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세 가지 구원론

성경공부 시리즈 2권- 하늘의 전쟁

제1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세 가지 구원론

어떤 복음을 선택하셨나요?

교회 안에 두 가지 복음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참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가짜 복음입니다. 참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복음이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 하시려고 계획하신 참된 구속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짜 복음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 내용을 살짝 바꾸어 놓은 위조된 복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복음이 다 한가지로 성경의 단어들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혼돈을 겪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마음에 맞는 복음을 자기의 진정한 동기와 소원을 따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복음은 알곡을 만들 어내고 가짜 복음은 가라지를 생산해 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복음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두 가지 복음이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그 역사적인 측면을 마지막 4장에서 연구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다른 구원론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내가 어떠한 복음을 믿으며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어떤 구원론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 니까?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를 불문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원론 중에 어느 하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2) 율법주의의 구원론
3) 자유주의의 구원론(신학적인 용어로는 ‘도덕률 폐기론’라고 함)

기독교 교회 역사를 뒤돌아볼 때,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켜온 두 가지 구원론에 대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률 폐기론) 입니다. 율법주의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순종과 선한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구원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고 믿는 매우 위험한 교리이고, 이와 반대로 도덕률 폐기론은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폐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세속적이고 방종한 상태로 이끄는데, 이렇게 믿는 사람은 죄 되고 세속적인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무서운 교리입니다. 사탄은 이 두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사탄은 유대교회에 철저한 율법주의를 투입시킴으로써,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아 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와 돌아가심을 통하여 초대 기독교회가 세워졌고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란,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 값비싼 향유를 사서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분의 진리에 바치게 한 신앙이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입니다. 사랑은 그 여인을 진리에 완전히 붙잡 힌바 된 의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막 14:9).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참된 가르침의 한 실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사도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는 형식과 의무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서서히 율법주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 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은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에 천주교회를 통하여 각종 예식과 순례 즉,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를 퍼뜨리는 데 성공하였습니 다. 이 때문에 온 세상은 깊은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기독교회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운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수립해 놓은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요한 웨슬리 시대에 와서는 복음과 율법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가 회복됨으로써 개신교회의 전성기를 맞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산업혁명 이후부터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고 부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극에 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세속적 흐름과 경향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왔는데, 바로 그 즈음부터 그리스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을 범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괴이한 가르침이 생기기 시작하였 습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성장과 번영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게 되었고,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인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거듭나지 못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교회의 문을 낮춘 다는 그럴듯한 명목하에 십계명을 폐지하거나 그 권위를 낮추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일반적으로 이것을 도덕률(십계명) 폐기론 또는 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이미 세속과 유행 그리고 돈이 주는 매력에 굴복한 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로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성경이 인정하는 참된 구원론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률 폐기론)가 함께 공존하게 되는 괴이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구원을 약속하는 서로 다른 신앙들이 공존하면서부터, 교인들은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길 잃은 양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에는 다 마찬가지인데, 구원만 받으면 되지 까다롭게 따져서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묻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양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가득 채워가는 현실을 보면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됩니다.

이 책자에서 우리는, 모든 교파와 종파를 초월해서 그리스도인이 가진 구원론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그 차이점을 비교할 것이며, 어떤 구원론이 성경이 말하는 참구원론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세 가지는 첫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둘째로 율법주의, 셋째로는 자유주의(도 덕률 폐기론)입니다.

이 세 가지 구원론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률 폐기론)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다음과 같은 5가지 성서에 따른 구원론(믿음으로 말미 암는 의)에 대해서 율법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어떠한 이해와 신앙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율법주의자들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들 속에 있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 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하지만, 그리 스도께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전적으로 바치지 않은 상태에서 즉, 더럽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자 무모한 노력을 합니다. 그들은 세상과 재물에 대한 결정적인 포기와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의 영적 경험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지킴으로써 의로운 생애를 살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애씁 니다.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의지와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달리는 고달픈 마라토너처럼,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실패와 좌절의 늪으로 빠져 들어 가게 되는데,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말로입니다.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은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분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고,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세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런 그리스도인들 역시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은 율법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적 경험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심판에 압도되어 두려움 속에서 성경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지만, 자아와 욕심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반복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율법주의적 신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그들의 시선을 십자가로 고정하고,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죄의 은혜를 명상함으로 써, 죄와 이기심과 세속적 정신을 버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심령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있으며, 율법주의 함정으 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서, 십계명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무시해 버립니다.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하여졌다.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에 대한 의무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며,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또한, 그들은 말하기를 “하 나님의 법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지킬 수도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율법 유효성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순종의 댓가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진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도록 반응한다는 사실을 자유주의자들은 이해해 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정신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다고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구원의 기초를 자신의 힘으로 이루고자 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행함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임에도,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행함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종교적 의무가 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 니라”(엡 2:8-10).

율법주의자들은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선물로서 주어 지는 구원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기보다는, 지옥 불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적 목적이 동기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자 노력합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채 율법에 순종하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자유주의자들은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 자체가 율법주의라고 착각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은 법을 존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힘으로 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의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 데 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열정 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죄의 유혹에 대하여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3.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그분께서는 죄와 죄인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다루셨습니다. 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죄인에 대한 동정은 언제나 죄인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던져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을 함께 미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엄하게 심판합니다. 비록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는 죄를 다른 사람들이 범하였을 때일지라도 그것을 확대하고 정죄하는 성향을 종종 드러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에 대해서 같은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서, 그들은 죄를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해서도 “관대한 사랑(?)”을 나타 냅니다. 자신의 죄를 교회 앞에서 고백해야 할 죄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다음과 같은 사랑가를 부릅니다. “당신의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무책임한 사랑의 표현은 죄인들의 마음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죄에 대한 경계와 경각심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동시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으로 그의 생애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인의 생애를 관대하게 봐주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히려 율법주의자로 정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의 생애를 살지만 스스로 의롭다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 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러나 욥은 자신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위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찌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찌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욥 9:20,21).
이러한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되는 겸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눈을 그리스도로부터 돌려서 세상과 자신을 볼 경우에는 여지없이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에도 성도들은 요한일서 2장 1절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언해줄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율법주의자들의 경험을 묘사 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5,19).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극심한 좌절 속에서 외치는 율법주의자들의 절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오 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매우 엄격한 생애를 살려고 애씀 에도 실패를 반복하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숫자의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좌절, 비관, 자기 실망 등에 빠져서 생애를 불행하게 보내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과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버리든지, 심한 경우에는 자살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도달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하 여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덕적 패배주의자(자유주의자 들)의 길을 걷기로 신앙을 전향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면에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의 경험과 유사하지만, 매우 다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나 율법주의자가 모두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율법이 십자가에 의해서 폐하여 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믿고 있거나,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처럼 좌절감이나 신경 쇠약 증세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무시하는 죄된 삶 속에서도 기만적인 행복과 거짓 안전감을 느끼면서 거의 완전한 자기 기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생애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라면서 두려워 떨겠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 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혹시, 십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5.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들의 마음에 완전한 평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율법주의자들은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그들의 영혼 속에 평화를 간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거룩한 율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정죄에 빠져들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용서에 대한 확신도 소유할 수 없으며, 죄악에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영적 스테미너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어, 율법과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에 대해 순종하려고 애쓰는 일은 율법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 교회는 자유주의적 정신이 팽배해 있습니다. 자유주의가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그 결과 각종 유행과 장신구와 짙은 화장, 그리고 각종 세속적 관습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심지 어는 술, 담배, 도박을 즐기는 사람까지도 집사나 장로 안수를 받게 되는 해괴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설교와 십일금과 각종 헌금을 기억하여 철저하게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점점 더 교회 안에서 듣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겪는 이러한 증세들은 바로 “자유주의”가 가져온 치명적 병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은 지금도 모든 자유주의자 에게 날카로운 경종을 울려 줍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4-46).

보화가 감춰진 밭의 값이 얼마였을까요?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우연하게 찾은 좋은 진주의 값은 얼마였습니까? 장사꾼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 니다. 영생의 댓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길로 들어서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습 니까? 조심하십시오! 마지막 날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근거로 해서 여러 분의 신앙과 삶을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6.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 보내는 호소

복음은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복음과 율법이 완전하게 성서적 조화를 이룬 복음만이 성도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죄인의 성품과 생애를 변화시켜서 하늘 도성 안으로 인도할 수 있게 만듭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그들이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로부터 넉넉히 구원해 내실 수 있는 구세 주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심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아름다운 생애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가르쳐 주도록 하십시오.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자포자기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포기하고 인생을 방종과 자기만족으로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진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제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최선의 처방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생애를 명상함으로써 여러분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모든 시험과 기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율법과 원칙에 철저하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위선적인 율법주의자들을 보면서 율법을 경시하게 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은 가운데 성령님께서 역사 하셔서 자신의 생애가 나태하고 방종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경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는 순결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때에 반대편에서 기다리는 사탄의 덫인 율법주의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자신도 모르게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거짓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일단 율법을 경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삶은 아무런 원칙과 표준이 없이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세워 놓은 인생관과 철학에 따라서 형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분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 신앙을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입니다. 세상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자유주의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한, 여러분의 생활은 방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는 쓰디쓴 후회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은 폐지되었으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물어보십시오. 또한, 날마다 십자가와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닫는다 면,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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