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호 매일의 만나

매일의 만나

열한시 월간지 256호

1. 진리와 오류, 그리고 분별력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3,14).
진리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전달되므로, 양심을 되살아나게 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하여 말씀을 단지 문자적으로만 취하는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말씀은 영혼을 소성케 하지 않으며 마음을 거룩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성경에서 인용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계명과 약속에 정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사람들의 지성에 영적인 빛을 비추어서 진리를 마음에 전하지 않는다면, 어떤 영혼도 자신을 개혁하기 위하여 반석에 떨어져 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것은 그 영적인 대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비추심이 없다면 우리는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없으며, 사탄이 세상에 가져온 거대한 시험과 속임에 속절없이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는 빛과 어두움의 권세 사이의 쟁투의 끝에 가까이 있습니다. 갈수록 대적은 우리를 현혹하고 시험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계 13:14)을 미혹할 것입니다. 비록 어두움의 권세가 흑암으로 땅을 덮으며 사람들을 짙은 암흑으로 덮기 위해 활동할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분의 회심케 하는 권세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능력이 동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으로 하루에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살전 1:5)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그리스도인은 사회관계를 통하여 세상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밝은 빛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아직도 생명의 빛을 모르는 자들의 길을 환하게 비춰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성화된 사교적인 능력은 영혼을 구주께로 인도하는 일에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에 골몰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도 우리의 축복과 특권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몰인정하고 가혹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찾았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셨던 것처럼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울하고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결코 세상에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는 긍휼이 많으신 구세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모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바라 볼 때도 예수님에게서 보았던 그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시는 곳마다 그곳엔 화평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안온하고도 거룩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비록 인간이긴 하지만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임을 증거 할 때에 매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로 소생함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의의 태양을 향하여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빛을 발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이 받은 빛을 남에게 반사합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세상에 빛과 은혜를 보내실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양식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우리가 “오늘날(오늘, σ?μερον)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할 때, 비록 그것이 내일을 위해 충분하지 않더라도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 37:3)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라는 하나님의 보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에는 육신을 지탱해 줄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에게 영양을 공급하여 영생하게 할 영적 양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게 할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양식이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것을 마음 가운데 받아들임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을 먹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이해시키며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우리의 가슴에 새겨 주시기 위해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 그 말씀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해줄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축복과 영적 축복을 막론하고 필요한 것을 매일 구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성취시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변함없는 보호하심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친히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위대하고 귀중한 진리를 연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이런 교제를 나눔으로써 굶주린 영혼처럼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들처럼 생명의 샘에서 생기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4. 그릇된 열정을 삼가하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간혹 행동에 있어서 맹목적이고 아무 계획도 목적도 없이 무지하게 밀어붙이는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적인 열성은 원칙을 따르는 것이며, 충동적인 기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은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보다 더 큰 열성을 필요로 하는 사업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영생에 관계되기 때문에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적 열성은 말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활력 있고 능률 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적 열성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함이 모든 노력과 모든 사역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적 열성은 열정적 기도와 겸비와 가정의 의무에도 신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적 열성의 열매인 온유와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영혼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하여 희생하기를 자원하는 사람이 심히 적습니다. 말이 많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체하는 일이 교회 안에 난무 하지만, 말은 하기가 쉽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렬한 그리스도인적 열성입니다. 모든 사람이 먼저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할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 안에 계시는 때에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구속의 경륜에서 그리스도와 협력자가 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요? 또 어떤 일을 이 일과 견줄 수 있을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5. 세상의 허탄한 주장을 따르는 자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인간적인 철학과 사상, 그리고 세상의 관심사에 현혹되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권고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해석합니다. 영생은 말씀 가운데 있는 생명의 요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이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기도하는 정신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감화력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영적인 힘줄과 근육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갈급하여 깊이 파고 들어가는 자들만이 진리의 숨은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열렬히 탐구하는 자에게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시는 광채가 말씀 위에 비취며 새롭고 신선한 중요성을 느끼도록 진리가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는 것입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의 마음에는 과거에 전혀 느껴 본 적이 없는 화평과 기쁜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되고, 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진리의 고귀함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하늘의 빛이 말씀 위에 비취며 성경의 매 글자마다 마치 금으로 색을 입힌 것처럼 밝게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음과 정신에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이 영적이고 생명이 있는 말씀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성실히 연구하는 모든 영혼은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자들입니다.


6. 하나님의 동역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고전 3:9)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은혜 중에 살기를 애쓰는 모든 참된 마음과 진실된 영혼을 높이고 받들어 주실 것입니다. 또 겸손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는 영혼에게서 결코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서 일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 그분의 백성에게 빛을 주실 때에 그분은 오직 한 집단을 통해서만 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니엘은 유다의 왕자였으며 이사야 또한 왕족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었고 아모스는 목자였으며, 스가랴는 바벨론에서 온 포로였고 엘리사는 농부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분을 위해 일할 동역자를 부르실 때 인간적인 신분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우리가 허락만 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동역자가 되도록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탄의 성채를 함락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장비들과 모든 영적 무기들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가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은 이웃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바울과 아볼로에게 임하여 영적 사역을 위해 그들을 구별하셨던 그와 같은 은혜가 오늘날도 헌신한 그리스도인 선교인들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학교 교육이 부족한 사람들과 사회적 지위가 비천한 사람들이 가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토대로 영혼 구원 사업에서 놀라운 성공을 해왔습니다. 그들이 했던 성공의 비결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말을 은혜의 기름에 적시고, 사랑으로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 나가게 했으며, 하나님을 매일 배우기를 힘쓰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교양미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머물고 계신 모든 사람과 세상에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일 모든 사람은 인간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구주로부터 은혜를 받는 사람만이 영적인 생명이 조수같이 흘러 나갈 것입니다.


7. 성경에 의한 교육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요,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아이 때부터 성경을 알게 되었고, 가정교육을 통하여 경건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의 성경에 대한 신앙은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경건한 여인들이 디모데를 지도한 법칙이었습니다. 디모데가 그들에게서 받은 교훈의 영적 능력은 그로 하여금 말에 순결하고, 그를 둘러싼 악한 감화에 물들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의 가정의 교사들은 디모데를 책임을 지도록 준비시키는 일에 하나님과 협력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충실하고 끈기 있고 진실한 청년 임을 알고 그를 수고스러운 여행의 동료로 선택하였습니다. 유년 시절에 디모데를 가르쳤던 이들은 그들이 염려한 아들이 위대한 사도와 친밀한 교제로 연결되는 것을 보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에게서 교사가 되도록 택함을 받았을 때 청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의 조력자로 택함을 받기에 적합하도록 그의 어릴적 교육에서 그의 원칙은 굳게 세워졌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고 “믿음 안에서 참 아들”(딤전 1:2)이라 하였습니다. 위대한 사도는 가끔 젊은 제자에게 말하게 하고, 성경 역사에 관하여 그에게 질문 하였으며, 그들이 여기 저기 여행하면서 성공적인 사역을 행하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가르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디모데와의 모든 교제에 있어서 경솔하게 움직이지 아니하고, 침착하게 생각하고, 매 발걸음마다 이것이 주님의 길인가 하고 묻는 습관을 가르쳤습니다. 성령께서는 그가 거룩한 임재자의 거하실 성전을 꼴 지을 수 있는 사람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성경의 교훈이 매일의 삶에 작용될 때에 그 사람의 성품에 깊고 영속적인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이 교훈을 디모데는 배우고 실행하기를 순종하였습니다.


8. 견고한 터에 서 있는 자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으니라”(딤후 2:19)
주님께서는 매우 충실하고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진 한 백성을 두실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 준비하는 시기에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사역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열렬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전파하던 목사들이 신앙을 저버리고 원수의 대열에 가담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거짓말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인간의 신앙과 감정은 변할는지 모르나 하나님의 진리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처럼 확실하므로, 사탄이 자신의 모든 술책과 흉악한 능력을 다 발휘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거짓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이 효력을 잃도록 전력을 다할 동안 진리는 타오르는 등불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놀라운 자비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한 사탄과 그의 대리자들의 처지에 설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과 협력할 것인가?” 라고 끊임 없이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암흑의 세력과 원수가 되지 않는다면, 원수의 강력한 세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그의 치명적인 독은 언제고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을 치명적인 원수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은 비록 더디지만 지금도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바를 믿는 이유를 알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굳게 붙잡아, 다가올 시대에 대처하기 위하여 훌륭한 터를 스스로 쌓도록 해야 합니다.


9. 미혹과 기만을 막는 열쇠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하나님의 음성은 말씀을 통해 항상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많은 다른 음성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성경에 적용해 보지 않는다면 거짓선지자나 기만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올바로 분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들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올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탄이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눈앞에서 기적을 행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발이 하나님의 진리에 확고하게 서 있지 않다면 그 때 우리는 미혹하는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급기야 실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위한 유일한 안전은 감추어진 보화를 찾는 것처럼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보화를 구하는 것처럼 진리를 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놓고 ‘나를 비추소서 진리가 무엇인지 나를 가르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령께서 진리를 우리의 영혼에 새기기 위해 마음에 오실 때, 우리는 그 인상이 쉽게 사라져버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모든 점이 확고해지는 그런 경험들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분리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만날 특권이 없는 곳에 처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쌓아 가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대적이 우리를 둘러쌌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오직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10. 사람을 낚는 어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어떤 사람이든지 삶의 위기를 당할 때에, 우리가 조언이나 충고를 하려고 말할 때는 우리 자신이 경험해서 얻은 모본과 정신은 다만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사역자나 전도를 맡은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드러워지고 겸손하여지고 순전하여지기 전에는, 남을 변화시킬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변화가 온다면, 타인을 축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마치 향기 좋은 꽃을 피게 하기 위하여 장미나무가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불행한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가 어디 있든 그 지쳐 있는 자들에게 적절한 말을 해줄 기회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달픈 삶의 와중에서도 그들의 성품의 고결성을 보존함으로써 온유함과 겸손한 중에 주님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이해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의외로 우리는 어둠의 쇠사슬에 묶여 있으며 또 결단력과 도덕적 능력이 부족한 자들의 시련에 대해 조금 밖에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에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영혼들로 인해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낙담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닥이라도 희망의 빛이 있는 한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일을 그쳐서는 안 됩니다. 고귀한 영혼들은 자기를 희생하신 구주께 너무나 비싼 값으로 사신 바 되었습니다. 돕는 손길이 없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결단코 새롭게 소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내와 백절불굴의 노력에 의해 그들도 고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 친절한 태도, 진심이 담긴 이해와 같이 그들에게는 이론이 아닌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11. 소중한 한 가지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예수님은 하늘에서 주신 교훈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언제나 큰 축복을 나누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이해의 눈을 열어 그들로 하여금 천연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세상을 붙드시는가를 깨닫도록 노력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놀라운 교훈을 주실 때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듣는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음식 준비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온화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보다도 자기에게 더 귀중한 말씀 곧 구주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말씀을 그의 마음에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침착하고 헌신적인 정신과 장래와 영생에 관한 지식을 깊이 갈망하는 마음과 영적으로 향상함에 필요한 은혜였습니다. 마르다는 잠시 후에 지나갈 일은 덜 염려하고, 영생을 위하여 더욱 염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그들을 현명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도록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에도 주의성 깊고 정열적인 일꾼이 필요합니다. 마르다와 같은 사람들에게 활동적인 교회 사역에 그들의 열심을 다할 넓은 분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근면과 기민성과 정력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화 되어야 합니다.


12. 인침 받은 일꾼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분의 교회의 교인들을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능력이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능력으로 삼으면 그분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실 것이며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 사업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시며,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7-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신 손이 우리의 입에 대여 있음을 확신하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세상에 말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거룩한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화들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을 세상에 전달할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구주께서는 성령과 그분의 성품을 세상에 나타낼 사람들을 무엇보다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구주의 사랑이 사람을 통하여 증거 되기를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습니다. 온 하늘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능력을 나타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진리를 선포하는 특별한 사역을 하도록 능력을 받았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순종한다면, 교회에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충성을 다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그 교회를 대적할 세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주의 강림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촉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인 것입니다.


13. 살아 있는 믿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인식하며 우리의 삶에 비추는 하늘의 빛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사상과 행동 가운데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사슬에서 흠 있는 한 고리는 사슬을 가치 없이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도움 없이는 이 거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또 그 약속들을 그분의 불변의 말씀에 관한 산 믿음으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하고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적인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적인 믿음에 기초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반석 위에 발을 놓게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모든 시간 내내 그리스도께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성품의 완전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질문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너무나 분명한 명령을 주셨으며, 우리는 그 명령에 절대적인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의 뜻이 기록된 성경책을 덮은 채, 묻고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끝까지 이러한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마침내 멸망의 위기 가운데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믿음을 떠날 때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확신하며 흔들리지 않을 위치에 있는지 끊임 없이 살피고, 영혼들이 진리를 떠나는 것으로 인해 아주 조금이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14. 하나님의 은총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슥 4:7)
하나님 성전의 회복과 건축을 방해하기 위하여 생겼던 그 어려움들과 같은 그러한 난관들을 당하게 됩니다. 곧 스룹바벨 앞에 나타났던 곤란의 큰 산들을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에 충성으로 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세울 수도 없고 또 사역을 멸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움과 반대를 당한 중에도 하나님의 사역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보호하시고 그분의 거룩한 성령으로 인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이뤄지고 있는 그분의 사역은 결단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영적 성전의 건물은 완성을 이룰 때까지 곧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는 함성과 함께 머릿돌이 내어질 때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사명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 곧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를 세상에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성품을 세상에 나타낼 대리자들 외에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없습니다. 또 구주의 사랑이 인간을 통해 나타내지는 것만큼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는 진리를 선포할 하나님의 대리자가 있고, 특별한 사역을 하도록 그분에게 임명된 하나님의 대리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그분의 모든 계명에 순종만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그 교회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그들의 충성심에 진실하고 주님을 영광되게 한다면, 그들을 대항할 그 어떤 세력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 굳건해 짐으로 온 세상이 은총의 분위기로 뒤덮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굴복할 때 이 목적은 달성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영혼을 주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하십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입니다.


15. 성결한 언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세상에 주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성취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런 목적을 기꺼이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한 가지 목적으로 자기 동료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처럼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참된 생명력이 지극히 적은 이유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토록 알기를 원하는 그 어떤 신학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차고 넘치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지존하신 분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이 말씀처럼 인간 가슴속에 있는 그분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열매를 맺게 하는 사역을 행하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원수와 마주치셨을 경우, “기록되었으되” 라고 하신 그 간단한 말씀의 모본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주의 모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을 적게 말할수록 대화는 더 순수하고 은혜로워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화된 언어의 습관을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결한 언어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16.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그리스도는 야심으로 가득 찬 마귀에게 속고 기만 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박 아래 있었으므로 이 지구상의 어떤 백성도 누릴 수 없는 왕국을 세우실 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방의 멍에를 벗기시고, 그분의 백성들을 높이시어 하늘 왕국의 왕자로 삼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앞으로 나와서 그분께 굴복하던가 아니면 멸망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각 시대 선지자들이 일어나 그러한 필연적인 결과에 대하여 특별한 복음을 계속 외쳐왔습니다. 세상 왕국과 이방인의 부요함을 발아래 두고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제사장이며 왕으로 높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열화와 같은 이런 기대를 두고 기도를 게을리 할 경우, 무익한 인간 그 이하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사탄의 거짓말에 기만 당하고 있었으므로 참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그분은 하늘 왕국의 특성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셨는데, 이 땅에서의 그 이름이나 지위, 그리고 칭호는 하늘에서 무가치하게 여겼지만 아름다운 덕과 고귀한 인격은 가장 위대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를 하실 때 그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첫마디는 그러한 헛된 야망들을 땅 속에 묻어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참 하나님을 몰라 멸망하는 영혼을 정결하고 거룩한 분위기 속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 경고는 비단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경고가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인 것입니다.


17. 그리스도의 순종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인 자 안에 거하십니다. 시련이 올지라도 주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인데, 주님의 임재가 있는 가시덤불은 불에 타면서도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불은 가지를 소멸시키지 않는 대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연약한 인간 대리자와 같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용광로 같은 시련의 불이 타고 핍박과 시련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은 단지 우리의 죄 된 성향 즉 찌꺼기만 없앨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련의 과정으로 인해 금은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온 시련에 불평하지 말고, 그분이 고통 받는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이래 우리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신성에 인성을 옷 입으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눈을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슬픔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분은 시험 중에 있는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인간이 시험 받은 것처럼 모든 점에서 시험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순종은 인간으로서의 승리와 순종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과 동일한 순종을 오늘날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하지 않고는 사탄의 시험을 결단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준 순종은 어떤 한 낮은 하나님이 그보다 높은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순종하신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부성애의 근원이며, 수세기에 걸쳐 인간의 마음의 통로를 통해 사랑이 흘러나오는 근원으로 여기도록 하시기 위해,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18. 구속의 경륜이 만들어지던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 말씀은 영원 전부터 인간을 향한 은혜의 목적과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에 따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능력과 함께 창조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능자께서는 인간의 약점과 그로 인한 결과들을 아셨지만 그분의 보좌를 의에 기초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행하시는 일을 단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나중을 아십니다. 따라서 구속은 사후처리가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목적은 작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에까지 미칠 것이었습니다. 우주의 창조와 복음의 비밀은 다 한 목적으로서 자연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셔서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타락한 인류와 우주의 지성들에게 나타내진 바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인성의 팔로는 인간 가족을 두르시고 신성의 팔로는 영원을 붙드십니다. 그분은 거룩한 하나님과 죄 많은 인류 사이를 연결하는 중계자이십니다. 그분은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수 있는 분이십니다. 구속의 큰 언약 가운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변함이 영원부터 그리스도와 협정되었습니다. 은혜의 언약이 믿음의 선조들에게 나타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한 언약이었고 복음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한 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3)
죄인이 회심한 후에 생활에 나타나는 커다란 변화는 어떤 인간적 선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인 자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19.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믿음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용서를 약속하시기에 적합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구원을 얻을만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죄를 위해서 마련된 치료제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죄인의 죄와 허물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그의 구세주로 믿을 때에 틀림 없으신 그분의 약속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우리의 칭의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자와 보증인으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속죄와 의가 되셨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고, 죄인은 율법에게 이 빚을 갚아야 하는데, 칭의의 경험을 한 사람은 비로서 이것을 치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통해서 가는 길 뿐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고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순종을 죄인의 계정에다 두실 때, 인간의 실패 대신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가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고 회개하는 그 어떠한 영혼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의인을 대하듯 그를 대하시고,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어떻게 의로 여기시는 바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말씀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임을 소망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가슴 뛰는 희망의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백성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한 교회를 두고 계시는데 그 교인들은 선택된 백성들이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방황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불평을 일삼는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한 백성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역의 성공 여부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역의 대장이시므로 모든 일을 질서 있게 행하실 것입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사 43:3)고 하신 말씀처럼 다른 열방을 희생시켜가면서 까지라도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위한 특별하신 사랑과 주권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월등하게 선하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기인하여 그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실은 훌륭한 배를 항구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키를 조정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사역이 위험 가운데 처해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 키를 잡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난국을 뚫고 나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항구까지 무사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을만한 이유가 우리에게 넘치도록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유한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돌보시고 주관하시도록 간구할 때, 우리의 사역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21. 언약의 연속성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홍수 후에 인간들은 다시 땅 위에 번성하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죄악도 함께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완악한 죄인들이 그들의 죄악적인 길을 따르도록 버려두시고, 그 대신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장래 후손들을 위해 그분의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같은 언약 곧 은혜의 언약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창 22:18)겠다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가운데서 새롭게 반복 되었습니다. 이 같은 언약에 대하여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도 베드로는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7)고 이 언약의 연속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와 같이 메시아에 대한 복음을 깨닫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가 의인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중에는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이르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해 증언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고 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아담과 처음으로 맺게 되고 아브라함 때에 재확인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는 비준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속의 암시가 주어진 이래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바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무조건적 순종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뚜렷한 믿음과 신뢰의 본보기였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과 신뢰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22. 가장 무서운 영적 기만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자신의 말로 스스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때때로 사탄의 자극을 받아 순간적인 충동 아래서 시기나 악한 억측의 말을 발하게 되며, 자신들이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을 마치 진정으로 믿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우리의 사상에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즉 우리가 한 말에 스스로 속게 되며, 사탄의 선동을 받아 말한 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또 어떤 의견이나 결정을 발표한 후에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우리는 흔히 너무 교만하고 완악하여 그것을 철회하지 않고 자신이 옳은 것을 증명하려고 힘쓰다가 마침내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빛을 조금씩 거절하고, 조금씩 세상과 타협하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상을 버리지 않는 점차적인 결정들을 합니다.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들면서 죄인들과 사귀는 것이 별로 위험한 일이 아니라고 결정함으로써 점차적인 결정을 시작합니다. 언제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결정, 희생이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자신을 섬기기로 하는 한두 번의 결정, 날마다 삶에서 말씀과 기도를 등한히 하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와 영원한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그 경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즉 성령에 굴복하고 매순간 주님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점차적인 타협과 자기 기만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자기 연민에 의한 지나친 피해의식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교만함의 발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의 말씀을 매일 먹고 주님과 매일 동행하는 경험을 해야할 것입니다.


23. 안식일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겔 20:20)
출애굽 시대의 안식일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뚜렷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에 그들의 일 감독자들은 매주 요구되는 작업량이 증가하므로 그들을 안식일에도 노동을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박에서 구원을 받아 여호와의 계명들을 방해 받지 않고 준수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은 공포되었고 두 돌비에 “하나님이 친히 쓰신” 그것은 모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동안 일곱째 날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고 예비일에 2일치의 몫이 기적적으로 보존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안식하는 날에 대하여 끊임없이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신 5:12)는 모세의 권고를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안식일 계명을 충실히 준수함으로, 그들의 창조주와 구세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책임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할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들이 올바른 정신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한, 우상 숭배는 존재할 수 없고, 이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십계명의 요구들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며,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2)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봉사의 기간 동안 안식일의 의무적인 요구를 강조하셨고 그분의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친히 주신 제도를 존중히 여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안식일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표징(sign)입니다.


24. 마지막 때 사탄의 노력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7)
우리가 만일 사탄보다 강하신 그리스도의 구원과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탄과 그 부하들의 권능과 악함을 당연히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집의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는 일을 철저히 하여 악한 자의 손에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는 몹시 주의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악한 천사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탄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육체를 훼손하고 고통스럽게 하여 생명과 재산을 손쉽게 파괴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악한 자의 유일한 기쁨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고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여 마침내 악령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입니다.
과거 약 6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그리스도와 사탄과의 대 쟁투는 결국에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인류를 위하여 행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봉사를 깨뜨리고 사람들을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가 마치기 전까지,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하여 희생을 드리는 일이 다시는 필요 없게 될 때까지, 사람들을 암흑 상태에 붙잡아 두어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사탄은 자기의 권력을 거절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없는 때, 즉 일반 세상과 교회가 냉담하고 죄악 가운데 있을 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자기의 손에서 벗어날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영원한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부르짖는 때에는, 거기에 벌써 사탄이 와서 그리스도의 권능과 싸움을 하게 됩니다. 사탄은 비록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배에 참석한 자들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그침 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끝까지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25. 밀실의 기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그리스도인에게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칠 때에도 마음의 안정이 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억울한 취급을 받을지라도 격분해서는 안 됩니다. 복수의 정신을 가지면 우리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소멸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우리의 곁에는 군기를 들고 원수를 대적하는 하늘의 사자가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그들이 의의 태양의 빛난 광선으로 우리를 둘러싸면 사탄은 결코 이 광선을 넘거나 뚫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이 거룩한 빛의 방패를 돌파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더욱 악해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앞으로 고난이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이 우리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밀실로 들어가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께 지혜를 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 50: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의 복잡한 문제와 곤궁한 사정과 영적 도움의 필요를 그분께 아뢰라고 권유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우리는 곧 그분께 진지하고 열렬한 호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끈기 있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강한 믿음의 증거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홀로 아무런 방비도 없이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전능자의 팔을 움직이고 기도는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합니다”(히 11:33,34).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죽은 순교자들의 증거, 즉 “이방 사람의 진을 물리”친 증거를 들을 때에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환난 날에 주님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건지실 것입니다. 그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26. 성경 연구의 자세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사탄이 가장 잘 쓰는 기만 중의 하나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믿든지 상관할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사탄은 진리가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이 성결하여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짓 교리, 지어낸 말들을 교회 안에 퍼뜨리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애매하고 이상하게 해석하는 것과 종교적 신앙에 관하여 여러 가지 모순된 이론을 발표하는 것은 사탄의 소행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 교회에서 자기의 마음에 맞는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을 곡해하는 것 같은 그러한 일반적 폐단은 바로 이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신중히 연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슨 새로운 신기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조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경의 어떤 절을 그 전후 관계없이 끌어내고, 혹은 한 절 중 반절 만을 가지고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반절을 연구함으로 그 절 전체의 의미는 전혀 관계없는 성경절들을 그릇 인용하여 자기들의 육적 정욕을 마음껏 행하기 위한 증명을 삼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성경의 표상이나 내용을 자기의 주장과 일치하도록 해석하므로써 성경 자체가 성경의 해석자인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을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설명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온전하게 해석하기 곤란한 것은 물론이며, 쉬운 구절일지라도 그 진정한 의미를 곡해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시 97:11)셨습니다.


27. 절망의 순간에 처한 사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주님의 백성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의 저수지가 열리며 그들이 구하는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약간의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좀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은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지체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전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어떤 속죄도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이미 이루어진 속죄를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죄로 얼룩진 영혼이 건전하게 회복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 보배로운 피의 공로에 의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청하는 동안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우리의 마음에 각인시키고 적용하십니다. 사탄이 의심과 낙담을 일으키는 당혹스런 순간에, 주님의 성령께서는 사탄에 반대해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말씀을 표준으로 높일 것이며, 의의 태양의 밝은 빛줄기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비출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절망으로 압도할 때, 성령께서는 살아 계신 구주가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중보를 우리에게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간청을 아버지께서 받으실 만하게 하는 향기, 바로 거룩한 향기이십니다.


28.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그리스도께서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창조주의 뜻대로 회복되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큰 희생을 받아들일 때,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인가 바알을 경배하는 자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외관상의 제단이 있을 리 없고 거기에 우상을 차려 놓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우상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마음속으로 신봉하는 사상과 목적을 돌이나 나무를 깎아 우상으로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알의 노예로서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 천연계 속에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는 참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철학적 우상이나 세상의 지식을 하나님 대신 섬기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가 그분 보좌의 속성이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동정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구주이신 아들 안에 나타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내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 특성을 소유하신 분을 사모하고 찾으며 그분을 닮기 원한다면 우리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 우리에게 입혀진 그분의 공로가 아름다운 향으로 아버지께 상달됩니다. 그리고 우리 구주의 성품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 내리게 되며 아름다운 향기처럼 은혜로 우리를 감싸게 됩니다. 사랑과 온유와 인내의 정신이 우리 삶에 충만해 진다면 완고한 마음들은 부드러워지고 믿음의 적이요 그리스도의 원수마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이 충만케 하라”(빌 2:3,4).


29. 사탄이 퍼뜨린 정신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9)
물질적인 것이거나 영적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인간의 지식은 부분적이며 불완전합니다. 사람들의 과학적 방면의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단순한 이론과 가설을 과학적 사실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딤전 6:20)으로 시험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너무도 흔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나머지 무한한 능력을 자연에 돌리는 어이없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의 닻줄이 끊어지면서 불신의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철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은 영원한 신비까지를 절대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것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해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능을 인정하게 되고 자기의 너무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지 않으시고 깨닫게 하지 않도록 하신 것을 굳이 알려고 애쓰며 짐작하고 추측하도록 하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 중의 대표적인 걸작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하늘에서 자기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모든 은밀한 목적을 자기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다고 불만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높은 지위에 관하여 계시된 것까지 완전히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는 또한 천사들에게도 그와 같은 불만을 일으킴으로써 함께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그와 같은 정신을 넣어 줌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무시해 버리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30.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만약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정로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했다면, 또 그가 예수님을 확고하게 바라보다가 한 순간 돌아섰다면, 그가 고의적으로 범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그는 다시 돌아서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잘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덜 사랑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는 자신이 구주와 교제해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가지를 잘못 판단함으로 하나님께 꾸지람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승리로 전환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말씀에서 교훈을 배우고 다시 속임을 당하지 않게 주의할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고,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하여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위한 진리는 건전한 신뢰가 함께 할 때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소위 학식 있고 세상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겸손한 마음과 순종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매일 배우고 있지 않는다면, 그들의 지혜는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들의 그럴듯한 지혜에서 세상에 유익한 이론들과 체계들을 계획하고 고안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날마다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31. 진리를 거절한 결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성령의 감화보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은 죄악의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감화는 점점 약해져서 불순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에게는 경고가 끼치는 힘도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점차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게 되고 육체의 정욕대로 살게 됩니다. 지금은 그들이 직접 뿌려온 씨앗의 결과가 무르익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멸시하고 육의 마음은 돌같이 딱딱 해져만 갑니다. 그것은 마치 홍수 이전 시대에 편만했던 강포한 사람들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영적으로 눈멀게 하지 않으시고 충분한 빛과 증거를 주셔서 진리와 오류를 구별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강제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셔서 선 아니면 악을 택하게 하십니다. 이때 사람들이 만약 자신의 판단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거절하고, 한 번 악을 선택하면 두 번째에는 보다 쉽게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가다가 마침내 죄 가운데서 굳어져서 그의 마음에 품고 있는 거짓된 오류들을 진리라고 믿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를 거절한 그의 선택이 그 열매를 내는 것입니다.
진리는 좌우에 날 선 검입니다. 삶과 죽음의 이 문제가 전 인류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이 선택은 우리가 영생을 얻든지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선택에는 중간도 없고 제 2의 은혜의 기간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기회와 특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 보좌에 앉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의 성향들에 애착을 버리고 모든 이기심은 뿌리째 잘라 버려야 합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는 말씀을 늘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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