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호 부활 4부

4부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

열한시 월간지 257호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3,20)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부활!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의 고통과 사별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부활의 의미가 가슴 속 깊이 와 닿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했거나,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나 친지를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처럼 복된 소망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 죽었던 사람을 산 사람으로 다시 만나는 부활,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성경은 죽은 의인들이 부활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문자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확실한 증거로써 실제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고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 열매 되신 주님께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주님을 믿고 주 안에서 잠든 의인들이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똑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1.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처음 익은 열매로서 죽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서 요제절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하는 밭에서 처음 익은 곡식의 이삭들을 모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들이 가져간 처음 익은 곡식단을 여호와 앞에 감사의 예물로서 흔들었습니다. 추수 밭에서 모은 처음 익은 곡식의 이삭들, 곧 유월절에 백성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 바쳐진 처음 익은 곡식단은 여호와 앞에 감사의 예물로 바쳐졌습니다. 백성은 추수의 여호와로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익은 열매를 흔들었습니다. 이 의식을 올린 후에 낫으로 곡식을 베어 추수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납한 이 곡식단은 추수를 예표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요제의 원형으로서, 여호와 앞에 요제를 드리던 바로 그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처음 익은 열매 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아 들일 큰 영적 추수를 표상하였습니다. 또한 그분의 부활은 죽은 모든 의인의 부활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여기서 “데리고 오시리라”라는 단어는 영어로 “bring” 헬라어로는 “아고”(?γω)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 문맥상 “데리고 가시리라”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올바른 번역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사람의 마지막 부활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잠자는 이들의 첫 열매이셨던 생명의 왕께서 요제의 원형인 첫 열매가 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롬 8:29)었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요제절의 의식은 오랫동안 유대인들에 의해서 상징적으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그 상징적인 의식이 실제의 원형이 되었던 것입니다.

첫 열매이신 예수님의 부활 외에 또 다른 부활의 예들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것은 모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것과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무덤에서 나온 자들의 부활의 예입니다. “무덤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예수님 외에 다시 부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죽었다가 부활할 모든 사람에 대한 부활의 약속의 표가 됩니다. 그들이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한 것처럼, 마지막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섬기다가 잠든 자들이 무덤을 깨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날에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동일한 능력이 그분의 자녀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깰 수 없던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며 잠자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그 부활의 승리로, 재림의 아침에 일어날 영광스럽고 엄청난 클라이맥스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에, 사탄의 통치 아래 신음하던 지구의 고통과 죄악의 역사가 마쳐지므로 사탄의 통치는 그 종막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생명의 시여자께서는 무덤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불멸의 생명으로 영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첫 열매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날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2. 부활은 재 창조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비진리처럼 부활할 때 영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활할 때는 영과 신체(몸)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서가 아니라 신체를 갖고 부활하셨다는 기록을 보아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6-39).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가 있는 몸을 가지고 부활하신 것을 이 성경 절을 보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부활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죽음의 본질에 대해 살펴봅시다.

1) 죽음의 본질

죽음이 생명의 중단이라면, 성경은 죽은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까요? 기독교에 들어온 비진리가 가르치는 것처럼, 죽을 때 인간의 몸이 영과 혼이 분리되어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죽음은 완전한 멸절이 아니고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의 일시적인 무의식 상태에 불과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상태를 거듭해서 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다윗과 솔로몬과 이스라엘과 유다의 다른 왕들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들이 조상들과 함께 자는 것으로 묘사합니다(왕상 2:10, 11:43, 14:20,31, 15:8; 대하 21:1, 26:23). 욥은, 다윗(시 13:3)과 예레미야(렘 51:39,57)와 다니엘(단 12:2)과 똑같이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습니다(욥 14:17-12). 신약 성경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잔다고 말씀하셨고(마 9:24; 막 5:39), 죽은 나사로도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 11:11-14). 마태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났다고 기록했고,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를 기록하면서, 그가 “자니라”(행 7:60)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역시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습니다(고전 15:51,52; 살전 4:13-17; 벧후 3:4).

죽을 때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해하려면 사람의 본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나타낼 때, 하나의 유기체로서 전인적인 사람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혼”(원어: 네페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과 생기와의 연합인 생령(살아있는 혼), 혹은 영혼(네페쉬)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에는 반대 현상이 생깁니다. 곧 땅의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서 생기가 제거되면, 의식이 전혀 없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은 영혼(네페쉬)이 됩니다(시 146:4). 몸을 이루었던 요소는 본래 그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창 3:19). 영혼(네페쉬)은 육체를 떠나서 의식적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을 때 영혼(네페쉬)이 하나의 의식적 존재로 생존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실로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쉬)은 죽”(겔 18:20)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분리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몸과 영혼(네페쉬)은 함께 존재합니다. 또한, 성경은 어느 곳에도 사람이-혹은 그의 “영혼”(soul, 네페쉬)이나 “영”(spirit, 루아흐)이 천성적으로 불멸의 특성이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혼’(네페쉬)과 ‘영’(루아흐)이라는 말이 성경에 1,600회 이상 사용되고 있지만, “불사” 혹은 “불멸”이라는 낱말과는 결코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덤은 의식이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죽음이 하나의 잠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무덤(하데스)이 그 죽은 자를 내어주는(계 20:13) 부활 때까지 무의식 상태로 무덤 속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2) 재창조

부활은 재창조입니다. 부활은 썩은 인간의 몸이 새롭게 다시 재창조함을 받는 것이지 옛 몸을 다시 합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죽은 의인을 불러내시고 생명의 호흡을 다시 주실 것이며, 마른 뼈들에게 다시 살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비록 부활한 몸이 무덤으로 들어갈 때와 똑같은 물질이나 원소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개성과 동일성은 그대로 보존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불가사의한 일들은 인간에게 하나의 신비입니다. 죽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올 것이지만, 병에서는 자유로움을 얻고 아무 흠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바울은 밭에 뿌려진 곡식 알갱이의 예를 들어서 부활의 문제를 설명하였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5-38).

씨앗을 심는 예를 생각해 보면, 밭에 파종된 곡식의 알갱이는 썩었지만 거기서 새로운 곡식 낟알이 나옵니다. 썩은 낟알 속에 있는 자연의 원소가 결코 그전 것과 똑같이 재구성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자기를 기쁘시게 할 만한 아름다운 형체를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39-43).

이렇게 인간이 부활하는 것은 몸이 부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롭고 영화로운 몸이 될 것입니다. 옛 신체의 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아 합성된 몸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손을 통해 새롭게 재창조된 아름다운 몸일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로운 출생이기 때문이며, 육의 몸을 심고 영적인 몸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몸을 주실 것입니다.

3. 성품은 보존됨

인간이 죄를 간직하고 죽으면, 다시 말해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성품과 땅에 속한 육신의 성정을 가지고 그대로 죽으면, 그 사람은 이 땅이 불로 멸망할 때 땅과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여 거듭난 성품, 하늘에서 살기에 적합한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무덤에서 불러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은 생각과 감정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인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꼴 지워진 성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세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는 동안 간직하고 있던 성품의 특성은 죽음에 의해서나 부활에 의해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사회에서 나타냈던 동일한 성향을 가지고 무덤에서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 때에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지 않으십니다. 변화의 일은 지금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성품의 결함들을 회개하고 극복해야 하며, 이 은혜의 시기 동안에 균형 잡힌 성품을 이루어야 합니다. 죽을 때에 인간의 정신과 성품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대로 보존됩니다. 부활할 때에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성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서 성도가 되길 원한다면 먼저 지상에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죽을 때에 가지고 있어야 할 성품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서로 알아봄

부활하는 의인들은 각자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날 것이며, 따라서 친구들이 서로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구주의 얼굴과 태도와 음성은 모두 다 그분의 제자들에게 익숙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데 대한 충분한 증거를 받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어둠과 불신이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주님께서 자기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제자에게만 나타나신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도마는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한 주일 내내 그의 형제들은 희망과 믿음을 가진 것과는 달리 도마는 모든 것이 어둡게만 보이는 불행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동안 도마는 여러 번 반복해서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가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들이 눈으로 본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그들의 증언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자기의 불신에도 그는 부활의 그 좋은 소식이 진짜였으면 하는 가냘픈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예언의 증거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생각과 그가 한 말을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의심하던 도마는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여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못 자국을 그대로 지니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부활한 우리의 친구들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들이 혹시 이 인간 세상에서 모양이 일그러지고 병들고 볼품이 없었다 할지라도 완전한 건강과 균형을 갖추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럽게 된 몸일지라도 그 속에 그들만의 동일성이 보존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알아볼 것입니다.

 

마치면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우리에게는 복된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많은 신실한 믿음의 선조들이 부활을 믿으면서 숨져갔습니다.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성경이 말하는 부활신앙을 고백함으로 화형과 사형을 당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영국 국교회가 정치적인 이유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기록이 나옵니다. 영국 국교회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따라 영혼불멸을 부인하고, 조건적인 불멸을 고수하며, 부활을 믿는 다수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투옥하거나 화형에 처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때인 1575년 7월, 테르우르트(Hendrik Terwoort)와 피터스(Jan Pieters)가 화형에 처해졌고, 제임스 1세(James I) 때인 1611년 4월, 레가트(B. Legatt)와 위트만(Edward Wightman)이 역시 같은 이유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그들이 믿는 바에 대해 재가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13개조의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인 제12조의 신앙고백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26장 19절, 요한복음 11장 25절, 다니엘 12장 2절, 요한복음 5장 25절,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기록된 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죽은 자로부터 자신의 몸으로 일어날 것이며(욥기 19장 25절, 이사야 26장 19절, 고린도전서 15장), 그 후에는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마 25:34, 롬 2:6)

그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고수했던 부활신앙! 그러나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었기 때문에 큰 소망을 가지고 기꺼이 죽게 만든 그 복된 부활의 가르침이 이 시대에는 얼마나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되었습니까? 또한, 부활이 그렇게 복된 소식임에도, 그것을 믿고 부활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적습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지, 아니면 죽어 잠 자다가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의 성품을 준비한다면, 그리고 죽을 때의 성품을 매일 준비하고 산다면, 우리는 살아서나, 죽어서 부활해서나 그리운 예수님의 얼굴을 반가이 뵙게 될 것이며, 그 영화로운 재림의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부활의 소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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