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반란 전쟁 [신앙기사 2부]

제2부 유대 반란 전쟁

 

 

시대적 배경

 

기원후 54년 로마에서는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유대 총독으로는 벨릭스가 임명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유대 땅은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영적으로 망해가기 시작한다. 멸망이 예언된 운명 지어진 백성! 예루살렘에는 강도 떼들이 횡행하기 시작하고, 시카리(Sicarii)파라고 불리는 무법자들이 생겼는데, 시카리는 ‘가슴에 단검을 넣고 다닌다’고 해서 붙은 강도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대낮에 대로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대제사장 요나단이 이들에게 암살당하고, 수많은 살인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모든 백성들은 언제 “묻지마 살인”을 당할지 몰라 늘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또 여기저기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신적인 계시를 받았다면서 곳곳에서 폭동을 선동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시카리파와 강도들이 연합하여 사람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하고,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도록 충동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에 복종하는 자들은 민족의 배반자라고 위협하면서 유대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벨릭스의 뒤를 이어 베스도(Festus, 60~62년)가 총독이 되어 수많은 강도떼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는데, 베스도의 뒤를 이은 알비누스(Albinus, 62-64년)는 그 자신이 강도였다. 그는 공권력으로 사유재산을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선임 총독들이 강도죄로 잡은 범죄자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는 대가로 그들의 친척들에게 보석금을 뜯어냈다. 그러다 보니 감옥에 남은 사람은 보석금을 지불치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총독이 이러니 강도들은 알비누스에게 뇌물을 주어 “조직폭력배”로 성장한다. 허가받은 강도들이 된 것이다. 강도를 당한 사람들은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어 예루살렘은 강도의 소굴이 되면서 멸망은 무르익기 시작한다.
이어서 AD 64년 유다의 신임 총독에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부임하게 되는데, 전임 총독 알비누스보다 더 악랄하고 포악한 자였다. 그는 유다 총독이 되기 위해 네로에게 접근해서 엄청난 뇌물을 주고 총독이 되었다. 게시우스 플로루스 부인이 네로의 부인과 공모해서 얻어낸 자리다. 그러니 그 자금을 회수하려고 과중한 세금을 부담시켜서 모든 주민들을 거지로 만들었다. 또 강도들이 뇌물을 바치기만 하면, 전 국토에서 자유롭게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 조폭과 정치의 은밀한 뒷거래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사실 플로루스는 유대인들이 반란 전쟁을 일으키도록 몰아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평화가 지속된다면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자기를 고발하게 될 것을 예상했고, 반면에 반란이 일어난다면 자기의 악행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도발하기 위해 어떻게든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시민들은 감정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플로루스가 성전 창고에 사람들을 보내어 성전 자금을(17달란트) 약탈하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곧 자기 자신보다도 소중한 곳인데, 이러한 이방인의 착취로 그들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나아가 플로루스는 군인들에게 모든 집에 들어가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도록 허락했다. 어떤 경우는 하루에 여자와 아이들뿐 아니라 아기들까지도 자비를 얻지 못하고 죽어 약 3,600여 명이 칼에 죽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했다. 플로루스의 계획대로 민중들은 분노하고 있었고, 온건파인 유대 지도자들은 임박한 재난을 예상하고 로마와의 전쟁은 파멸뿐이며, 결국 이 나라를 로마에 넘겨주게 되는 것이라며 자제를 호소했다.

 

 

미쳐버린 도시 예루살렘

 

드디어 67년에 전국에 있는 조폭의 두목들이 약탈하는 것에도 실증이 나서 강도단인 시카리(Sicrrii)와 극우 저항단체인 열심당(Zealots)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습격해 내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약탈과 노상강도, 살인을 일삼았는데, 유대 왕족들과 대제사장을 죽이고, 마음대로 대제사장을 지정해서 앉혀놓았다.
전국의 강도들이 예루살렘으로 다 모였기 때문에, 도시의 식량은 급속히 줄어들게 되었고, 이들은 내란을 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로마와의 전쟁을 일으켰고 또한 예루살렘의 끔찍한 기근을 발생하게 한 주범들이었다. 대제사장의 집과 유다 왕궁에 불을 지르고, 채무문서가 보관된 궁에 불을 질러 채권자들의 계약서를 모두 태워버렸다. 이렇게 하므로 채무자였던 많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가난한 자들이 반란에 합세하게 되고,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열심당이 덕망 있는 주요 인사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이자, 시민들은 이들의 폭정에 견뎌낼 수가 없었고, 서로를 죽이는 내전은 더욱 확대하게 된다. 열심당은 이두매인을 용병으로 불러 도시를 장악하고 시민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일에 함께 했다.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열심당은 일반 시민들을 잡는 대로 목을 잘랐다. 귀족들을 잡아 고문하며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듣지 않으면 살해했다. 그들은 훌륭한 가문 출신이나 유력한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는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죽여야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시체들이 넘쳐나고 감히 가족과 친족들의 죽음에 대해 울거나 슬퍼할 수도 없었다. 애도하는 자도 똑같은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단지 밤에만 흙을 몇 줌 떠다가 시체 위에 뿌려줄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은 내란이 일어나자 요한파, 시몬파, 엘르아자르파 세 개의 당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전쟁을 벌였다. 성전에 제사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제단 앞에서 세 당파의 내전 때문에 칼에 맞아 자신이 제물이 되는 일들이 일어날 정도였다. 성전 마당에 이방인의 시체가 유대인의 시체와 섞이게 되고, 일반인의 시체와 제사장의 시체가 뒤섞여 성전 뜰을 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예루살렘은 가장 사악한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내란으로 동족의 시체를 위한 무덤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예루살렘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유대교와 이슬람, 정통파들과 메시아닉, 이들 사이의 끊임없는 테러와 폭행, 납치, 살인, 시위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는, 저주받은 평화의 도시가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히 성취되었다는 뜻인가? 예루살렘의 이러한 세 당파의 사악한 무리들 때문에 주민들은 고통 속에 지냈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군이 이 재앙에서 구출해주도록 전쟁이 속히 나기를 몹시 바랄 정도였다.
현재의 예루살렘도 그렇다. 각기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로 예루살렘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예루살렘이 현재 누구의 나라인가?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 국제법상으로는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는 도시지만, 현재는 이스라엘이 동 예루살렘을 인위적으로 점령 중이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했지만, 분쟁지역이기 때문에 텔아비브가 수도를 대신하고 있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영토를 빼앗았으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싸울 수밖에 없다.
역사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의 유대를 “창세 이후로 이렇게 죄악이 만연한 세대는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분노와 증오가 민중의 마음을 피폐케 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을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 당시는 유대인들 사이에 온갖 죄악들이 너무나 들끓고 있어서 사악한 죄악이라면 자행되지 않는 죄악이 없을 정도였으며, 인간의 머리로 짜낼 수 있는 갖가지의 극악한 범죄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따라서 죄악이 전염병처럼 퍼져 서로 경쟁하다시피 앞을 다투어 저질러졌는데… 시카리파 사람들은 불법적인 죄악과 자신의 혈족에게까지도 잔혹한 행동을 저지르고 파괴적인 일을 서슴지 않는 최초의 모델이라 하겠다. 불법적인 사악한 행동에 있어서는 소위 열심당들도 이들 못지않았다. 열심당은 이름 그대로 악한 행동에 열심을 다하는 일단의 무리들이었다. 열심당들은 모든 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으며, 역사에 기록된 그전의 모든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들을 열심히 경쟁하듯 답습하였다”(Josephus, 유대전쟁사 7권 8:361).
법을 유린하고, 무정부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악해진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 주민들은 로마군에게 빨리 예루살렘을 점령해 달라고 간청하는 일들이 생기게 될 정도로 예루살렘은 죄악의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

 

드디어 로마에서는 유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67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6만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온다. 그렇게 해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군대를 회군 시킨다. 네로 황제가 죽었기 때문이다. 네로 황제가 죽으면서 황제권 다툼이 일어났는데 베스파시안은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래서 공격을 잠시 멈추고 3년이 지난 후 70년 봄 그의 아들 티투스가 이끄는 4개 군단이 예루살렘에 와서 성을 포위하게 된다.
유대 반란군들은 거짓 선지자를 세워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며, 유대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이면 즉시 살해했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각 집마다 음식이 있다는 기미만 보이면 그것은 곧 살인이 벌어진다는 신호였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빼앗고 죽이는 일이 허다했다. 그들은 허리띠나 신발도 뜯어먹었으며 방패의 가죽조차도 씹어 먹었다.
어느 날 마리아의 집에 들이닥친 반란군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 분노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마리아는 품 안에 있는 어린 아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오 불쌍한 아가야! 이리 와서 내 음식이 되어다오. 그래서 강도들에게 분노를 보여주고, 세상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재난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어다오” 이 말을 하고 아들을 죽여서 삶은 후에 반은 먹고 반은 감추어 놓았다. 이때 반란군들이 냄새를 맡고 들이닥쳐서 음식을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마리아는 그들을 위해 충분한 양을 남겨놓았다고 하면서 뜯어먹다 남은 아들의 시체를 펴 놓았다. 강도들은 그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떨면서 떠났다. 이 가증스러운 사건은 즉시 예루살렘 전체에 퍼졌으며 곧 로마 군대에게도 전해졌다. 티투스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하나님 저는 유대인들에게 평화와 독립을 제안했으며 과거에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사면해 준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화해보다는 내분을, 평화 대신 전쟁을, 번영 대신 기근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에서 반란군을 피해 나오는 투항자들을 그들이 원하는 곳에 살도록 허가했고 남아있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구출하기 위해 토성을 쌓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반란군들은 성안의 백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고 있었다.
전쟁은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로마군을 기습하자 로마군은 성전 본당까지 그들을 추격해 왔다. 그때 한 로마군이 성전 안에 불타는 나무토막을 던졌다. 불길이 치솟자 도망치던 유대인들이 자신의 목숨은 돌볼 생각도 잊은 채 성전의 불을 끄려고 우르르 달려갔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이런 곳이다.
티투스가 이 소식을 듣고 불을 끄려고 말을 타고 성전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에게 불을 끄라고 소리쳤지만, 분노한 군사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성전 안의 사방이 온통 금으로 입혀져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서는 약탈할 수 있는 희망에 부풀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티투스는 전쟁 초기부터 군인들에게 절대로 성전이 무너지지 않게 하라고 당부했지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다 무너지게 된다. 성전에 있던 제사장들은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성전과 함께 불에 탔다. 성전에 대한 이들의 존경심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해야 할까? 성전이 불타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완전한 절망 속에서, 기근으로 말할 기운도 없었지만 애끓는 신음소리를 질렀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버리셨구나!”
이날 수많은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학살당한다. 운명의 시간표는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지, 성전이 불탄 그날은 과거 솔로몬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불탔던 바로 같은 달, 같은 날, 8월 30일이었다. 며칠 후 전쟁은 종식되고, 약 10만여 명의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콜로세움을 건축하는 노예가 된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일곱 촛대(메노라)를 전리품으로 가져갔으며, 메노라를 옮겨 가는 장면은 로마에 세워진 티투스의 개선문 안쪽에 부조되어 오늘까지 남아 있다.
당시 역사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와 징조가 계속 있었는데, 예루살렘 위에 칼처럼 생긴 별 하나와 혜성이 일 년 동안 계속 떠 있었다. 또 성전 안뜰의 황동으로 된 동쪽 문은 장정 20명이 밀어야 겨우 열릴 수 있는 문이고 쇠 빗장으로 잠겨있는데, 저절로 열린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고, 하늘에 병거들과 무장한 병사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모습이 구름 가운데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직무를 수행할 때, “우리는 이곳을 떠나고 있는 중이다.”라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또 하나의 특이한 징조는 전쟁이 나기 4년 전, 예루살렘이 아직은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어느 청년이 나타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밤이나 낮이나 예언하면서 돌아다녔다. 이런 불길한 예언에 분개하여 잡아서 여러 차례 뼈가 드러나도록 채찍질하기도 했지만 채찍질 당할 때마다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아!” 하면서 울부짖었다. 4년 동안 그는 다른 얘기는 하지 않고 오직 기도문을 암송하듯이 이 얘기만 되풀이하였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당했을 때 그의 예언이 증명되고서야 외치기를 그만두었다.

 

 

마사다 최후의 항전

 

성전이 무너지고 전쟁이 종식됐지만, 극단적 저항단체인 시카리파의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약 1천 명의 저항군들과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완벽한 요새로 불리는 마사다로 들어가서 최후의 항전을 하게 된다.
마사다는 기원전 168년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책을 불사르고, 성전 기물을 약탈해가는 일이 생기자 유대인들이 종교 자유와 성전 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마카비 전쟁 때 요새를 건축하고 마사다라 부른 곳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꼭대기는 평평한 지역이라 천혜의 요새였다. 이곳을 헤롯 왕이 심혈을 기울여 난공불락의 요새로 건축했는데, 요새 정상에 성벽을 빙 둘러쌓았고, 망대 37개를 세웠다. 정상은 토양이 비옥했기 때문에 경작지로 만들었고, 서쪽 경사지에 왕궁을 건축했으며, 저수지를 많이 만들어서 풍부한 물을 공급하게 했다. 그래서 이 마사다 요새는 지형상의 특성뿐만 아니라 인간이 심혈을 기울여 건축한 아주 막강한 요새가 된 것이다. 헤롯은 이곳에 많은 생필품과 몇 년 동안 버텨낼 수 있는 식량을 창고에 가득 보관해 놓았고, 또한 10,000여 명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각종 무기들이 준비돼 있었다.
헤롯은 왜 이런 요새를 만들어 놓았을까?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때문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그녀의 애인인 안토니우스에게 헤롯을 죽이고 유대의 왕권을 넘겨달라고 계속 들볶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는 예상외로 클레오파트라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애정으로 사랑의 노예가 돼버린 안토니우스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헤롯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사다를 요새화 했는데, 유대 반란군들이 마사다 요새를 유대 전쟁에서 최후의 보루로 삼게 된 것이다.
로마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유대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이끄는 제10군단, 1만 명의 군사들이 마사다를 함락하기 위해 진격해 왔는데, 마사다 요새의 가장 낮은 쪽에서부터 거대한 흙길을 쌓아 올렸다. 약 6천 명의 유대인 노예를 동원해서 누벽을 세웠는데, 피라미드 쌓듯이 길을 만든 것이다.
AD 73년 드디어 누벽이 완성되고 정상에 오른 로마군, 이제 성벽만 무너뜨리면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난다. 성벽은 이중으로 돼 있었는데, 첫 번째 성벽인 돌로 이뤄진 성벽은 투석기 같은 공성 장비로 무너뜨렸다. 두 번째 성벽은 투석기로 무너지지 않도록 흙과 나무로 유연하게 만들어서 공성 장비로 공격을 해도 탄력 있게 버틸 수 있었다. 성벽이 나무로 되어있었기에 로마군은 토성 벽에 불을 질러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바람이 로마군 쪽으로 불었기 때문에, 성벽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로마의 공성 장비들까지 다 삼켜버릴 것 같아 작전을 멈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반대쪽으로 불면서 마사다 성벽을 모두 불태우게 된다. 역사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때 갑자기 마치 신의 섭리인 양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불면서 성벽이 불길에 휩싸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로마군은 신의 도움을 받은 후에 그 다음날 공격하기로 하고 진영으로 돌아왔다”(Josephus, 유대전쟁사 7권 8:370). 마치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게 하여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어 조조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버린 것처럼 로마군은 마지막 성벽을 이렇게 허물게 된다.
그날 밤 엘르아자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저항군들을 모아 이렇게 연설한다. “우리는 제일 처음으로 로마에 반역을 일으킨 자들이고 결국 제일 나중까지 로마군과 싸우게 된 자들이오. … 이제 우리는 새벽이 되면 체포될 운명에 놓여있소.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영광스러운 죽음을 선택할 시간이 있소. …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외면했소. 유대 민족은 멸망할 운명에 처해졌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아야 했었단 말이오. 그것이 아니라면 결코 하나님께서 이러한 유대의 완전한 파멸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는 않았을 것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적군에 의해 불에 타 완전히 파멸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 같은 처참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우리를 몰아넣으셨소. 마사다 요새와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조차도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으며, 식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고 무기들과 그밖에 다른 각종 필수품들이 넘치도록 많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모든 구원의 희망을 앗아가 버리셨소. 무엇보다 불길이 우리가 세운 성벽 쪽으로 바꾸어진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동족들에게 저지른 수많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신 것이오. 이러한 죄악들에 대한 처벌을 적군인 로마군이 심판하게 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심판하도록 합시다. … 우리의 부녀자들이 더럽혀지지 않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가 되지 않게 합시다. 부녀자들과 자식들을 죽인 후에 우리도 서로 영광스럽게 죽도록 하여 우리의 자유를 간직하도록 합시다. … 우리의 식량은 그대로 놔둡시다. 왜냐하면 로마군들은 우리가 죽은 것을 보고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 자 이제 예루살렘을 한번 생각해 보시오. 예루살렘은 전 유대인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그런 도시로 단단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많은 요새와 거대한 망대들로 철통같이 보호돼 있는 데다 각종 많은 전쟁 장비를 갖추고 수많은 수비병들을 자랑하던 대도시였소.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이 어디 있단 말이오?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다고 믿었던 그 예루살렘이 지금 어찌 되었소? 그 기초까지 완전히 황폐화되어 버리지 않았소! … 이런 불행이 일어난 것은 로마군의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더 강력한 어떤 원인이 있어 로마군을 승리자로 만들었기 때문이오. …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해 왔을 때도 우리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로마군을 괴롭혀 왔소. 그런 이상 로마군이 우리를 생포한다면 그들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울지 누가 예견할 수 있단 말이오? … 자 아직 우리 손이 묶여 있지도 않고 칼까지 잡고 있을 때 적에게 노예가 되느니 함께 죽읍시다. 자유인으로 아이들과 아내와 같이 목숨을 끊도록 합시다”(Josephus, 유대전쟁사 7권 8:320~388).
연설이 끝나자 그들은 어떤 광기에 사로잡혀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아내와 자식들과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들의 목적을 실행에 옮겼다. 전쟁의 광기는 사람들을 이성에 묶어두지 못하고 이상한 기운 속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을 실행에 옮기게 만들었다.
저항군들은 먼저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최후의 10인을 제비 뽑아 정한 후, 그 열 명이 아직 죽지 않은 동포를 죽이고, 최후의 열 명 중에서 1명을 뽑아 9명을 죽인 후 자신도 자결했다. 다음 날 아침 로마군대가 올라왔을 때 모두가 죽은 모습을 보게 됐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뿐이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써 마사다 항전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유대 전쟁(66~73년)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막을 내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하나님의 역사가 유대인에게서 그리스도인에게 넘겨졌다. 예루살렘 멸망은 기독교의 도래를 알려주는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1차 유대 전쟁으로 인해 로마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철저하게 경계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유일신을 섬기고, 야훼를 섬기고, 안식일을 지키다 보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요세푸스의 기록

 

요세푸스는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인물로서 어머니는 왕족이었고 아버지는 24반차 제사장 중에서 으뜸가는 가문의 정통 유대인이었다.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에 대항하여 갈릴리 전투를 이끌었던 유대 장군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님의 실존을 역사로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기록에 관심을 갖는다. 많은 비평가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거나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인 모범을 보이신 분으로 취급하며 그분의 신성이나 기적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요세푸스는 이러한 논리를 잠재우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글에서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다루고 있고 또한 예수님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그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라고 하는 지혜자가 사셨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고 진리를 기쁘게 영접하는 자들의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 그분은 메시아이셨다. …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Josephus, 유대고대사 18권, 3:3). 이렇듯 예수님의 신성, 초자연적 능력,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모두를 인정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글은 신약성경과 같은 세대에 쓰여 졌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들은 신약과 같은 고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말라기에서 마태복음까지의 400년의 유대 역사를 제공해 준다. 안티오쿠스와의 전쟁과 마카비 혁명, 하스모네안 왕조의 흥망 등 신구약 중간사에 대해 다뤄주고 있고, 유대의 3대 종파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의 설립과 그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밝혀주므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를 유대고대사 제20권에서 밝히기를, “의인을 죽였기 때문에 이르러온 하나님의 뜻”이라고 서술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비난을 받지만 참으로 예언적인 서술이 아닐 수 없다.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36).
하나님은 성경의 기자들을 통해서만 감동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분에서도 감동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래서 전쟁 초기부터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반란군들을 설득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상당한 위협을 당했다. 물론 요세푸스가 전쟁 초기에는 베스파시안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유대 장군이었으나 로마의 포로가 되었고, 그는 베스파시안이 네로 다음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함으로써 죄수의 신분에서 벗어나 티투스 장군의 통역관으로서 AD 70년 예루살렘 진압 작전에 투입되어 유대와 로마의 협상 선봉에 나섰다.
전쟁 종식 후 그는 크게 세 개의 주제를 다룬 대작을 남기게 되는데, BC 2세기 중반 이후부터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까지 다룬 ‘유대전쟁사’(History of the Jewish War), 천지창조부터 1차 유대 전쟁 전까지를 다룬 ‘유대고대사’(Antiquities), 그리고 헬레니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유대 종교를 옹호하는 ‘아피온반박문’(Against Apion) 같은 유대 역사에 관한 여러 역작을 남기게 된다.

 

 

2차 유대 전쟁(132~135년)

 

그렇게 70년 정도 시간이 흘러 서기 132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 황제는 속국들과의 화친 정책으로 반란이 심하던 유대인들의 소원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가해 주었다. 랍비 아퀴바의 호소로 막대한 건축 자금이 모이고 있을 즈음, 황제는 모든 속국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예루살렘에 주피터(Jupiter) 신전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몹시 반발하여 성전 건축 자금이 반란 자금으로 사용되었고, 바르 코크바가 주동이 되어 제2차 유대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바르 코크바는 사기가 떨어지고 흩어진 유대인들을 불러 모아 로마와 전투를 시작했는데 백전백승이었다.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의 명장 세베리우스와 정예부대 22군단을 파견하였는데 전쟁에 능한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를 ‘엥케리’ 골짜기로 유인한 후 전멸시켜버리고,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한다. 승승장구하는 흥분한 유대인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하는데, “이 사람이 우리가 기다려 온 메시아가 아닐까?” 그런 기대가 최고조로 이를 때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실제 이름은 바르 코스바인데 당시 유대의 최고 랍비였던 아퀴바는 민수기 24:17절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라는 메시아를 예언한 말씀에 근거해, 바르 코스바를 “별의 아들” 바르 코크바라고 부르면서 그를 메시아라고 선언한다.
바르 코크바는 예루살렘을 로마로부터 해방 시켰고, 전투에서 계속 승리했다. 예루살렘 탈환 1년이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해방 1년으로 삼고 기념 화폐도 발행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메시아로 칭송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는데, 바로 독립군 중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나사렛파가 있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을 “메시아닉쥬”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을 “나사렛파”라고 불렀는데, 이들도 독립운동에 함께 했었다. 그런데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섬겨야 되니 나사렛파는 굉장한 갈등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나사렛파는 군대에서 이탈하게 된다.
황제가 원로원의 회의를 주재할 때, “짐과 그 군대들은 강건하도다”라고 시작할 정도로 그들의 명예는 높았는데 3년간 유대인들에게 거듭 패하면서 더 이상 그 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Dio Cassius, Historia Romana, 69, 13).
분노에 찬 로마는 134년에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고 무자비하게 보복을 하는데, 유대인 마을 985개를 초토화하고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60만 명 이상을 죽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 항상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의 진원지가 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했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 지역 이름을 유다에서 팔레스타인이라고 바꾸게 되었는데,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블레셋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팔레스타인으로 불리고 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자살하고, 아퀴바는 유대인들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처형당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이로써 유대인 전체가 디아스포라가 되었고, 이후 시오니즘에 의해 1948년 이스라엘 독립 때까지 거의 2,000년 동안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멸망의 이유

 

우리는 유대고대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과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확인할 수 있다.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36).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기들의 무서운 책임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의로운 아벨이 가인의 손에 쓰러져 최초의 무죄한 피가 흘려진 때로부터 이런 역사는 반복되었다. 각 시대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전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서 왕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저희의 음성을 높였다. 빛과 진리를 거절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형벌이 대대로 축적되어 왔었다. 그리스도 당시 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죄악은 이전 어느 세대의 죄악보다도 더 컸다.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그들은 아벨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죽임을 당한 모든 의인의 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들은 저희의 죄악의 잔을 넘치도록 채우고 있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8). 그리고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새 시대, 새 역사

 

영원할 것처럼 화려하고 찬란했던 그들의 역사가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자랑거리였던 예루살렘 성!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 그들이 그렇게 지키고 싶어 했던 예루살렘 성! 그러나 그곳은 그들이 영원히 정착할 땅이 아니었고 황폐해져 버려질 곳이었다.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버리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이 해야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지키려고 애쓰는 실수를 범했다.
예수님의 이 예언과 그 정확한 성취는 북방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하고, 남방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여호와는 더 이상 유대인만의 여호와가 아니며, 성경은 더 이상 유대인만의 경전이 아니며, 비록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이 선택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유대인의 종교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복음이 선포된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역사,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대인은 저주받고 형벌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의 형제들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절대 제외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것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신앙을 고백한다면 정말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은 다른 민족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중국과 북한이, 이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너무 기쁜 일인 것처럼, 유대인의 회심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회심이 성경 예언의 성취가 아니다. 그리고 유대민족 전체가 다 회복되는 일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휴거 된 이후에 이 땅에 유대인들이 남아서 유대민족 전체가 국가적, 민족적으로 회심한다는 것은 카톨릭에서 나온 7년 환난 교리이지 성경의 진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사도들과 초대교회로 말미암아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다. 영적 계보는 유대인에 한정되지 않고, 헬라인이든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타산지석[他山之石], 배도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충분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를 끝까지 거절하고, 자기들의 욕구와 욕망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간 결과는 끔찍한 파멸이었다. 유대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다. 철저히 버림받은 유대민족,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들에게는 끝없는 사랑과 돌봄을 여전히 제공하고 계신다. 우리는 멸망 받은 유대민족의 뒤를 이을 것인가? 영광스러운 믿음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인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면 미래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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