다른 신이 소개된 것이 아니라 엘로힘에 관해 이미 알려진 개념을 능가하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로 소개된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아도나이가 처음 성경에 나올 때 야훼와 함께 제시되었다는 것은 아도나이와 야훼가 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라는 진리를 강조한다. 실제로 모세가 야훼를 아도나이라 불렀다(출 5:22)는 사실은 그가 이 개념에 익숙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권고하는 그의 마지막 유언 가운데 모세는 그분이 천지를 소유한 분이심을 상기시킨다(신 10:14).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는 야훼 너희 엘로힘은 신들의 신이시며, 주들의 주 [아도님의 아도나이]시며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능하시고 두려우신 분이시며, 사람의 외모를 개의치 아니하고 보상을 받지 아니하시니”(신 10:17; 참고 시 136:3).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야훼, 엘로힘, 아도나이를 모두 동일시하고, 그 세 이름을 모두 한 하나님께 적용했다. 이 용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여러 특성과 기능을 주목하게 만든다.
나중에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대화 중에 아들을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이 진정 이루어질 것을 보증하는 표징을 아도나이 야훼께 요청한다(창 15:8). 하늘의 방문자는 그의 무례함을 개의치 않으시고, 간접적으로 표시된 그의 불신을 가벼운 꾸지람 한마디 없이 사랑으로 용납하신다. 그 후 아브람은 소돔 성을 위해 간구할 때 다시 아도나이란 칭호로 하나님께 호소한다(창 18:3, 27, 30~33). “나의 하나님[엘로힘] 나의 주[아도나이]”께 도움을 호소한 다윗은 아마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아도나이 엘로힘]”(시 38:15)이란 어휘를 꾸며낸 장본인일 것이다. 이 어휘는 후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도전을 받은 도마의 입에서 나온다(요 20:28).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이 깨닫도록 허락된 진리를 주목하게 하신다: “주 [야훼 ]께서 내 주[아도니—강조형 복수를 씀, 단수형 아도나이가 아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시 110: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질문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를 주라 불렀으니[즉 상전으로 강조했으니], 어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느냐?”(눅 20:41~44; 참고 마 22:43, 44).
아도나이는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표시한다. 아도나이, 즉 온 땅의 주(수 3:11, 13)라 했으니 이는 그가 온 땅의 소유자임을 뜻한다. 이는 “그 산의 주인[‘aḏoney, 아도네이]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하였더라”(왕상 16:24)에서 보는 바와 같다. 만물을 소유한 이는 하나님이심으로 그는 창조된 만물의 순종을 명할 수 있는 위치에 계신다.
그러므로 “아도나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적 관계와 관련이 있다:
(1) 주종 관계: 창 24:9,10,12,27,35; 39:2,3,7,8; 43:20; 출 21:4~6; 삿 19:11
(2) 부부 관계: 창 18:12; 삿 19:27; 왕상 1:17,18; 시 45:11; 벧전 3:6
이 관계들이 어떻게 되어야 성경적 이상에 융화되는지를 깨달으면,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서 아도나이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보다 잘 깨닫게 된다.

 

 

1. 종들의 주인

 

구약 시대에는 종이 두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각기 아돈과 명확한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하나님은 무관심한 이스라엘에게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자기 주인[또는 주인들]을 공경하나…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으며, 내가 주인[아도님 또는 아도나이]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6).
두 부류 중 첫째는 품꾼들이다. 그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주인과 무슨 일을, 어떤 기간에, 품삯 얼마에 할 것을 합의한다(마 20:1~3). 품꾼들은 일을 마치면 품삯을 받고, 품삯이 지불된 후에는 삯꾼과 주인은 서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이가 된다. 둘째 부류의 종은 “종” 또는 “매인 종[노예]”(`eḇeḏ, 에베드, 창 9:26, 27)으로 주인과의 관계는 채무나 그 밖의 사연(출 22:3) 때문에 얽맨 사이이다. 엘리사를 찾아와 죽은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종으로 가게 된 자기와 두 아들을 구해 달라고 도움을 호소했던 과부 이야기가 그 대표적 예이다. 팔려 가면 그녀와 두 아들은 본의 아니게 채권자의 종이 되어 그를 주인, 즉 “주”로 섬겨야 한다. 그들이 자유를 얻으려면 부채를 전액 갚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오는 빚진 신하는 왕에게 호소한다: “주여, 참아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갚겠나이다”(마 18:26). 왕은 그의 채무를 전액 탕감해 주고 그를 영원히 자기의 권한 아래 둔다. 그러므로 그 종은 더는 자기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19, 20). 이 두 이야기에서 부채는 본의 아니게 아돈의 종이 되게 만드는 원인이 됨을 보여준다.
“오 아도나이여, 진실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나는 주의 종이며 주의 여종의 아들이니다. 주께서 나의 결박들을 푸셨나이다.” 다윗은 하늘 아도나이는 주인도 되고 남편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여기 나타난다. 주인은 종이 심판을 받게 될 경우 종의 편이 되어 대적의 세력을 파괴할 책임이 있었다(시 143:2, 3).
종이 되는 계약의 비준은 자기의 피로써 했다
히브리인의 법은 동족 간 종살이 기간을 6년으로 제한했다. 그 기간이 끝나면 그는 풀려나 자기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었다(출 21:2). 만일 종이 처음 매일 때는 독신이었으나 복무 기간 중 주인이 아내를 얻어 주었으면, 혼자만 풀려나고 처자는 주인집에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들은 주인의 소유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처자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다시 계약을 맺고 더 일하여 처자의 몸값을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주인과 종은 이 새로운 계약을 비준하기 위해 재판장 앞으로 찾아갔다. 재판장은 절차를 설명하고 의식을 지도했다. 그때 종은 주인을 따라 주인집 대문으로 가서 문설주에 귀를 대고, 주인은 송곳으로 종의 귓바퀴에 귀고리 할 때처럼 구멍을 뚫었다. 귀는 잠깐 문설주에 박히고(출 21:6), 그 자리에 언약의 핏자국을 남겼다. 이것은 이때부터 종의 귀에 대한 독점권이 주인에게 있음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종은 여생을 주인을 섬기며 그 집 대문을 드나들며 주인의 명령을 준행할 것인데, 출애굽 직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설주에는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었듯이 주인집 문설주에는 종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이다. 그 핏자국은 죽기까지 순종을 서약한 인(印)과 보증인 동시에, 그 종은 이제 그 집을 출입할 당당한 권리가 있음을 의미했다. 그는 이제 그 집에 속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노예 제도에 따른 이 피의 언약에는 깊은 메시아적 의미가 들어 있다. 예수는 그의 아버지 아도나이의 이상적 종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人子)가 되어 인류를 구원하는 과업에 투신하기 위해 아버지의 품을 떠나 긴 여정에 오르실 때 선언하신 말씀을 상기했다: “주께서는 희생 제물과 예물을 바라지 아니하시고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주께서 죄로 인한 번제와 희생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때 내가 말씀드리기를 ‘오 하나님이시여, 보소서!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 하였노라”(히 10:5~9).

 

 

2.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과업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

 

위에 본 바울의 글은 「70인역」의 시편(40:6~8)에서 인용한 것이다. 시편 40:6의 난외주에는 “내 귀를 주께서 찌르셨나이다”로 되어 있다. 이것이 오히려 같은 원문에서 인용된 다른 본문들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예컨대 마태는 주님의 표현을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면…”(마 12:28)으로 기록했는데, 의사인 누가는 해부학적 관점을 살려 “그러나 만일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면…”(눅 11:20)으로 그리스도의 은유를 기억했다. 이런 차이에 대한 해명은 마태는 누가의 상징적 어휘를 해석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손가락”은 돌 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시고 또 벨사살 왕의 연회장 벽에 바벨론의 멸망을 글로 알리신 성령의 정확한 역사를 상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종이 되시기로 서약하신 것에 관한 히브리 성경과 「70인역」의 차이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계시로 본 메시아 예수의 예언적 주장은 “주께서 내 귀를 여셨나이다”로 되어 있으나, 난외주는 문자 그대로 “주께서 내 귀를 찌르셨나이다”로 되어 있다(시 40:6). 이것은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로 선택한 종에게 주인이 송곳으로 귀를 뚫은 관습을 두고 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의 헌신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70인에 의한 역동적 번역에 따르면 이 상징적 구절의 의미가 이렇게 밝혀졌다: “주께서는… 나를 위하여 한 몸을 맞추셨나이다[맞춤옷을 만들 듯]… 주의 뜻을 행하도록”(히 10:5~7 난외주). 종이 귀 뚫는 의식을 행한 후에는 “영원”토록 주인의 눈치와 부름을 살피며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출 21:6). 물론 그 영원은 살아있는 동안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선택하시고 아버지의 명령을 듣는 즉시 이행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빌 2:7). 우리 주님의 몸은 4,000년에 걸친 선택적 유전을 통해 그 과업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맞춘” 몸이었다. 이 준비는 그가 세상의 남녀들이 당했던 어떤 시련보다도 심한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했다. 이 엄숙한 개념을 좀 더 설명해 보자.
우리는 누구나 어떤 유혹에 대해 약한 성품상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유혹만 감당하면 되니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와 반대로 인간 예수의 몸과 마음은 세상에 살아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당했던 모든 유혹을 대결할 전쟁터로 계발되었다. 그는 사람이 당하는 모든 시련을 다 당하셨으나 죄는 범하지 않으셨다. 명령으로 하달된 하나님의 뜻은 피 묻은 그의 영혼의 문호를 통해 신속 정확하게 이행되었다. 예수는 그러므로 야훼의 가장 큰 종이시다. 하나님의 칭호 아도나이는 하늘의 모든 요구에 대한 종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으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종 관계의 모델을 제시한다.

 

서약으로 스스로 종의 신분에 묶이신 예수님

히브리 민족의 이러한 노예 제도는 주인의 뜻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종의 봉사와 주인이 무엇을 명하든지 기쁜 마음으로 즉시즉시 이행하는 종의 순종을 그 이상(理想)으로 했다(참고 엡 6:5~8; 골 3:22). 한편 주인, 즉 아돈은 계약에 의해 종의 모든 필요를 보살피고 소용되는 것들을 알아서 친절히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엡 6:9).
성경의 이 이상은 하나님과 그를 섬기는 언약의 종들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주종 관계를 묘사한다. 성경의 손꼽히는 위인들은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최대의 영예로 여겼다. 특별히 “아도나이의 종”이라 불린 메시아 가지(슥 3:8; 6:12)가 그랬다. 이 “종”이란 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시대의 경배자에게 수없이 적용되었다. 성전에서 노래하는 레위인들이 종으로 불렸고(시 113:1), 선지자들로 그랬다(왕하 9:7).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반적 진술들을 보게 된다: “그의 종의 번영을 기뻐하시는 주”(시 35:27), “곧, 그의 종 이스라엘에게 유업을 주신 분”(시 136:21, 22). 그러나 고집스레 불순종하는 그의 백성이 아도나이를 등지고 그와 그들의 대표 다윗 간에 체결된 피의 언약을 파기하자 하나님은 부득불 그 “종의 언약”(시 89:39)을 폐기하실 수밖에 없었다.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이 특별한 언약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인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도나이의 종이라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아도나이와의 특수한 계약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사명(사 49:5~7)을 받았으므로 모든 나라로 가서 그 사명을 완수할 책임이 있다(사 42:1~6).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지금은 그들이 종의 신분이나 그 일이 마쳐지면 그들은 그 나라에서 영원히 아도나이의 “친구”로 살게 된다(요 15:14~17).
이 승리는 오로지 수난의 종,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는 성령 충만한 그분께서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시며 인류의 온갖 고난을 해소키 위해 피 흘리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내 종”이라 부르시는 장면을 보고 묘사했다(사 42:1~7). 예수는 이 예언을 자기에게 적용하셨다(마 12:17~21). 선지자는 또한 그 헌신한 종이 공생애 중에 당하실 끔찍한 고난을 보고 “그의 용모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상하였고 그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다”(사 52:13, 14)고 기록하고, 이는 그의 의로운 생애를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사 53:11) 만들기 위함이라 하였다. 이 구약의 말씀들은 신약에서 모두 구세주께 적용된다. 그는 아도나이의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종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으로 언급되었을 때는 실제로 외부의 세속적이며 무관심한 대다수와 현격히 다른 한 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상적이고 충성된 참 백성을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부르시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바로에게 보내시라고 아도나이께 간청했다(출 4:10). 그러나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즉시 아도나이께 굴복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렘 1:7; 겔 2:4). 옛날 여호수아는 아도나이의 이름으로 호소하기 전에 그분을 “온 땅의” 주인으로 간주했으며(참고 시 97:5), 날마다 그분의 지도를 받고 살기를 바랐다. 그는 평생 그분을 섬기기로 동의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종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깊이 생각하고 하늘의 아도나이를 완전히 신뢰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빌 4:19)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아도나이는 그 일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행하실”(엡 3:20) 것이라 부언했다.
다윗은 아도나이란 하나님의 이름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노래했다: “보소서. 종들의 눈이 주인들의 손을 바라보고, 여종들의 눈이 여주인들의 손을 바라보는 것 같이 우리 눈이 주 우리 하나님을 바라오니…”(시 123:2). 그래서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많은 계시를 알게 되었을 때 이제는 종이 아니고 친구라고 말씀하셨다(요 15:14~16).

 

 

4. 그리스도는 신랑, 교회는 그의 신부

 

아도나이는 또한 부부 관계를 묘사한다. 사라는 남편을 “아돈” 즉 주(主)라 하였고(창 18:12; 참고 삿 19:26, 27), 밧세바는 다윗을 “내 아돈”(왕상 1:17, 18)이라 불렀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보좌에 앉은 행복한 왕에 비유하고(시 45:1~5), 그 왕을 메시아적 제사장과 동일시했다(시 45:6-8; 참고 히 1:8). 노래에 능했던 시인은 주의 전 뜰에서 시중드는 많은 시녀와 모든 사람을 격려할 때 이 약속을 말했다: “왕이 네 아름다움을 크게 탐내리니, 이는 그가 너의 아돈이심이라”(시 45:11).
베드로도 이 사상을 이렇게 강조해 말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복종했던 것과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어떤 놀라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그녀의 딸들이 되느니라”(벧전 3:6). 이 관계의 요건 중의 하나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논하면서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kurie, 퀴리에)께 하듯하라”(엡 5:22) 하였다. 신약의 퀴리에(kurie)는 구약의 아돈과 같은 호격(呼格)이다. 여기 “복종”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휘포스타소(hupostaso)인데, KJV에는 “submit”으로 번역되었다. 바울이 이 말을 쓴 진의를 살펴보면 먼저 영어의 submit은 라틴어의 숩(sub)과 밋토(mitto)에서 유래했다. 숩(sub)은 “아래” 또는 “밑”이란 뜻이고(예: sub-marine), mit의 어원인 밋토(mitto)는 “보내다”란 뜻이다(예: transmit). 그러므로 submit은 “자기를 밑으로 넣는다”는 뜻이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집 밑에서 집을 받들어 지탱하는 것과 같다. 헬라어의 휘포스타소(hupostaso)도 이처럼 분해하여 뜻을 알아볼 수 있는데, 휘포(hupo)는 “아래” 스타시스(stasis)는 “입장을 취해 서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영어와 헬라어 모두 “지지하고 받들고 힘을 북돋아 준다”는 뜻이다. 바울은 충성과 협조의 사상을 많이 강조했는데, 그것을 구세주와 그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명하곤 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 같이” 남편은 가정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의 신자들에게 자원하는 사랑과 협조와 지지와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삼고 가족과 온 집을 떠받드는 초석과 기둥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자들은 항상 기쁨으로 자원하는 이해심과 협력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제자 훈련은 무의미해진다. 그와 같이 가정에서는 아내의 지성적이고 이해성 깊은 협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는 그 가정에 문제가 있다. 사랑의 줄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묶으시는 것처럼 남편은 애정의 줄로 가족을 한데 묶어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종(submission)의 성서적 의미 속에는 굴종(屈從)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옹호(擁護)와 지지(支持)의 뜻을 크게 내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 부부 관계는 그리스도와 모든 시대의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사 54:5; 렘 3:14; 호 2:19, 20). 헬라어로 교회를 퀴리아케(kuriakē)라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주(kurios)께 속한 것”이란 뜻이다. 교회라는 영어 단어 church는 불어 세르클(cercle)에서 온 것으로, 신자들이 예수를 중심으로 모여 둥근 원을 이룬 것을 말한다. 구세주는 후세의 모든 제자가 아버지를 “알고”(요 17:3), 성장해서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21). 이 두 용어는 이상적 결혼 관계에 나타난다. 성경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신부를 구하는 이야기가 있다(마 9:15; 참고 요 3:29).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교회¬신부가 될 신자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을 어렴풋이 설명한다. 그 신부를 이사야는 새 땅으로 이해했고(사 62:4, 5), 요한은 새 도성으로 보았으며(계 21:1, 2),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새 사회로 보았다(엡 5:24, 25). 바울은 전도자로서의 자기의 역할을, 참된 개심자들을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처녀들로 신랑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신랑의 친구”인 중매인으로 간주했다(고후 11:2; 요 3:29; 참고 엡 5:23, 24, 32; 계 19:7; 21:2, 9; 22:17).
이사야는 이보다 훨씬 앞서 이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너를 지으신 이들은 네 남편들이니…”(사 54:5, 히브리어의 복수는 삼위를 지적한다). 한편 예레미야는 제멋대로 사는 아내를 붙잡고 호소하시는 야훼의 호소를 엿들었다: “타락한 자식들아, 돌이키라. 주[야훼]가 말하노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장가들었음이라. 내가 너희에게서 성읍 중 하나와 족속 중 둘을 취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리라”(렘 3:14). 당신의 백성의 거절과 불충에도 불구하고 아돈의 사랑과 헌신은 감소하지 않는다. 주님은 당신의 선지자를 통해 선언하신다: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리라”(사 62:5).

 

 

예수님은 아도나이의 폭넓은 아량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스도는 아도나이의 구현(具現)이요, 아내인 교회에게 흰 세마포 혼인 예복을 제공하는 교회의 신랑이시다(마 25:1~13). 흰 예복은 한량없이 고귀한 그의 보혈로 산 성품을 상징한다(계 19:7~9). 신부가 신랑과 최종적으로 연합될 준비가 되면, 아버지는 아들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대대적인 잔치를 베푸신다. 그 혼인으로 아들은 재창조된 땅인 지구(사 62:4~7), 금 도성 새 예루살렘(계 21:1, 2), 그리고 구속받은 그의 백성인 장자들의 교회(고후 11:2; 렘 6:2)와 삼중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잔치에는 많은 손님이 초대된다(마 22:2~14). 그러나 이 모든 풍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아내는 고멜처럼(호 1~3장) 창녀 짓을 하며 어리석게 놀아난다(렘 3:14, 20).
다시 요약하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부부는 “하나[`eḥaḏ ]”가 되어야 한다(창 2:24; 참고 요 17:21). 이 “하나”란 말이 최초로 쓰인 것은 “저녁”과 “아침”의 연합을 설명할 때였다(창 1:5). 우리는 어둠과 빛을 구분하는 데 아무런 곤란이 없다. 그 둘은 각기 현저히 다른 특성을 유지하면서 생태계에서 제각기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은 합해서 하루라고 하는 “하나”의 단위를 구성한다. 부부는 연합된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각자 개성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역할에 따라 각기 할 일을 해야 한다. 아도나이는 그러므로 신부인 당신의 교회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려는 신랑이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 목적이 달성될 때 아내는 비로소 그녀의 남편을 “알”게 된다. 그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예수는 내 영혼의 사모하는 애인”

 

아도나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남녀 누구나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라도 진정한 가족적 사랑의 힘과 기쁨을 통해 맛볼 수 있는 그의 성품의 일면을 보이시려 애쓰신다. “아내”(언약 교회의 신자들로 구성된)는 자기의 신성한 계약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려고 노력할 때 자기가 아도나이께 속했고 아도나이는 자기에게 속했음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신부 될 자가 아직 그의 원수일 때 아도나이는 그녀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다. 그는 지금 순간마다 그녀를 그의 영원하신 팔에 안고 그가 준비하신 집에 안주시키려고 애쓰신다. 그 일이 성취될 때까지 그녀는 그를 위해 하나의 사랑의 노예로서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아도나이와 이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에덴의 입구에서 하나님은 그녀를 쫓아내실 때 작별 인사를 하셨다. “쫓아낸다”는 말은 그분이 아담과 하와를 이혼했다는 뜻이다(창 3:24; 참고 21:10, 14). 그 후의 성경 이야기는 그녀가 다시 그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그가 쏟은 노력의 역사이다. 구원의 역사가 끝날 때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혼인 잔치가 새 땅에서 있을 것을 성령님은 예고하셨다. 아도나이는 참으로 이상적인 신랑이시다.

 

 

마치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의 이마 즉 마음에 소유하게 될 것이다(계 14:1).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수십 가지나 수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 즉 성품을 인류에게 계시하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에 소유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들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호들 중 성경에 빈번하게 나오는 칭호 몇 가지를 심층적으로 알아보았다.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진지한 성경 연구자들은 하나님의 칭호에서 놀라운 지식의 광맥을 발견할 뿐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깊은 의미를 발견했을 것이다. 많은 성경학도가 하나님의 성호를 통해 철저하게 성경적인 연구 방법을 배우게 되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보다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인도되어 매일 승리하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영원하신 하나님, 이제 성경에서 위에 본 두 가지 의미의 아도나이를 연구할 때 잘 깨닫도록 도와주소서.
영원하신 하나님, 주의 임재로 우리를 채우사 우리의 구세주요 친구요 애인이신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만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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