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교훈 [신앙기사 4부]

제4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교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

 

예수님은 용서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8장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다. 한 달란트는 금 34kg 정도로서 현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억 정도 된다. 일만 달란트라면 조 단위로 넘어가면서 그 금액이 얼마나 큰지 가늠이 안 된다. 이것은 갚을 수 없는 빚이다. 종이 임금에게 사정했을 때 그가 갚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잘 아는 임금은 조건 없이 탕감해 주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그 사람은 만물이 새롭게 보였을 것이고,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감사하며, 얼마나 감격하였겠는가! 그런데 이런 들뜬 기분으로 돌아오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시급을 만 원이라고 했을 때, 8시간 근무하면 8만 원, 백 데나리온은 약 800만 원 정도 된다.
은혜로 조건 없이 큰 빚을 탕감 받은 이 종은 자기 친구를 만났을 때, 은혜받은 자로서 친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빚을 탕감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빚진 친구를 기어이 감옥에 보냈다. 자기의 그 큰 탕감에 대하여 은혜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잊어버렸다. 이 소문은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임금은 다시 그를 불러 그 빚을 다 갚으라고 명하였다.

 

 

용서받은 증거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었다. 이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형제가 빌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실과 그 감격 때문에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기 전에 이미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라는 증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형제들의 허물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용서의 종교이다. 물론 용서에는 희생이 따른다.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하셨다.
감정에 손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려면 상한 감정의 고통을 희생으로 감수해야 한다. 금전의 손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려면 금전을 잃어버리는 희생을 해야 한다. 희생 없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죄지은 인류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그 놀라운 희생을 감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렇게 큰 기쁨이 하늘에 있다.

 

 

연합과 화목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주적 화목의 증거요 표적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늘에서 쫓겨나 지구의 아담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지구는 죄의 세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되었다. 한때 빛을 가진 천사였고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서 시중들던 케루빔(겔 28:14)이었던 자가 지구를 파멸로 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왔을 때 그리스도를 향한 사탄의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는 만행에 의해 온 우주는 사탄의 악함과 반역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았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과 희생에 감격하여 화목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 우주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시키는 화목의 표적이요, 세상의 죄인을 용서하여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되찾게 하는 능력이 된 것이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원래 하나님을 떠난 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놀라운 사랑의 희생을 멸시하고 짓밟는 죄를 더한다. 그러나 이 용서의 우주적 선포를 느끼고 그것을 자기에게 적용하면 그는 즉시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되찾아 누리게 된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말한다(히 9:22). 그러므로 용서는 피 흘리는 희생이 필요하고 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여 생명을 주고 존재하게 한 사실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 생명과 존재를 하나님께 반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이 그렇게 죽는 것으로 끝나면 이 지구를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은 완전히 실패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죽음을 대신 취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인의 죄를 사유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이렇게 하여 아담과 함께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마치면서

 

회개란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을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 그렇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생각, 잘못된 방향, 잘못된 인생에서 돌이켜 바른길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메타노에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다.
참된 회개를 하려면, 그것이 죄인 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죄가 내 정서에 역겨운 것이 되어야 한다. 죄가 싫어서 안 짓는 것과 형벌을 피하고자 안 짓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살면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제시되었을 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지만 이성보다는 내 감정, 내 정서, 내 경향에 따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더 끌리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 우리의 욕구와 감정이 이성을 삼켜버린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하고 난 후에는, 후회하지만 동일한 상황이 되면 이전보다 더 쉽게 감정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사람들이 겉보기엔 다 이성적인 것 같고, 다 바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감정과 욕망에 따라 살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죄의 낙을 즐기며, 본능과 욕구와 쾌락을 따라가는 것보다 좋아져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다. 즉 동기가 바뀌는 것, 우리의 정서와 감정의 경향이 바뀌는 것이 회개(메타노에오)이다.

그래서 회개의 3가지 요소는,
1) 죄가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지에 대한 이성적 이해(지성) -> 성령이 깨닫게 하심
2) 정서적으로 죄를 싫어하고, 영적인 것을 좋아하는 감정의 변화(감정) -> 성령의 능력
3) 의지적으로 죄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의지) -> 나의 결단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 지정의(知情意)가 결합하여야 회개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첫 번째인 지성적인 인식을 할 때, 마치 회개한 것 같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오늘날 교회가 잘못 가르친 것이다. 그저 믿음을 고백만 하면, 교회 출석 잘하면 회개한 자로 생각하는 데 아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생각과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졌다. 동기와 욕구가 달라졌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상태, 즉 거듭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목욕하는 회개와 발을 씻는 두 종류의 회개를 공부했다. 목욕하는 회개는 예수님을 떠나서 살다가 그것이 죽은 상태임을 깨달아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회개이고, 발을 씻는 회개는 믿고 살다가 실수하고, 넘어진 것에 슬퍼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도 목욕하는 회개의 경험 없이 발만 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따라다녔지만, 마음에 모시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 생각도 없었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주님 곁에 있었다. 이렇게 목욕하는 회개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하는 부류가 많다.
반면 나머지 제자들은 목욕은 했다.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라 살기로 결심하며 주님을 따랐다. 하지만 아직도 허물투성이고, 부족하고, 나약해서 자꾸 쓰러졌다. 이 세상은 악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공격은 쉴 틈이 없고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처절한 투쟁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살지만 발은 땅을 밟고 있다.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에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공격이 있고, 죄를 사랑하게 만드는 유혹이 있다. 이리저리 피하고 방패로 막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살을 맞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발 씻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 절규하며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용서해주시기를, 능력의 손길로 우리의 연약함과 죄 됨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회개의 전 과정에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회개케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구원의 과정에 우리의 의지의 결단은 당연히 필요하나 그것은 단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이끌리어 반응하는 것뿐이다. 집 나간 아들의 책임을 아버지가 지신 것처럼 우리의 죄들을, 세상이 이처럼 어둡고 범죄의 소굴이 된 책임을 우리 주님이 지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이 사랑이 우리를 회개케 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지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들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시며, 그들을 돌이키려고 애쓰신다. 우리는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회개(메타노에오)이다.
우리가 회개를 공부한다고 해서 회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회개는 지식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회개인지 알아야 바른 회개를 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적 경험은 내가 아는 만큼, 또 아는 대로 형성된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구원의 도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무턱대고 믿는 것은 미신이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지금 아버지께로 돌아가기에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을 고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도 될 만큼 충분히 선한 사람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다고 속삭이는 사탄의 말을 듣지 말라. 만일 그때까지 기다린다면 결코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하는 예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그리하면 그분은 멀리까지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디딘다고 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우리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회개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그 순간에 그분은 그것을 아신다. 기도가 아무리 더듬거리고 아무리 은밀하게 눈물을 흘릴지라도 그분은 아시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마중 나가지 아니하시는 때는 없다. 기도가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은혜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는 은혜를 만나기 위해 나온다. 회개의 초청을 거절하지 말고 오늘! 지금! 죄의 길에서 돌이켜 은혜의 길,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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