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성령의 역할

성경공부 시리즈 3권- 성령의 역사

제1부 성령의 역할

성령은 어떤 힘이나 기운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한 가지 점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꽤 많은 사람이 성령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기운이나 힘, 내지는 능력 같은 비인격적인 물질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하나의 인격체이신 분으로 소개하셨습니 다.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그가”, 또는 “저가”라고 호칭하시며 당신 자신과 동등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개체로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여 주의 영, 곧 성령을 한 인격체로 말씀하신 사실도 보게 됩니다. 또한 베드로도 “네가 성령을 속이고…”(행 5:3)라고 말씀하여 성령님을 인격체로 언급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호칭하고 있는가 하면, 시편 139편 7절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령께서는 신성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 위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셨고,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물에서 계셨으며,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주님 위에 임하셨던 사실로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미루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믿는 자들을 얻게 될 때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성령님을 어떻게 취급하여야 할 지에 있어서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성령님도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격적인 개체를 가지신 하나님 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려고 애쓰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성령님께 쓰인바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많이 명상하여야 됩니다.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재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1)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는 분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거듭남, 칭의, 성화는 모두 성령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과 8장의 몇 구절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구속하기 때문에 경험되는 처절한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 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4-20).
율법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가하였 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롬 7:22,23).

2) 세 가지 법과 성령

이 성경 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법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법은 하나 님의 법, 즉 십계명(7절)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 법이 공정하고 선하지만 자신이 그 법의 요구를 행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법은 “죄의 법”으로서 육신에 거하는 죄의 힘을 가리킵니다. “죄의 법”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며, 또한 후천적으로도 습득되는 죄로 쏠리는 인간의 성향을 말합니다. 이 성향은 인간이 의를 행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인간의 도덕성을 약하게 만들어 도덕적 능력의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7장 24절에서,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보면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마서 8장에 승리의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에게 곤고한 인간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해결점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 번째 법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기 때문입 니다. 이 세 번째 법은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와 신앙적 고뇌를 완전히 해결시켜 줍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세 번째 법은 바로 우리가 성령께 완전히 굴복한다면 그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성령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승리를 얻도록 할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하여 승리함으로써,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얻게 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높이기 위하여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고상한 선물이었습니다. 성령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영적으로 소생시켜주는 분으로 주시는 바 되었으며 이 분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여러 세기 동안 강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탄의 속박에 복종 당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신성의 제 삼위이신 성령의 강력한 작용을 통하여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셨 습니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며 배양된 악의 성향들을 이기며 당신 자신의 품성을 당신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3) 약속된 선물

예 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기 바로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비유들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의 근원으로서, 상담자로서, 인도자로서, 친구로서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 야만 할 때가 이르렀고, 그들을 늑대들 속에서 방황하는 양으로서, 뱀들의 공격을 받는 비둘기로서 홀로 남겨두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느 때 보다도 더 큰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을 아시고, 그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여러 시험을 내다보시며 그들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을 준비하셔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려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요 14:16,17).

성령을 의미하는 “보혜사”의 헬라어 원어는 “Parakletos”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성경 번역본들에는 “돕는 자”(N.A.S.B.), “상담자”(R.S.V.), “대변자”(N.E.B), “당신 옆에서 변호해 주는 다른 이”(Philip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다른 번역을 비교해 볼 때 “보혜사”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William Barclay는 “Parakletos”-보혜사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Parakletos의 문자적 의미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실제적 의미는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하는 이유와 연결되어 결정되어진다. 헬라 사람들은 이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Parakletos’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인 단어로써 이 사람은 고소당한 사람의 대변자나 증인으로서 고소당한 사람을 변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 단어는 어떤 단체나 군대에 초빙을 받아 그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Parakletos’는 주로 문제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Parakletos’의 현대적 의미는 ‘to cope’ 즉, 견딜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문제점들과 불안함을 없애주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이다. 성령은 패배한 영혼에게 승리를 가능케 한다.”

4) 동반자 되시는 성령

바울은 “Parakletos” – 보혜사라는 단어와 함께 또 다른 말을 사용함으로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교제”라는 말입니다(빌 2:1).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슬픔과 고통 중에서, 그리고 앞길이 캄캄하고 장래가 암담 하게 보일 때에 또한 우리가 무기력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에 믿음의 기도 응답으로써 보혜사가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환경은 우리를 모든 지상의 친구로부터 분리시킬는지 모르지만, 어떤 환경도 어떤 먼 거리도 우리들을 하늘의 보혜사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그분은 우리를 지지하고 붙드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오른편에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성령 은사의 중요성을 설명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거듭나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로부터 떠나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면 성령께서 그의 양심에 역사하사 그들이 어떠한 결과를 갖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십 니다(요 16:11 참고). 또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깨끗하게 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되며, 의롭게 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6:11 참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음과 인생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 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갈 5:16-25 참고).

또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에 의를 증가시키며, 이로써 우리가 참된 평안과 즐거움을 얻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며, 연약한 자를 도와 능력을 주시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죄를 끊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롬 14:17, 8:26, 요 14:26, 엡 3:16, 고후 3:17, 눅 24:49 참고).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의 임재를 더욱 더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죄와 자아와 더불어 싸우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글을 계속해서 읽기 전에 먼저 성령과 도움의 역사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5)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울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함으로 로마서 7장에 그가 언급한 죄에 힘없이 넘어지는 인간의 상태를 다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1장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 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니”라고 하였고, 욥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욕망, 감정, 동기, 흥미, 경향, 자세… 등 인간의 개성과 성품을 형성하는 것들을 마음 안에 갖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하여 우리는 왜 아기들도 죄된 증상을 나타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중심에 자기중심적 자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창 3:15).

죄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는 모든 마음은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내가 …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원수 관계는 선천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으므로 그의 본성은 악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사탄과 조화되고 그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종이 되었습니다.
죄인과 죄의 창시자인 사탄과는 본질상으로 원수 관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둘 다 반역 으로 악해졌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셨을 것 같으면 사탄과 인류는 동맹하여 하늘을 대항하였을 것입니다. 인류는 사탄과 원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에 연합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경로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 안에 이미 세워져 있는 기관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들이 말 안 듣고 고집 센죄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양심은 왜곡되어지고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양심에 호소하심으로써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자아 중심적인 우리들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 중심적인 삶을 고집한다면,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없으며, 죄로부터 온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없고, 하늘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악을 향한 모든 성향과 함께 자아는 반드시 완전히 굴복되어져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대부분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무엇을 위하여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합니 다. 다윗 왕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 보내어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이 죄는 다윗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셔서 한 마리의 작은 양의 이야기를 하게 하심으로써, 다윗의 마음을 찌르셨습니다(삼하 12:1-13 참고).
다윗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탐욕적인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 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은 그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의 시, 시편 51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일이 성공하면, 우리의 양심은 일깨워지고 우리가 그 동안 지어온 구체적인 죄들에 대하여 깊은 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죄들은 우리를 쉽게 무너뜨리고 힘없게 만드는 육체의 정욕일 수도 있고,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부정직한 거래일 수도 있으며, 나쁜 성격일 수도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헛되이 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책들, 또는 음악들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도 같은 사상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 기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 6-7)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우리는 초자연적인 어떤 힘에 의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나는 승리하리라

양심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일과 하나님께 속하고자 하는 소망을 통하여 우리는 죄된 습관들을 없애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죄를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 좋아하는 이러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나는 다시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악한 성미를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 저러한 나쁜 죄의 습관들을 먼저 고치기 시작함으로써 그리스도 인이 되려고 시도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맙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시작부터 틀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개혁은 습관의 개혁보다도 먼저 마음의 개혁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을 개혁하고자 하면 이러한 개혁은 오래가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구멍 난 곳을 때우는 식의 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전체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어느 조그만 부분이라도 악에 대한 성향이 개발되도록 내버려 두거나 반역의 정신이 싹트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 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방법으로 매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나타내는 일이 허다합니다.

7) 억지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자 할 때에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고 단지 순종해야만 하늘에 갈 수있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애쓴다면, 결코 우리는 순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러한 행위는 순종이 아니라 억지 행위일 뿐입 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겉으로만 행하는 외식적 복종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순종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원함이 순결한 사랑의 결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자아로 인하여 진실된 순종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노력은 이기심에 의지한 특정한 습관의 개혁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자아를 개혁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해방되 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죄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 정복될 수 없습니다. 죄를 정복하는 것은 악한 영들을 정복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어떤 한계를 설정하여 스스로를 억제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의미한 노력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승리자로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역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이 어떠한 죄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일 이상의 위대한 사업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Self)를 포기하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아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자아를 정복하는 법은 바로 거듭남에 있습니다.

오직 자아가 죽을 때에만,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지며,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고, 사랑의 향기가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며,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사실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아에 집착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를 거절하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죄가 발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소멸의 불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정복되어지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여러 형태로 부패된 마음은 쉽게 성령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승리가 있기 전까지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승리는 확실히 가능합니 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내려지는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부패된 감정들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자아는 높아지려는 감정으로 크게 부풀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이 이러한 비뚤어진 자아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위에 떨어져 부서뜨려짐을 당한 경험이 없습니다.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이 없으면, 그들은 계속해서 자아에 의존하여 살 것이며, 영원한 의로 돌아서는 경험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 진주 문을 들어설 자들은 모두 정복자로서 들어갈 것인데, 그들이 정복한 가장 큰원수는 바로 자아가 될 것입니다.

2. 성령을 받는 길

3년 이상이나 의지하고 믿고 따르던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로 떠나가실 시간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폭탄처럼 충격 적인 발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애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그분께 있었습 니다. 그분 때문에 그들은 모든 집과 농토와 배와 그물들과 생업들을 버렸습니다. 가족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의 비난과 조소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훌쩍 떠나 버리시고 나면 그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쿼 바디스(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하신 주님의 대답은 그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마치 다정한 아버지처럼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위로의 말씀을 꺼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 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예수님이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그들에게 보혜사였 었기 때문에 이제 떠나가시는 마당에 다른 보혜사를 그들을 위하여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Comforter(보혜사) 라는 영어 단어가 내포하고 있듯이 “필요할 때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라는 뜻으로서 “항상 곁에 있어서 위로하며 길을 인도해 주는 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낱말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들에게 마치 예수님께서 항상 그들 곁에 계셔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고 갈 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와 꼭 같은 역할을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아직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제자들 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이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7-20).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진리를 가르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직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장 26절에서 주께서는 “보혜사 곧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도 성령의 직분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셨던 그 똑같은 일을 그들을 위하여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생명의 진리의 길로 늘 가르치시고 인도해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아처럼 내버려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영이십니다(요 4: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시간에 모든 곳에 존재하실 수 있는 무소부재의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가르치시고 보여 주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사람의 육신을 취하신 채 이 땅에 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모든 사업을 다 이루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시점에서, 불쌍한 제자들을 위하여 놀랍고도 위대한 한 가지 선물을 약속해 주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쓰시고 임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항상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같이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그들 각자 한 사람 한사람과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성령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크고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로 다시 돌아가시는 입장이셨으나 그들은 홀로 버려진 바 되지 않을 것이었을 뿐더러, 그들은 더욱 더 놀라운 영적 체험과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

성령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회 역사에 있어서 항상 토론과 이견의 주제가 되어 왔습 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마치 능력을 주고 기적을 베풀게 하며 환희의 경험을 가져다주는 매개체로서만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성령을, 그리스도인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깨닫게 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39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고 있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 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 에서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다는 의미는 아직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희생하시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부터 승천하시기 전까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약 40일간의 황금 같은 시간동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이 주님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즉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고 설명하여준 성경 말씀들을 찾아서 설명하여 주시는 일로 대부분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27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 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러한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 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러므로 제자들이 메시야의 사명과 사역에 대한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성령을 받으시고 직접 체험하셨던 예수님께서 성령을 이해하시는 것처럼 성령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 39절은 저희에게 아직 성령이 계시지 아니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해 오셨습니다. 십자가 이전에도 성령께서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고 올바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들을 통하여 능력을 행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하여 설명하시 면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과거에 지은 죄들과 현재에 의롭게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리고 미래에 받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양심에 자각을 주는 일을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떠나서 의롭게 살아가도록 촉구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리대로 개혁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감화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성령을 받고자 원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 다. 먼 길을 마다하고 매일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여 성령을 달라고 정성껏 기도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에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성령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성경적으로 알지 못하면서 성령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막연히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굴복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성령의 능력과 현시만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닮지 않은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교회나 그 당사자에게 있어서 커다란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성령이란 인간 편의 욕심에 따라서 주어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우리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죄를 깨닫고 의롭게 살도록 양심을 일깨우 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품성과 진리를 대변 하는 증인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행 1:8 참조).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그리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시기에 따라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우리를 향한 성령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기를 간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어떠한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는 정도에 따라서 성령을 받은 증거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표로 삼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해 때문에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5장 32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셨고, 같은 장 23절에는 “사 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가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에 관한 7가지 질문

1) 성령의 역사는 신약시대의 오순절 때부터 시작 되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 시에 성령께서 함께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 시니라”(창 1:1,2).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에 대한 당신의 목적을 성취시키시기 위하여 인간이란 도구들을 통하여 당신의 성령으로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시대인 광야 교회에도 당신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셨다”(느 9:20). 성령을 통하여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셨으며, 사도시대에는 처음 시작하는 그리스도 교회에게 힘을 주시기 위하여 성령의 크신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에는 성령께서 수많은 순교자에게 역사하여 종교 개혁의 길을 예비하였으며,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성경을 모든 국가와 민족의 방언 으로 번역한 것도 성령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킴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갈보리로 이끌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모든 종류의 편견과 불신의 벽을 무너뜨리며, 죄를 범하였을 때에 양심의 가책을 주심으로써, 진정한 회개의 정신을 갖도록 유도하고 계십니다.

2) 성령을 받을 때에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갖게 되는가?

성령을 받는 모든 사람의 느낌과 감정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바람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 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 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0,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습니까?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 있는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해 주시는 생애를 사셨 습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지,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제와 치료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 서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 으로 꼴 지워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 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전파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 수단 으로 사용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서도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게 허락 하신 이유는 구제와 봉사를 통한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 질문과 관련 있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교훈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고…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26,33,40).

3) 나는 방언의 은사와 병 고치는 은사를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그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우리는 “같은 한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는 중요한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2:11). 우리가 받기 원하는 성령의 은사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복음의 전파를 위한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각 사람을 도구로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당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준비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부리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적과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나 은사의 필요성과 그것이 행하여지는 장소와 시간과 환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적이 행사되어야 하는 최적의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어떠한 환경에서 하늘 아버지의 기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정확하게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주시는 능력을 시기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부족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구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 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4) 나는 기적을 행하였고 경험 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어떤 기적이나 은사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구원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증거나 기준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적을 행하였고 경험하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국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적인 삶을 산 결과로 인하여 멸망 받았던 예를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은사가 누구에게 발견되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어떤 교회에는 방언하는 사람들만 가득하고, 또 다른 어떤 교회에는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마치 유행 처럼 교회 안에 그룹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방언을 하지 못하고 안수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열등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 형편이 아닙니까? 사도 시대의 고린도 교회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는데,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훈계하였습니다. “너희는 그리스 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 다 사도겠느냐, 다선지자겠느냐, …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7-30).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한 은사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 우리 몸에는 지체가 있어서 서로 협력하면서 몸을 유지하는 것처 럼, 그리스도인들도 각기 다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특별히 “방언은 …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시대에 복음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무식한 제자들에 의해서 언어가 다른 각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하였는데, 언어의 장벽으로 인하여 그 일이 어렵게 되자, 하나님께서 복음의 신속한 전파를 위해서 방언의 선물을 제자들에게 내려 주심으로써, 복음이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전파될 수 있게 섭리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목격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방언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전도용이 아니라, 이미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확신용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용도가 변경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 도께서 정하신 시험 기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0).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며, 불만과 낙담이 아니라 희락이고, 분냄과 근심과 스스로 지어낸 불화가 아니라 화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 하게 맺은 자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내려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5) 기적이 모두 성령의 은사인가?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이 시대에도 나누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사용할 때에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사탄의 활동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살후 2:9)으로 특징 지워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활동이 매우 기만적인 이유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고 있으 며,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1:13,14). 그 기만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할 수만 있으며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하려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마 24:24).
이러한 말씀들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교회나 성직자들을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와 모든 종교적 체험, 그리고 모든 기적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 듯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살전 5:21).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도 요한의 또 다른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6) 그렇다면, 성경은 영을 시험하는 판단 기준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성경 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안에빛이 없기 때문이라”(사 8:20, KJV).

성령의 참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바가 성경의 진리에 일치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②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렘 28:9).
어떤 사람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으면, 그가 예언하는 바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③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표 자로 설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을 하고,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며, 모든 금전 문제에 있어서 엄격한 정직을 유지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은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를잘 알고 있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다른 양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상한 혼동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심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 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혹시 자신이 다른 영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은 위대한 성령의 능력을 받기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거룩한 선물을 줍니다. 거룩하게 변화된 성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위탁하였을 때에 복음 전파 사업에 어떠한 혼돈과 위험이 따르게 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④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 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시련과 고통 중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죄와 시험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마땅히 죄와 유혹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하늘의 선물이 내려지게 됩니다.

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사도 요한 역시 앞에서 이사야가 말했던 영의 구별법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인내로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나오는 진실한 그리스도 인들에 관한 계시를 보면서, 사도 요한은 그들의 신분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을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과 은사를 무조건 하나님의 영의 은사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충고는 모든 기적과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고 판단하여 유익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7) 현재,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 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씁니다.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 각기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은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을 하였습니다.
B 그런데,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습니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매우 설득력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 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살후 2:10,11).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세요. 그것만이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사탄의 대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고 공언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거나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적인 위치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 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감정적인 신앙을 갖게 되며, 진리를 주장하면서 사랑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하며,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요 14:15-17). 사도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e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 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 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 어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영을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입니다.

기적과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표적이지만, 마귀도 그것을 매우 흡사하게 모방함으로써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미혹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에 대하여 주시는 매우 명백한 교훈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그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0-23).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아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많이 내쫓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했으며, 구원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과 은사같이 보이는 것들을 행하였지만, 그들은 결국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라는 멸망의 선언을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성경절의 서두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9,20).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 아름답고 거룩한 열매가 맺히지 못했던 것이 그들이 불에 던지우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깨끗하지 못한 마음과 불의한 생활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를 간구했으며, 그때 마귀는 그들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힘과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을 매우 깊은 기만 가운데로 끌어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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