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엘리야 침례 요한 [신앙기사 3부]

제3부 두 번째 엘리야 침례 요한 [신앙기사]

“그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 3:1-3).

 

그리스도의 시대에 외치는 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이사야가 오래전에 예언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 40:3-5).

“네가 누구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바로 전에 그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회개와 개혁의 메시지를 외치는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능력 있고 영성 있는 이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침례를 받기 위하여 광야로 몰려들었다. 무슨 자격으로 침례를 주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대답하라는 랍비들의 심문에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그는 침례 요한이었다. 그는 자신의 복음 사역을 예증하기 위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왕이 자주 다니지 않는 영토 내의 지역을 여행할 때에는, 일단의 사람들을 왕의 수레보다 앞서 보내 험준한 비탈을 평평하게 하고 우묵한 곳을 메우게 함으로써 왕이 안전하게, 장애 없이 여행할 수 있게 하였다. 요한의 사명도 그랬다. 그는 메시아의 초림에 앞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임무를 띠고 왔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으로 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엄숙한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메시지는 산처럼 높아진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죄로 인해 패이고 음침하게 된 마음의 골짜기를 돋우어지게 하여, 메시아의 복음 사역이 평탄하게 이루어지도록 예비시키는 것이었다.

침례 요한이 공중 전도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은 그가 메시아가 강림하기 전에 직접 나타날 엘리야라고 믿었다. 요한은 이러한 기대를 부정했지만, 예수님께서 후에 요한에 대하여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엘리야가 행한 사역을 하기 위하여 왔다. 영광의 왕국이 오기 전에 은혜의 왕국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게 하려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침례 요한의 절제 생활

 

요한은 개혁자요 선구자였다. 그의 사명과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생활습관에 대한 지침이 출생 때부터 지시되었다. 하늘로부터 직접 가브리엘 천사가 파송되어 요한이 지켜야 할 건강 개혁에 대해 부모에게 말해 주었다. 하늘의 사자는 요한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할 것과 태어나면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했다.

“저가 …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리라(눅 1:15).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빛과 진리와 사람들의 사상에 새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거룩한 메신저가 되기 위하여 그는 절제하는 생활을 살았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체력과 정신적, 영적 능력이 필요하였는데, 식욕과 정욕을 지배하고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재물에 대한 탐욕과 사치와 과시에 대한 방종이 널리 퍼져 있어, 관능적인 쾌락, 먹고 마시는 잔치가 육체의 질병과 쇠퇴를 일으키고, 영적 지각을 흐리게 하여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요한은 태어날 때 받은 지시대로 엄격한 절제와 극기 속에 살았다. 안일하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쾌락을 떠나 광야에서 살았다. 그의 단순한 의복, 곧 낙타 털로 짠 겉옷은 그 세대 사람들, 특히 유대 제사장들의 사치와 겉치레에 대한 책망이 되었다. 그는 절제하고 극기하는 삶과 검소한 의복으로 그 시대의 부절제를 책망했던 것이다. 그는 순수한 채식으로 생활했는데, 그의 음식, 곧, 메뚜기와 석청(케롭나무 열매와 야생 꿀 :편집자 주)은 도처에 편만해 있는 식욕의 방종과 탐욕에 대해 견책이 되었다.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거룩한 진리를 위탁받은 말세에 사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자 엘리야의 심령으로 왔던 것처럼 충성스러운 엘리야로 대표될 수 있다.
엘리야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건강과 절제의 메시지는 세 천사의 복음과 함께 전해져서 사람들의 영과 육이 건강하고 정결해지도록 해야 한다. 세상에 유행하는 의복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우상숭배와 사치한 생활로부터 사람들을 돌이키게 해야 한다. 특히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방종은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예민한 식별력을 둔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사신 바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를 거룩하고 가납할만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보존해야 한다.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식욕에 방종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건강을 해치는 유행을 따르는 옷을 입음으로 육체를 약화시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절제하고 극기하는 생활은 우리의 영성에 큰 영향을 준다.

 

 

침례 요한의 교육과 거주지

 

정상적인 경우라면 침례 요한은 제사장직을 위하여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랍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는 자기의 사역을 수행하기에 부적당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습득하도록 신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보내지 않으셨다. 당시의 교육은 하나님에 대한 산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학문과 인간의 유전과 규례가 주를 이루는 쓸모없는 교육이었다. 랍비들의 교육은 오히려 청년들을 지혜와 산 지식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게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천연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배우게 하려고 그를 광야로 부르셨다. 요한이 성장한 곳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지역으로, 푸른 언덕들과 황량한 광야와 거친 계곡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세상의 향락과 사치를 버리고 엄격한 수양을 받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광야의 주위 환경은 단순함과 극기의 습관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세상의 소란함에 방해받지 않고 천연계와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의 공과들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부모는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말을 요한에게 자주 들려주며 어린 시절부터 요한에게 그의 사명을 계속 제시해 주었고, 요한은 그 거룩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요한의 학교는 광야였다. 그는 광야에서 그의 교과서를 발견했다. 천연계에 나타나 있는 창조의 과학은 하나님의 구속의 과학과 신비를 그에게 알려주는 좋은 교재가 되었고, 그 비밀들을 연구할 때에 그는 하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요한이 경외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던 주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었다. 메시아, 곧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약속된 후손의 강림에 대한 계시들과 이사야가 메시아의 영광을 그린 황홀한 묘사를 그는 밤낮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산 중에서 그 메시아, 아름다우신 왕을 바라볼 때에 자기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이 보낸 메신저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만왕의 왕을 경배하므로 세상의 군주들 앞에 두려움이 없이 곧게 설 수 있었다. 인간을 높이고 찬양하는 인본주의가 바탕이 되는 헛된 교육 대신에 성령의 지도하심을 직접 배우므로 요한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이 참교육이다. 침례 요한이 거룩한 사명과 사역을 위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도 그의 생활을 모본으로 삼도록 하자.

 

 

침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침례 요한이 전한 엘리야 메시지 중 일부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 즉 세상의 죄를 가지고 가시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죄는 무엇인가? 성경은 “죄는 불법이라”(요일 3:4)고 정의한다.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 죄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에서 바알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은 구약시대에 주신 것이고 신약시대에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믿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침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소개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성소의 진리를 회복한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물로 어린 양을 끌고 성소에 가서 속죄제를 드렸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성소에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은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으며 이 복음을 침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주신 성소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 3:7-9)

침례 요한은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진정한회개 없이 침례를 받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첫번째 엘리야와 두번째 엘리야는 모두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충돌했다. 세번째 엘리야가 일어나는 이 시대에도 종교지도자들과 충돌이 있을 것이다. 성경의 바른 진리를 전하지 않고 바알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알려주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개혁할 수 있도록 진리를 외쳐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반대와 충돌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침례 요한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꽤 강력한 말이다.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 하며 항상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부드럽지 않았고, 사람들이 잘못된 상태에서 돌이키고 개혁할 수 있도록 강력했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후에 침례 요한은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특정한 교단이나 단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침례 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라고 했는데 여기서 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교단에 있든지 어느 시대에 살든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대는 침례 요한의 시대와 매우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고 사람들의 인기와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살고 있다.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결국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며 그들의 자리를 회개한 이방인들이 채우게 될 것이다.

 

 

침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한 이유

 

침례 요한은 헤롯의 불법을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헤롯은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을 범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들과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계명들로 이루어져 있다. 헤롯은 그 중에 부부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명을 범했다. 첫번째 엘리야도 아합과 그 집의 문제를 말했다. 이와 같이 각 시대에 보내진 엘리야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 즉 불법에 대해 지적하여, 그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했다.
침례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관계를 지적하다가 헤로디아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부탁으로 침례 요한은 목이 잘려 죽었다. 이 사건은 마지막 시대에도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의 불법적인 관계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들은 침례 요한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음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이 시대에도 성경에 음녀와 적그리스도로 예언된 단체는 정치, 경제, 종교지도자들과 불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에큐메니칼 종교통합 운동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

에덴에서 두 가지 제도가 제정되었다. 둘 다 관계를 다루는 제도로서 안식일과 결혼 제도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과 관련된 것이고 결혼 제도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에 관련된 것이다.
침례 요한이 결혼 제도와 관련된 일곱째 계명을 범한 헤롯의 죄를 지적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는 안식일과 관련된 계명 즉 넷째 계명을 범하는 것에 대한 죄를 지적해야 할 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예언 중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예언의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이 말씀은 중세시대에 1000년 이상의 기간동안 전성기를 누린 천주교가 있던 시대의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여기서 “이세벨”은 교황권을 상징하고 있다. 교황권은 기독교안에 이교의 교리를 들여와 기독교를 외형만 기독교 같은 이교로 만들었다. 교황권은 성경의 수많은 진리를 왜곡했는데,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까지 변개했다. 하나님의 계명 중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는 넷째 계명은 “주일을 지키고”로 변경시켰는데 천주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주의 날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하라는 말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변경이 교회의 전통에 의해서 지금까지 내려온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수많은 개신교인에게 느끼고 있는 비논리적인 점이다. 그들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카톨릭교회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변경된 주의 날을 일요일로 지키고 있다.” (Salvation History and the Commandments, pp. 294, 1963 edition).

“물론, 카톨릭교회는 안식일이 자신들에 의해서 변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카톨릭교회의 행위는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권세와 권위를 상징하는 표(Mark)이다.“ C.F.토마스 대주교

천주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시킨 것이 천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첫번째 짐승으로 상징된 천주교 교황권이 두번째 짐승인 미국과 함께 온 세상에 짐승의 표를 강요할 것이 예언되어 있다. 오늘날 천주교 교황이 이 시대의 정치, 경제,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짐승의 표를 강요하게 된다는 요한계시록 13장의 예언과 관련이 있다.
침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한 이유는 그 당시 지도자들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는 헤롯의 불법적인 관계를 지적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대에 일어날 엘리야들도 온 세상에 불법을 강요할 바벨론 세력을 폭로하고 그 죄를 지적하다가 침례 요한과 같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침례 요한에게 기적적인 구출은 허락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 요한의 뒤를 따랐던 자들에게와 같이 침례 요한에게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보증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만일 처음부터 종말까지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들이 성취하고 있는 그 목적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다면 그들이 인도받기를 선택하였을 그 길 이외의 어떤 다른 길로는 결코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신다. 하늘로 옮겨간 에녹이나 불병거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일지라도 결코 옥중에서 외롭게 죽은 침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거나 영예를 더 많이 받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리고 하늘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신임이요 가장 높은 영예인 것이다.
마지막 때에도 바알을 숭배할 것인지 하나님을 경배할 것인지에 대한 대결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목숨이 위협받을지라도 침례 요한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죄를 지적하고 바벨론의 정체를 폭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 바벨론에 포로 된 하나님의 백성이 진리를 분별하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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