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찾아온 은혜 [신앙기사 1부]

제1부 11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찾아온 은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11시 인생

 

살다 보면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그런 탄식과 원망과 때로는 분노와 절규가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데 직장을 잃었다. 대출받아 조그만 가게라도 하나 열었는데, 빚만 쌓이고 문을 닫은지 오래다. 평생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사기꾼에게 잃고 화병에 쓰러진 가장,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지 않아 눈물로 기다리는 엄마, 잘못된 결혼생활, 재수/삼수했는데 성적은 나오지 않고, 남들은 부동산과 주식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는데, 나는 하루아침에 벼락 거지가 되고, 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건강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된다. 짜증과 우울과 분노가 복합적인 감정으로 올라와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싶고, 차라리 미쳐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 있으면 뭐든 될 것 같고, 건강을 잃은 사람은 건강만 있으면 이제 주님 뜻대로 살겠다 결심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서 상처받은 사람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은 그런 욕구들을 가지고 산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결코 쉽지가 않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힘듦을 넘어서 괴롭다. 힘들지 않은 사람, 가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죽을 수만 있다면, 아니 죽어도 된다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가 많다. 나의 욕심이 잉태해서 자초한 어려움도 있고, 전혀 원하지도 않고 계획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곤란한 경우도 있다. 또 나의 욕망으로 일을 벌였는데 잘못되면 하나님 원망하고, 너무 일이 꼬이면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에 ‘될 대로 돼라’ 하며 죄에 죄를 더 쌓아 올린다. 하지만 남는 것은 깊은 허무와 죄책감이 더 깊어질 뿐이다. 돌이키고 싶은데, 돌아가고 싶은데 너무 멀리 온 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적, 영적 방황은 계속되기만 한다.
이렇게 괴로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다녀도 건강 잃으면 괴롭고, 건강해도 돈 없으면 괴롭고, 건강하고 돈 있어도 자식이 속 썩이면 괴롭고, 이것저것 다 있어도 사람들과 관계가 틀어지면 괴롭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고, 이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늘이 주는 평안이다. 직장을 잃어도, 사기를 당해도, 건강을 잃어도, 쪽박을 차도, 자식들이 속 썩여도, 사람들이 떠나도 내 마음에 하늘이 준 평안이 가득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평안을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늘 평안을 가질 수 있을까? 전 재산을 하나님께 갖다 바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뭔가를 열심히 해서 하늘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그 평안은 우리가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지금은 마지막 때, 종말의 때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베푸시는 은혜가 있다.
성경에는 은혜에 대한 얘기가 참으로 많지만, 우리는 그 은혜를 거저 받아들이기에 많은 망설임이 있다. 이 세상이 비은혜의 세상이기 때문에 은혜라는 단어는 익숙지가 않다. 왠지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비은혜의 세계에서 성공하는 법을 배웠다.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잡는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권리를 주장하라. 돈 낸 만큼 찾아 먹으라.” 나도 이런 공식들을 잘 안다. 그런 공식을 따라 살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이런 공식이 이뤄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 마땅한 대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그저 공정한 대우받기를 원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정의, 평등, 공정> 이런 주제가 매우 민감한 이슈가 되었다. “나한테 더 잘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더 대우를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최소한 공평하게는 해 줘야죠.” 그래서 조금만 차별을 느끼게 되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가 부르짖는다. 이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배운 법칙들이다.
그러나 성경의 목소리에 조금만 귀 기울여 보면 세상의 공식에는 어울리지 않는 은혜가 거대한 파도처럼 넘쳐흐르고 있다.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만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형벌받기에 마땅하지만 받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데 받은 것이 있다.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용서를 받았다. 진노를 받아 마땅한 내가 사랑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의, 평등, 공정>을 학습하다 보니, 은혜에 대해 본능적 저항감이 있다. 그래서 자꾸 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선인이나 악인에게 고루 비추이는 햇빛과 비, 가꾸는 이 없어도 험한 산자락에 절로 피는 들꽃… 우리에게 은혜로 가득 찬 세상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은혜를 분석하거나 정의하신 일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이 은혜다. 저것이 은혜다.” 하신 적이 없고, 은혜라는 단어도 거의 사용하신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은혜이셨기 때문이다. 은혜가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통해 은혜를 전해주셨다.

 

 

11시 은혜

 

마태복음 20장은 예언적 의미에서 인류 역사가 끝나기 1시간 전에 부름받아 일하는 “열한시일꾼”들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12시에 종말이 오기 때문에 열한시일꾼들은 종말 직전에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실 열한시일꾼이라는 말은 그렇게 멋진 단어가 아니다. 애달픈 말이다. 행복한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열한시일꾼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가?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6시)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오전 9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오후 12시)와 제구시(오후 3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마 20:1~7).
3시, 9시, 11시는 유대인들의 시간개념으로서 6을 더하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이 된다. 유대 시간으로 11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5시를 말한다. 이 장면이 무슨 장면인가? 새벽에 일꾼들을 모집해 가는 새벽 인력시장의 모습이다. 인력시장 앞에 가보면 길게 줄을 서 있고 북적북적하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여기저기 폐업하고 일용직이라도 구하기 위해 일할 사람은 늘어나는데, 일할 장소는 줄어만 간다. 6시부터 모집하는 게 아니라 6시가 마감이다. 그래서 경쟁 때문에 새벽 4시부터 줄 서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아무리 일찍 와서 줄 서도 실력 없는 사람, 나이 많은 사람, 경험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써 주질 않는다. 그래서 이런 경쟁에 밀리는 사람들은 일 못 나가는 날이 일주일 중 4일은 된다. 인력 모집 마감은 6시. 선택받은 사람들은 승합차를 타고 여기저기 흩어진다. 남겨진 노동자들이 그래도 자리를 뜨지 못하는 건 혹시나 선택받을까 하는 미련 때문이다. 보통 오전 9시까지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오전 9시는 유대 시간으로 제 3시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5시. 유대 시간으로 11시. 이 시간은 사람을 모집하는 시간이 아니라 일이 끝나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몇 사람이 인력시장 앞에 아직도 서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종일 인력사무소 앞에서 자기를 불러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 사람의 삶에 얼마나 깊은 시름이 배어 있을까?
대부분 오전 9시에 집에 돌아갔고,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남아있던 어떤 사람들은 매우 드물지만 정오 12시에, 그리고 기적적으로 오후 3시에도 부름을 받고 일터로 갔다. 그런데 오후 5시까지 부름을 받지 못한 이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결국 대부분 포기하고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뜨지만 이 사람은 차마 돌아갈 수가 없다. 아내는 병든 부모님을 간병하고 있고, 아이들은 아빠가 두 손에 먹을 것을 사 들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빠!” 하며 달려 나올 아이들에게 과자봉지 하나라도 내놓아야 할 가장이 아니겠는가? 빈손으로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흔들리는 가족들의 눈동자를 어떻게 보겠는가? 차마 집에 갈 수가 없다. 오늘 빈손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굶어야 한다는 그 절박함에 모두가 떠나버린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들이 11시 일꾼이다. 이 사람들은 능력 없는 사람들, 외면당한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 결혼에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 상처 많은 사람들, 나이 많아 무시당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루 일을 하고 마쳐가는 그 시간이지만, 이 사람은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 차마 빈손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벌써 눈물이 쏟아지며 장터에서 서성이고 있다.
11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 부끄러운 것이 더 많은 사람들, 상처와 얼룩뿐인 지나온 인생들, 부모에게 버림받고 시설에서 자란 사람들, 대인기피증에 몇 개월, 몇 년 동안 말을 안 하고 살아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이 있기에 절망하고 싶어도 절망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 악착같이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으로 힘겨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게으르거나 불성실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오후 5시는 어떤 시간일까? 누가 봐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이다. 그들은 부르짖는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우리 인생에 11시가 올 때가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몰려올 때가 있다. 11시만큼이나 막다른 곳에 다다를 때가 있다. 고민과 괴로움에 짓눌려 이젠 끝인 것만 같은 시간,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런 11시가 우리 인생을 채울 때가 있다. 반복되는 실패, 씻을 수 없는 상처, 너무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신다. 모든 것이 캄캄하게만 보이고,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유혹이 밀려오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지금은 절망의 순간일지 모르나, 답답한 한숨의 시간일지 모르나 그럴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바로 그때,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11시에, 우리 인생의 주인이 찾아온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마 20:7). 지금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가? 한숨과 탄식뿐인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주인이 찾아오신다. 성경에서 가장 감격적이고 달콤한 말 중에 하나를 찾는다면, 이 말씀이 아닐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아무도 불러 주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은혜가 찾아오신다. 절박한 심정으로 버티고 서 있는 그 절망의 시간인 오후 5시에 우리를 부르신다. 그것은 전적인 은혜이다. 우리 인생의 11시, 그 캄캄해 보이는 시간에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마치 포도원을 운영하기 위해 일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련한 그 일꾼을 위해 포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무익한 종의 고백

 

이제 11시 일꾼이 포도원에 들어온 후 1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일당을 받을 시간이다.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8~14).
예수님의 이 포도원 비유는 세상적인 논리나 경제적 이치로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취지였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경제논리나 정의, 평등, 공정이 아니라 바로 은혜이다. 우리가 일한 만큼, 행한 만큼 우리를 가치 있게 보시는 것이 아니다. 은혜란 하루 품삯처럼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일등이냐 꼴찌냐를 따지지 않는다.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충성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별처럼 빛나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이 아님을 또한 인정한다.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랐지만 직장을 잃고, 장애를 입고, 재산을 잃고 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땅의 인생이 평생 수고와 고난과 아픔의 생애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는 증거는 아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을 떠나야 할 이유가 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다 끝내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이 11시 일수 있다. 이때에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주님의 은혜를 온 마음으로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채 평안한 휴식에 들어가며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며 고백하게 될 수도 있다. 의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한 번도 자신에게서 햇빛을 거두신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메말라 죽도록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에, 아니 지금 살아있을 때에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지나가는 산들바람도 그저 왔다 가는 무의미한 바람이 아니라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임을 지금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마지막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수 있다. 건강, 가정, 직장, 재물, 관계, 평판, 명예… 우리가 다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아직 하나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아니요. 전 하나님을 떠난 지 오래됐어요. 저는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요. 하나님이 계신 걸 믿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저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게 없을 거예요. 하나님도 저를 포기하셨을 거예요.” 아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무 곳에, 아무렇게나 그저 의미 없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꽃들도 주님의 은혜가 찾아오시면 그때부터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창조주의 사랑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은혜는 죄인을 위해 생명을 대신 주신 주님의 사랑이며,
은혜는 무가치한 사람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혜는 탕자에게 소망을 갖게 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며,
은혜는 집 나간 탕자를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기다리며 버선발로 마중 나가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은혜는 자신의 속절없음을 보며 낙심치 않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힘이다.
은혜는 회개와 거룩을 가능하게 하며, 재림을 사모하게 만든다.
은혜는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한다.
은혜는 우리의 눈을 밝게 하여 우리 인생에 관여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최선을 보게 한다.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을 일깨워주고, 주인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충동을 일깨워준다.
은혜는 충성스럽게 일하게 만드는 동력이며, 약한 자가 힘을 내게 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은혜는 주인에게 최선을 다해 충성하며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는 무익한 종의 고백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 은혜는 주님이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아낌없이 베푸신 모든 것이다! 우리에게 베푸신 부족함 없는 그 은혜, 우리를 구원하기에 부족함 없는 그 사랑을 우리가 지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보상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따라서 사는 삶이 어렵다 불평하지 않으며, 주님을 위한 헌신이 힘들다 하지 않게 된다. 이런 무익한 종의 고백을 우리 주님은 몹시 듣고 싶어 하시며, 몹시 기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11시 일꾼은 자신의 생명조차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는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용사요, 예수의 증인이다.

 

 

은혜를 잊어버린 결과

 

이 은혜로운 장면에서 예수님은 굳이 먼저 온 일꾼들의 불평불만을 곁들이셨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놔두시지 왜 굳이 불평하는 일꾼 이야기를 넣었을까?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온 일꾼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먼저 온 일꾼처럼 될 수가 있다. 어쩌면 그들도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종일 장터에 있을 뻔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의 사정을 알아보고 불러줬는데, 그 불러 주신 은혜를 잊어버렸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자기의 행위를 기억하고 마땅히 받아야 될 보상만을 생각한다. 남들이 자신의 공로와 헌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잊힐지라도 자신의 공로는 절대 잊혀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우리 모두는 이 부분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11시에 부름받은 일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인을 만나므로 내 인생의 방황이 끝나지 않았는가!
종일 일한 일꾼들도 처음 약속대로 받았고, 주인은 약속을 지켰다. 주인은 그들을 속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불만이 생겼는가? 불만의 원인은 은혜의 파격적인 계산법에 있다. ‘왜 저 사람들이 나와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다. 은혜가 익숙해지니까 감사를 잊어버렸다. 은혜가 익숙해지면 감사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된다. 얼마나 큰 비극인지 모른다. 우리의 삶 속에 아직 감사가 있는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 있는가?
먼저 온 일꾼들이 불평한 첫 번째 이유는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늦게 온 일꾼과 자기를 비교했기 때문이다.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비교하는 순간 자신이 더 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우월감이 생겨버렸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대우를 더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보다 인정받지 못할 때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서운함이 생기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나아 보이거나 잘나 보여야 만족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서 형제들에 대해 시기와 질투, 냉랭하고 인색한 정신을 나타낸다.
유대인이 먼저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바로 이러한 정신 때문에 그들은 버림받고 말았다. 유대인뿐 아니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난 이렇게 하는데 넌 왜 이렇게 안 하느냐?” 형제자매의 흠을 고쳐 주려다가 정작 자신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이 보이는 이유는 내가 어떤 죄인인지 깨닫지 못해서 그렇고 그러다 보니 주님께 참으로 용서받은 경험이 없어서 그렇고,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
또 교회에 분란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면 질투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와 공로대로 보상을 받고 싶어 불평하는 일꾼은 아낌없는 은혜를 베푸신 자비로운 주인의 성품을 곡해하고 다른 사람이 오해하도록 부추기는 악한 종이다.
어느 틈엔가 은혜는 잊히고, 내 수고의 추억만이 생생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래 위에 새겨 놓고, 내 수고는 돌 위에 깊게 새겨 놓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퇴근 1시간을 남겨놓고 11시 일꾼을 부르는 이 은혜로운 장면에서 주님께서 먼저 온 일꾼의 불평을 언급하신 이유는, “너희는 그렇게 되지 말라”라고 주신 주님의 지혜이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말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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