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호 부활 3부

3부 부활에 혼란을 가져온 성경 절의 잘못된 해석

열한시 월간지 257호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영혼이 죽으면 즉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오해할 수 있는 성경 절이 있습니다. 사실 본래 그 성경 절의 의미는 그렇지 않지만, 해석하는 과정에 그 의미가 곡해되어 마치 영혼불멸 사상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성경 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어의 의미와 깊은 뜻을 오해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사상이 들어가므로 그렇게 된 것들입니다.

질문1 : 누가복음 23장 43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낙원에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답 : 이 성경 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죽어서 강도와 예수님이 함께 낙원에 갔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은 강도보다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함께 낙원에 갈 수가 없습니다(요 19:32-34).

2)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그날 낙원에 가신 것이 아니라 일요일 부활한 후였습니다(요 20:17). 어떤 사람들은 낙원과 하나님이 계신 곳이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요한계시록 2장 7절에는 하나님의 낙원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22장 1, 2절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낙원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성경 절의 바른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에 너와 내가 못 박힌 오늘, 내가 너에게 말하는데, 후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말씀이 이렇게 곡해된 것일까요? 이 성경 절이 그렇게 인용되게 된 것은 구두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예수님과 강도가 당일에 낙원에 갈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헬라어가 띄어쓰기나 구두점들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혼란입니다. 원문을 단어 나열 순서 그대로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르시되 그에게 예수께서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네게 오늘 나와 함께 네가 있으리라 낙원에”

여기서 “오늘”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한 시간에 관련시키느냐, 혹은 낙원에 가는 시간에 관련시키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집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에 기초하여 보면 이것은 약속한 시간과 관련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질문하신 성경 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영어 본문을 보면, “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어로 번역할 때 찍었어야 할 올바른 구두점은, “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라고 하여 “today” 다음에 구두점을 찍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영혼불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오늘”이라고 하는 단어를, 낙원에 오늘 가겠다는 뜻으로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질문 2 : 전도서 12장 7절에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답 : 여기 신(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인데 이것은 본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호흡”이나 “생명”입니다. 실제 이 말은 언제나 의사를 표현하고 활동하는 이성적인 존재에게만 사용되며, “루아흐”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전혀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어 성경(성서교재간행사, 1991년)에서는 “그때가 되면 흙에서 온 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네 생명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만일 루아흐를 영혼으로 번역한다면 욥기 27장 3절의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코에 있다는 우스운 말이 되고 맙니다.

질문 3 : 누가복음 1장 19-3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사람이 죽어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닙니까?

답 : 누가복음 16:19-31의 말씀은 결코 실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14절에는 이 비유의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부(富)는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증거이므로, 부자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잘 알려진 이야기를 통하여 그러한 생각에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실제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부자가 간 곳을 “음부”라고 하였는데, 원어로는 무덤을 가리키는 “하데스”입니다. 무덤 속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2) 나사로가 간 곳이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 품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3) 24절에 보면 그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 한다고 하는데, 과연 영혼이 뜨거움이나 목마름 등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육체가 느끼는 감각들입니다.

4) 25절의 아브라함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에서 고생했느냐 안 했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결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5) 과연 천국과 지옥이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일까요? 그렇다면 그곳이 정말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지옥의 고통을 다 보고 있는 곳은 천국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에 잘 알려진 이집트의 설화입니다. 그것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오시리스(Si-Osiris)와 그의 아버지 세톤 카임붸제(Seton Chaemwese)가 죽음의 나라를 여행하는 내용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난한 서기관과 부유한 세리 바르마얀”의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Joachim Jeremias, 예수의 비유. 허혁 역, 왜관:분도출판사, 1974, p.177). 비유는 교훈을 얻는 데서 그쳐야지 비유 자체를 실제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는 끈기와 노력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자 만든 이야기이지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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