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찾기 [신앙기사 1부]

제1부 하나님의 이름 찾기

 

“모세가 하나님께 여쭈었다. ‘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제게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출3:13).

모세의 오경과 그 밖의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수백 개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각 칭호는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성품의 국면을 공개하며, 또한 불가사의한 그분의 성품을 상세히 알게 해 준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한 낯선 사람을 소개한다 치자. 그는 어딘가 색다른 사람이다. 우선 그는 ㅇㅇㅇ라고 소개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부르며 조금 알게 된다. 또 그는 아버지와 남편이며 직업은 선생님이며 취미는 정원사, 사진사, 그리고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집사이며 어느 자선 단체의 회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새로운 칭호가 하나하나 추가될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가. 그러나 실은 우리가 그 사람과 함께 한 지붕 아래서 한동안 살아보고, 그 집 아이들의 행동을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그와 같다. 칭호 하나하나가 조명을 밝혀 주고 그의 성품에 대한 빛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주님께서 이처럼 당신의 자녀들에게 자신을 공개하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사탄의 곡해와 사람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정말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에게 알게 하시려는 그분의 의도 때문이다. 그 의도는 더 나아가서 인간이 자신의 타락한 상태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변화의 이상(理想)을 받아들여 전향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칭호를 한꺼번에 다 연구해서 파악하려는 자는 벽에 부닥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도로 마광(磨光)된 아름다운 여러 면의 다이아몬드에 햇빛을 비추고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광채가 너무 강하면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오직 번뜩이는 섬광을 볼 뿐이다. 그러므로 보석을 잘 보기 위해서는 그늘로 들어가서 빛이 한 번에 하나의 단면만 비추도록 하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는 보석의 단면 몇 개를 검토한 후 그것이 보석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칫하면 각 단면과 보석 전체와의 관계를 망각할 위험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경고의 말은 하나님의 성호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어떤 하나의 성호도 전체를 다 포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어느 일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완전한 초상화는 성령께서 허락하신 모든 성호를 다 연구하여 그 의미를 종합해 볼 때 그려진다. 이처럼 각 성호가 강조하는 빛을 하나하나 합쳐 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의 성품의 찬란한 광채를 어렴풋이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드디어 예수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사명을 마치실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그의 영광의 충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썩지 않는 육안으로 그를 보는 날이 오기까지 그의 사랑스러운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문뜩 깨닫게 될 것이다(계 22:4).

 

 

이름들은 삼위의 각 위(位)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주의해 둘 것을 하나님의 칭호들은 삼위의 신격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지 삼위의 각 위에 따로따로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각 성호의 깊은 뜻은 최종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벽하고 찬란하게 드러났다. 성경의 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를 소중히 여겼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다윗은 찬양하기를 인생의 투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旗)를 세우리라”(시 20:5) 하였다. 지혜의 사람은 적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의 방어가 어디 있는지를 알았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고 그는 원수들을 향해 부르짖었고,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고 주장했다. 시편 기자가 쉴 곳을 찾은 곳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리라”(시 9:10) 하였다. 아무리 연구를 깊이 해도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세와 본질을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선별해 주신 당신의 여러 이름을 연구할 때 우리는 점점 커지고 깊어지는 그의 심오한 영광을 분별하게 된다. 계속해서 그의 이름의 심오한 뜻을 탐색할 것이다. 이름이 아름다우신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그분 안에 있는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은 아직도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의 연구로 하나님의 본성을 깨달으려는 이들의 노력을 무산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거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를 기도하며 심사숙고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칭호가 나올 때마다 그 배경에 숨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 왜 특별히 어떤 칭호를 어떤 경우에 사용하셨는가를 연구해 보면 의미가 확실히 드러난다.
구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들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엘로힘(‘Elohim), 엘(‘El) 또는 엘로아(‘Eloah)(창1:1; 25:11)를 일괄해서 “God”으로 표기하고, 원문의 야훼(Yahweh)는 “LORD” 또는 “GOD”으로 전부 대문자로 표기하고 있다(창2:4, 5; 6:5~8). “Lord”—이렇게 첫 글자만 대문자로 쓴 것은 아도나이(‘Aḏonay)를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창 15:2). 이 세 이름은 성경에 모두 일만 번 이상 나온다.
엘로힘(‘Elohim), 야훼(Yahweh), 아도나이(‘Aḏonay), 이 세 이름은 각기 별개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것이 사용된 배경을 살펴볼 때 경건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각기 다른 독특한 하나님의 특성을 발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 필요에 그 이름들이 각기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이 세 성호의 복합형이 더러 나타난다. 야훼 엘로힘(Yahweh ‘Elohim)을 “LORD God”(창 2:4,5,7,8)로, 아도나이 야훼(‘Aḏonay Yahweh)를 “Lord GOD”으로 옮긴 것이 그런 경우이다(창 15:2; 겔 2:4).
어떤 경우에는 한 절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 불리고, 다음절에서는 야훼로 불린다. 그 이유는 내용의 배경을 신중히 연구해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언약 체결자인 엘로힘으로 나타내신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는 야훼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창조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추가적인 내용이 주어진다. 야훼는 인간 가족의 드라마가 전개됨에 따라 엘로힘이 관여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르나 거기에 보완적인 국면에 관계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또 엘로힘 과 야훼가 창세기 6장에서 노아의 성격을 보는 각도와 지구의 장래를 보는 관점에 반영된다. 이제 이 이름에 대하여 한가지씩 성령의 인도와 가르치심을 받아 연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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