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계문목사의 영상을 본 개신교 가족들의 반응

가문을 두드리신 하나님! [생활간증]

– 진정미

 

​큰 고모님을 찾아뵙는 일은 제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릴 적, 집안의 막내로 자란 저는 수많은 어르신과 사촌 언니, 오빠들의 사랑을 받는 것과 동시에 ‘이것 하면 안 된다. 저것 하면 안 된다.’ 또는 ‘이건, 이래야 해. 저건 저래야 해.’ 등등의 훈계를 너무 많이 듣고 살다 보니, ‘어른 공포증’이 생길 정도로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어려워하는 경향이 짙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게 큰 고모님은 잘해주셔도 어딘가 늘 불편한 분이긴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늘 제게는 너그럽기 한량없으신 큰 고모님의 냉랭하고 싸늘한 어투는 집안 분위기가 어떠한지 짐작만으로도 심각하다는 것을 대번에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손계문 목사라는 사람의 영상이 우리 집안에 돌고 있는데, 그 영상, 최초 유포자가 너냐?”

여지없이 대답은 “네”였습니다.

친정어머니, 언니, 오빠에게 보낸 영상이 뭔가 문제시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그쪽 교회는 가봤고?”

“네”

“아이들은?”

“함께 가본 적 있습니다.”

“이번 주 주말에 서울로 올라와라. 거기 전도사니, 목사니 그런 역할 하는 사람 대동하지 말고, 너 혼자 와라. 고모도 그렇게 할 테니.”

“네”

통화를 마친 후에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습니다.

‘아니, 내가 우리 가족들한테 유튜브 영상을 좀 돌렸기로서니, 우리 엄마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데, 왜 큰 고모님께서 괜한 성화이신가? 괜히 고분고분 간다고 했나?’

그런데 그 이후 연이어 연결된 다른 고모님, 삼촌들의 통화내용에서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던 거구나.’

​사연인즉, 매일같이 엄마, 오빠, 언니에게 돌렸던 그 영상을 언니 쪽에서 고모님들께, 오빠 쪽에서는 삼촌네 쪽으로 영상이 돌고 돌아서 결국엔 안식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졌다는 것입니다. 서울 큰고모님이 권사직을 감당하고 있으니 막내 고모님이 여쭤본다는 것이 큰고모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새였습니다. 누가 대체 그 영상을 돌렸는지 거슬러 찾다 보니 저한테까지 전화가 온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큰 고모님을 찾아뵐 날도 곧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닐 거로 생각했는데, 기분이 착잡하기만 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요약되어 전달된 저 문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렸습니다. 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혹시 기회가 된다면 오해 없이 잘 설명하고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제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나를 기억하라’라는 책을 읽고, 또 읽고, 중요한 부분은 외기도 하고, 계명에 관한 말씀을 여러 번 청취하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어른 공포증으로 어르신들 앞에 가면 말수도 적어지고, 질문이 있기 전엔 입을 떼기도 어려워하는 저이지만, 이번만큼은 주의 능력으로 함께하는 입술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혹여나 말로써 채 전달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나를 기억하라’, ‘오 그리스도’, ‘빛과 어둠의 대장정’을 챙겨 들고 갈 채비를 마친 이후에는 계속해서 기도만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우상숭배를 그치는 가문이 되게 해주세요.”

큰 고모님을 드디어 만나 뵙게 된 오후 늦은 시각, 큰 고모님은 내내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받느냐?”

이 질문은 내가 교회의 한 자매님께 제일 먼저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말씀을 채 듣기도 전에는 올무를 놓기 위한 질문으로 그렇게 영리하게 보일 수가 없었는데,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는 어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준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님께서는 “예수님밖에 없죠. 말씀 들어보세요.”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씀을 놓치지 않도록 권유해주심이 너무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장면이 연상되자마자 가장 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제가 예전에 품었던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약의 십계명과 주님께서 주신 신약의 계명이 같은 것임을 말씀드렸고, 그 계명 안에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일요일은 사람의 의견이나 말들로 확정되다시피 내려와 많은 이들이 지키니까 옳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는 말씀을 드렸고, 계명을 지키는 것과 좁고 협착한 길로 가야 한다는 것, 세대주의자들의 이스라엘 회복보다 더 중요한 나 자신의 참 회개와 회복, 순수성을 찾아야 함에 동의하고 계시던 때에 큰 고모님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저는 지루한 시간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한 분이랑 통화를 그토록 오랫동안 하시는 건지, 여러분이랑 통화를 나누시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자리를 뜨셔서 되도록 먼 곳에서 통화를 하시느라 잠시 잠깐 긴장을 늦출 수는 있었지만, 도대체 언제쯤에서나 집에 갈 수 있을는지, 아직 질문하실 것도 많고, 일일이 답을 해드리다 보면 하루해가 모자랄 지경이 될지도 모르는데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그냥 집안에 다른 분들이 영상시청 하시는 것, 막지만 않게 해주세요.” 계속해서 그 기도만 흘러나올 뿐이었고, 들을 사람이 없는 맞은편 의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 또한 기도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1시간이 좀 넘게 흘렀을까? 큰 고모님께서 돌아오신 후, 제게 다짜고짜 하신 말씀은 또다시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너희, 나 포섭하려고 계획하고 짰니?”

아,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실까? 사실 저 질문 한마디에 갑자기 화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바쁘시면 바쁜 시간대를 피해 약속을 잡으시던지, 통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잠시 돌아와 급한 전화니 편히 쉬고 있으라는 형식적인 인사라도 남기시던지, 이도 저도 다 뒤로하신 채로 돌아오신 후 남기신 그런 말 한마디는, 기다림에 지친 제 기분을 매우 언짢게 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질문 한마디 안에 내포된 의미를 그땐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요?

‘아…. 그냥 오해하시든지, 말든지 나도 내 할 말 다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버릴까?’ 그런데 그때, 제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음성이 들렸습니다. ‘말씀을 들어보시던지, 아니시던지 지금 일어서서 나가버리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겠지?’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하신 것인지 그 연유를 묻기 위해, 저 또한 큰고모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혹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큰 고모님은 혹 전화기가 꺼져있느냐는 질문을 하셨고, 큰고모님 챙겨드릴 책을 좀 챙겨오느라 깜빡하고 충전기를 책상에 놓고 온 모양이라고 답을 드렸더니, 그제야 통화한 사람들이 집안 식구들이며, 고모며, 삼촌, 멕시코에 있는 조카까지 전화가 들어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큰 고모님께서 영상시청이나 하고 집안의 막내를 불러들인 것인지, 나중에 알게 되면 집안의 큰 어르신의 체면이 상할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영상시청부터 하시고 분별을 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는지 돌아가면서 통화를 시도했던가 봅니다. 순간, 어른 공포증을 앓고 있는 제가 주님께 드렸던 기도가 생각이 나면서 울컥했습니다.

‘나의 작은 신음조차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셨지.’

또한 감사했습니다. ‘아!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총 7인의 아군을 붙여주셨군요. 그것도 모른 채, 저는 그 시간이 따분하고 지루하다며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죄송해요.’

그리고 큰 고모님과의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좀 전까지 들었던 제 생각을 솔직하게 다 전달했습니다.

“고모님, 오늘은 제가 고모님을 포섭하려는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고모님의 주도된 목적 아래 제가 불려왔습니다. 집안의 큰 어르신을 뵈러 오는 길이라 긴장한 나머지 충전기를 놓고 왔는데, 제가 어찌 됐는지 궁금한 분들이 아마 제가 걱정된 나머지, 고모님께 직접 연락을 드렸던 모양입니다. 고모님께서는 당연히 그럴 오해를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바쁘시면 다른 날 저를 부르시던지, 급한 통화라면 잠시 돌아와, 편히 기다리라는 말씀도 남기지 않으신 채 시간이 흘러가서 조금 서운했던 터였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제 불찰로 인해 오해를 빚은 부분도 있는 것 같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 제 소신을 밝히고자 합니다. 신앙은 자신의 선택과 결단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도 인성도 부정하는 바도 아니고, 율법주의자들도 아니며, 계명을 부인하지도 않고, 참 회개와 거룩, 가정의 회복을 중요시하고 있고, 교주나 그 역할을 하는 자는 더더욱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한낱 사람들의 말뿐이라 이리저리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직접 알아보시는 게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또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스스로 책임 하는 소명과 사명 의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이비가 만연하는 때에, 모르는 목사의 영상이 집안 내부에 돌고 있다는 기우에 저를 부르신 큰고모님께서는 가족들의 권유로 일단 영상을 40여 일간 기도하며 시청해보겠다고 약속하셨고, 저는 그것만으로도 족히 감사해하며 무사히 귀가했습니다. 그래도 쉽게 가라앉혀지지 않는 마음속의 의문이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주님! 그렇게 주님께서 일을 다 하실 거였으면서 저는 왜 그 자리에 보내신 것인가요?’

실제로 20여 분 남짓한 시간 외에 제가 한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린 일 외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져 조금은 허탈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마음속에 강한 울림에 저는 눈시울을 적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가 모르고 있던 그 순간에도 나는 일하고 있었단다.”

‘아! 그랬구나. 내가 모르고 있던 시간 속에서도 신실하신 주님은 일하고 계셨고, 내게 직접 그 산 현장을 보여주셨던 거구나!’


이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제겐 변화된 생활이 있습니다.

‘누구한테는 보내도 되겠지?’ ‘이 사람한테는 아직인가?’ 하는 판단하는 마음과 갈등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집안 식구들, 학부모님들, 일하다 맺은 잠깐의 인연들에도…. 전하는 자의 역할은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평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앞으로의 여정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체험했기에,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글은 월간지 [열한시 262호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호소]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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