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의 의무를 잃어버린 자들의 필요 [신앙기사 1부]

제1부 피조물의 의무를 잃어버린 자들의 필요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사람을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인류를 통해 나타내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길 원하셨다. 그리고 피조물과의 교통을 통해서 자신의 크신 선하심과 영광을 나타내려 하셨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시는 분이다. 능하신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시고, 만물은 그분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변함없고 절대적인 완전한 의존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매 순간 우리를 붙드셔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근원이 어디인지 피조물인 우리의 시작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전적인 의존 상태임을 알아야만 한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영원한 미래에도 여전히 겸손하게 비워진 가난한 마음에만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처음 한 번만이 아니라 그분의 계속되는 능력 있는 활동으로 매 순간 꾸준히 공급되고 있다. 피조물의 이러한 본질을 볼 때 겸손은 인생의 첫째 의무이며, 가장 고상하고 너그러운 모든 도덕의 기초이다. 겸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마음이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태도이다.

 

 

겸손의 의무를 잃는다면

 

겸손의 원어는 “아나우”(히: 가난한, 고통받는, 겸손한, 온유한, 비천한)와 “샤흐”(히: 낮은, 비천한, 겸손한), “타페이노스”(헬: 낮은, 비천한, 가난한, 겸손한; 명사-낮아진 마음)가 있다.
겸손이 사라지고 교만이 차지하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 천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광명한 천국에서 흑암의 세계로 쫓겨나게 된 것은 스스로 교만한 태도로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교만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던 옛 뱀, 모든 성품이 악마와 같이 교만했던 그 뱀이 하와의 귀에 유혹의 속삭임을 할 때, 그 한마디 한마디에는 지옥의 독극물이 들어있었다. 하와가 그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심이 마음에 생겨났을 때, 그 독극물은 그의 심령과 피와 생명에 흘러들었다. 그 때문에 그 복된 겸손과 하나님만 의지하던 마음은 영원히 파괴되어 버렸다. 우리의 첫 조상들이 그들의 높은 자리에서 오늘날 우리가 빠진 이 처참한 처지로 떨어지게 된 것은 그 간교한 뱀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지려는 욕심, 바로 그의 교만의 독극물을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주입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 될 뻔했던 그 마음이다. 하지만 하와와 하와에게서 난 인류의 생명은 그 행복 대신에 무서운 죄와 모든 저주와 사탄의 교만의 독극물로 그 뿌리가 썩게 되었다. 하늘나라에서든 이 세상 나라에서든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은 지옥의 문이며 저주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맺어야 할 근본적인 유일한 관계는 잃어버린 겸손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없다.

 

 

구속이 필요한 이유

 

인간의 구속이 필요하게 된 것은 교만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깊이 침투해 들어온 그 무서운 세력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우리의 구속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 나무는 뿌리의 본질대로 자랄 수밖에 없다.
사탄이 사람의 생명 속에 던져준 그 무서운 교만의 세력은 정말 놀랍게도 이 세상 도처에 매시간 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사람들은 그 힘을 두려워하며 싸우다가 피하고 만다. 하지만 그 세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 놀라운 힘이 어디서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따라서 이 무서운 세력을 어떤 방법으로 깨뜨려야 할지도 당연히 모르고 있다.
교만은 그 뿌리와 힘을 우리의 안과 밖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이 교만이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통회하고 탄식함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 교만은 근원이 사탄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뿌리 깊은 교만을 우리 스스로 계속 이겨낼 수가 없고, 벗어버릴 수도 없다는 절망을 토로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초자연적인 힘인 하나님의 어린 양의 구속의 필요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기적 근성과 교만을 대항해 싸우는 절망적인 투쟁 중에서 우리의 배후에 있는 흑암의 세력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가 되고 만다. 이러한 극도의 절망은 우리가 어떤 외부의 힘과, 외부에서 오는 생명을 갈망하고 받아들이는데 훨씬 더 유익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갈급한 심정만이 사탄과 그의 교만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늘에서 이 땅에 가져오신 그 겸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예수님의 성육신 이유

 

예수님의 성육신은 이 땅에서 겸손을 회복하시고 우리에게 겸손을 갖게 하는 동시에 그 겸손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이었다. 하늘에 계셨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5~8).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보는 그 겸손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아버지와 같이 계실 때에도 그분을 온통 사로잡았던 그분의 속성이었다. 그 겸손이 하늘을 버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오시게 했고, 그분은 그 겸손을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옮겨오셨다. 그리고 이 땅 위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분의 죽으심에 대하여 그 효력을 발휘하게 했으며,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게 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구원은 그분의 사심과 죽으심, 그분의 성품과 정신, 그분이 가졌던 겸손이었다. 이 겸손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근본적인 태도이시며, 동시에 그분의 구속 사역의 기초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지극히 겸손한 생애를 가지고 인간의 운명을 대신 지고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의 구원이 되고, 그분의 구원하심은 우리의 겸손이 된 것이다.

 

 

성육신을 올바로 이해해야 함

 

나무는 그 뿌리의 본질대로 자랄 수밖에 없다. 우리 안에 뿌리내린 죄의 세력을 알기 위해서 첫 아담과 그의 타락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둘째 아담과, 그분이 살아 움직이는 겸손의 영을 우리 마음에 주셔서 교만을 이기게 하는 그 그리스도의 능력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마귀가 뿌린 교만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강력히 지배했던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겸손의 힘은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아담에게서 옛 생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새 생명은 실로 더 큰 것임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야 한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해 인간의 성품에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가 그 위에 서고 자라나야 할 뿌리이다. 그 생명은 강한 세력으로 그 전에도 역사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능케도 했으며, 오늘날 우리의 영 속에서도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생명을 묵상하고 알고 의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 생명은 현재 우리의 것이 되었으며, 우리가 그 생명을 소유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은 그 생명의 통제를 받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 즉 구속주로서의 본질을 이룬 그분의 특성이 무엇인지 올바른 사상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그분의 겸손이다. 그분의 성육신은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었다는 거룩하고 엄숙한 겸손이다.

 

 

겸손으로 인침 받아야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활은 죄에서 속량을 받고,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인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계는 오직 마음에 흘러넘치는 겸손으로 인침을 받아야 한다. 만일 이 겸손이 없다면 하나님을 모실 수도, 하나님의 은혜도, 성령의 능력도 체험할 수 없다. 겸손이 없다면 믿음도 사랑도 기쁨도 능력도 있을 수 없다. 겸손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뿌리내릴 수 있는 유일한 마음 밭이다. 모든 불만과 실패의 원인은 겸손의 결핍이다. 겸손은 모든 은혜와 미덕의 근본 뿌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역사를 우리에게 하셨던 것도 그분의 겸손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올바른 태도는 겸손밖에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성적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좀 더 순종하게 되고, 또 항상 순종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거나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정말 깨닫게 될 때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익함을 인식할 뿐이다.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깨어 있는 생각을 할 때, 우리는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피조물인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정말 귀한 것이다. 우리의 뜻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도구와 그릇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럴 때에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의 지위를 올바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 겸손임을 알게 된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진실한 신자들의 삶은 어떤 것보다 겸손을 아름다운 덕의 최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그 반대의 삶을 산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명히 여러 번 이 겸손의 교훈을 거듭 가르치셨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마음속에 이토록 깊숙이 침투한 이 교만처럼 곤란하고 위험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의 마음에 겸손이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무능력한 자들인지를 발견하려면, 오직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극하신 사랑과 겸손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워라. 우리의 교만을 통회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심령에 오셔서 우리 안에 놀라운 생명과 은혜를 나누어주실 것을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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