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기적과 은사를 구하십니까?

성경공부 시리즈 3권- 성령의 역사

제1부 기적과 은사를 구하십니까?

1. 서론

봄 방학 때였습니다. 경수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 가는 일로 매우 기분이 들떠 있었는데, 왜냐하면 카톨릭 신자이신 어머 니가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수는 드디어 어머니와의 신앙 장벽을 없애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친교를 나누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집 현관에 도착하자,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어머니의 기쁨에 찬탄성이, 여행에 지친 피로를 씻어 주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피곤하긴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는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경수는 어머니와 다른 교우들이 번갈아 가며, 찬송하고 서로 간증을 나누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믿음과 순복에 대한 권면을 주고받으며, 죄의 고백과 감정이 넘치는 기도들과 위로 뻗은 팔과 같은 것들은 대체적 으로 성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성모 마리아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니…”하는 통역이 뒤따랐습니다.
경수가 겪은 일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문제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영적 선물의 확실성을 진지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방언하고 예언하며 병 고치는 초자 연적 현상들이 전혀 거짓일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들 역시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모든 현상들을 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원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아주 멋있게 포장된 꾸러미일지라도, 그 속에 선물을 담고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좋게 포장된 것이 다 좋은 선물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속에 부비트랩(작은 폭탄의 일종)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영적 은사라고 불리는 감정적 환희의 모습 뒤에 혹시 무엇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매우 중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참 선물이나 은사는 “같은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고전 12:11)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복음사업을 위한 당신의 뜻에 따라서 각 사람을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당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준비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묻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9,30).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적이나 은사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나 구원을 평가하는 특별한 은혜의 증거나 시험기준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말씀하셨는데,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교회는 물론 개인들도, 무슨 특별한 은사가 어떤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느냐에 따라서 서로를 판단합니까?

아마도 방언보다 더 교회 안에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 선물이 교회에게 주어진 것은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엡 4:13)게 하기 위함임을 생각할 때, 오늘날의 “방언”은 참으로 문제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믿음을 과소평 가하고 있으며, 이와 반면에 방언을 하지 않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방언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정죄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정당한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새 방언”이 “믿는 자들”을 “따르”는 표적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으며, 이 은사는 오순절에 초대 교회에 주어졌던 유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선물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평생을 애써도 다 할 수 없는 일을 한 순간에 그들을 위해서 행하 셨습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각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그들이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적 선물은 그들이 하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방언의 선물이 마지막 시대에는 무가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 나심을 기다”(고전 1:7)려야 합니다. 모든 영적 은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자라나도록 교회 안에서 역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또 사용할 때,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않은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를 위조하고자 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활동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살후 2:9)으로 특징지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으로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 있게 될 것인데,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고후 11:13,14)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주는 “영적 선물”은 성령의 진짜 영적 선물과 너무 흡사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반복 하여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24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 다. 택하신 자들은 보통 사람들이나 적당하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성적이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기만책의 첫 표적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사탄만이 직접 위장을 하고 나타나서 “큰 표적과 기사를”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초자연적 역사들 가운데 많은 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그러나 사실은 거짓 사도인) 사람들에 의해 행해질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 성경 절의 앞뒤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 불행한 영혼들이 주의 뜻을 행치 않았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권능을 행”했던 기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행위들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줄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이(예수님께서 많다고 하셨음) 잘못 인도되어 마침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사탄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될까요?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을 깊이 살피게 하는 두려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와 경험을 비교해 보아야 하며, 이 둘의 관계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진리와 경험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에게 기만과 미혹의 문을 활짝 열어 놓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인을 항상 온전한 경험으로 인도하는데, 그러한 경험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 둘 즉,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들의 신앙 경험이 올바른 궤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 둘은 상호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나 진리 자체는 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해서 진리를 변조하려고 하게 됩니다. 진리는 불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모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경험의 판단 기준이 됩니다. 오직 진리만이 경험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판단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경험은 아무것도 정의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경험만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그러나 경험은 올바른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하게 되면 각기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어진 어떤 경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매우 불완전 하며, 설사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선입관, 개성, 편견 등에 의해서 크게 달라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나 입장이나 생각을 중요시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성경에 기록된 진리만을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령 은사 운동이 비평받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진리로 경험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근거로 진리를 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과정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

ⓐ 나는 어떤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신약의 기록에서 발견하였다.
ⓒ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것은 매우 그럴듯한 논리의 전개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도 경험만 가지고는 그 경험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험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경험과 흡사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짜라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성령의 역사도 위조할 수 있으며 인간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한”사람들에 대하여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살후 2:10,11)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깃발 아래 모인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고 말씀하 셨으며, 바울도 “허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고후 2:17)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모든 교회들을 일괄적으로 다 피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천만에요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 모든 종교적 체험, 모든 영적 현시들을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살전 5:21)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 은사를 강조하고 있는 교회들과 그 교회들의 가르침을 성경의 모든 진리와 비교하여 살펴본 후, 만일 그것들이 성경과 일치하면 확실한 안전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기만당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그룹이 영적 현시와 감정적 체험에 빠져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성경의 진리를 척량하려 한다면 그들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4:16,17, 15:26, 16: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딤후 3:16)입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영을 판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사 8:20, KJV). 요한도 또
하나의 시험기준을 첨가하였는데, 그가 제시한 시험 기준은 영이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는지를 시험하라는 것입니다(요일 4:1-3). 이사야서에 나왔던 동일한 시험기준이 요한계시록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 14:12).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계명의 준수를 대신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순종을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결합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성령의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5-17)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은 “하나 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행 5:32). 예수님께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은 기록하기를,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일 2:4)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십계 명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주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십계명을 폐지하고 새로운 계명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항상 있어온 십계명의 중심 사상을 재 강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 계명”은 절대로 십계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며, 십계 명을 비춰주는 빛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요일 2:3-8). 더구나 야고보는 십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면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약 2:10,11).
이것은 십자가 이후, 오순절이 훨씬 지난 후에도 여전히 율법이 유효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고자 하실까요?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증거에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인 계명을 불순종하는 죄된 생애를 살고 있는 죄인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을 시험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기적을 흉내 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이나 진리를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이지 그리스도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입니 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고 성령의 능력을 행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 님의 율법을 높이고 죄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는 성경 말씀들을 공공연히 피하는 사람 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잠 28:9)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율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할 때, 하나 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역사하실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 까요?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충성과 순종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더 분명히 말씀하셔야 합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분의 말씀은 솔로몬을 통해 주신 성령의 권면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잠 13:13). 순종의 역사를 낳는 것은 우리가 아니요,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골 1:27-29). 우리의 생애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활이 먼저 그리스도의 진리와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완전하신 성품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반사하는 것보다 더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없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히 8:10).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마음속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은사처럼 보이는 무엇을 산출하고자 애쓰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며, 우리를 보는 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거짓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25:14 영어 성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자원과 재능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부지 런히 사용해야 하며, 가장 좋은 은사는 그것이 필요 될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인의 생애를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권하는 바입니 다. 우리가 성령의 침례를 간구하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의 편협함으로 인하여 그분의 역사를 제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참 은사를 행사하고 있는 많은 사람이 그런 것을 전혀 계획하거나 의식하지 않은 채 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은사들은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초자연적 도움이 필요 되는 상황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의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는 것처럼 어떠한 복음적 필요나 목적도 없이 아무 곳에서 일어나거나 어떤 유행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능력에 의하여 일어난 기적은,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모든 진리의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깊고 영적인 자아 희생적 사랑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교회 안에 참 열매가 존재할 때에 있게 됩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 선, 믿음, 온유, 절제 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남은 백성의 특성이 될 것입니다(계 12:17). 우리는 잘못된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진지함을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떠난 이러한 형태의 예배는 결국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야 합니다.
사탄에 의한 거짓 은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누가 그것을 식별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트로이의 주민들은 그 도시의 성문에 놓인 평화의 선물을 매우 기뻐했습 니다. 주민들이 그 거대한 목마를, 성벽 안으로 들여가자, 곧 그리스 군인들이 그 목마 속에서 쏟아져 나와서 그 도시를 강제로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전에도 여러 번 선물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겉모습만 보고 이 멋진 새 선물을 큰 축복으로 여기며 받았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적의 계략을 과소평가함으로써 결국 그 선물 때문에 멸망당했습니다. 트로이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충분한 경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 라”(계 16:13,14).

개구리 같은 영들이 입에서 나온다는 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서 바벨탑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언어의 혼잡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높이기 위한 반역 때문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창 11:4-9). 그들의 반역은, 방언이라는 혼잡한 언어와 함께 거짓 교리를 마구 퍼뜨림으로써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고의 음성은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2,4).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음성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과연 그들이 이 경고를 받아들일까요?


2.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오늘날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무아경 속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방언을 초대 교회가 받았던 성령의 참 은사라고 가르치며, 오늘날의 교회에 그은사가 있는 것은 정당하다는 증거로서 고린도전서 14장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논쟁이 수년 동안 교회들 사이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우리가 세세히 다 알 수는 없지 만, 대체적인 문제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연륜에 비해서 엄청난 영적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기엔 너무도 약한, 겨우 10여 명의 남녀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필요 되는 강력한 의사소통의 무기를 그들에게 허락하셨 습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언어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 보고 싶은 열정에서, 그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신비 종교에 빠져 있는 주변의 이교도들에게 어떤 전시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감명을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말하는 방법, 즉 한 번에 하나의 의미 없는 음절을 말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배우는 사람이 마침내 자유롭게 자음 모음을 붙여가며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는 “은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됩니다. 이러한 초보자들은 거의 모든 은사 중심의 집회들에 참석할 때마다 만족한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배 분위기에 따라 감정이 고조되어서 그 절정에 달하면 자동적으로 사람들은 방언으로 응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현대 교회들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영적 선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탄에게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선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 다. 참을성 있고 친절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과 함께 수고한 결과, 그들은 마침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사랑으로 양육하며 성경의 진리로 양육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현대의 방언을 모두 사탄의 소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복음 활동에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비록 사탄이, 오늘날 종종 방언이라고 불리는 말들을 마음대로 자극하고 조종할 수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열심으로 당신을 찾는 자들을 아시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 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했듯이, 오늘날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영혼들을 찾아내어 꾸준히 도와 줄 그런 사도들이 필요합니다.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을 잘 돌보아 줄 책임을 지우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 9:42).

여러분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증거 활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 부은 바 되었습니까? “보라 네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4).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참된 사랑과 깊은 염려로 돌보아 줄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어떤 영혼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그 영혼의 마음이 움직여져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영문 번역)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 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영문 번역)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3.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역사를 더듬어 보면, 종교적 예배에 무아경 상태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은 그리 스도 교회가 설립되기 여러 세기 전에 이교주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무아 경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힌두교, 불교, 기타 신비종교 등 각 종교단체의 주요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의미 없는 음절의 반복적 멜로디는 종종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몽환경이나 최면 직전의 상태로 들어가 도록 만들기 때문에 심리적 속임수에 말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게 만듭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란에서 보전하느니라.”(잠 21:23)고 말한 현인의 충고가 얼마나 적절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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