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호 매일의 만나

매일의 만나

열한시 월간지 258호

1. 요한계시록 안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

오늘날 세상은 전례 없는 재난들이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을 하니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느끼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불길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갑작스럽게 올지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미래를 성경의 예언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펼쳐 보이셨는데, 바로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입니다. 다니엘서는 바벨론으로부터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제국을 거쳐 현재의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과 마침내는 지구의 종말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세계 역사의 대 파노라마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후부터 인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우주 전쟁과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세력 간의 대전쟁의 사건들과 특별히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연구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으며, 다가오는 미래 또한 알 수 있고 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를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끝”(계 21:6; 22:13)이요, “처음과 나중”(1:17; 2:8; 22:13)이라고 가리키고 있으며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좋은 소식”을 그 속에 담고 있는 복음서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맞을 거룩한 신부로 준비되기 위해 성경의 예언들을 연구 하여야 하겠습니다.

 

2. 에베소교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사도 시대의 선교적 열성과 교리적 정통성, 그리고 도덕적 순결로 특징 지워져 “첫사랑의 교회”로 불릴 만큼 바람직한 교회였던 에베소는 AD31년부터 100년까지 1세기의 초대교회를 예표합니다. 에베소는 한때 로마제국의 아시아도의 도청소재지가 될 정도로 대도시였고 정치, 상업 및 이교의 중심지로서 “아시아의 빛” “아시아의 첫째 도시”로 불렸습니다. 특히 에베소는 다산의 여신인 아데미(로마인은 다이애나)의 고향으로 “온 아시아와 천하”(행 19:27)가 광신적으로 그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이렇게 이교가 성행하는 에베소에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을 하는 중에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서 그들과 함께 에베소를 방문(행 18:18~21)하면서 복음이 전해졌고, 이후 이곳에 남게 된 브리스길라와 젊은 설교자인 아볼라는 열심히 전도해서 마침내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성경에서조차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계 2:2) 한 것처럼 헌신적인 성도들 때문에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니골라당과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이세벨 등 타협을 조장하는 세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교리적 순수함은 유지했지만 거짓 가르침을 조사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형제를 의심하고 동료 신자들의 정통성을 점검하느라 교회는 사랑이라는 복음의 특성을 팽개치며 율법주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교회도 건전한 교리의 중요성은 부인 할 수 없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종교활동,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멸망의 원인이었으며 또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3. 서머나교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교회 역사에서는 사도시대 다음인 AD100년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공인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313년까지, 200여년간 혹독한 핍박을 치른 시대를 서머나 교회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서머나는 몰약과 같은 뜻인데 마치 몰약이 짓눌려 부서질수록 더욱 짙은 향기를 피우듯이 서머나 교회는 심한 핍박과 고난을 당할수록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의 향기를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 받은 이유는 당시 황제 숭배는 의무적이었고 거절하면 각종 경제 제재와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들에게 극렬한 적개심을 나타낸 이들은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고 이들은 열심히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오늘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 있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고,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바로 내가 “사탄의 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 나가서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주님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오늘 준비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외로웠을지라도, 그들은 은혜와 믿음에는 부요했습니다. 반대로 육신과 물질에는 풍요하지만 영적으로는 빈 깡통인 라오디게아 교회와 뚜렷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회질서를 어기는 자들로 낙인 찍어서 사고파는 매매를 못하게 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급기야는 다 죽이는 무자비한 박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을 맛보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개인적으로 잘 알아야 환난의 때에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해야 마지막 때에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버가모교회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버가모 교회 시대는 313년부터 시작해서 로마교회가 중세기의 교권을 실제로 장악하여 지상권을 행사하게 된 538년까지로,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세상과 국가에 적합한 교회가 되기 위해 좁은 길의 투쟁 대신 큰 길을 선택해 배도한 중세 교회가 됩니다. 버가모는 특히 이교가 성행한 도시로서 고대 바벨론의 신비적인 거짓 종교를 로마 제국에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다시 이교 로마를 교황 로마로 연결해 줌으로써 역사적인 인터체인지가 되었고 “사탄의 권좌”가 버가모에 있다는 말씀의 의미가 뚜렷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버가모는 이교 숭배와 더불어 로마 황제의 숭배까지 강요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지정해 주신 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신앙이 나타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도피가 아니라 정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서머나 시대 동안 사탄은 로마제국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혹독한 핍박으로 정복하려고 했으나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버가모 시대에 이르러서는 발람의 계교를 써서 돌연히 유화정책으로 바꾼 뒤, 그리스도인들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고 번영과 명예를 미끼로 교회를 단번에 세속화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게 되자 교회는 이교의 감화에 휩싸여 우상 숭배에 참여하고, 세상과 간음하여 정치와 종교가 하나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계 2:14; 약 4:4 참조)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도(聖徒)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분리되고 따로 구별된다는 뜻으로(고후 6:17 참조),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하신 주님의 음성에 우리도 지금 무릎 꿇고 발람과 발락의 유혹에서 벗어나 거룩한 성도로 구별되어야 하겠습니다.

 

5. 두아디라교회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5,26)

4, 5세기 버가모 시대 동안 꾸준히 성장해 온 교황청이 538년 마침내 권력을 장악한 이후 1517년 10월 31일 루터에 의해 타격을 입고 세력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한 때까지를 종교 암흑시대인 두아디라 시대로 구분합니다. 이 시대를 그토록 패역하고 배도하게 만든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중세시대의 교회는 정치와 종교를 망라해서 권력을 휘두른 로마 카톨릭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적인 권력에 집착하여 오만해 지고 형식주의에 빠져 냉랭하며 세속에 짙게 물들어 악취가 심하게 날 때 진흙탕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나 사랑과 청빈과 봉사와 복음전파의 기치를 높이 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왈덴스인들과 종교개혁의 샛별인 위클리프, 얀 후스와 제롬 등이었습니다. 반면에 파멸의 여선지자 이세벨이 두아디라 시대에 다시 나타나는데, 교회는 세속의 권세와 동맹을 맺어 교권과 정권을 함께 장악함으로써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관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세벨은 자신이 간음하고 우상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 세력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교회도 두아디라 교회처럼 실제적 불륜과 영적 불륜이 혼합되어 있지 않은 지 심각하게 돌아 볼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계 18:21)고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현대 이세벨인 음녀와 연합한 모든 나라들과 종교들과 개인들의 영원한 파멸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진리가 거대한 횃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큰 영향력이 없어도 좋습니다. 작은 촛불이라도 함께 들고 있으면 서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그렇게 함께 들고 있다면 세상은 이 빛을 절대 감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진리로 밝히는 이 운동에 함께 전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6. 사데교회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로 16,17,18세기에 걸쳐 실제로는 개신교 태동의 전체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시대가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각 시대 교회들 모두의 기대를 크게 저버린, 즉 생명 없는 무기력으로 전락해버려 19세기에 있었던 복음 선교 대운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가 오기까지 개신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는 종교개혁의 후손들끼리 교리 싸움과 세속화에 영적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개혁자들의 생생한 진리와 경건은 점점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퇴보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신앙에 있어 치명적인 사실은 신앙이 생명이 되는 역할을 그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의 신앙은 참된 복음을 잃어버렸고, 신앙보다 자신들의 신학에 맹목적이 되어버렸으며, 내적인 경험보다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회는 외적인 윤리조직으로 전락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경험으로 바꿔지는 신앙, 그리고 심령 속에 거룩한 능력으로 머물게 되는 신앙은 잊혀진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중단되어 버린 종교개혁을 완성시켜서 성경의 참 진리를 회복하고, 초대교회 당시 있었던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같은 늦은비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세속과 비진리가 교회 안에 밀려들어 오는 이 시대에 진리의 울타리로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예수께서 전해주신 그 순결한 복음으로의 회복을 외치는 하나의 물결, 하나의 운동이며, 마태복음 20장 포도원의 비유에서 일을 마치기 위해 맨 마지막에 부름 받은 11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라는 1620년 청교도들의 아버지라 불리운 로빈슨 목사의 고별 설교 중 한마디가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7. 빌라델비아교회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이라는 뜻이며 사데 시대의 종결로 보는 1798년부터 1844년까지로 적용시키는데 적합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은 없이 칭찬만 있을뿐더러 최고의 영적 상태를 유지한 교회로 특징지어져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시대는 구약의 성막제도에서 대속죄일에 해당하는 하늘 성소의 정결(단 8:14)이 있게 되는 2300주야의 끝인 1844년의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바로 이 해에 가장 거룩한 장소인 하늘 지성소에서 가장 거룩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거룩한 제물이신 자신의 피를 가지고 그분의 백성을 죄로부터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는 지성소의 봉사 즉 재림 전 심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히 7:26; 9:11~14, 24, 25;10:10~14). 지성소의 문이 열리며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자유주의 사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하고 고등비평과 이성주의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법 십계명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죽음의 도시 사데의 겨울은 지나고 영적인 죽음에서 온 교회가 깨어나 사랑과 선교가 꽃핀 빌라델비아의 새봄을 맞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가 상실했던 처음 사랑이 다시 움돋기 시작했고, 오순절의 역사가 재연되었습니다. 연약한 빌라델비아 교회가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룩한 놀라운 선교의 업적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생애의 소망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될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엄 캐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썼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의 복된 소식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빛날 것입니다.

 

8. 라오디게아교회(1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일곱교회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의 뜻은 “백성을 심판함” 또는 “심판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델비아 시대가 마쳐짐과 동시에 열려 진 하늘 지성소의 문을 통해 들어가신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시고 재림 전에 심판을 진행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고 하신 것처럼 참으로 라오디게아인들은 아쉬운 것이 없을 만큼 넉넉했기 때문에 하나님까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마디의 칭찬도 없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칭찬받을 일이 하나도 없는데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오늘날 신자들의 상태를 볼 때, 우리는 라오디게아 시대의 비극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는데 열성은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한다고 공언은 하지만 헌신에는 결여돼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버리고 불신자가 되기를 선택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에 대하여 죽고 신앙의 원칙에 따라 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각성은 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병을 취급하는 태도에 있는 것입니다. 환자가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병이 있는데도 부인하면 위대한 의사의 처방과 약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됩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부해지고, 치유를 받고, 옷 입힘을 받으려면 옛 생활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완고함, 우리의 조급함, 우리의 사랑 없음, 우리의 형식주의가 성령의 역사로 깨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련한 모습을 주님 앞에 그대로 내어놓으며 사랑의 치유를 시작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9. 라오디게아교회(2부)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토록 날카롭고 냉정한 책망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거절되거나 버림받은 교회가 아닙니다. 참된 증인의 권면은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전혀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아직도 치료할 기회가 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결국은 삶입니다. 장황한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떤 신념이 아니며 지적인 동의 또한 아닙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할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흰 옷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부여하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인데,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마음을 그분의 의지에 몰입시키며, 정신이 예수님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생각이 주님께 사로잡힐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빈곤과 비참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책망이 필요한 경우 우리는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자신의 들보를 위해 먼저 기도하고 용서받은 후 상대방을 돌이키려는 간절한 마음과 온유한 말로 책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러워진 성품의 옷을 빨고 어린양의 피로 깨끗하게 해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시기심, 자기 뜻대로 하려는 고집, 교만, 정욕, 영적인 나태함을 정복해야 할 때는 지금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으려면 먼저 내 마음을 주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마음 문 앞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손실을 은혜로 회복시켜 주시고자 두드리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밖에 두지 말고 주님과 한 식탁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0. 하나님의 보좌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온 우주를 통틀어 하나님보다 거룩한 다른 어떤 것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이 끝에 계시다가 저 끝에 계시기도 하시므로 그분의 보좌도 움직이는 보좌입니다. 우리 인간의 개념처럼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갇혀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는 지성소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역적인 면을 고려했을 때, 계시록 4장과 5장의 배경은 성소 첫째 칸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 성소 첫째 칸에도, 둘째 칸인 지성소에도 그리고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보좌에도 믿음으로 따라 들어갈 수 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본 사람은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사도 요한인데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된 때는 한결같이 앞이 캄캄하고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 에워싸일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라갈 때 많은 어려움과 곤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혼자 짐을 지고 가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의를 버리고 마음과 생애가 순결해진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일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탄식하고 절망할 때가 아니며, 의심과 불신에 굴복 당할 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련을 헤아리시며 각 사람이 통과해야 할 풀무불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옆에 계시지만 알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므로 온갖 나쁜 짓을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를 볼 수만 있다면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 편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11. 지구에서 우주까지 가장 감격적인 경험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구속은 구원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구속은 구원을 하기는 했는데 대가를 주고, 즉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 주셨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5장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죄악의 역사를 끝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우리에게 다시금 분명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불쌍한 나오미 가정을 위해 기업을 대신 이어준 보아스 이야기가 나오는데, 보아스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한 구속주, 기업 무를 자 즉 “고엘(goel)입니다.(룻 4:9, 10) 지구는 하나님의 소유이나 사탄이 정당한 권리로 양도받지 않고 강탈해 간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 무를 자 곧 구속주가 오셔서 그 값을 치름으로써 지구를 되찾게 됩니다.

인봉한 두루마리를 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요한은 크게 울었습니다. 책의 인봉이 떨어지는 것은 오랫동안 죄로 말미암아 잔인하게 빼앗겼던 모든 것으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요한의 울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에서가 아니라 죄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 인간들과 피조물들로 더불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당하는 고뇌의 울음입니다.(롬 8:19~23) 구속의 근거는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지만 구속의 완성은 아직 미래에 속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완전히 구원해 가실 그때까지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 성령의 인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신자들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그치고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이제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품위와 품격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벧전 2:9; 히 4:15, 16)

 

12.일곱인의 비밀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7)

계시록 6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 중에 여섯째 인까지 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이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경험들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세상 끝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은 계시록 6장의 일곱 인과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인의 시대는 에베소 교회 시대에 해당되며, 백마탄 기사는 그리스도와 같은 순결한 성격을 가지고 온 땅에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이기고 또 이기는 복음입니다. 둘째 인은 서머나 교회 시대에 해당되며 붉은 말을 탄 기사는 큰 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성도들을 죽이기 위한 큰 권세를 의미합니다. 셋째 인은 버가모 교회 시대에 해당되며 검은색은 죽음과 재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그 당시 말씀에 대한 영적 기근이 아주 심했던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넷째 인은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해당되며 청황색 말을 탄 자는 기근의 결과로서 이르러 올 영적 질병과 죽음의 심판들을 가리킵니다. 다섯째 인은 사데 교회 시대에 해당되며 주로 중세의 박해를 상징하지만 제단 아래 순교자들은 아벨로부터 시작된 모든 시대의 순교자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순교자들까지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여섯째 인은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둘 다 해당이 됩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재앙과 사건들은 주로 유럽과 북미에서 발생했는데, 그 당시 이 지역은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므로 시대적 부흥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인의 계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충실한 백성들이 비록 전쟁, 기근, 온역 그리고 박해를 받아 죽음의 시련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승리할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 28:7)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비록 재난과 죽음을 당할지라도 부활을 보장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3. 말도 많고 탈도 많은 14만 4천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14만 4천은 하나님의 인을 받고 마지막에 특별한 복음 사역을 완성할 사람들로서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14만 4천은 과거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14만 4천의 후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7장2절에서 14만 4천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라고 하였는데, 인침이라는 것은 신분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신분증으로 그 신분증엔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고 기록돼 있고 하나님의 인이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의 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상을 가리키며 그 인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성품과 사상이 마음에 새겨져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에 녹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인이든 짐승의 표든 그것은 인치는 주체의 형상을 반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의 표는 성품이 사탄과 같은 악한 형상을 지니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이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말한 것은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곧 교회를 뜻하려 함이었고 그 숫자 역시 상징적인 수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맡은 일꾼들을 우리는 11시 일꾼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마지막 종교개혁을 완성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이른비를 받았 듯 마지막 시대에는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받는 늦은비 성령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 무리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 일곱 나팔(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심판이 시작되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 8:3)

일곱 나팔은 하나님의 심판의 분명한 확실성을 말해주고 있으며 큰 소리로 외치는 이유는 우리를 죄의 길에서 떠나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되심과 선하심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만약 우리가 더 선한 사람이 못되면 그만큼 더 큰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곱 나팔 중 첫째 나팔은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이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받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둘째 나팔은 서로마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고, 셋째 나팔은 타락한 기독교회에 가해지는 심판을 말합니다. 넷째 나팔은 중세의 어둠을 가져온 재앙이었으며, 다섯째 나팔은 중동 일대를 휩쓸고 유럽까지 쳐들어간 무함마드의 채찍을 상징하고, 여섯째 나팔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의 많은 지역을 지배한 투르크(이슬람) 세력에서 계속된 재앙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째 나팔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인간 역사의 최종적 단계에서의 마지막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침내 온 세상은 주님의 재림 때 두 무리로 갈라져서 서게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무리, 의인과 악인, 알곡과 가라지로 분리되어 서게 될 것입니다. 지난 교회 역사를 통해 보았듯이 참 교회에 대한 핍박은 끝이 없고,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는 고난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하나하나 세심하게 우리를 돌보시는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아무리 무서운 역사가 진행되어도 우리는 두렵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시되 우리 뜻대로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을 위한 나팔소리가 들릴 때 두려움에 떠는 신앙이 아니라 여호와의 편에 서서 담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15. 성경에 예언된 이슬람과 교황청의 밀월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 중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은 이슬람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을 단순히 종교라고 말하기엔 부족합니다. 사회 모든 분야에 이슬람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슬람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개신교 박멸에 앞장선 카톨릭의 엘리트 정예부대가 비밀조직 예수회인데, 예수회 신부였던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는 교황청의 음모와 비밀자료들을 세상에 폭로하다가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 자료들엔 놀라운 얘기가 들어있는데,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아서 창시된 종교가 아니라 교황청이 많은 투자를 해서 만든 종교라는 것입니다. 교황청이 이슬람을 만든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카톨릭을 거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유대교를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어떤 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무슬림은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속임 당한 사람들이지요. 이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희생을 하고 있는가? 그저 이런 변명, 저런 핑계를 대면서 적당히 교회 다니고, 적당히 예배 드리고, 뭘 그렇게 헌신을 강요하느냐고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언하던 사람들이 막상 내 시간을 내야 하고, 내 수고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내 재물이 요구될 때 얼굴 표정이 달라집니다. 막상 헌신과 희생이 요구될 땐, 너무 그렇게 극성스럽게 신앙하지 말라며 다른 사람의 열정에까지 찬물을 끼얹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시간,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6. 이슬람과 교황청이 꿈꾸는 신세계질서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이슬람은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슬람의 세계관은 전쟁 세계관입니다. 전쟁 때는 윤리와 도덕 기준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거짓말하면 나쁜 것이지만 전쟁 때는 적을 속이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전략인 것입니다. 반면에 이슬람 테러는 전 세계인들의 생각 속에 안전을 위해서는 자유를 통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국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또한 시온주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뒤에 수백 년 동안 숨어서 활동한 동유럽 유대인(아슈케나짐)의 정치적인 활동입니다. 다시 말해서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아니라 신세계질서를 세우려는 비밀조직들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밀조직은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양쪽 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카톨릭에는 마리아와 함께 초승달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초승달은 고대 바벨론의 세미라미스의 표식이고, 태양신의 상징입니다. 또한 초승달은 바로 이슬람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전쟁이 바알의 선지자들과 있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태양신을 숭배하는 바알 숭배자들과 참 그리스도인의 전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 중 아무도 조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 같이 우리의 등과 그릇에 기름을 채우고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환난의 때에 설 수 있는 준비는 그때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것입니다. 환난 준비가 몇 년 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자가발전 시스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예”하며 응답할 수 있는 믿음과 준비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환난을 승리할 수 있는 준비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지막 그 큰 날에 하나님의 용사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7. 복음, 재림, 심판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계 10:7)

계시록 10장의 배경은 일곱 교회 중에서 19세기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벌어지는 일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마지막 시대와 연결되는 중요한 예언을 마치 릴레이 선수가 바통을 넘겨주는 것처럼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 2절에서 얘기하는 ‘펴 놓인 작은 책’은 구약의 다니엘서를 의미하는데, 이 책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어 전 세계에 전파된 때는 1800년대 중 후반에 일어난 강력한 세계 선교운동, 재림운동이 일어나는 빌라델비아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들에게 이루어지는 시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시대, 이슬람이 세상을 괴롭게 하는 시대, 나팔을 부는 동안 하늘에서는 재림 전 심판사역이 진행되고, 나팔이 끝나면 은혜의 시기도 끝나고 7재앙이 내려집니다. 이때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교회는 교단적인 선교사역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이 시기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중국 선교를 향해 속히 나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은 얼마나 사악하며 완악한 일인가? 죽어가는 영혼을 못 본채 내버려두고 가인처럼 “내가 동생을 돌보는 자이니까?”라고 말한다면 그가 받아야 할 벌이 얼마나 클 것인가! 라고 얘기했습니다. 1905년 73세의 나이로 평생 중국에서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그는 한 순간도 그의 삶을 비본질적인 일에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여 살아있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는 교회로서 살도록 이끄는데 있었다”고 얘기 한 것처럼 진정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사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시든 간에 근심이 아니라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느껴질 때, 교회는 다시 부흥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8. 두 증인과 공산주의 전쟁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

성경에서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는데 이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방신을 섬기고, 마흔 두 달 동안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로마 교황청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은 외관상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일어난 혁명으로 보이지만 무신론을 유포시키고 공산주의 기틀을 마련해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의 수십억 인구를 공산주의 속에 가두어 버린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은 갑자기 발생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거절한 결과 그 대가로 참담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성경이 폐지되고, 일주일 제도가 사라진 후, 이성의 여신이 숭배를 받자 프랑스는 최악의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들고, 할 수 없이 “사흘 반” 즉 정확히 3년 반 후에 성경을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이처럼 무신론이 하나님의 두 증인에 대해 도전했지만, 그 두 증인은 오히려 전에 없이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 대신에 사람에게 주의를 끌게 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스스로 성경을 상고하는 대신에 목사나 감독이나 신학 교수들을 그들의 지도자로 바라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속의 길을 끊어 버릴 도덕적 용기가 부족하므로 교회에서 가르쳐 준 대로만 믿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말씀을 상고하기를 싫어하므로 속절없이 거짓의 쇠사슬에 매여 있게 됩니다. 지금은 마음이 거짓된 신앙 고백자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시험할 때가 눈 앞에 당도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고 하신 것처럼 사람의 권위 위에 세워진 것은 무엇이든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변함 없는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은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19. 하나님이 사탄을 멸망시키지 않는 이유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계시록 12장 1절~3절과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는 상징적으로 쓰일 때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왕하 19:21)이고, 신약에서는 ‘교회’(고후 11:2)입니다. 그리고 용은 사탄(계 20:2)이며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사 9:6)이십니다. 악마는 한 때 빛의 간직자란 뜻의 루시퍼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하나님은 루시퍼를 완전하게 창조(겔 25:12, 15)했지만 루시퍼는 스스로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교묘하게 충동질하고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나 권위적이라고 천사들을 기만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하와를 기만하여 죄를 짓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사탄을 당장 멸망시켰다면, 천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심은 언젠가 또 다른 반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탄이 하나님을 잘못 나타냄으로써 야기된 손상을 원상태로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진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손수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사탄을 멸망시키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는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고, 두 번째는 예수님처럼 승리하는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 출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곧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어느 한 편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불순종을 용납하실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무리들은 공의는 빠진 채 은혜와 사랑만 찬양하다가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무리들은 사탄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실천하며, 전심을 다 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입니다.

 

20. 미국과 바티칸의 두 얼굴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5)

마지막 시대는 선과 악, 그리스도와 사탄, 하나님의 백성과 적그리스도의 대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때입니다. 특별히 짐승의 표의 환난은 이러한 영적 전쟁의 클라이맥스요 하이라이트입니다. 짐승의 표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생 이단으로 출발했고, 발생 때부터 국가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한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계시록 13장에는 사탄의 지휘를 받아 성도들을 핍박할 두 짐승이 출현합니다. 짐승은 성경 예언에서 어떤 정치적 세력이나 국가를 의미합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이 짐승은 로만 카톨릭입니다. 그리고 새끼 양 같은 짐승은 미국입니다. 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와 로만 카톨릭 교회를 예수님의 권위 위에 올려놓는 신성모독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여신을 섬기는 이방 종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16장, 19장, 20장에서는 새끼 양 같은 짐승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두 짐승이 연합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할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고 매매를 할 수 없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고결한 충성심을 잃지 않으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미래에 짐승의 표를 거절하기 위해선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그때에도 하나님의 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신세계 질서를 위해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곧 닥칠 때, 미국으로부터 종교 자유를 억압하는 법령이 세워질 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는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기 위해 기꺼이 행동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1. 짐승의 표 666, 베리칩인가?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 13:17)

다니엘서 7장의 작은 뿔과 계시록 13장의 짐승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교황청이며 안식일을 일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로 변경하였고 온 세상이 놀랍게도 그 짐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의 짐승의 우상은, 개신교회라는 이름을 버리며 다시 짐승을 섬기는 배도한 개신교회를 의미합니다. 중세 교황의 권력에 맞게 싸웠던 항의자, 대항자라는 뜻의 개신교의 이름이 무색합니다. 더는 개신교가 아니라 음녀의 딸입니다. 짐승의 우상인 배도한 개신교회는 모든 사람이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하고, 거짓 안식일을 지키게 할 것이며, 거절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설 것입니다. 국가 세력과 결탁한 교회가 성도들을 죽이며,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은 이단자라는 누명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은 승리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신실하다면 그 승리자의 무리에 우리가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비웃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낼 것이나 더 많은 사람이 성경적 안식일을 깨닫고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많은 사람의 구원은 우리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예언적 경고들을 우리가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베뢰아인들처럼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 위해 나갈 때, 자기를 지나쳐 버리고 간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의 결정이, 곧 다가올 장래에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선택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함께 하십니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시 119:126)

 

22. 나는 누구인가?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와 이성주의는 성서비평학과 이신론(理神論)을 발전시키면서 성경의 역사성은 애초부터 부정되고, 그저 정신적 수양이나 도덕적 가르침을 주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이방 신들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오직 창조에 있습니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께 마땅한 경배와 예배를 드릴 때 가장 존엄하고, 존귀하고,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어떤 문자적 오류도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으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사람들이 성경의 복음과 예언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분명한 말씀이 사탄의 속임수를 폭로해 주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교회, 거룩한 교회, 참 교회는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참 교회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큰 시련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우리의 성품과 생각이 성경에 일치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실천하기를 원치 않는 진리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똑똑하느냐에 달렸지 않고, 얼마나 진실하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3. 세상을 뒤흔드는 3가지 경고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계시록 14장에서 언급된 세 천사의 메시지는 세상을 뒤흔들 만큼 능력 있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메시지가 전해져야 예수께서 드디어 재림하실 수 있는, 재림 전에 반드시 선포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메시지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사랑의 호소이자 경고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천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 메신저를 말하는데,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참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을 의미합니다. 첫째 천사가 전하는 영원한 복음이란, 죄인을 변화시켜 에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이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참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드는 힘, 그 능력, 그 파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둘째 천사는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메시지인데, 첫째 천사의 메시지를 거절했기 때문에, 교회들이 바벨론이 되어 도덕적으로 심히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영적 현실을 보여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셋째 천사의 메시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입니다. 자기는 매일 죽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사시는 경험을 통하여, 항상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하는 사람들, 그들이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바벨론의 거짓 가르침을 폭로하고 하나님의 인을 받도록 초청하려면, 먼저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경험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 중요한 세 천사의 복음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체험하는 성도들이 하루속히 많아져야 합니다. 교회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더는 잘못된 가르침인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인정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마지막 시대 진리를 아는 백성으로 사명감을 등한히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24. 아마겟돈 전쟁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계 15:8)

계시록 15장에 나오는 일곱 재앙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는 짧은 기간에 이뤄지는 예언들이고, 일곱 재앙 중에서 여섯 번째 재앙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항하는 세상의 세력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이해입니다.

마지막 때에 수많은 사람이 짐승의 표를 받고 악한 성품으로 고정되겠지만, 또 다른 수많은 사람은 의의 옷을 입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호소에 응답하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들의 생활 방향을 재정립하여 하나님의 진리 안에 확고히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은혜의 시간이 끝나는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곱 재앙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나님께 돌아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에 대한 공포심에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지 진정한 회개는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환난이 지나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진실한 사람들에게 임했던 “이른 비 성령”의 역사는 마지막 시대에 다시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늦은 비 성령”의 역사라고 부릅니다. 이 늦은 비 성령은 바벨론 교회에서 떠나 진리를 따라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 위에,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의 법을 더 사랑하여 충성하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내릴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언약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과 지성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새기게 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참되고 거룩한 안식일이 주는 복되고 평화로운 삶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세상의 문제가 더 심각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좀 더 벌고 편하게 살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25. 음란한 여자와 일곱 왕의 타락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계 17:14)

계시록 17장은 음란한 여자로 상징된 타락한 종교가 세상 정치가들과 음행하다가 결국 그 정치 권력으로부터 버림받는 이야기로 종말의 시기에 우리가 어느 시점에 살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놀라운 예언입니다.음녀로 상징되는 교황청은 무슨 종교를 믿어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라는 참람한 소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의 재분배를 언급하며 세상의 경제 시스템을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요일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일요일 법령을 통하여 짐승의 우상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우리를 대속하신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그 반응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의 결과일 뿐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과 순교는 기름과 같아서 신앙을 더욱 타오르게 만듭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세상과의 타협이며 세속적인 정신입니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간음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참 진리와 복음이 없으니 갈피를 못 잡고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양심이 무감각해져 죄가 편만해도 죄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짓밟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종교와 국가의 세계적인 통합은 성경에 위배되는 일들을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할 것이며,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안식일을 교황의 권위로 변경하여 지키게 할 것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살 수도 팔 수도 없을 것이고, 신앙 양심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결국 세상을 소란케 하는 테러주의자로 낙인 찍혀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백성의 구원입니다. 그 과정은 어렵고 험난할 것이지만 결국엔 하나님께서 승리할 것입니다.

 

26. 갈멜산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전쟁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갈멜산 전쟁은 계시록 13장 사건의 표상과 상징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했던 그 이적을 짐승도 행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배도한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저희 마음을 낮추기를 거절하고 엘리야가 이 무서운 형벌을 가지고 왔다는 거짓을 믿고 분노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데, 많은 신자가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문제가 있어도 대다수가 따라가니까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전할 사람, 비록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평판이 떨어지고,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할지라도 담대히 진리를 말할 사람을 부르십니다.

교회와 국가를 뒤덮은 배도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참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거절한 이유는 바알 신앙은 편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요구하지도 않고, 죄를 버리라고도 하지 않으며,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단호한 책망의 말씀들은 듣기 싫어하고 마침내 자기 소견에 옳은 길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위해 도우려고 제단 가까이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얼씬도 못하도록 그를 막으셨습니다.

계시록 18장에 나오는 천사는 이 시대의 엘리야들입니다. 그리고 이 천사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넘치는 죄악은 교회가 성경의 표준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오히려 세상 권력과 야합함으로 이르러 온 결과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제발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내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해도 마땅히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7. 지구 종말 때 일어나는 사건과 성경의 핵심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계시록 19장과 같이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신랑이 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신부가 입고 있는 흰 세마포는 실제 옷이 아니라 거짓 교리에 물들지 않은 순결과 충성과 신실함을 가리킵니다. 세마포는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행실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열매요 결과입니다.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는 말씀과 같이 구원의 옷과 의로운 행위가 구원받은 자들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이지 인간들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9:9)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에 분주한 나머지 하늘의 초청에는 관심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에덴에서 범죄했던 하와처럼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 즉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말을 더 신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늘의 대장군으로서 백마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재림 전에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멸망할지 최종 심판을 끝내시고 나서 제사장 복을 벗고 왕의 복장을 입으신 후 재림하시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어떤 심판을 하시는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고, 양과 염소를 나누는 심판입니다. 예수님 재림 전에 있는 심판은 의인을 변호하고 구원해서 하늘 백성 삼기 위한 심판이고, 재림하실 때는 그것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지은 죄를 용서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죄에 대한 승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게 해 주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28. 사탄의 최후와 천년왕국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계 20:11)

계시록 19장과 20장은 예수님의 재림부터 천년기, 최후의 심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얘기입니다. 무저갱은 어딘가에 있는 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재림으로 황폐된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이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박 당한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통해 아브라함이 알게 된 것처럼 의인들은 천년기 심판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정성과 인내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애쓰셨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통하여 의인과 악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 깨닫기를 바라시고, 악인들 조차도 자신들의 멸망이 마땅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 어느 날 다시 눈을 떴는데 재림의 광경이 보이면 우리는 하늘로 가기 위하여 생명의 부활(첫째 부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이 보이면 우리는 심판을 받기 위해 1000년 후에 부활(둘째 부활)한 악인들의 무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때 만일 우리가 성 밖에 있게 된다면 얼마나 인생을 다시 살고 싶을 것입니까? 고통스럽게 회상하면서 그때 그 잘못된 선택을 바꾸기를 얼마나 원할 것입니까! 잘못된 결정들, 저지른 어리석은 죄들, 하나님의 율법은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으며, 지켜서는 안 된다고 했던 어리석은 생각들을 얼마나 후회할 것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무정하게 대하며, 냉정하고, 상처를 주며, 비난해 왔던 지난 날들을 얼마나 후회할 것입니까!

우리가 어느 부활에 참여할지는 전적으로 오늘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거룩한 성안에 있을 수 있도록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빛을 비추시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지금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29. 하늘나라 생활 12가지 맛보기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죽음은 의인에게도 찾아오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잠깐 사는 이 세상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투자하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삼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나의 시간과 재능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지구에 있었던 오직 한 가지가 영원토록 새 하늘과 새 땅에도 남아 있을 것인데,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당신의 몸에 지니셨던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죄가 남겨놓은 모든 것은 다 사라졌지만, 도마에게 보이신 손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인 십자가의 잔인한 흔적이 남아 있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게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자기 처지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해서 상대방을 오해하고 거짓으로 비난하는 말, 소문을 재확산하는 것도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들,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 욕망을 극복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마련된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불 못입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내가 변화되어 가는 것이 신앙인 것처럼 미신과의 진정한 차이점은 나의 변화 여부에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신앙, 그것은 미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먼 미래에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지금 우리 안에 임해야 합니다. 주님이 임하는 삶,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 삶,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천지개벽 하셔서 나의 모든 사상, 소원, 비전 등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삶! 그것이 은혜의 왕국입니다. 지금 도래한 은혜의 왕국을 경험한 사람이 영광의 왕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0. 재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 이 지구는 7재앙 중 여섯 번째 재앙을 통과하면서 몹시 황폐하고, 의인들은 고난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지구에 재앙을 가져온 원인으로 지목되어 그들을 죽여도 된다는 사법 선언을 넘어, 이제는 보이는 대로 학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속고 있기 때문에 주저 없이 마녀사냥 하듯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바로 이런 위기일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다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구원받은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그들의 삶을 계명에 비추어 보고 그들의 죄와 결점을 깨달아 그리스도께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께 가면 모든 율법이 다 폐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면 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판 선악과입니다. 그 말을 믿고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하늘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사리 우리 약점에 굴복하고 맙니다. 우리 자신이 새로워지기 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하늘에 우리가 속히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임했습니다. 하늘나라는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31. 열한시 일꾼

“주 예수의 은혜가 (이 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요한계시록에는 6000년이라는 방대한 인류 역사가 들어 있고, 타락과 배도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그리스도인들을 보았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통해 인도해 오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계시록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고, 성도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로움을 확인하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게 만드는 소망의 말씀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암흑시대였지만 그 어두움만큼이나 밝은 빛을 내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던 종교개혁 시대의 판단 기준은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미래의 우리는 오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죄인을 진심으로 회개케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고 싶은 새 마음을 갖게 된 자들! 이들에 의해서 중단되어버린 종교개혁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참 진리가 회복되고 오해된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이 밝혀질 것입니다. 성령의 큰 권능을 받아도 교만하지 않을, 변화된 성품의 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약속하신 성령의 부흥 운동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의 물결인 회개, 거룩, 재림 운동을 통해 온 세상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일하는 일꾼들이 마태복음 20장 포도원의 비유에서 일을 마치기 위해 추수 바로 전에 부름 받은 11시 일꾼입니다. 우리 모두 11시 일꾼이 되어 우리를 부르신 소명과 우리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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