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온전한 사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신앙기사 1부]

제1부 율법의 온전한 사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6~40).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뜻을 알아서 행하려는 열렬한 소망을 나타낼 것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충분히 다룬 그의 편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라고 하였다.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는 즐겨 순종함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일 것이나, 이기적이고 은혜를 모르는 아이는 그의 부모를 위하여 가능한 한 적게 일하면서도, 순종하는 성실한 아이들에게 허락된 특권들은 모두 누리기를 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도 똑같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받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는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부당한 속박으로 생각하며 계명들을 고통스러운 멍에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로 마음과 삶이 거룩해지기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이며, 자기가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슬퍼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사랑의 제자는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요일 5:1)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삶과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은 이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 세상에 오셔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셨다. 그분은 이 때문에 힘써 일하시고 번민하시다가 구원하시려고 하신 자들로 인하여 심장이 터지고 마침내는 갈보리 언덕에서 생명을 버리셨다.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름

 

많은 사람들은 우리 구주께서 사셨던 삶을 피하려 한다.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더욱 좋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를 치시는 일을 인내로써 견디는 것을 너무 큰 손해이며 희생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는 미천한 도구로서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의지하면서 모든 계명을 성실하게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는 일이 쉬운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능히 그리스도를 위한 짐을 지게 될 것이고 이웃들에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는 담대하고 확신 있는 태도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 1:12) 한다고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삶의 행로에서 장애물을 만나 그것들을 성실하게 정복하고, 반대와 치욕을 당해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를 얻으며, 맡겨진 책임을 감당하여 우리 주님께서 가지셨던 정신으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실과 능력에 대한 참으로 고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소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수가성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요 4:42)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할수록 우리는 더욱 예민하게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진지하게 우리의 능력과 구속자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마음의 성전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할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을 거스려 범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용서를 구할 때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역사하시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는 믿음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우리는 성화될 수 있으며 이리하여 영광의 왕국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흰옷 입은 구속 받은 자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자들

 

그리스도와 친밀히 연합하며 하나님의 것들 가운데서 풍부한 체험을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은 선행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15:8)라고 말씀하셨다. 아주 경건했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을 때에 우리는 자주 그들의 경험과 학식을 우리가 달성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께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 주시기를 지상의 부모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것보다 더욱 즐겨 하신다는 그분의 말씀을 확신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성품을 완성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예비해 두신 재료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성품을 건설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와 같은 노력을 하기만 하면 그와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마음의 거룩함과 삶의 순결을 위해 신실하게 노력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과 낙담 중에 있는 듯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보며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계속 슬퍼하고, 자기의 믿음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참된 믿음이 가지고 있는 단순성 이상을 넘겨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가운데 커다란 흑암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에 거하며,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살펴보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서 돌려야 한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그저 믿어야만 한다. 우리의 믿음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과거의 죄들을 회개하며, 앞으로는 순종하기를 결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도 아울러 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때때로 흑암과 낙담이 영혼을 엄습하여 우리를 압도하려고 위협할 것이다. 우리의 확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 감정의 변화가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부여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그런 연후에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조용히 안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때때로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온 심령 깊숙이 공포의 전율을 일으키기도 하겠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다거나 혹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변심했다거나 하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에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고자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어제 우리가 느꼈던 것과 같은 그런 평화와 기쁨을 오늘에는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흑암 가운데서도 마치 빛 가운데처럼 온전히 주를 신뢰해야 한다. 사탄은 “너는 너무도 큰 죄인이므로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수 없다”라고 속삭일지 모른다. 자신이 참으로 죄 많고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유혹자를 만날 때에 이렇게 부르짖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나를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보혈을 신뢰한다. 나는 이 순간에도 무력한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의탁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적이며 활기찬 믿음을 가진 생애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확고부동한 믿음은 마음 가운데 끊임없는 평화와 확증이 자리 잡게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난관에 처한 듯이 보일지라도 실망하지 말자. 모든 장애물이 닥쳐오고 내적인 원수가 생길지라도 그것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더욱 필요하게 해 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굳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의 독특한 결점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분께 특별한 은혜를 간구하자. 유혹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악한 선동을 확고히 저항하며 마음에 이렇게 말하자. “내가 어떻게 나의 구속자에게 치욕을 돌리겠는가?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렸다. 사탄의 일을 행할 수 없다”. 모든 우상을 버리며 즐겨 하는 온갖 죄악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랑하는 구주께 도움을 간청하자. 하늘 아버지의 보좌 앞에 서서 주님의 못 자국 난 손을 내보이면서 우리를 위하여 탄원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고마우신 구주께서 우리를 강건케 하신다는 것을 믿자. 이기는 자들에게 쓰일 면류관을 믿음으로 바라보자. 구원받은 자들이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속량하신 어린 양이여!” 하는 기쁨에 찬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라. 이런 장면들을 현실화하여 생각하도록 힘쓰라. 첫 순교자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 중에서 정사와 권세와 영적 사악함과 맹렬하게 투쟁할 때에 부르짖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라고 하였다. 세상의 구주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하늘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계신 광경을 그는 볼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용모에서 비춰나는 영광스러운 빛이 그의 원수들까지도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와 하늘 세계에 더 많이 두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한 싸움에서 강력한 격려와 지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지않아 본향이 될 더욱 좋은 저 나라의 영광을 묵상할 때에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외에는 모든 세상의 매력이 거의 가치 없이 보일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 열렬한 노력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랫동안 마음을 세상 만물만을 생각하도록 허용한다면 그 습관적인 생각을 변경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이 너무 자주 관심이 그것에만 끌려 흥미를 그곳에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는 도성에 들어가 예수님과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려면, 이 세상에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품이 자주 우리의 생각과 이야기의 주제가 되어야 하며, 매일 일정한 시간을 특별히 이 거룩한 주제들을 경건하게 묵상하는 일에 열중해야 한다.

 

추천 게시물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