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호 매일의 만나

 

1. 신성한 불과 다른 불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레 10:3)

이스라엘의 성막이 봉헌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니, 곧 불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 제단 위의 제물을 사르고, 백성들은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놀라운 현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증거를 보았고, 여호와의 존전에 있는 것처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아론의 두 아들들은 각각 자기의 향로를 들고, 그 위에 향을 불태워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올라가게 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불”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점화하시고, 이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명하신 신성한 불 대신에 보통의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불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서 백성들이 보는 데서 그들을 사르어 버렸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모세와 아론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여호와께서는 특별히 그들을 높이사 70인의 장로들과 함께 산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는 그렇다고 해서 용서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한층 더 중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큰 빛을 받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처럼,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할 특권을 받았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죄악을 엄격히 형벌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스스로 믿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치명적인 기만입니다. 주어진 큰 빛과 특권은, 주어진 빛에 상응하는 미덕과 거룩함을 요구합니다. 큰 축복이나 특권에 취하여 방심하거나 부주의하게 되어서는 안 되며, 이것들이 결코 죄에 방종하게 하거나 그러한 축복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엄격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이점은 그분의 거룩한 뜻을 실행하는 일에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2. 자녀 교육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애 3:37)

나답과 아비후의 범죄는 그들의 부주의함이 원인이지만 사실 그 책임은 아버지인 아론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년 시절에 자제하는 습관에 대하여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론의 우유부단한 기질과 정의에 대한 확고부동함의 결핍이 그로 하여금 자녀들의 훈련을 등한히 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자녀들은 오랫동안 자라온 방종의 습관이 그들을 굳게 붙잡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받은 가장 신성한 직무까지도 그들의 방종을 깨뜨릴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존경하거나 하나님의 요구를 엄격히 순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론의 잘못된 관용이 결과적으로 자녀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 자신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그분에게 가까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이 엄숙한 예배 시간에 그분께서 지시하신 것이 거의 다 이루어진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명을 떠나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사 5:20~24)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명의 어느 부분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거나 또 그분이 요구하신 것의 대용품도 받으실 것이라고 믿으므로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돌연히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가져온 그처럼 무서운 죄가 자신의 의무를 태만히 한 결과임을 안 아버지의 마음은 격심한 고민으로 고통을 당하였으나, 아론은 자기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슬픔을 나타냄으로 죄를 동정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중은 그 일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도록 인도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3. 부절제의 결과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말 2:7)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그분의 징계의 공의로움을 깨닫도록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이 무서운 심판이 경고가 되어 하나님의 참으심을 경히 여김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구원함을 받을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변명하려고 노력하는 죄인에 대한 거짓된 동정심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도덕적 지각력을 무디게 하는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사람은 범죄의 흉악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능력이 없이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위험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들의 의무입니다. 죄의 참 성질과 결과에 대하여 죄인들의 눈을 어둡게 함으로 경고의 감화를 말살시키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동정적인 사람이라고 우쭐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방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인을 멸망의 벼랑 위에서 쉬도록 달래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 죄의 분담자가 되어, 그가 회개하지 않는 데 대한 무서운 책임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거짓되고 기만적인 동정의 결과로 멸망 당하고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범죄 하기 전에 술에 취해 있지 않았더라면, 이 치명적인 죄를 결코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났었던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가장 주의 깊고 엄숙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절제로 인하여 정신이 혼란하게 되고, 도덕적 식별력이 둔해져서, 신성한 것과 속된 것의 차이를 통찰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거룩한 책임과 관련된 지위에 있는 자들은 모두 다 엄격히 절제하는 자들이 되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공평하게 다스리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확고한 원칙과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4. 율법과 언약의 역사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

아담과 하와는 창조함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요구를 알았고 그 교훈은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을 때 율법이 변경되지 않고 오히려 인류를 돌이켜 다시 그 율법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구원의 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구주의 약속이 주어졌고 큰 속죄제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키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도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았더라면 죽음도, 구주의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이 율법은 그 후에 이어진 세대들을 통하여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구속을 위한 은혜스러운 준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범죄로 인하여 세상이 매우 악하게 되었으므로 홍수로 세상을 부패로부터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율법은 노아와 그 가족에 의하여 보존되었고 노아는 그의 자손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에게 할례의 의식을 주셨는데 이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 우상숭배에 가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습관을 본받는 기질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 서약을 지키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그들은 애굽에 체류하여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자들과의 교제와 강압으로 애굽 사람들에게 굴종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은 이교의 악하고 잔인한 가르침에 의하여 더욱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셔서 영광에 둘러싸이시고 천사들에게 호위되시어 매우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시내산에 강림하사 온 백성이 듣는 가운데서 그분의 율법을 선포하셨습니다.

 

5. 의식에 관한 율법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여호와께서 율법을 선포하실 때에 그분의 요구를 잘 잊어버리는 백성들의 기억력에 그분의 교훈을 의탁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돌비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전통과 그분의 거룩한 교훈이 섞이거나, 인간의 의식이나 습관과 그분의 요구가 혼동될 모든 가능성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제거해 버리시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상세한 교훈을 주는 율례와 법도를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 상호 간의 의무와 이방인에 대한 의무에 관한 이 지시들은 십계명의 원칙이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무도 오해할 필요가 없을 만큼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주어졌습니다. 그것들은 돌비에 새겨진 열 교훈들의 신성함을 수호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지켰더라면 할례 의식은 조금도 필요 없었을 것이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시내산에서 율법이 선포되거나 또한 그것이 돌비에 새겨질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십계명의 원칙들을 실천했었더라면 모세에게 부가적 지시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에게 위임된 희생 제도도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왜곡되었습니다. 미신, 우상숭배, 잔인, 방탕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봉사를 부패시켰습니다. 우상 숭배자들과의 오랜 교제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이교의 습관들을 그들의 예배에 혼합시킴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는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희생 제사에 관한 명확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성막이 완성된 후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와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예배 형식에 관한 완전한 지시를 모세에게 주셨고 그는 의식에 관한 율법을 받아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6. 성경을 왜곡하는 자들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그리스도인 중에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에 대한 성경 절을 도덕적 율법(moral law)이 폐지되었다는 증거로 사용함으로 이 두 율법을 혼동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 두 제도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뚜렷하고도 명백합니다. 이 의식의 제도는 그리스도 즉, 그분의 희생과 그분의 제사장 직분을 가리키는 상징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의문의 율법은 그 희생 제도와 규례(規例-ordinance)와 함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형이 실물을 만날 때까지 히브리 사람들에 의하여 이행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 더는 희생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골 2:14)신 율법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율법에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마 5:17)고 말씀하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가능한 한 크게 강조하여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보좌와 같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 시대를 통하여 인류에게 율법의 요구를 주장할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에 관해 느헤미야는 “주께서…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저희와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저희에게 주”(느 9:13)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십계명입니다. 구주의 죽으심으로 표상과 그림자가 되는 의문의 율법은 종언을 고했지만 도덕적 율법의 의무는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이 율법을 위반한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은 불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7. 인류와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

인류의 역사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의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이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교통이 없는 대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분의 율법의 권위와 신성성을 옹호하시도록 그리스도의 손에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마침내 하늘과 타락한 족속 사이의 모든 교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져 온 것이지요.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모세 등 이 고대의 성인들은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시기로 되어 있던 구주와 교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셨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 11)고 말하였습니다. 구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 19:10)
이처럼 의문의 율법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된 후에도 바울은 그것이 구속의 경륜 가운데서 차지하는 자리와 그리스도의 사역과의 관계를 보이면서 유대 사람들 앞에 그것의 참 위치와 가치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각 세대를 통하여 나타나야 할 진리를 예표하고 있는 성소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와 함께 올라가는 향연은 죄인의 기도를 하나님께 가납하실 수 있게 해 주는 그분의 의를 나타냅니다. 제단 위에 드린 피가 흐르는 희생 제물은 오실 구세주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암흑시대와 배교의 시대를 통하여 허락하신 메시아가 초림 하시는 때가 이를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간직될 수 있었습니다.

 

8. 선민의 참된 의미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 제도에 빛을 비춰 주고 의문의 율법에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새로운 진리가 나타나고 태초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 더 분명해질 때에 하나님의 선민을 취급하시는 그분의 품성과 목적이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추가로 받는 모든 새로운 빛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구속의 경륜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영감을 통해 주신 성경 말씀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힘을 발견하고 그 모든 페이지를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자신들과 그들의 이웃 사이에 장벽을 세우도록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이 무한하신 분의 마음은 땅의 모든 거민에게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을 거절하고 버렸으나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고 그들을 사랑과 은혜를 받는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노력하고 계셨습니다. 선민들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그분의 축복이 그들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로 번영케 하시고 영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성실함은 그가 체류하던 모든 나라 백성들에게 하나의 빛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위에 있는 백성들과 담을 쌓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실과 이기심 없는 정신, 그의 무용과 자비심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에서, 애굽에서 그리고 심지어 소돔의 주민들에게까지도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대표자를 통하여 알려지셨습니다.
그와 같이 애굽 백성들과 그 강대한 왕국과 관계있던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모세를 통하여 지상 최대 왕국의 보좌 옆에 한 빛을 주시고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들은 다 참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 모든 빛은 하나님이 손을 들어 그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주어졌습니다.

 

9. 빛이 되는 자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을 축복하고 높이신 것은 그들만이 그분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은총과 축복을 받아서 그것을 독점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들을 통해서 땅의 모든 거민에게 그분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위에 있는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과 구별되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나 그것과 관련되어 생기는 모든 죄를 가증히 여기셨으며 그분의 백성에게 다른 민족과 섞이어 “그들의 소위를 본받아”(출 23:24)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우상 숭배자들과의 결혼을 금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순결해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독선적 배타심을 가지고 세상과 담을 쌓으므로 그들이 세상에 아무런 감화도 끼칠 수 없게 하시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주님처럼 각 시대에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였습니다. 구주께서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4, 15)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안은 곧 세상입니다.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는 바로 이와 같이 행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근 백성에게 빛을 비추는 대신에 그들로 그 빛을 감추어 두게 한 것은 사탄의 조종을 받아 불신을 품게 된 그들 자신의 악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교도의 불의한 습관을 따르게 하거나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거만한 배타심을 가지고 스스로 이방인과 담을 쌓게 한 것도 같은 완고한 정신에서였습니다.

 

10. 언약과 율법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성경이 두 가지 율법 곧 변함없고 영원한 율법과 잠정적이요 임시적인 율법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언약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은혜의 언약은 에덴에서 처음으로 사람으로 더불어 맺어졌고 타락 후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 언약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순종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였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그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족장들은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언약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22:18)는 약속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되풀이되었는데,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가리켰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이해하고 죄의 용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신뢰하였습니다.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도 보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증언은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고 선언하셨습니다.
비록 이 언약은 아담과 맺어지고 아브라함에게 되풀이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는 비준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구속에 대한 첫 통고가 주어졌던 때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존재했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비준하신 때로부터 그것은 새 언약으로 불렸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 언약의 기초였으며, 그것은 단순히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11. 하나님의 언약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시 110:4)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을 대부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그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그분의 능력과 자비를 그들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홍해 곧 애굽의 추격을 받았을 때 도망할 길이 없어 보이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셨고,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그들을 도우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세의 속박에서 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을 그분 자신과 결속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더 큰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마음속에 가득 찬 죄악,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무능함, 구세주의 필요 등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배워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 광야로 인도하사,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들에게 순종을 조건으로 큰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그분의 율법을 주셨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게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달았고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의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이때 비로소 그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 바로 평가할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12. 언약의 조건은 순종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3, 34).

옛 언약의 조건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26)고 한 것처럼 “순종하라 그리하면 살리라”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 즉 죄의 용서의 약속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일치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 위에 세워졌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같은 율법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 판에 기록됩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 하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죄 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새 언약하에서 믿음과 율법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 4)고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비록 발전의 정도가 다르고 같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의 필요에 응하기 위하여 그분의 능력의 나타남 또한 다를지라도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한결같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의 의식과 의례에서 예표된 구주는 복음에 나타난 구주와 같은 분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공포하시고 모세에게 의식의 율법의 교훈을 전달하셨던 그분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기초로 제시하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대원칙은 그가 모세를 통하여 히브리 백성에게 주신 말씀을 반복하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요구와 통치 원칙은 항상 같은데, 모든 것이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 1:17) 그분에게 나왔기 때문입니다.

 

13. 하나님의 조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신 23:14)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성막을 짓기 전에 제사장들의 위임식과 유월절을 지키는 일과 백성들을 계수하는 일과 그 외에 그들의 행정상 또는 종교상 조직에 필요 불가결한 여러 가지 준비를 완성하는 일 등으로 약 1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여기서 예배가 더욱 명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나라의 통치를 위한 율법들이 반포되었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로서 더 효율적인 조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 체제는 완전성과 단순성이 뛰어났으며 철저한 조직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물의 완성과 정돈에서 그처럼 현저하게 표현된 질서가 히브리 제도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위와 통치의 중심 곧 이스라엘의 주권자이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임명을 받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을 집행하는, 눈에 보이는 그들의 지도자로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각 지파의 장로 중에서 70인의 의원을 뽑아 국민의 일반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다음에는 성소에서 여호와께 의논하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마다 두령들이 지파들을 다스렸습니다.
이같이 히브리 진영은 철저한 질서에 따라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성막에 관계된 모든 일의 책임이 레위 사람들에게 위탁되었으며 다른 지파 사람들은 성막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각 지파의 위치도 지정되어 있었으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나온 섞인 무리는 진영의 변두리에 거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후손들은 3대까지 공동 사회에서 제외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철저한 청결법이 엄격한 질서와 함께 시행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규칙은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 불가결하였으며 또한 완전한 질서와 순결을 유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즐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14. 질서의 하나님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 10:35, 36)

이스라엘의 모든 여행에 있어서 항상 법궤가 선두에 섰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 앞에서 행진하였고 은 나팔을 든 제사장들은 그들 가까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어서 모세의 지시를 백성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나팔이 지시하는 대로 해야 할 모든 행동에 관하여 분명한 지시를 내리는 것이 각 집단의 지도자의 의무였습니다. 누구든지 받은 지시에 따르기를 등한히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관련된 사물마다 완전한 질서 가운데 있습니다. 복종과 철저한 훈련이 천사의 무리의 행동에 나타납니다. 성공은 질서와 조화된 행동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시대에 못지않게 지금도 그분의 사역에 질서와 조직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다 지혜롭게 일할 것이며 부주의하거나 되는 대로 하는 태도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는 자기가 승인하신다는 표를 칠 수 있도록 그분의 사역을 믿음과 정확성을 가지고 이루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의 모든 여행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의 진칠 장소가 구름기둥의 강하로 지시되었고, 그들의 진영이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할 경우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행을 계속해야 할 때에는 그 구름이 거룩한 장막 위로 높이 떠올랐습니다. 멈출 때와 떠날 때에는 언제나 엄숙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침내 시내 광야에서 구름이 전진의 신호를 보냈을 때, 가나안 변경 지방 가데스까지의 거리는 불과 11일간의 여정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진치고 있던 그곳을 거의 마지못해 떠났으며 오늘날의 성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본향으로 생각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마치 그들의 본향처럼 생각했습니다.

 

15. 진리로 연합되지 못한 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 34)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할수록 길은 더욱 험해졌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돌 많은 협곡과 불모의 황야를 가로질러 뻗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진은 느리고 고통스러웠으며 군중은 오랫동안 장막을 치고 평안이 있던 뒤라 노중의 위험과 불편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3일 여정 후에는 공공연한 불평들이 들렸습니다. 이러한 불평은 이스라엘과 완전히 연합하지 않은 많은 섞인 무리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그 불평자들은 행진 방향에 불만을 품고 모세도 역시 그들과 같이 구름의 지도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는 길에 대한 결점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습니다. 불만은 전염되었고 얼마 안 가서 온 진영에 퍼졌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진리로 완전히 연합되지 못한 자들의 불평과 악한 선동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과 갈등으로 영적인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먹을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나를 풍부하게 공급받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 있는 많은 애굽 사람들은 사치스러운 음식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불평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뿐 아니라 고기도 쉽게 좀 더 그들에게 공급하실 수 있으셨으나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것을 제한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애굽에서 먹었던 자극성 식물보다 그들에게 더 필요하고 적합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셨습니다. 왜곡된 식욕을 보다 건전한 상태로 회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태초에 인류를 위하여 준비된 음식 곧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땅의 열매를 즐겨 먹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체로 육식을 공급하지 않으신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16. 방종과 부절제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시 78:18, 19)

사탄은 불평하는 백성들을 교묘하게 유혹하여 하나님의 이런 제한을 불공평하고 잔인한 일처럼 생각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제한받지 않은 식욕의 방종이 호색을 낳게 하기 쉬운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금지된 것을 갈망하게 하였습니다. 이 방법을 통하여 백성들이 더 쉽게 그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질병과 불행의 창시자 사탄은 그가 최대의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불시에 습격할 것입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먹게 한 때로부터 사탄은 식욕에 호소하는 유혹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죄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을 정욕의 방종으로 이끄는 먹고 마시는 데의 부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도덕적 의무를 무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이런 사람은 유혹이 엄습해 올 때 그것을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그들로 순결하고 거룩하고 행복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고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그들 자신들의 행복과 그들의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필요한 훈련의 과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의 현명하신 제한에 복종하여 기꺼이 식욕을 억제했더라면 그들은 허약과 질병을 모르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육체적·정신적 힘을 아울러 가졌을 것이며 그들은 진리와 의무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예민한 분별력과 견실한 판단력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제한과 요구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께서 그들이 도달하기를 원하셨던 경건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내려 주시려던 축복도 받지 못했습니다.

 

17. 다베라(불사름)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민 11:1)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시내 광야까지 여행하는 동안에 불평과 소동이 자주 일어났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지와 무분별력을 동정하시어 그때에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분은 호렙산에서 그들에게 나타내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긍휼을 목격하였으므로 이제 그들은 큰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신과 불만은 더 큰 죄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백성들은 여호와께 언약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불평은 반역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을 무정부주의와 멸망에서 보존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분명하게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고 불평자들 중 가장 죄가 심한 사람은 구름에서 나온 번갯불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모세는 이 재앙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의 이름을 다베라 곧 “불사름”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곧 전보다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 무서운 재앙은 생존자를 겸비하고 회개하게 하는 대신 그들의 불평을 더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백성들은 장막 문 여기저기에 모여서 울며 탄식하면서 그들은 창조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음식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만나가 그들의 필요에 가장 적합했다는 끊임없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파들 중에 한 사람도 약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낙망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생명을 위하여 차라리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를 간청할 정도로 모든 위험을 감수하였으나 그들의 응답은 불평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고난과 저들이 생각하는 고통의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씌웠습니다. 그들의 사악한 불평은, 모세가 지고 비틀거리던 염려와 책임의 짐을 두 배나 무겁게 하였습니다.

 

18. 영적 지도자의 역할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신 1:16, 17)

백성들의 계속되는 불평으로 인하여 비통에 빠진 모세는 하나님을 불신하라는 유혹까지 당하면서 거의 불평에 가까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을 소집하도록 명하셨는데, 이들은 노령일 뿐 아니라 품위와 건전한 판단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서 모세와 책임을 분담할 가장 충실하고도 유능한 사람들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의 감화가 백성들의 난폭한 행위를 제지하고 폭동을 진압하는 것을 도울 것이지만 그들의 발탁은 결국 중한 악을 가져올 것입니다(겔 8:10~12 참조).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목격하였던 경험에 합당한 믿음을 나타냈더라면 그들은 결코 선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의 부담과 봉사를 과장하였습니다. 모세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저주가 되었던 불평의 정신에 빠진 데 대하여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만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는 끊임없이 그를 인도하셨을 것이며 모든 비상사태를 감당할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회중에게 반복하고 70인의 장로의 임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선발된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지도자의 당부는 현대의 재판관과 입법자들을 위한 사법상 정직의 좋은 본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70인을 성막으로 소집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강림하사 오순절 날의 제자들처럼 그들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그들의 사역을 위하여 준비시키시고 회중 앞에서 그들을 높여 이스라엘의 행정에 있어서 모세와 더불어 협력하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라는 신임을 받게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19. 겸손한 마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릴 칠십인의 장로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준하시는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고결하고 이기심 없는 정신에 대한 증거가 또다시 드러났습니다. 70인 중에 엘닷과 메닷은 겸손하게 그들이 그처럼 책임이 무거운 지위에 오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형제들과 같이 성막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이 있는 곳에 임하심으로 그들도 예언의 선물을 행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는 그 일이 분열을 조장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이와 같은 불규칙한 일을 제지하고자, 그는 그의 상관의 명예를 위한 열심으로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민 11:28)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엘닷과 메닷을 시기하는 여호수아와는 달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탐하거나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다에서 불어온 강풍이 메추라기 떼를 몰아와 백성들은 막대한 수량을 거둬들였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말려서 저장하였기 때문에 그 공급은 약속된 대로 온 한 달 동안 먹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고집스럽게 열망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최고의 유익이 되지 않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반역적인 욕망이 충족되었으나 그들은 그 결과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대로 포식하였고 그들의 부절제는 곧 처벌당했습니다. 많은 무리가 맹렬한 열병으로 죽임을 당했고 동시에 그들 중에 가장 죄가 많은 자들은 그들이 탐하던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멸망을 당했으며 백성들은 그곳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불렀습니다.

 

20. 미리암과 아론의 반역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아론과 미리암은 이스라엘에서 높은 명예와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둘 다 예언의 선물을 받았고 하나님의 명을 받아 히브리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 모세와 함께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리암의 성격의 장점은 일찍이 그가 소녀로서 나일강가에서 아기 모세가 숨겨진 작은 상자를 지켜보던 때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자제력과 재치를 그분의 백성의 해방자를 보호하는 도구로 쓰셨습니다. 시와 음악적 소질을 풍부히 받은 미리암은 홍해 바닷가에서 이스라엘 부녀들의 노래와 춤을 인도하였습니다. 백성의 사랑과 하나님께로부터 명예를 받아 그녀는 모세와 아론의 다음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처음 불화를 가져온 것과 같은 악이 이 여인의 마음에서 싹이 텄습니다.
70인의 장로를 임명하는 일에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으로 더불어 상의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모세에 대하여 질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로 가는 도중에 이드로가 내방했고 그때에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권고를 즉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아론과 미리암은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그들의 영향력보다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또 장로 회의를 조직할 때에 그들의 지위와 권위가 무시당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부과된 책임의 무게를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조력하도록 택하심을 입은 까닭에 자기들이 그와 동등하게 지도하는 책임을 나눠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조력자들을 임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타고난 인간의 감정에는 기울인 노력에 성공이 따르면 교만해 지거나 우쭐해지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자기 찬양이 설 자리를 없게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고 열심으로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해도 교만함을 벗어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의 땅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21. 불평불만의 정신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모세는 자기에게 위임된 사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자기의 고문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자신을 더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덜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시내 광야에서 우상숭배 문제에 비열하게 굴종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품성의 약점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미리암과 아론은 질투와 야망에 눈이 어두워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론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가족이 거룩한 사제의 직임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다고 간주하고 그들은 동등한 지위와 권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신 모세의 결혼에 대하여 불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즉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않고 다른 민족의 여인을 선택한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 모욕을 주는 처사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십보라는 교묘하게 위장된 방법으로 멸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십보라는 살빛이 다소 검었기 때문에 “구스 여자”로 불렸지만 미디안 사람이었으므로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비록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으나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십보라는 광야에서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에 그의 임무가 너무 중하여 그의 힘이 쇠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염려를 이드로에게 고했고 이드로는 자기의 구제책을 제시했습니다. 십보라에 대한 미리암의 반감의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미리암은 자신과 아론이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고 상심하면서 모세의 아내를 그 원인으로 생각하고 그가 전과 같이 그들을 그의 의논자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은 십보라의 영향력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때 만일 아론이 의의 편에 굳게 섰더라면 그 악을 능히 제지했겠지만 그는 미리암의 악한 행위를 견책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동조했고 그의 불평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질투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2. 모세를 지도자로 택하신 이유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모세는 형제들의 비난을 불평 없이 침묵으로 참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불신과 불평, 그의 변함없는 조력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의 교만과 시기에 대하여 참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은 미디안에서의 수고와 기다리는 세월 동안에 얻은 경험 곧 그곳에서 계발한 겸손과 인내의 정신이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하나님의 지혜와 지도를 받게 된 이유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가르치기 쉽고 가르침을 받기 원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하는 진지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은 주를 전적으로 따르기를 자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의지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무 교만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들과 자기의 고집대로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실 수 없으십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자기 자신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에 대하여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택하시고 그분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미리암과 아론이 불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들의 지도자에게뿐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불충한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선동적인 험담자들은 성막으로 부름을 받아 모세와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계시와 꿈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셨으나 모세에 대하여서는 더 밀접한 교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노하심의 증거로 성막에서 구름은 사라졌고 미리암은 벌을 받았습니다. 아론은 무사하였으나 미리암의 벌로 혹독한 견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자기를 높이는 마음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6)

미리암을 통해 여호와께서 진노를 나타내신 이 사건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로 삼아 불만과 불복종의 정신을 제지하시고자 계획되었습니다. 미리암의 질투와 불만이 현저하게 처벌되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는 더 큰 악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질투는 인간의 심중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악마적인 특성의 하나이며 그 결과는 가장 불행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하늘에서 불화를 처음 일으킨 것은 질투심이었고 그것에 빠지는 것은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우리가 스스로 그들의 동기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약 4:11)라고 한 것처럼 누구든지 스스로 재판자 직을 취하여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창조주의 대권을 침해하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대사로 서서 일하도록 부르신 사람들에 대하여 경솔하게 비난하기를 삼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0, 11)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교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세워진 사람들을 위하여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 5:19)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백성의 지도자와 교사의 중책을 맡기신 그분은 백성들에게 그분의 종들을 취급한 방법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을 우리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미리암에게 내린 심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업에 책임을 지우신 사람들에 대하여 질투하고 불평하는 모든 사람에게 견책이 되어야 합니다.

 

24. 열두 정탐꾼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9)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산을 떠난 지 11일 만에 약속의 땅 변경에서 머지않은 바란 광야에 있는 가데스에 진을 쳤습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정탐꾼을 미리 보내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자고 제의하였으며 모세는 곧 이 문제를 여호와 앞에 제출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이 일을 위하여 각 지파에서 족장 한 사람씩을 선택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모세는 지시받은 대로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그 땅에 가서 그 위치와 자연의 이점과 거기 거하는 백성들의 강약과 다소를 살피되 그 땅의 토질과 비옥도를 살피고 그 땅의 열매를 가져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희망을 품고 열렬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40일 만에 정탐꾼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정탐꾼들은 견본이 될 만한 과일을 가져와 그 땅의 비옥함을 보여주었는데, 그때는 포도가 익는 계절이었으므로, 그들은 두 사람이 메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큰 포도송이를 가져왔으며 또 그 지방에 많이 나는 무화과와 석류도 가져왔습니다.
정탐꾼들은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민 13:17~33, 14장)라는 말로 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여호와의 음성을 순종하여, 곧 올라가 그 땅을 점령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묘사한 후 두 정탐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그들에게 닥칠 고난과 위험을 과장하여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의 각 부분에 산재하고 있는 강력한 민족들을 열거하면서 그 도시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매우 클 뿐 아니라 그 속에 거하는 백성들은 강하여, 자기들이 그들을 정복하기는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또 그곳에서 아낙 자손들인 거인들을 보았다고 보고하고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25.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정탐꾼들이 사탄의 충동을 받아 절망에 빠진 자신들의 불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감상을 말할 때에, 백성들의 희망과 용기는 겁에 질려 절망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은 회중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선민을 위하여 그처럼 자주 나타났던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게 했습니다. 그들은 불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했고, 지금까지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신 손길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은 모세를 비롯한 그들의 지도자들이 백성을 기만하고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을 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실망과 낙담에 빠져 있을 때,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하고자 담대히 일어서서, 불충실한 동료들의 악한 영향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갈렙은 이미 보고된 내용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열 정탐꾼들은 그의 말을 가로막고 장애물에 대하여 처음보다 더 어둡게 묘사하면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물론 모세와 하나님께 대하여, 고집스럽게 반대하였습니다. 사태의 진전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점령하려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유해한 영향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것은 불길한 보고일 뿐 아니라 허위 보고였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에 모순이 있었습니다. 정탐꾼들은 처음에 그 땅은 비옥하고 번영하는 땅이요, 그곳 백성들은 키가 크다고 보고했는데, 만일 그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곳 기후가 건강을 해친다면 위에 말한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불신에 굴복시킬 때에는 그들은 자신을 사탄의 지배 아래 두게 되며 사탄이 그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26.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 2:21)

열 정탐꾼의 왜곡된 선동으로 인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폭동과 공공연한 반항이 신속히 뒤따라 일어났습니다. 사탄에게 완전히 지배된 백성들은 이성을 잃은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말을 듣고 계신다는 것과 구름기둥 속에 싸인 하나님의 앞에 있는 천사가 그들의 분노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세와 아론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은 비통 중에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하고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감정은 하나님을 대항하면서, 차지할 수 없는 땅을 약속함으로 그들을 기만하였다고 모세뿐 아니라 하나님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강하신 팔이 그들을 구원해 낸 그 고생과 속박의 땅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그들을 인도할 장관을 임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비통과 의분의 표시로 옷을 찢고, 백성들 가운데로 급히 달려 나갔습니다. 그들의 쟁쟁한 음성은 울음소리와 반역적 통탄으로 야단법석하는 소리를 압도하고 들렸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9).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의 한도를 채웠으므로 여호와의 보호가 제거되어 그들은 쉽게 항복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증되어 있었으나 불충실한 정탐꾼의 허위 보고가 수용되고, 그것 때문에 온 회중은 기만을 당했습니다. 만약 두 사람만 불길한 보고를 하고 열 사람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땅을 점령하자고 격려했을지라도, 그들은 역시 그들의 사악한 불신 때문에 열 사람의 충고보다 두 사람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불평과 불신으로 지배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27. 40년 광야생활의 발단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불충실한 정탐꾼들은 큰 소리로 갈렙과 여호수아를 중상하고, 그들을 돌로 치자고 소리를 치면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의 살인 계획을 막으시고 타오르는 빛과 같은 그분의 임재의 영광이 성막을 비췄습니다. 이제 모세는 일어나 성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가 전염병으로 저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탄원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멸하고 그를 더 강한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두고 그분의 긍휼하심에 호소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즉석에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불신과 비겁함 때문에 그분은 그들의 원수를 정복하기 위하여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런고로 그분은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그들에게 단 하나의 안전한 길인 홍해 쪽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리”(민 14:28~31)라고 하시고 갈렙에 대하여 “내 종 갈렙은 그 믿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탐꾼들이 40일간을 그 여행에 소비한 것처럼, 이스라엘 무리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결정을 백성들에게 전달했을 때에, 그들의 분노는 비탄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받을 형벌이 공정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충실한 열 정탐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전염병에 걸려 온 이스라엘 회중의 목전에서 죽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운명에서 자기들의 파멸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28. 회개와 후회의 차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 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린 후에야 그들의 죄 된 행위를 성실히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의 망은과 불순종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악한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슬퍼한 것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명령을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들의 고집은 다시 머리를 쳐들었으며, 그들은 광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땅에서 물러가도록 명령하심으로, 그들의 표면적 복종을 시험하시고, 그것이 진정한 복종이 아님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들은 무분별한 감정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순종하라고 간청한 정탐꾼을 죽이려 함으로 큰 죄에 빠졌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재난을 가져올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동일한 폭동을 일으킬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권위를 받들어 그들에게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고 명했을 때에, 이러한 반역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와 아론은 물론 갈렙과 여호수아에게도 참으로 쓰라린 실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불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던 축복들이 저들로부터 거두어졌을 때에 울며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들은 까닭 없이 불평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울 이유를 주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 앞에 그대로 놓여 있는 그들의 죄를 슬퍼했더라면, 이런 선고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앙에 대하여 슬퍼하고 그들의 슬픔은 회개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 내린 선고를 다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29.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는 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유 1:15)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이요, 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의적 태만으로 그 허락은 철회되었습니다. 사탄은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하나님의 금령이 내린 지금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을 때에 그들이 거절한 바로 그 일을 하도록 그들에게 독촉하였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백성들은 처음에 가나안을 점령하는 데 그들의 노력과 함께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더니 이제 그들은 그 사역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성취하고자 대담하게 나섰습니다. 그들은 범죄로 인하여 그처럼 몹시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분의 의도는 그들이 전쟁으로 그 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서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고백할 때에야 그들이 그처럼 경솔하게 내던졌던 축복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분을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분의 약속을 멸시하고, 유혹에 빠져 악한 천사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깨뜨리고자 할 때에 여호와께서는 때때로 이런 사람들이 비록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죄를 깨닫고 그들의 행위의 악함과 그들을 다루시는 그분의 공의와 선하심을 부득이 시인하도록 환경들을 지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흑암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의 사역의 반작용을 그냥 두십니다. 악한 길로 지체 없이 나가는 정신은 비록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하고 반대와 오해를 받아왔던 그분의 충성스러운 책망자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자복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최후로 쏟아질 때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죄인들은 모두 그분의 정죄가 공정함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30.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호 9:17)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나안 정복을 시도하고자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갑옷과 전쟁 무기로 무장했으므로 그들 나름으로는 전쟁을 위하여 잘 준비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세상적인 조건과 사람의 외형적인 능력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추진하고자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러나 거의 40년 후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라가 여리고를 취하라고 지시하셨을 때에, 그분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법궤가 군대의 선두에서 행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임명하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지휘하에서 그들의 행진을 지도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명령과 지도자들의 엄한 제지를 거역하고 법궤도 없고 모세도 없이 원수의 군대와 싸우러 나아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백성을 인도하는 듯한 신비한 능력과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이적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강한 군대를 소집하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암석질로 된 높은 고지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험한 협로와 가파르고 위험한 오르막길을 통해서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그들의 패배를 한층 더 심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참패를 당하고 그들의 반역적 실험의 결과는 파멸과 죽음뿐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항복했고 생존자들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저들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신 1:45)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최초의 패배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용기와 확고부동한 정신을 일깨워 그들을 정복하는 일에 어려움만 가중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한 원수들 앞에서 물러나, 그곳에 그들의 온 세대의 무덤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광야로 들어가는 길밖에는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31. 반역의 태동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재앙들은 한동안 그들의 불평과 반항을 제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반역의 정신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전에 일어난 반역들은 일반적으로 군중의 돌발적 충동에서 일어난 단순한 민중의 소요(騷擾)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계획된 음모로 교활하게 꾸며졌고, 그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서 친히 임명하신 지도자의 권위를 전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주모자인 고라는 고핫 족속에 속한 레위 사람으로서 모세의 사촌이었으며 재능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막 봉사의 직분을 맡았으나 자기의 지위에 불만을 품고 사제직을 갈망하였습니다. 전에 모든 가족의 장자에게 주어졌던 사제의 직분을 아론과 그의 집에 준 처사에 대하여 질투와 불만을 품은 고라는 은밀하게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반대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행정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다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여러 명의 동조자들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야곱의 장자의 후손인 그들은 이스라엘의 행정적 권위가 그들에게 속했다고 주장하고 고라와 함께 사제직의 명예를 나누어 갖기로 모의하였습니다.
또한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는 분위기는 고라의 음모를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처절한 실망 중에서 전에 품었던 의심과 질투와 증오가 되살아나 참을성 있는 저들의 지도자를 향하여 다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구름기둥에 가려져서 그들의 앞에 행하신다는 것과 모세는 그분으로부터 모든 지시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광야에서 다 죽어야 한다는 무서운 선고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그 같은 운명을 선고한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라고 생각하고 그 사실을 믿을 만한 구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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