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왜 옛 언약은 계속될 수 없었는가?

성경공부 시리즈 2권- 하늘의 전쟁

제2부 왜 옛 언약은 계속될 수 없었는가?

1. 서론

얼마 전에 저는 전도 집회의 설교를 마치고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급히 입구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세 명의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저에게 큰 소리로 묻기를 “목사님, 저희는 오늘 저녁 목사님께서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마치 우리가 옛 언약 하에 사는 것처럼 주장하는 설교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 젊은이는, 십계명은 옛 언약이며 십자가에서 폐하여졌으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옛 언약인 십계명이 이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습 니다. 그 젊은이의 그러한 믿음은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그대로 반영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확신을 성경의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무서운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 가르침을 확실히 배워둘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에 십계명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도덕적 교훈 중에 어느 하나라도 무시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입니다.

물론 십계명을 언약으로 말한 곳이 구약 성경에 여러 번 나오지만, 여기서 저는 십계명이 과연 폐지되었는가를 여러분과 함께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흥미 있는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언약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약 에는 여러 형태와 유형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서로의 약속에 기초한 쌍방의 합의를 말합니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언약에 기초하여 당신의 백성을 취급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모세나 아브라함 혹은 다윗과 같은 개인과 조약을 맺으셨고, 어떤 경우에는 이스라엘 국가와 맺으셨습니다. 그 모든 언약 중에서 가장 중요한 언약은 이세상이 존재하기 오래전에 이미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의 언약인데,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구를 창조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KJV역)으로 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만약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되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대속제물이 되시기로 합의하셨습니다.

이 영원한 언약의 조건은 결코 변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언약이 세워졌지만,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게 되는 이 단순한 예비 책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언약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언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줍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옛 언약(첫 언약)”과, 그 옛 언약에 비해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새 언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이 두 언약을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옛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 라”(히 8:6-13).

이 말씀은 옛 언약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말해줍니다. 그것은 더 좋은 약속들을 가진 새언약 때문에 버려진 바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과 생각에 두는 새 언약의 전모에 관하여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없어져 간 율법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십계명이 아니라 옛 언약

옛 언약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옛 언약이 무엇이 아닌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폐하여진 언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십계명이 폐하여진 언약입니까? 이제 폐하여진 언약에는 십계명 자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증명해 주는 세 가지를 살펴보십시다. 그다음에, 옛 언약이 정말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성경 절과 성경 절을 대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우리는 옛 언약 속에 무엇인가 빈약한 언약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우리가 읽은 대로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졌습니다. 자! 그러면 십계명 속에서 어떤 빈약한 약속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오히려 히브리서의 저자인 바울은 그것들이 매우 좋은 것임을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옛 언약이 무흠하지” 않다고 기록한 히브리서 저자가 도덕률인 십계명을 필요 없어 폐하는 약속이나 언약으로써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약속이 있는” 좋은 계명으로 권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로써 십계명에는 어떠한 결함도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옛 언약에 대한 그릇된 이해 중 두 번째는, “옛 언약이 결함이 있었다”는 말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 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 8:7).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친필(십계명)에서 어떤 결함이나 잘못을 찾아낸 사람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 바울은 기록하기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하였습니다.

십계명에 대한 이러한 성경 절들이 무엇인가 연약하고 불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어떤 법이 완전하다면, 그 법에는 어떠한 결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옛 언약은 십계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지 않습니 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옛 언약에 대한 가장 극적인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읽게 됩니다. 그것은 옛 언약이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상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짓는 심각한 질문 하나를 생각해 보십시다. 위대한 도덕률인 십계 명이 “없어져” 갔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바울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렇다면 성경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까? 없어져 가면서 동시에 굳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같은 저자가 같은 율법에 대해서 상반되는 말을 기록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이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3장 31절의 “율법”대신에 “옛 언약”이란 말을 넣어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옛 언약)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옛 언약)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것은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말한 바와는 전혀 맞지 않게 들립니 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은 옛 언약이 “없어져 간”다고 말했지, 십계명이 없어져 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없어져 버린 옛 언약은 십계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3. 그러면 옛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옛 언약이 아닌지를 알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이 옛 언약이었는가를 성경에서 찾아보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출애굽기로 거슬러 올라 가야 합니다. 시내산에서 이루어졌던 언약이 한 가지 이상이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 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모세를 산 위로 부르 셔서 당신과 백성 사이에 맺을 언약을 제안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3-6).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당신의 제안을 백성에게 전하게 하셨는지 주의해 보십시오. 여기에 참 언약의 요소들이 모두 있습니다. 쌍방을 위한 조건들과 약속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언약은 맺어 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그때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출 19:7,8)였습니다.

그 백성의 대답이 하나님께 올려지자, 곧 옛 언약의 기초가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언약이 공식적으로 시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조약을 봉인하고 인준하는 일이 있어야 했습니다. 백성 위에 수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언약을 인준하는 의식이 거행되었 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4-8).

여기서 이 언약은 십계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만들어진 상호 간의 언약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도덕률이었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언약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이 어떻게 약속(언약)이 될 수있을까요? 옛 언약은, 십계명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공언한 이스라엘 백성의 맹세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이 서로 교환된 것이었습니다. 백성은 그 법을 지키기로 약속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답례로서 그들을 복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조약 체결의 과정에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약속하는 백성 편에서 보인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을 승인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협조와 도움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들은 공언했습니다. 그들이 취한 태도는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있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여러 번 장담하긴 했지만, 모세가 십계명 돌비를 가지고 산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슬프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빈약한 약속이 옛 언약의 어디에 있었는지를 조금 이해하시 겠지요? 문제는 언약을 맹세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에 있었지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 자체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새 언약의 약속이 더 좋은 것일까요?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창안하셨으며, 백성은 오직 그분의 능력을 힘(도움)입어 순종을 잘할 수 있을 것을 보장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0-12).

어떻게 새 언약이 인준되었습니까? 그것은 옛 언약과 꼭 같은 방법인 피를 흘림으 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수소가 피를 흘리는 대신에, 죄 없으신 하나님 아들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 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 13:20,21).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인간의 연약한 약속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는 인간들의 말 대신에, 하나님의 새 언약의 약속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우리 속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더는 인간의 노력 으로 언약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그분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능력이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요? 수소의 피가 아닌 “영원한 언약의 피로”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희생과 공로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을 비교하여 봅시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준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고 공언한 백성의 약속에 기초하 였습니다.(출 24:5-8, 히 9:19-20) 새 언약은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 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인준되었습니 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4. 참된 회개에 기초한 새 개념 “언약”

이런 사실들은 우리를 새 언약의 중심부로 인도합니 다. 순종은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짐으로서 가능케 됩니다. 율법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통하여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남의 경험은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 오심으로서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신자의 생활 속에 임하셔서 순종에 필요한 당신의 능력을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십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연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게 되며, 그분의 승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게 되고, 자신의 육체적인 정욕과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바울은 그 변화를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에게 율법의 의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KJV). 예수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육신에 따라서 생애 하지 않고 성령을 쫓아서 생애 하심 으로써 율법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의”라는 말은 원어로 “디카이마”인데, 이것은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체를 취하신 예수님의 죄 없으신 생애 때문에 율법의 요구가 우리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종류의 육체를 취하신 채 죄를 극복하셨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당신의 승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도록 허락하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실제로 죄와 분리된 당신의 거룩한 생애를 우리의 육체 속에서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신뢰하고 따르는 모든 자녀를 위한 새 언약의 약속입니다. 또한, 이것은 누구든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이며,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곧 영광의 소망.”(골 1:27) 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단)는 바울의 간증은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마음에 기록된 새 언약의 율법이 시내산에서 돌비에 새겨진 율법과 똑같은 것임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위대한 영적 원칙들은 바로 하나님의 품성을 반영하며 하나님 정부의 기초를 이룹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직무에 있는 것입니다. 돌비에 새겨진 율법은 우리를 단지 정죄하며 죽음에 이르게 할 뿐인데,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 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롬 8:7)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육신의 생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회개케 하는 은혜로 변화된 마음에 받아들여질 때에,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는 얽매임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성령 충만한 자녀에게는 율법이 결코 무거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자연 스러운 것이 되며,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하기를, “나의 하나님 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하였 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함을 받는 그리 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5. 아무런 변동 사항도 없는 새 언약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준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실 때까지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이 중대한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죽음은 바로 이 핵심적인 진리를 얼마나 잘 이해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 니라.”(히 9:16,17)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언”이란 말은 “언약”을 가리키는 것입니 다. 사람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죽음에 의해서 인준된 후에야, 그 유언의 조항들이 실행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유언이나 언약도 갈보리의 십자가 이후 에야 비로소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이 문제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 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 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 3:15).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의 뜻과 유언이 바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유언자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분 께서 제공하신 방법과 수단들은 어느 것도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요구 사항들이 그분의 죄 없으신 생애의 완전하신 모본에 의해서 분명히 나타났으며, 성령을 통하여각 신자의 마음속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시겠다는 방법이 세워졌습니다.

새 언약의 조건에서는, 단 한 영혼도 타락한 본성의 강한 충동을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도록 내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성품에 기초한 영원한 약속들은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모든 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초인간적인 능력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죄와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그분의 능력을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자마다 마음이 변화되고 부드러 워져서, 모든 고집과 강퍅함과 이기심과 교만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이 영광 스러운 새 협정의 “더 좋은 약속”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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