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엘리야의 사역 [신앙기사 2부]

제2부 첫 번째 엘리야의 사역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약 5:17)

엘리야 선지자의 시대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일생의 사역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을 따르며 의를 위하여 홀로 서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감명을 주고 있다. 그 기록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찾아낸 사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필요하셨다. 불신과 반역으로 얼룩진 배도의 시대에 백성들을 깨우고 경고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일꾼이 필요하셨다. 아합의 시대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중에 사는 신앙과 기도의 사람이 그 일을 위해 택함을 입었는데,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였다. 산중 은신처에서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에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의분이 일어났다. 그 당시 북방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했다. “엣 바알”은 “바알이 그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이세벨은 그녀의 아버지를 따라 바알을 숭배하는데 열심이었고 아합과 결혼한 이후에는 북방 이스라엘에 있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물들였다. 그리하여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합의 영향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거의 잊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 대신 바알을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 신으로 믿고 섬기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악습을 그대로 모방하며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눈이 멀고 현세의 이익과 육욕에만 빠져,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의 임무는 물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엘리야는 한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던 백성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회개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백성의 악한 행위를 돌이킬 수만 있다면, 형벌이라도 내리셔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엘리야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엘리야는 비록 그 명령을 순종할 때에 생명이 위태하게 될 것을 알았지만, 그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지체하지 않았다. 그의 담대함과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영혼을 위한 열정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대에도 엘리야와 같은 정신과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악의 조류에 휩쓸려 가고, 주위의 친구와 친지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류의 길로 갈 때라도, 엘리야처럼 홀로 굳게 서서 의와 진리의 길을 가며,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영혼들에 대한 부담과 오류에 물들고 표류하는 기독교를 위한 부담을 가지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담대하게 참된 복음과 진리를 가지고 영혼들에게 경고하며 가까이 다가온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엘리야가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거나 인간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합 왕 앞에 나타나 바른 진리를 전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나아가 진리를 외쳐야 할 사람들은 왕과 같은 높은 지위와 권력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진 이유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 숨었다.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들을 통해 엘리야를 먹이셨다. 그러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곧 시내가 마르게 되었다. 여기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상징되는 성령의 역사가 그쳤다는 것을 뜻한다.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동안에 참된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후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과부에게 보내졌다. 사르밧의 과부는 얼마 남지 않은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엘리야의 말을 듣고 남은 식재료로 엘리야에게 먼저 떡을 만들어 주었다. 그 이후 과부의 가루와 기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떨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에 북방 이스라엘에도 과부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엘리야는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졌을까? 북방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던 반면 사르밧 과부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참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깨달았고 진리를 찾는 갈급한 마음이 있었다. 엘리야가 왔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 것이다. 떡을 만들 수 있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혈통이나 교단 또는 소속을 따지지 않으신다. 오직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수많은 오류가 기독교 안과 밖에 있는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진실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시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왕상 18:17-18)

아합은 엘리야를 잡으려고 지속적으로 찾아다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때가 차기까지 엘리야를 보호하셨다. 때가 되어 나타난 엘리야를 보자마자 아합 왕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비판했다. 아합의 문제는 진리를 전하는 자에게 음모론자라는 누명을 씌워서 진리를 막으려 한다는 것이다. 아합은 성가신 엘리야를 제거하면 이스라엘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합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쫓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괴롭게 된 것이다. 아합은 이세벨이 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그것은 결국 이세벨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아합과 이세벨은 그 당시 북방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지도자이자 종교적인 지도자였다.
북방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표상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과거 북방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상숭배가 기독교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말라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의 법을 잊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바알을 쫒았던 북방 이스라엘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그 당시 바알을 숭배하는 예배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의 형식을 보면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음악으로 채워지고 있다. 또한 감정적인 설교, 번영신학과 같은 타협된 신학 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만 하며 그 진리를 왜곡하는 설교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바알 숭배와 같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음악과 설교들로 채워진 오늘날 예배형식은 우상숭배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예배의 문제점을 말하면 그 당시에 아합이 엘리야를 비난한 것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된다. 기독교를 괴롭게 하는 이단자로 몰려 사람들의 반대와 조롱과 비판을 받게 된다. 이 시대에 과연 누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엘리야와 같은 심령과 능력으로 담대하게 기독교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외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엘리야의 접전과 아마겟돈 전쟁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왕상 18:19)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명과 대결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미친 듯이 떠들고 소리지르며, 감정적으로 극한 상황까지 가면서 자신의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하여 피가 흐르기까지 하였다. 이런 일을 하루 종일 피곤할 때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고 드디어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다.
엘리야는 간단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12개의 돌로 제단을 놓았다. 이것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소의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이 하나되는 참된 예배이다. 제단을 쌓은 후에 엘리야는 단순하지만 진실된 기도를 드렸고 그 즉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그 이후 사람들은 참 하나님이 누구 신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에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우리가 할 일은 죄의 사람인 사탄의 사악함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결단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결단한 이후에 성령의 비가 내릴 것이다.

엘리야가 치렀던 갈멜산에서의 그 유명한 접전은 표상적인 의미에서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선과 악의 대 전쟁인 “아마겟돈의 전쟁”(계 16:16)과 깊은 연관이 있다. 마지막 때에 사탄과 연합한 세력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과 접전하기 위하여,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아마겟돈에 모이게 된다. 성경은 그곳을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아마겟돈”의 헬라어는 “할 므깃도 (Har-megiddon)”로서 이것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 있다. “므깃도”는 바로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과 접전을 했던 “갈멜산” 아랫부분에 있는 평야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아마겟돈”, 헬라어 “할 므깃도”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갈멜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에서 마지막 전쟁이 일어난다고 묘사했을까? 그것은 갈멜산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 신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있었던 대결과 같이, 마지막 때에 선과 악의 영적인 대결이 그렇게 펼쳐질 것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로 기록한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갈멜산에서의 대결처럼, 선과 악의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정점을 이룰 것이다. 그 날에 서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흰옷을 준비해야 한다. 엘리야의 시대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과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자들 사이에 경계선이 분명하게 그어져 있다. 우리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2, 4, 5)고 외쳐야 한다.
모든 영혼에게 시험이 닥쳐올 시간은 머지않았다. 사람들은 거짓 계명을 준수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사이에 투쟁이 있을 것이다. 차츰차츰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고 세상의 습관에 동화하는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과 투옥의 위협과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세력에 복종할 것이다. 그때에는 금이 찌끼에서 분리될 것이며, 참 경건은 겉치레만의 경건과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엘리야와 같이 마지막 선과 악의 대전쟁에서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의의 증인과 일꾼이 되도록 하자!

 

 

엘리야의 믿음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갈멜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엘리야는 거듭거듭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종을 보내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럴 때마다 종은 돌아와 “아무것도 없나이다”(왕상 18:43)라고 말하였다. 선지자는 조급해 하지도 아니하고 믿음을 잃지도 아니하였다. 오히려 더 열렬히 탄원하기를 계속하였다. 종은 여섯 번이나 구리처럼 굳은 하늘에는 비 올 징조가 없다는 말을 가지고 돌아왔다. 불요불굴의 엘리야는 한 번 더 그를 보내었으며, 이번에는 종이 돌아와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왕상 18:44)라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넉넉하였다. 엘리야는 하늘에 흑암이 모여 들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그 작은 구름에서 많은 비를 볼 수 있었고 그의 믿음과 일치한 행동으로 급히 종을 아합에게 보내어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왕상 18:44)라는 말을 전했다.
6은 불완전을 뜻하며 사람의 숫자이다. 7은 하나님의 숫자이며 완전을 뜻한다. 엘리야가 일곱 번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완전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세상의 반대와 조롱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엘리야와 같은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합한 때에 응답하실 것이며 그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까지 구원하실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참된 하나님이 누구신지 증거했다. 그러나 이세벨은 그 사건을 듣고도 엘리야를 죽이려했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구원하지 못한 것은 슬픈 일이다. 그와 같은 일이 이 시대에도 반복될 것이다. 엘리야의 믿음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도 끝까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진리를 거절할 것이다. 슬픈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엘리야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진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의 대결이 있어야 하며 우리는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마지막 선과 악의 대결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유형의 예배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관련된 대결이다. 안타깝게도 이 대결에서 기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요 종교 지도자들과 대중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쪽을 따르고 있으며 그것은 북방 이스라엘이 바알을 숭배하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는 어떠한 시련과 핍박이 있더라도 엘리야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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