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신앙기사 2부]

제2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성화는 매일매일의 과제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요구 중 하나를 짓밟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셔서 축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성령의 증거하시는 음성을 잠잠하게 하여 그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어떠한 신앙적인 감정의 황홀경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의 마음에는 거하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귀히 하는 자들만을 존귀히 하신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우리가 분노와 정욕과 탐욕과 증오와 이기심과 그 밖의 그릇된 죄에 빠지면 우리는 죄의 종이 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죄의 종이 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자극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육체가 성령을 거스려 정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계속적인 투쟁 가운데서 육체를 대항하여 싸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되어 부르짖기를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라고 하게 된다.

 

 

올바른 신앙적 습관과 그 결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성품을 계발하고자 한다면 신앙생활 가운데서 올바른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세상의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매일의 기도는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는 데 필수적이며 영적 삶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주 하나님을 향한 생각을 고상하게 하도록 힘써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그 마음을 다시 강하게 해야 한다. 끈질긴 노력으로 습관은 이것을 쉽게 성취할 수 있다.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킨다면 안전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조건들을 지킴으로써만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실 수 있게 할 수 있다. 신앙이 삶의 가장 큰일이 되게 해야 한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의 모든 능력이 그리스도의 싸움에 투입되어야 한다. 우리는 힘과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확실한 것처럼, 우리가 승리를 얻는 것도 확실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 밑에서 회개하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평화에 대한 첫째 공과가 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과연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무한히 친절하고 헌신적인 사랑이다. 영혼의 가치를 알려고 하면 살아 있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의 과학과 새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재능에 대한 가치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치르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가가 얼마나 크셨던가를 생각하면 그것을 평가할 수 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애정과 봉사를 드리지 않음으로써 그분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배은망덕함을 나타내게 되겠는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너무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라고 제안하시는 불멸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세상과 벗이 될 수 있겠는가?

 

 

전진하는 신앙, 베드로의 사다리

 

성화는 전진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한 말 가운데 연속적인 계단이 제시되어 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 1:5~8).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10,11).
여기에 우리가 결코 실족하지 않을 확신을 주는 한 길을 발견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적 은혜를 얻기 위하여 더하기 법의 계획에 따라 일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그들에게 허락하시기 위하여 곱하기 법의 계획에 따라 역사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땅에서 하늘에 오르는 더욱 빛나는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침내 “영원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사 35:10)을 가지고 그 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 곧 그분은 우리의 가장 귀하고 가장 성결한 생각과 가장 순결하고 가장 열렬한 애정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면, 우리는 항상 그분을 찬양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 우리의 입술로 그분을 찬양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치고 은혜와 진리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다.

 

 

참된 성화와 거짓 성화

 

성경에 나타난 성화는 개체 전체 곧 영과 혼과 몸이 모두 완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온전한 헌신에 대한 진정한 개념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교회가 이 큰 축복을 누리도록 기원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그러나 기독교계 안에 그 자체가 거짓이며 위험한 감화를 가진 성화의 이론이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순수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성화는 말과 의지적 경배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성품을 참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들이 죄 없다고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생애는 비난할 여지가 없을 것이며, 그들은 받은 진리의 산 대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성품대로 살기 위해 마음을 더욱 연마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에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뚜렷이 흠 없는 완전함을 분간할 것이며, 더 깊이 자신의 결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그들이 아직도 거룩하게 되기에는 멀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과 부족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분의 형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더욱더 의롭게 보인다.
우리가 참회와 겸손한 신뢰를 품고,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시고 우리의 슬픔 때문에 고통의 짐을 지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발걸음을 따를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런 일이 마음 가운데 일어날 때에 우리는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만을 높이고 우리의 무력한 영혼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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