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아름다운 열매, 온유 [신앙기사 3부]

제3부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 온유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화의 가장 고귀한 열매는 온유의 은사이다. 이 은사가 영혼을 주관할 때 성격은 그 감화로 말미암아 형성된다. 그런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모시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의지를 복종시킨다. 그의 지력은 모든 신성한 진리들을 깨닫게 되며, 의심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의지를 모든 신성한 교훈에 굴복시킨다. 진정한 온유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완화시키고 주입적인 말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준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온유는 루디아와 같이 예수님의 발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자가 되게 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리로다”(시 25:9).
온유한 사람의 말씨는 거만한 사람의 말씨와는 결코 같지 않다. 그들은 어린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하고 기도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으로서 가장 높고 명예스러운 지위에 앉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였다. 그의 마음은 위대한 사명에 대한 고상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하늘의 메시지를 통보받고서 그는 지시를 받기 위하여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은 입장에 두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수 5:14)라고 한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후에 바울이 처음으로 한 말은 “주여 내게 무엇을 행하시려나이까”(행 9:6)였다. 그리스도의 학교에 있어서 온유는 뚜렷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온유는 성령께서 성화된 자에게 주시는 한 은사이며, 온유함을 지닌 사람은 어느 때나 충동적이고 성급한 성격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본성적으로 심술궂거나 조급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온유의 은사를 마음에 품으면 그들은 자신의 좋지 못한 성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가장 진지한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불쾌하게 하며 그분을 닮지 않은 것들을 극복할 때까지 매일매일 절제할 것이다. 그들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영감적 교훈을 순종할 수 있을 때까지 거룩한 모범에 동화되어 가게 된다. 사람이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아직도 말이나 행위 가운데 불결한 샘이 쓰디쓴 물을 분출해 내듯이 나타나게 되면 그 사람은 속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매우 기본적인 것부터 배워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악마와 같은 몰인정한 마음을 오랫동안 품어 옴으로 그들이 거룩하지 못한 요소를 좋아하며 또 기분 나쁘게 하고 화나게 하는 말들을 즐겨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시기 전에 회개해야만 한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평가하시는 마음의 단장이다. 사도는 이것이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보다도 더 값지고 고귀하다고 말하고 있다. 외적 단장은 썩어질 육체만을 아름답게 하지만, 반면 온유함의 단장은 마음을 단장하여 온유한 사람을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결시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장식품이다. 광명한 별들로 하늘을 단장하신 분께서 동일한 성령으로 “겸손한 자를 구원하여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라고 약속하셨다. 하늘 천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과 동행하는 자들을 가장 잘 단장한 자로 기록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달해야 할 높은 목표가 있다. 항상 더 높은 목표를 향해 향상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대해 고상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여기에 암시된 것보다 더 존엄하게 될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결하게 된 자들에게는 찾아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전개되고 그것은 세상의 부요함보다 수천 배 이상 고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유한한 인간은 지극히 높임을 받아 하나님과 또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게 된다.

 

 

육체의 정욕을 억제함

 

많은 사람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는 이 말씀을 단지 방탕한 사람만을 경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성경 절은 모든 해로운 식욕과 정욕의 만족을 금할 것을 말하고 있다.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육체의 건강에 무관심하고, 또한 부절제는 죄가 아니라고 믿으며, 부절제가 그들의 영성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공감이 있다. 건강을 증진시키지 않는 습관은 어느 것이나 더 높고 고상한 기능을 퇴화시킨다. 먹고 마시는 데 대한 그릇된 습관은 사상과 행동을 그릇되게 인도한다. 식욕의 방종은 동물적인 성질을 강화하여 그 성질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지배하게 된다. 누구든지 이기적이며 탐욕적이면서 성화의 축복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이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그릇된 습관으로 생명과 건강의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질병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고 있다. 그들은 그릇된 식욕에 방종함으로써 그들의 소화기관들을 약하게 하고 있다. 가해지는 학대에 저항하려는 인체조직의 능력은 놀라우나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악습을 계속하면 신체의 모든 기능이 약해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릇된 식욕과 정욕을 즐김으로, 일하는 데 활력을 잃게 되고 육체적·정신적·도덕적 능력을 약하게 한다. 이렇게 허약해진 사람들이 신체를 혹사하는 대신 절제 있게 살아서 건강을 증진시켰더라면, 그들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 생각해 보라. 사도 바울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라고 한 말씀은 그가 형제들이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을 목표로 삼으라고 권고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뜻하신 것이 아닌 축복을 누리도록 기원한 것도 아니었다. 평강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합당하게 될 사람들은 순결하고 거룩한 성품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는 알았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5~27).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아무 흠이나 질병이 없는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바치라는 특별한 지시가 옛날 이스라엘에게 내려졌다. 가장 완전한 짐승만이 이 목적을 위해 선택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주님의 백성들이 이 교훈들을 저버린 것에 대하여 가장 혹독하게 견책하셨다.
“아들은 그 아비를 그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1:6~13).
이 말씀은 옛날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이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교훈이 된다. 사도 바울이 그의 형제들에게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드리라고 호소하면서 진정한 성화의 원칙을 진술하고 있다. 그 원칙은 한낱 이론이나 감정, 혹은 권면의 형식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 적용되는 살아있고 활동적인 원칙이다. 그 원칙은 우리의 먹고 마시며 또한 입는 습관이 육체적·정신적·도덕적 건강을 보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악습으로 더럽혀진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우리 몸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요구한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정욕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진실로 성화된 자들은 올바른 육체적인 습관을 보존함으로 도덕적 표준을 향상시킬 것이며, 다니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절제와 극기의 모본을 나타낼 것이다. 모든 비열한 식욕은 불화를 일으키는 욕망이 된다. 자연법칙에 저촉되는 것은 무엇이나 영혼에 병적인 상태를 조성한다. 방종은 위의 소화불량과 간장의 마비와 흐릿한 두뇌를 가져와서 인간의 정신과 기질을 가르치게 한다. 이렇게 쇠약해진 체력을 하나님께 드리면 흠이 있는 희생제물을 거절하시는 분께서 받으시겠는가! 우리의 식욕과 생활습관을 자연법칙에 일치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제단에 바치는 몸들을 마치 유대인이 희생제물을 조사했던 것처럼 정밀히 한다면 누가 가납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봉사함에 바칠 수 있는 모든 기관의 정력을 충분히 보존할 수 있도록 어떠한 일에나 그들의 습관을 단속할 것이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성화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식욕과 정욕이 건강과 생명을 소모시키는 방종에 빠져 있는 동안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건강 법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점에서나 그들의 능력이 제한되게 되어, 이웃들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올바르게 이행할 수 없으며, 또 전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할 수도 없게 된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후 7:1)고 말한다. 그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하여 참으로 성화된 자들이 누릴 자유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2).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 중 몇 가지를 “우상숭배와…술 취함과…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20, 21)고 열거하고 있다. 그중에 절제도 포함되어 있는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 언급한 다음에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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