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호 부활 1부

제1부 죽는 즉시 천국 간다면 부활은 왜 필요한가?

열한시 월간지 257호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기독교의 신앙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는 우리에게 부활을 가르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와 성경적인 실제 부활을 믿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렇게 활기 없고 무기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가르침과 교리가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이번 기사에서는 부활의 정확한 개념과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여러분의 신앙이 확고해 지기를 바랍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 중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 비율이, 무교나 일반인보다 기독교인들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신교인의 75.6%가 사후세계를 인정한 데 반해, 일반인은 46.7%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00%가 아닌, 부활을 믿는 75%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부활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명확하거나 명료하게 조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기독교의 순수한 진리에 섞이게 된 불분명하고 불투명한 교리들 때문입니다.

영혼불멸 사상은 부활의 의미를 혼돈시킨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독교에 침투한 비진리의 가르침 때문에 부활에 대한 확실하고도 명확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과 죽음 이후의 문제와 영생과 심판의 문제가 서로 정확하게 꿰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 있는 부활의 개념과 의미가 놀랍고 복된 소식임에도,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귀에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희미한 이야기처럼 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믿음의 동기부여가 되며, 우리의 신앙을 위한 필생의 준비와 소망의 활력과 목표를 주는 놀라운 부활의 개념을 불분명하게 흐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비진리의 가르침을 우리는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합니다. 기독교 안에는 부활의 의미를 흐리는 대표적 두 가지 이교적인 사상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개념이며, 두 번째는 영혼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대표적인 두 가지 비진리는 부활의 개념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오해하게 합니다. 아무리 성경이 올바른 부활의 개념을 말하고 있어도, 이런 사상을 믿고 있으면 부활의 중요성이나 필요성, 그리고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의미를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몸소 나타났던 그렇게 놀라운 부활의 현시가,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재현되어 나타나야 할 그 놀라운 부활의 현시가, 기독교에 침투한 비진리 때문에 퇴색되는 것은 대단한 유감입니다. 기독교에서 현재 널리 가르치고 있는 이 두 가지 비진리, 잘못된 교리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을 흐리고 있는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만일 영혼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즉시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면, 이미 천국이나 지옥에 가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왜 또다시 부활시키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죽자마자, 그것이 몸이든 혼이든 다시 살아나서, 일종의 부활 같은 것을 거쳐 천국이나 지옥에 이미 가 있다면, 왜 또다른 부활이 그렇게 필요하며, 부활의 의미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고 새로운 것이 되겠습니까? 또한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면, 부활이 무슨 그렇게 새삼스럽고 감격스러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교 영혼불멸 사상의 오류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의미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 영혼불멸 사상의 침투

고대 이집트 사람들과 플라톤을 대표로 하여 생긴 헬라 사상,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로 시작된 중세 교회의 신조, 그리고 칼뱅에 의하여 정립된 교리는, 모두 영혼은 몸을 떠나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불멸의 본질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의인이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처럼, 또한 구원받지 못한 악인은 지옥 불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불멸이나 영원지옥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진리가 아니라, “거짓의 아비”(요 8:44)인 사탄이 한 최초 거짓말(창 3:4)에 기초한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서기 150년부터 325년, 곧 역사적인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리기까지의 시대를 “니케아 전 시대”(Ante-Nicene Period)라고 하는데, 이 시대의 시작과 함께 로마 제국에 편만했던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 안으로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에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 경계했던 거짓된 종교철학인 “영지주의”가 들어오고(딤전 4:7, 6:20; 요일 4:1-3), 어거스틴이 깊이 빠져 있던 신플라톤 사상도 넘쳐 들어왔습니다. 모든 기독교 학교 안에 헬라의 영향이 점점 압도적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교회 안에도 영혼불멸의 사상이 내세에 관한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내세와 사후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뭘까요?

2) 구약 성경의 가르침 : 반드시 죽으리라

성경은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항상 조건적인 불멸과 영혼 멸망의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하나님의 말씀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범죄하지 않으면 불멸의 영생을 보장받게 된다는 조건적 불멸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불법을 하면, 죄의 값인 사망에 이른다는 악인 멸망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구약의 모든 선조와 선지자들에 의해 확고하게 옹호되었으며, 구약 성경의 일관된 신앙입니다. 이에 관하여 <유대 백과사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해체된 뒤에도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는 신념은 단순한 신앙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사변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성경 어디에도 분명히 가르쳐진 데가 없다.”

영혼불멸 사상이 구약 성경에 결코 용납될 수 없었음을 같은 책에 다음과 같이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후에도 영혼이 계속적인 생명을 누린다는 신앙은, 원시적인 조상숭배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실패한 바 있는 강신술(삼상 28:13; 사 8:19)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인데, 생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 적대되는 것으로, 선지자들과 통치자들에 의하여 좌절당하고 억압을 당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은 영혼불멸 신앙을 사탄의 역사로 간주하고 이단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혹독한 방법을 써서 근절시키도록 촉구했다는 것입니다(레 19:31, 20:6,27; 삼상 28:9; 대상 10:13; 사 8:19 참조).

3) 신약 성경의 가르침 : 몸의 부활

신약 시대에 와서도, 예수님은 물론 모든 사도와 신약 성경 전체는 당시에 편만했던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며, 유대교 내부까지 깊이 침투해 있던 그릇된 내세관을 정면으로 배척했습니다(마 22:23-33; 행 4:2; 23:8).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행 17:18)하여 변론이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마지막 심판 후 재림 때에 있을 몸의 부활로 인한 불멸이었지, 몸과 분리된 영혼의 불멸이 아니었습니다(요 11:25,26; 고전 15:52-54; 살전 4:16).

인간은 처음부터 불멸의 속성을 받은 바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조건으로 영생이 보장되었음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여 “죄의 삯은 사망(롬 6:23)임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 시에 썩지 아니할 생명을 부여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끝까지 복음을 거절하고 불순종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있을 심판을 거쳐, 재림 후 천 년 뒤에 있을 둘째 부활 때 육신의 몸으로, 영원한 심판의 불에 영원히 소멸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계 20:12-15; 말 4:1,2; 시 37:9-11; 롬 6:23). 이러한 조건적 불멸과 악인 멸망(소멸)의 신앙 교리는 매우 성경적이며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4) 초대 교부들이 믿었던 조건적 불멸 신앙

우리의 선조들은 인간의 사후 상태와 영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믿었을까요? 예수님과 사도들이 믿었던 정통적인 부활 신앙, 곧 조건적인 불멸 신앙은 사도들과 직접 접촉했던 초대교회 교부들에 의하여 거의 일관성 있게 유지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Polycarp)을 비롯하여 당시의 문서들인 “디다케”(Didache) 교훈집, “바나바”(Barnabas) 서신, “허마”(롬 16:14, Hermas)의 목자 등에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을 강조하고 악인의 영원한 소멸이 진술되어 있어, 영혼 문제에 관한 한 사도들의 신앙이 그 후 시대에도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또한, 믿음을 위해 순교한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6~165)는 조건적 불멸과 악인의 소멸을 성경과 일치되게 논증했으며, 그의 제자인 “타티안”(Tatian, 110~172), 폴리캅의 제자인 안디옥의 “데오필러스”(Theophilus, 180년 사망)도 같은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지금의 프랑스 남부 고을 지방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lrenaeus, 130~202)는, 탁월한 종말 신학을 가지고 영지주의와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 영원 형벌 신앙을 논박하여 조건적 불멸 신앙의 성경진리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변하기 시작하여, 헬라 철학의 영향은 점점 기독교의 가르침에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헬라 철학의 본거지가 된 북아프리카 출신의 교부들, 즉 “터툴리안”과 “오리겐” 등의 영향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점점 깊은 뿌리를 내린 신플라톤 사상이 영혼불멸과 영원 지옥의 가르침을 공고히 하게 되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역사적인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옹호하여 정통 신앙의 기수가 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7~373) 감독이, 이미 시대의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듯 훨씬 약해진 논증으로 성경에 입각한 조건적인 불멸을 옹호한 것을 마지막으로 대세는 기울어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나타난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터툴리안의 영원 지옥 신앙, 그리고 이교 적인 연옥 신앙을 정립시켜 중세기 카톨릭교회에 전수함으로써, 그 이후 거의 천 년간 진리를 밝히는 소리는 거의 잠잠해졌습니다.

5) 성경의 조건적 불멸 신앙을 옹호한 중세기 기수들

그러나 12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성경적인 조건적 불멸을 옹호하는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2세기 가장 탁월할 신학자로 알려진 “메돈”(Methone)의 헬라 감독 “니콜라스”(Nicholas)가 일어나 신플라톤 사상을 공박하기 시작했고, 중세기를 대표하는 몇 유대인 학자들, 곧 마이몬(Moses Ben Miemon, 1131~1204), 아브라바넬(Judah Abravanel, 1437~1508) 등이 영원 지옥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특히 12세기 이후 성경의 진리를 고수하며 알프스 산중에 칩거하던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인 왈덴스인(the Waldenses)이, 연옥의 교리가 이교 사상임을 지적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들을 반대함으로써 혹독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14세기가 밝아오자,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38)가 과감히 일어나 연옥의 거짓됨과 죽음은 잠과 같은 무의식 상태임을 성경을 근거로 강력히 논증했습니다. 곧 이어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탁월한 언어학자요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 개혁자였는데, 최초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이유로 화형을 당한 위대한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신, 구약 성경을 해박한 원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깊이 이해한 틴데일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중세 교황청을 적그리스도로 단정함과 동시에 중세 카톨릭교가 가르쳐온 영혼불멸, 즉 죽은 뒤 영혼이 간다는 그런 천국, 지옥, 연옥을 모두 반박하고, 재림 시에 있을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소망으로 확인했습니다. 틴데일은 반대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논리적으로 반문했습니다.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 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이교의 철학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영혼은 언제나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리와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교리를 함께 혼합해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일치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안에서 성령과 육신이 더 이상 역사 할 수가 없다… 내게 다시 말해주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이후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과 영혼불멸을 동시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William Tyndale, An Answer to Sir Thomas More’s Dialogue, Book 4, pp.180,181)

6) 종교개혁과 함께 부활한 조건적 불멸 신앙의 가르침

16세기에 접어들면서, 1517년 독일을 시작으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의 큰 별 루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받게 되는 구원을 선포했으며, 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의 기준이 됨을 선언했습니다. 이교적 가르침에 기초한 연옥의 교리로 사람을 위협하여 면죄부 판매로 수익을 올리던 중세 교회의 타락은, 사실 모두 영혼불멸과 영원형벌 사상에 근거했던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그의 41개조 신조에서, “영혼이 불멸이라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같이 로마교회의 교령집 쓰레기 더미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루터는 성경적인 근거로써 죽음은 영혼의 잠이라는 사상을 신조로 삼았으며, 연옥과 성인숭배를 반박하고 그 신조를 죽는 순간까지 유지했습니다. 그는 “영혼은 몸이 죽을 때 소멸하며, 하나님께서는 이후 몸과 함께 부활시킨다”(Luther, Defence Proposition No.27)고 주장했으며,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마치 그들이 쓰러져 잠들었다가 아버지에게로 모여들듯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위로로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으로 그들보다 앞서 간 성도들과 함께 부활을 기다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어디에서나 이러한 위로를 베풀고 있다.”

7) 대표적 현대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오스카 쿨만은 1902년 스위스에서 출생한 신학자로서, 1949~1972년까지 신약학 교수로 활동하였고, 여러 권의 신학 저서를 저술한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입니다. 그는 자기의 논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적 부활 신앙은 영혼불멸에 대한 헬라적 관념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신약에서는 언제나 죽음을 궁극적인 원수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서 친구를 찾았던 헬라 사상과는 극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오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쓰지 않았는가?”(Oscar Cullmann, 영혼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전경연 편, p.12).

그의 논문에 의하면, 죽음을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했던 소크라테스나, 또한 죽음을 환희에 찬 영혼의 해방으로 받아들인 칼빈의 사상은 모두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쿨만은 자신의 깊은 연구를 통해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은 본질적으로 불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불멸의 것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기독교 신학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부터 불멸이라는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사후에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적을 통해서 뿐이다”(기독교 신학사전 379).

영혼불멸 사상과 부활의 신앙은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어긋나는 교리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에 기독교에는 현재 엄청난 모순과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즉시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까지 모두 가버리고 나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때인 재림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부활은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그러므로 놀라운 부활의 기적을 혼돈스럽게 만드는 비진리를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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