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호 매일의 만나

 

1. 금촛대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

성소 안에 있는 금촛대는 일곱 개 가지(Branch)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완전한 빛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순(branch)” 즉 “가지”라고 말합니다. 촛대는 빛을 주기 위해 마련된 기구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그 빛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금촛대가 빛을 내려면 감람유(올리브기름)를 사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감람유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 지시는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 빛은 항상 그분의 임재하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빛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소 안에는 창문이나 지붕에 구멍이 없습니다. 즉 외부로부터 빛이 들어올 구멍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에는 참 빛 되신 하나님의 진리 이외에는 외부의 빛이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인간적인 철학이나 근거 없는 과학적인 이론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금촛대의 빛만이 성소 안을 밝혀 주는 것처럼 깜깜한 세상을 밝혀 주는 것도 진리의 빛밖에 없습니다.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모든 오류와 잘못된 것들이 쫓겨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진리의 말씀으로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빛을 따라가는 빛의 아들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2. 진리대로 사는 삶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주실 때,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지 머릿속 기억 창고에 넣어두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이 제단 위에 놓여서 죄를 태우는 희생 제물로 드려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아름다운 봉사라 할지라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해지지 못할 때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데, 건강한 열매란 우리의 마음이 거듭나고 헌신적이며 어떤 일을 해도 그 동기가 순수한 것을 말합니다.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가 그 촛대 양옆에 서서 금촛대와 연결되어 계속해서 기름을 공급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영혼 안의 촛대가 가지들을 타고 금잔으로 흘러드는 하늘의 두 증인인 신, 구약 성경 말씀으로부터 기름을 매일 공급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서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이 없으므로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진리대로 사는 굴복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기 때문에 신랑의 길을 비출 수 있는 빛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자신을 개혁하고 성품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계속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와 목사들이 준비하여 준 성경의 가르침과 교리만을 가지고 개인적인 체험 없이 살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하나님의 말씀) 말고 또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매일 성경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성화의 방법이고 이것이 구원을 유지시키는 하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 유혹이 엄습할 때, 시험이 닥쳐올 때 성소(말씀)로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합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3. 성소 안의 떡상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5).

성소 안에 있는 떡상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의 경험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계 2:37)라는 흥미로운 말씀이 있는데,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이기는 경험을 위해서는 감추어진 만나를 먹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감추어진 만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매일 먹던 기적의 양식인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 지성소의 법궤 안에 두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나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하셨으니 만나는 곧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만나와 같이 매일 먹어야 살 수 있는 생명의 떡인 것입니다.
만나가 이 땅에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이 무엇이지?”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곧 “만나”라는 말의 뜻이었습니다. 만나가 이 땅 표면 위에 내려와 덮인 것처럼,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인간들 중의 하나가 되시어 말구유에 누워 계실 때에도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구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 만나이십니다. 만나가 밤에 내렸던 것처럼 이 세상이 죄와 오류로 깜깜할 때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만나는 시간이 지나면 스러져 없어져서 이른 아침에 나가서 구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날 하루를 거룩하게 보내기 위한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만나는 내일 먹기 위해 쌓아 둘 수가 없으며 그날을 위한 하루의 양식입니다. 만나는 우리가 농사를 지어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인 만나를 먹을 때, 우리의 영혼은 소생할 수 있고 죄에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4. 만나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찌니”(레 24:8).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의 세속적인 입맛 때문에 하늘의 만나를 싫어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세상적인 그럴듯한 이론이나 자극적인 영상, 그리고 인간의 사상과 철학, 증명이 되지 않는 가설들이 하늘의 생명의 떡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의 꿀맛 같은 경험을 잃어버리게 될 때 죄를 상징하는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살아날 길은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를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속죄제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되고 영혼이 다시 정결함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는 일을 우리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곡식이 추수된 후 농부는 맷돌로 그 낟알들을 갈아서 떡을 만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은 인류의 죄의 짐 때문에 짓눌리고 갈리시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서에 의하면 레위인들이 성소를 위한 진설병을 구울 때 다 익었는지 알아보려고 창처럼 생긴 긴 포크로 그 떡의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익었을 때 그 위에다 십자형의 표시를 해 놓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 경험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예법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살을 먹고 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안식일에는 음식을 요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성소의 떡은 안식일 아침에도 굽도록 지시되었습니다(레 24:8).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특별히 거룩한 날 아침에 풍성한 하늘의 양식을 먹도록 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몸소 체험한 생명의 양식을 매 안식일 아침마다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식은 떡이나 지난주에 구운 떡들을 나누어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말씀은 매일 연구해야 하며 바로 그 말씀 자체가 우리의 가는 길에 빛이 되고 순례자에게 힘을 주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5. 분향단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분향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시는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상징하는 아카시아 나무에다 정금을 씌워서 만든 분향단은 법궤나 떡상보다 더 높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그리스도의 중보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한 부분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분향단의 향이 성소 안에 자욱하여 우리를 지성소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쉐키나 광채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늘에는 예수님의 공로, 그분의 생애에 나타난 자아 부정, 자기희생으로 만들어진 의의 향이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와 함께 향연으로 올려지기 위해 간직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의 진지하고 겸손한 기도들이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갈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그분의 완전한 순종의 공로를 섞으십니다. 우리의 기도들은 이 향으로 말미암아 향기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로 서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인 예수님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성도들과 부활한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광채 앞에 서서 “그분 앞에 누가 능히 서리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 즉 주님의 은혜의 향이 섞이지 않으면 아버지께 상달될 수가 없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연결해 주시는 고리입니다.

 

6.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죄인이 성소 뜰에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후에 믿음으로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경험이 있어야 제사장이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려 속죄를 얻도록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 경험을 상징적인 의미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죄를 씻어버리는 진정한 개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가 아무리 많은 진리를 이해하고 동의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로 옷 입혀지거나(칭의) 중보의 기도를 받은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소 뜰의 경험을 통해서 성소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실 수가 없는데, 그의 죄가 진정으로 뉘우쳐지고 포기되어 양으로 전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실상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를 받는 자는 아주 적을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고백한 죄들이 실상은 한 번도 하늘 성소에 올라가서 대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죄 사함을 받은 적이 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백한 죄가 하늘 성소로 옮겨져서 죄 사함을 받았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죄가 성소로 옮겨지지 않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희생제물을 드렸다고 해서 성소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성소 제도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경험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만 중보의 향이 그들의 죄를 가려 줄 것입니다. 성도들이 완전한 성품을 향하여 성소의 길을 경험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의 향이 그들을 가려 줄 것이며, 대속죄일에 죄인이 지성소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기 위해 나아가는 동안,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향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완전한 생애를 산 것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7. 분향단의 향과 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분향단의 향은 특별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게 되어 있었고 아무나 그 향의 재료를 흉내 내어 만들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출 30:34~38), 그 이유는 성소의 향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죄 없는 생애 즉 그분의 거룩한 의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또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우는 분향단의 네 뿔에는 속죄 제물의 피를 바르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용서의 은혜가 세상 어디서든지 회개하는 자녀들에게 힘 있게 나아간다는 상징입니다.
성소의 분향단의 불은 아무 불이나 가져다가 사용할 수 없었고 반드시 거룩한 불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거룩한 불이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부터 가져온 불로써 제일 처음 그들이 성소 봉사를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셨던 그 불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사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나온 거룩한 불 즉 인류를 위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위한 갈보리의 속죄의 희생이나 중보의 기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거룩한 불은 바로 거룩하고 뜨거운 그분의 사랑입니다.
번제단에서 드려진 속죄제로 인하여 죄인이 용서를 받고 구속함을 얻을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되었으나 막상 제사장이 그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죄인이 고백한 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분향단 앞에서 드리기까지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레 4:26 참조)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의 구속을 위한 준비가 마련된 것이지 거기에서 우리의 구속이 다 끝나고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지상 성소에서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수시로 제사장들을 교체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 성소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자신의 피로 하늘 성소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살아 계신 중보자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소에 있습니다.

 

8. 그리스도와 성령의 중보 사역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가 갈보리의 십자가로 나아갈 때 그곳에서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하여 정죄를 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회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로부터 사유하심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번제단에서 세상 죄를 위해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자로 상징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상 성소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날마다 드리는 제사와 해마다 드리는 속죄는 더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참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이 그 제사들이 상징하는 원형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범죄를 계속하기 때문에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보혈을 항상 다시 적용시키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식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이 지상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셨던 것처럼 지금 하늘 성소에서도 당신의 흘리신 피를 제시하시면서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모든 범죄와 모든 사소한 실수를 위해서 지금도 그분의 보혈을 제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인간을 위해 계속 중재하고 계시는데,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처럼 그분의 피를 바쳐서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우리의 기도와 참회를 자아내며 찬송과 감사를 불러일으키고 계십니다. 참된 신자가 드리는 종교적 의식, 기도, 찬송 및 죄의 자복은 분향처럼 하늘 성전으로 올라가기는 하나, 그것들이 인간의 타락한 통로를 통과함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입지 않는 한 더러워져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게 여겨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께 받으시는 바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9. 성소 안에서의 범죄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겔 18:24).

성소 뜰에서 칭의의 경험을 통해 성소 안으로 들어간 그리스도인이 성소 안에서 다시 범죄했을 때는, 성소 안에는 죄의 용서를 위한 희생 제사가 없기 때문에 다시 성소 밖으로 나가서 희생 제물을 구해 성소 뜰에서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성화는 그리스도인이 칭의의 경험을 얻을 때 동시에 마음속에서 시작합니다). 물론 처음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처럼 오랜 자복이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된 어린양을 스스로 죽이는 경험을 다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가지 않고는 어떠한 죄인도 진정으로 죄의 모습을 보고 슬퍼할 수가 없으며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다시 거듭남의 경험을 한 후에 성소 안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을 덮어준다는 가르침은 성소의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영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성소에서 성화의 길을 걷다가 수십, 수백 번의 실수나 범죄를 통해서 성소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할 수가 있으며 그 회수가 많아짐에 따라 우리의 양심 또한 그렇게 무뎌진다는 두려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되 감사함과 존절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죄와 함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에게 늦은비 성령의 역사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늦은비 성령은 죄를 다 이기게 해 주고 성품을 완전하게 해 주기 위해서 임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승리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성품을 온전하게 이룬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10. 지성소의 의미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시 80:1).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법궤 위에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가 있습니다. “쉐키나”는 히브리 말로 “임재”라는 뜻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성소의 최종 목적지요,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성소 뜰의 칭의의 경험과 성소 첫째 칸의 성화의 경험들을 통과한 것은 지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인 쉐키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 위함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광채 앞에 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방법을 따라 죄의 문제를 마음속에서 완전하게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소는 다른 의미에서 심판을 뜻합니다.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가 다시 에덴으로 회복되려면 우리를 쫓겨나도록 만든 그 죄가 아직 우리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고 검토하는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심판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추악한 죄인의 모습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된 삶을 살았는지 확인받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는 정확하게 조사되어 내가 하늘에 살기 적합한 사람인지 확증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죄인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저 용서해 주시고 씻으셔서 모두 다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이라면 그토록 오랫동안 죄의 역사를 길게 끌거나 재림을 지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정말로 죄를 슬퍼하며 죄를 버릴 마음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고, 그가 믿음을 통해 정말 죄를 미워하여 버리기로 작정하였으며, 그 증거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죄를 승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회개한 죄인이 정말로 회개한 것인지 그 회개의 경험을 줄곧 지켜오고 있는 것인지를 조사해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빛에 대한 온전한 순종은 우리 믿음의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11. 공평하신 하나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계 19:1, 2).

거듭남의 경험은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받는 용서와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일이 있기 전까지는 조건적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끝까지 주님의 손을 놓지 않고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이상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분께 나아오는 자들은 결단코 내어 쫓지 않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도 모든 일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살피는 심판은 오히려 천사들과 우주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공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동기와 생각들을 기록한 책들을 펼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알게 하실 때, 온 우주가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함과 의로우심을 의심 없이 모두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피조물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의심의 씨를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은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공의로우신 성품을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계시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는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와 경외하는 일이 순수한 존경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행함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 자체가 의롭고 자비로운 심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옹호하고 구원이 합당하다는 것을 공표하려고 심판을 베푸시는 것이지 죄를 찾아내어 정죄하기 위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사 1:27)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통해 구속을 받게 됩니다.

 

12. 지성소의 법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법궤는 “언약궤” 또는 “증거궤”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기초로 해서 그분의 백성과 언약을 세우셨던 까닭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그 법궤 위를 “시은좌”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보좌의 기초는 하나님의 십계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을 없애며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에게 집행유예 기간을 주셨으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율법의 요구인 최후의 심판을 피하고 조건적인 은혜의 기간을 얻도록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속하는 자들에게 그 은혜의 피는 영원한 용서와 생명을 주게 되는 것이요, 그 피를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국에 가서 그 용서의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 것입니다.
법궤는 영어로 “Ark”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성경에 세 번 적용되었습니다. 노아 홍 수 때의 방주, 아기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어 보냈던 갈대 상자, 그리고 지성소의 언약궤입니다. 이 “Ark”는 한 세대에서 다시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게 만드는 상자로 죄악 세상에서 의로운 세상으로 넘어갈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품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법궤 안에 담겨 있던 만나의 항아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법궤 옆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는데, 첫째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계명을 지키는 참된 남은 교회로 인도하시기 위해 그분이 택하신 선지자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고, 두 번째는 마른 지팡이에서 새싹이 난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중생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자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13. 그룹 천사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시 99:1).

법궤 위 시은좌의 양옆에 서 있는 정금으로 만든 두 그룹 천사들은 원래 넷이었습니다. 법궤 위에 둘이 있었고 나중에 다윗이 계시 가운데 지시를 받고 아들 솔로몬에 의하여 짓도록 명한 솔로몬 성전에는 두 그룹 천사가 추가되어 지성소 법궤 앞바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왕상 6장 참조). 법궤 위에 있던 두 그룹 천사들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바닥에 놓였던 천사들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그 위에 씌운 것입니다. 여기서 조각목은 타락한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룹 천사들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하나님을 호위하는 것입니다. 법궤 위의 그룹 천사들이 시은좌의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들의 몸과 날개로 반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네 그룹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온 우주 앞에 가장 잘 반사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돌아와 주님의 사랑을 통해 온전하게 변화되고 순결해진 인간들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품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닮을 수 있고,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존재가 이 우주 가운데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탄은 항상 인간들에 대한 비난을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제시하고, 그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잃어버렸다고 역설하면서 그들을 범법자로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것과 같이 인간들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 속에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회개하는 영혼 속에 거룩한 능력을 주셔서 타락과 부패로부터 우리를 들어 올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인간들을 고상하게 고양시키고 회복시키시어, 사탄과 악한 천사들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생긴 하늘 궁전의 빈자리들을 채우고 우리가 다시 거룩한 천사들과 친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처럼 성소 제도 속에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과 오묘가 설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14. 대제사장의 역할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6, 17).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모든 허물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정결케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날에 너희를 위해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고 한 것처럼 대속죄일을 지나기 전까지는 사실상 죄로부터의 완전한 정결은 아직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매일 자복하고 회개한 우리의 헌신을 통해 우리는 구원과 용서를 누리고 삽니다. 그러나 그 구속의 경험을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유지해 나가야지, 한 번 얻었다고 영원히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을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제사장들이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대속죄일의 정결 사역을 선포하며, 그 중요성을 설명해야 하는 제사장들이 먼저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경험이 없이 어떻게 대속죄일 사역을 집행하고 가르치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속죄일에 제사장들이 먼저 몸을 씻고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던 것처럼 교회 지도자들의 진정한 속죄의 경험으로부터 교회의 속죄의 역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의 마지막 날인 대속죄일에 제일 먼저 자기 자신과 자기의 권속들을 위해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시은좌 위와 그 앞에 일곱 번 뿌리고 죄를 완전히 용서받고 도말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속죄일에도 매일 드리는 제사가 함께 드려졌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아직 고백 되어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까 하여 수양을 속죄제로 여전히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주님을 위해 뽑은 숫염소를 죄의 도말을 위해 잡을 때까지 아직 그들에게는 용서의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교회의 부흥과 개혁은 지도자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5. 대속죄일의 삶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계 11:15~18).

역사적으로 현대의 교회가 대속죄일에 들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시록 예언 가운데 하나인, 일곱 나팔 사건 중에서 제일 마지막 일곱째 나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예언적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일곱째 나팔 시대가 하늘 지성소가 열리는 대속죄일의 시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지성소 안의 언약궤가 보이는 모습은 지성소 시대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사실 때는 성소 뜰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성소 시대로 들어가서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고 거룩해져야 하는 요구에 대하여 이해하기 시작한 성소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종결짓는 마지막 대속죄일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각각 심판을 통해서 과연 그들이 영원히 살게 하는 참된 믿음과 성품을 가졌는지를 평가받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거룩하신 면전에서 살 수 있는지를 판단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자들인지를 평가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경험은 각자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자는 성소 뜰의 경험을 하고 있을 수 있고, 어떤 자는 성소 안에 서 있으며, 어떤 자는 지성소의 경험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자들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아직 성소 뜰 안으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자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냉철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16.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 4).

우리가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구원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한 것처럼 믿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한 것처럼 죄를 자백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누구나 다 의롭다 하시고 구원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생들을 위해 구원을 마련해 주시고, 용서를 보증해 주신 것은 맞지만, 그것이 나에게 실제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버리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한 로마 군병들을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희생 제물의 피 흘림이 중요하지만,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중보하고 심판하는 역할도 구속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죄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권세)을 함께 주시는데, 이 경험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실제적인지 살피고 심판하는 것은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2장의 왕이 예복을 심사하는 혼인 잔치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쉽게 깨닫게 합니다.

 

17. 대속죄일의 영적인 의미

“이날에 너희를 위해 속죄하여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드리는 속죄를 통해 용서를 받아오고 있었으나 그들이 대속죄일에 가서 모든 죄로부터 온전히 정결케 되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죄를 정말로 회개하여 다시는 악에 빠지는 일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야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옛날 대속죄일의 경험은 말세에 교회의 영적인 경험과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을 상징한 것입니다.
대속죄일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첫 번째는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회개를 의미하며 아직 고백하지 않았거나 버리지 아니한 죄가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표상적 의식에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속죄의 봉사를 하는 동안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태도로써 죄에 대하여 슬퍼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대속죄일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용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은혜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오늘날, 죄를 슬퍼하고 진정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가진 경박한 정신은 반드시 버려져야 합니다. 마음의 악한 경향들과 싸워 이기려고 하는 모든 사람 앞에는 반드시 격렬한 투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할 일입니다. 어떤 사람의 순결과 헌신이 다른 사람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 없습니다. 비록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사건을 조사하시기를 마치 세상에 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조사를 받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복음의 능력은 한없이 커서 우리가 죄를 너무나 미워하게 되어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게 해 주실 충분한 능력이 있음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18. 정한 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 14:4).

대속죄일의 행사 중 제일 마지막으로 행해지는 것이 바로 사탄을 상징하는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몰아 보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사셀 염소는 속죄 사역의 일부가 아니라 속죄가 끝난 후에 죄에 대한 책임을 지워 심판하는 과정입니다. 이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가는 자를 “정한 자”라고 하는데, 그는 대속죄일이 끝나려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엄숙하게 지켜보는 가운데서 아사셀 염소를 끌고 무인지경의 광야로 몰고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정한 자가 그 염소를 놓치게 되면 온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정한 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이 아사셀 염소는 염소 둘이 끌려왔다가 한 마리는 죽었기 때문에, 자기의 운명을 알아차리고 도망하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때 그 염소를 끌고 나가는 이 정한 자는 바로 사탄을 천년기의 황폐한 곳으로 내몰고 나가는 십사만 사천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죄의 도말을 받고 살아서 승천할 성품을 이루었으며, 중보자 없이 야곱의 환난을 통과한 살아 있는 의인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사탄을 대항하여 마지막 전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보자가 없는 시기에 산다는 뜻은 더는 용서의 은혜가 없는 시기, 즉 인류를 위한 은혜의 시기가 다 끝나게 된 시간을 말합니다. 인침이 끝나고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지어진 이후에 복음의 능력으로 준비된 성품을 가진 성도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만 사는 성도들이 더는 죄의 파워에 지배됨 없이 죄 없는 생활을 사는 짧은 시기를 말합니다. 그 시기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 칠 재앙의 심판이 떨어지는 시기입니다. 그때에 분노한 사탄은 마치 과거에 자기가 에서를 충동해 야곱을 향하여 군대를 진군시킨 것과 같이 환난의 때에 악한 자들을 선동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9. 사탄의 시험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사탄의 이 땅에 대한 최상권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사탄이 그들을 세상에서 제거해 버릴 수만 있으면 그의 승리는 완성될 것입니다. 사탄은 거룩한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죄가 용서된 것도 짐작하고 있지만 그들의 문제가 하늘 성소에서 결정된 것은 모릅니다. 사탄은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했던 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 죄를 하나님 앞에 크게 과장하여 제시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도록 제거된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죄는 용서해 주시면서 자기와 자기 부하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불공평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그들을 자신의 손에 넘겨주어 멸망시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한 것에 대하여 비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탄이 욥을 시험해 보도록 잠깐 허용해 주셨던 것처럼 할 수 없이 성도들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의 확신과 믿음과 인내의 정신은 욥과 같이 격렬하게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시련과 유혹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우주에 증명할 것이며, 사탄의 고소가 틀렸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증거하면서, 사탄을 천년기의 광야로 즉 황폐되어 있는 이 지구 위에 천 년 동안 혼자 갇혀 있게 할 것입니다. 그 기간에 악인들은 죽어 땅속에 있으며, 의인들은 하늘에 올라가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게 되는 것입니다.

20.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약 1:13).

중국의 고사 성어 중에 “희구지심(喜懼之心)”이라는 말은 기쁘면서도 두렵다는 뜻인데요,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를 살게 되면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 예언의 참된 내용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은혜의 시기가 마쳐지고 그 후에 중보자 없이 서야 하는 믿음과 성품을 가져야 하는데, 그 경험은 바로 지금부터 쌓아 나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십사만 사천인”이라고도 하고 “예수의 증인”이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의 시기를 지내고, 칠 재앙이 내리는 동안 겪게 될 야곱의 환난을 견디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내릴 때, 하늘에서 더는 중보하시고 용서하시는 사역이 없을 때, 하나님 앞에 설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믿음을 조금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기만적 권세와 양심을 억압하는 짐승의 표 법령에 굴복할 위험이 매우 큽니다. 비록 그들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내게 될지라도 그들은 환난의 때에 준비된 자들보다 더욱 심한 고난과 고통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훈련의 기회가 있을 때 등한히 한 믿음의 교훈을 무서운 절망 가운데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쌓아야 합니다. 천사들은 우리의 열렬하고 진실한 기도들을 기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누는 기도를 등한히 하기보다 차라리 이기적인 생활 방식을 버리고 개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난과 극기의 경험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부귀와 명예와 안이함보다 훨씬 낫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일에 몰두 당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허용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우상인 재산과 가족, 건강까지도 빼앗아 가심으로 우리에게 기도할 시간을 일부러라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21. 인침의 경험을 하는 자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인침(Sealing)이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침은 단 한 번에 도장을 찍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과 성경의 진리로 점점 이해가 밝아지고 신앙의 경험이 깊어져 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경험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이 점점 더 밝게 다가올 때 계속해서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라고 말씀합니다. 의인들은 진리를 통해 개혁해 나가면서 주님을 더 밝히 알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이 원숙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표준은 죄를 짓지 않고 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우리의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아 하늘에 올라간 후에도 성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더욱 닮아가는 성장을 해 나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표준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품인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뜻은 죄에 승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그분의 형상을 새겨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인침의 경험이 시작됩니다. 하늘에 들어갈 모든 사람은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침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22.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딤후 2:19).

인침은 죄와 부정함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받게 됩니다. 마지막 환난의 바람이 불어닥치기 전에 하나님의 참 백성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 준비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짐승의 표 환난을 통과하면서 이마에 받는 마지막 인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충성스러운 믿음을 지키고 욥처럼 인내하는 성품을 소유한 자들의 이마에 쳐지는 특별한 인입니다. 어떠한 입장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을 져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 가지고 사셨던 그 믿음을 얘기합니다. 절망의 순간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셨던 그 믿음 즉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로 그 믿음이 예수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소유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전쟁입니다. 다니엘 3장에 기록된 두라 평지에 세워진 우상에게 경배하라는 명령으로 생겨난 환난은 둘째 계명인 우상 숭배에 대한 것이 이슈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짐승의 표 환난도 짐승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형식의 예배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인가에 대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투쟁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의 이마에 쳐질 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입니다. 두라 평지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들 중에 세 명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사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마지막 짐승의 표 환난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인지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23. 성소 정결 사역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4).

대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시는 날이지만 일 년 내내 그들의 죄로 더럽혀진 성소도 정결케 하시는 날입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 죄악의 기록들이 하늘 책에 기록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실 때 우리가 그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포기하였으며 그래서 그 죄의 문제를 양심 속에서 해결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같은 죄를 계속해서 범해 간다면 하늘 천사들은 우리의 죄를 책에 썼다가 지웠다가 하는 일을 계속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범하는 일이 죄인의 생애에서 그치게 될 때 그 죄의 기록을 기록책에서 지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의 도말이라고 부릅니다. 이 죄의 도말은 그 죄인의 마음속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선재 되어야 하며, 그때 우리는 그 죄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성소 뜰에서 양을 죽이고 흘린 피 속에는 죄인이 고백한 죄를 담고 있는 것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 양의 흘린 피를 가지고 제사장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 앞바닥에 일곱 번씩 뿌린 후에 죄인을 위해 기도할 때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백한 죄악들이 하늘 성소로 올라가서 기록책에 보관되고, 예수님께서 그 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릴 때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성소 제도는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하늘 성소는 우리의 죄 때문에 더럽혀져 있는 것입니다.
대속죄일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 주위에 모여서 정말로 자기가 철저하게 죄에 대하여 회개를 하였으며 죄를 버렸는지에 대해 자신을 살폈던 것처럼, 우리도 역사적으로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그 죄를 버리고 정결함을 입어야 죄가 기록책에서 도말되고, 그 결과로 성소가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24. 죄의 도말과 우리의 삶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죄의 도말은 마지막 세대의 남은 백성이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험입니다. 이 경험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승천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누리게 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며 특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어떻게 도말 되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죄가 도말 되려면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의 도말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일반적인 죄의 용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마치 우리가 그러한 죄를 전혀 짓지 않은 것처럼 잊어버리시고 깨끗이 씻으시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좀 더 구체적인 구속의 단계에서 마지막 최종적인 구원의 역사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들을 기록책에서 지우시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특별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와 죄의 도말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일 년 내내 성소의 봉사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이며, 죄의 도말은 대속죄일에 한 번 단행하는 최종적인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적인 우리의 경험에서 살펴보면, 죄의 용서란 우리가 평상시에 짓는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이름 밑에 “용서받았음”이라고 기록해 두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심사하는 심판을 거쳐서 우리의 진실함과 계명을 지키는 성품이 드러나기까지는 우리 죄의 기록을 아직 지우지 않고 기록책에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매일의 용서도 분명한 용서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의 속마음이 아직 인 쳐지기까지는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죄의 용서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회개했던 때와 똑같이 유지하여 심판 날까지 변함이 없을 때 확정되는 것이며, 우리가 변함없이 죄를 미워할 때 우리가 받아온 용서들은 결국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25. 유쾌하게 되는 날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해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 20).

죄의 도말을 예언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심판이 있은 후에 단행되는데,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악에서 떠나면 죄의 도말의 경험이 우리에게 이르러 온다는 조건을 말하면서 그 시기는 주 앞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유쾌하게 되는 날에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은 마지막 시대에 위대한 복음 사역을 통해 열매들이 추수될 때, 그 성령의 역사를 늦은 비 성령의 역사라고 하며,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른 비 성령이 내림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늦은 비 성령이 크게 임함으로 추수 사역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농사에 있어서 씨앗을 뿌리고 발아할 때는 이른 비가 내리고 추수 때는 늦은 비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가 기대했던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유쾌한 날을 영어로는 “The Times of Refreshing”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그것은 작물이 열매를 맺어 추수되는 시기, 농부들이 기뻐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시기에는 이른 비로써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말세에는 주 앞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유쾌하게 되는 날, 즉 마지막 복음의 열매를 추수하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영어 번역의 또 다른 의미는, “다시 새롭게 되는 때”로서, 우리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으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온전하게 회복된 기능과 용량을 가지고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며 구원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상태로 다시 새롭게 되돌아간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우리 모두 유쾌하게 되는 날을 맞이하기를 소망합니다.

 

26. 죄가 도말된 사람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시 51:9).

죄를 도말한다는 것은 죄의 기록을 말끔하게 지워서 없애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실 수가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잊어버리시기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죄의 장본인이 그 죄를 진실로 회개함과 또한 그 죄를 미워하여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기면서 그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성품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거나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성품이 준비된 상태를 확인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심판을 끝내시고 그의 모든 죄를 기록책에서 도말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기록책 뿐만 아니라 우리의 두뇌 속에서도 죄의 기록을 지우셔서 우리가 더는 지은 죄를 기억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유쾌하게 되는 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여전히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 때문에 우리의 영혼 속에는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며 우리가 타락한 통로가 되었다는 죄의 기억 때문에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지 못하므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죄의 도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두뇌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부분만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셨던 역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여 바벨탑을 쌓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반역과 죄가 급속하게 세상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두뇌 속에서 지금까지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의 기억력을 지워 버리시고 그 대신 다른 언어들의 프로그램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면의 기억들과 그들의 개성 내지는 성품에 관한 기억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건들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아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역사하시는 창조의 능력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27. 대속죄일을 살아가는 사람들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회개한 사람들을 위해 그분의 피를 가지고 호소하시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 것처럼, 지상 성소의 제사장들은 표상적으로 매일의 사역에서 죄인들을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성소에 뿌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회개한 죄인을 율법의 정죄에서 풀어 주게 되어 있었지만 죄를 도말하기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의 기록은 최후의 속죄까지 성소에 남아 있었습니다. 죄인이 그 죄악들을 버리고 온전히 회개하였는지를 검증하여 지워 버릴 때까지 죄의 기록이 보관되는 것입니다. 대속죄일을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피의 공로로 회개하고 죄를 포기한 모든 사람의 죄가 하늘의 기록책에서 제거됩니다. 이렇게 하여 성소 자체가 죄의 기록에서 해방 또는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이 속죄의 큰 사역, 곧 죄를 도말하는 일이 하늘 성소의 모형인 지상 성소에서 매년 행해지는 대속죄일의 의식들로 상징되어 있었습니다. 죄가 회중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광야로 옮겨진 것처럼, 최후의 속죄에서도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의 죄가 하늘의 기록에서 제거되고 다시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죄들은 망각의 세계로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고 그들은 그것들을 다시 기억해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죽은 의인들은 죽어 있는 동안에 땅속에서 죄의 도말의 경험을 하게 되고, 살아서 승천할 성도들은 죄의 도말의 경험을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와 분리되는 경험을 하여야 합니다. 구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그분의 능력에, 우리의 무지를 그분의 지혜에, 우리의 무가치함을 그분의 공로에 연합시키기를 간청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도말되는 대속죄일의 기간에 살고 있습니다.

 

28.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자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계 15:2).

짐승과 그의 우상과 이름의 수를 이겼다는 의미는 짐승의 표를 강제하는 박해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란 의미이기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 환난을 통과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서 땅으로부터 끌어올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그들은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의 시기를 지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마지막으로 내릴 때 중보자 없이 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은 마지막 세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14만 4천인은 복음의 청사진인 성소의 복음을 온전히 체험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회복된 모든 진리의 빛을 깨닫고 바벨론의 오류의 포도주에 취하지 않으며, 오류를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멸망하게 하는 더러운 음녀와 음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시대의 믿는 자 중에서 제일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고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의 증인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첫 열매로 준비되고 인 쳐지는 일이 먼저 생겨야 마지막 추수 사역이 시작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과거 어느 누구도 불러본 적이 없는 새 노래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홍해에 막혀 있을 때 물을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경험을 노래하는 모세의 노래, 악인들에게 사면초가로 둘러싸여 죽음에 처하게 될 때 하늘을 가르시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구속함을 노래하는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야곱의 환난과 같은 큰 환난에 직면하나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계 7:16)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9. 율법의 필요성을 증거하는 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선악 간의 대쟁투는 최초부터 하나님의 계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순종할 수 없고 그 계명을 폐기하지 않고서는 죄인이 용서받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사 죄인의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와 같은 시험과 유혹들을 당하시면서도 죄의 파워를 이긴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는 자비를 없애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계명은 의로우며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율법을 대항하는 전쟁은 세상의 종말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예수님 자신이 보이신 그 온전한 순종의 모습을 최후의 한 무리를 통해 재현시켜 보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우주는 죄인이었다가 회복된 인간들을 다시 죄 없는 하늘로 맞아들이기에 지극히 안전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은 각 개인들이 자기 시대에 주어진 빛의 양에 따라 판단을 받게 됩니다. 과거의 어떤 이들은 진리를 몰랐거나 깨닫지 못했기에 그렇게 행하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그들이 아는 범위의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그러한 자들의 부족을 지목하면서 완전치 못한 자들을 왜 구원하느냐고 하나님을 고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세대의 증인들을 통해 특별한 증거를 준비하십니다. 모든 진리가 회복된 세대에 사는 14만 4천인들은 자기들이 깨달은 모든 진리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품을 보임으로, 과거의 구원받는 세대들도 이 14만 4천인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도 이 진리의 빛을 알고 이해했더라면 그들 역시 똑같은 충성과 순종을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0. 지구 역사의 끝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참된 영적 이스라엘의 계통을 이어받은 한 교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14만 4천인으로 12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참된 영적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의 막내로 태어난 마지막 세대, 곧 유전 법칙에 의하여 가장 연약한 몸과 마음을 갖고 태어난 우리를 연단하시어, 성령께 온전히 굴복한 인간은 누구나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우주 앞에 증명해 보이시려고 하십니다. 그때 그들 앞에서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욥 1:9, 10)라고 고소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욥을 시험하도록 사탄에게 내어 주셨던 것처럼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탄에게 시험하도록 허용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14만 4천인들을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고백처럼 그분의 백성들을 다시는 죄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성품으로 준비시키신 후에 이 세상의 은혜의 문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 그리고 완전한 순종을 위해 경험한 모든 훈련이 그들로 하여금 사탄의 고소를 영원히 침묵시킬 것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께 욕을 돌릴 수 없다는 지극한 사랑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마침내 사탄의 고소가 침묵으로 바뀔 때, 온 우주는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도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아멘!” 하고 외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와 14만 4천인들의 간증은 다시는 우주에 죄와 반역이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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