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 어머니와 나, 남은 때

어머니와 나, 남은 때 [신앙간증]

– 심수진

 

내가 중2 아니면 중3 사이의 어느 가을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보니 어머니의 눈이 매우 빨개서 부어 있었다. 목은 잠겨서 날 보자마자 또다시 울음이 솟구치는지 갑자기 벽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미친 듯이 기도를 하며 침통하게 우셨다. 나는 정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아주 멋쟁이로 옷을 잘 입고 매일 화장하며 애교가 많아 아버지도 좋아하시고, 나만 아는 비밀인 건지 타인도 아는 건지 모르지만 엄마의 애인도 좋아하고, 엄마의 사업에 필요한 일명 하우스라는(집을 도박하는 이에게 빌려주는) 곳에 오시는 손님들, 남자는 물론 여자들에게도 매우 친근하여 손님을 끌어오고 유지하는 능력이 아주 탁월하신 분으로 그렇게 눈물 콧물 범벅으로 침통하게 목메어 가며 하나님께 기도하실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자고 하면 나에게 싫은 티를 내고 오히려 점을 보고 그러셨던 분이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 저학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말 그대로 쫄딱 망해서 당장 거처할 집도 없어 외할머니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많은 빚을 져 명분적으로는 먹고살고자 도박사업을 하는 것이라 말하는 엄마, 알면서도 묵인하는 아빠, 고통받는 오빠와 그 고통을 나에게 화풀이하는 먹이사슬 같은 관계였다. 그 가장 밑바닥에서 무방비로 모든 것을 견뎌야 했던 나로서는, 어리고 힘이 없었기에 모두를 용서할 수가 없고 힘겨웠지만,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가면서 이를 갈면서 하루빨리 커서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었던, 질풍노도의 시기인 초등시절과 사춘기 무서운 중2병의 시절을 보냈다.

 

난 언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가? 6살? 7살? 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여름성경학교로 교회에 처음 가게 되었고, 예배 때 부르는 노래와 율동을 하는 재미가 좋아서, 그리고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매주 듣는 재미에 빠져서 다녔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지옥불에 빠진다는 선생님의 말이 무서워 매일 밤이나 새벽 모두가 잠들었을 때 혼자서 무릎 꿇고 이불 속에서 가족이 하나님을 믿게 해달라고 정말 많이 기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는 4식구 모두가 한방에서 잠을 자던 때라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새벽에 깨어서 기도했는데, 기도를 안 하면 불안해서 잠도 못 잘 정도로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는 커가면서 그런 것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먼 나라 이야기다 그렇게 여기고 다니던 교회를 안 다니고 있었다.

2010년 10월 어머니는 뇌종양에 이은 폐암 4기로 1년 투병 후 돌아가셨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후 이곳에서 전하는 진리를 접한 경험은 없을지라도 계속 한 교회를 다니고 돌아가실 때까지 신앙을 계속 유지하셨다. 그리고 난 어머니의 신앙이 정의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지만 진심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두려움에서 그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니 믿지 않는다면 두렵지도 않는 법이다.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그 죄의 무게를 알기에 진실한 회개가 가능하다. 무력하게 죽어가는 순간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에게는 다 죽어 가면서 저게 뭐야라고 평가받을지라도, 하나님과 진실로 믿는 이들은 참으로 다행이고 잘 된 일이라고 여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애로 어머니를 품으셨을 것이라고 난 여긴다.

 

나에겐 올케가 두 명이 있는데, 조카들을 낳고 이혼한 전 올케와 중학교 이후부터 조카들을 보살핀 지금의 올케. 전 올케는 철저한 불교인으로 시집와 개종해서 이혼 후 신학대를 가서 어느 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재혼 후 새 삶을 살고 있다고 들었으며, 지금의 올케도 칼빈주의 교회에 다니는 듯하지만, 믿지 않던 이에서 어머니로 인하여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두 명을 주님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인도하였고, 정신을 놓는 순간까지도, 타인과 의사소통은 안 되더라도, 하나님과 계속 의사소통하였으리라 믿는다. 이는 내가 응급실에 실려가보니 타인과 되지 않아도 혼자서는 생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잠시지만, 충분하게 회개할 시간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 여긴다.

 

나의 아주 꼬꼬마 시절의 기도가 하나님께 닿아서 어머니가 내가 사춘기 시절에 믿게 되었으며, 어머니로 인하여 두 올케가 믿게 되었으며, 또 신앙에서 멀리 살던 나를 위하여 어머니가 많은 기도를 하여 내가, 하나님은 없다고 성경을 두 번이나 찢은 내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 전후로 하나님이 있으면 직접 대면해서 따지고 싶다고, 할 말이 많다고 맘속으로 떠들어 대던 내가 나의 죄를 돌이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음이 얼마나 은혜인가! 감사하며 이 글을 쓰는 동안도 눈물이 난다.

이 시기의 나는 (2000~2009) 오빠가 도박과 사업 실패로 거의 6억 대의 빚을 져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이 많으신 아버지는 계약직으로 다니시던 회사를 회장님의 배려로 당시 70대의 나이로 더 다니고, 전 올케는 집을 뛰쳐나가 결국 이혼하게 되고, 유치원인 아이와 초등 저학년인 조카들이 새엄마가 바람피운 당사자로 매일 엄마를 울린 당사자란 걸 모르고 새엄마라 부르며 좋아하고 잘 따르는 것이 맘이 찢어지게 아팠으나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 함구했다. 조카들이 가장 안타까웠다. 할머니와 엄마가 갑자기 떠나서 그 공백을 채우지 못해서 어린 나이에 힘들어서 헤매는 게 너무 불쌍해서 말이다. 오빠는 신불자가 되어 너무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애들은 학교의 급식비조차 어려웠고 학원비는 낼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난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조카들의 그런 상황이 견딜 수가 없이 싫어서 잠시 동안은 학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빚을 갚는다면서 나에게 돈을 빌려 오빠의 또 다른 사업 자금을 아버지 어머니가 대주었단 걸 알고 나서였다. 나에게 도움받는 것은 항상 당연시하였고, 나에게 속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당연하게 내가 이해할 부분으로 미안하다고 여기지도 않고 고맙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 본질적으로 그런 부분에서 많이 상처받은 것 같다. 이런 일들이 어려서부터 큰 거 작은 거 수십 년간 쌓이니 참다 참다 결국 곪아 터지게 되어 난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10년 정도를 떨어져서 살았다.

 

이 시기에 남편을 만나 모든 일을 관두고 집에서 쉬면서 드라마와 영화에 빠져 살게 되면서 세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드라마 작가가 되려고 작가 과정을 등록하고 작품도 써보면서 맘을 정화하려고 애도 쓰고, 국내외로 여행도 많이 다니고, 맛집도 많이 다니고, 친한 친구들과만 소소하게 만나서 시간을 보내면서 몇 년의 시간을 보내니 극단적으로 업 다운을 하였던 감정은 잦아들었지만, 궁극적인 어떤 공허감은 메꾸어지질 않았다. 남편이 아무리 날 위하여 노력하고 다정하고 무엇이든 같이해주어도 고맙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즈음부터 난 신앙을 찾기 시작하였고, 남편도 그 부분은 인정하여 지지해 주었다. 이 사람은 믿지는 않지만, 나의 신앙은 지지해 준다. 이것도 감사하다.

그러나 이렇게 된 가장 큰 역할은 내가 어린 시절 기도했던 어머니의 기도가 다시 날 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생의 몇 십 년을 길게 보아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여 당장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인생에서 결정적일 때 구원으로 이끌도록 어떤 계기가 오도록 하는 것… 기도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자신의 기도처에서 기도 제목에 온통 나를 위한 것들로 채워 놓고 은밀하게 기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난 아버지와 오빠도 참으로 다양한 이유와 핑계로 미워하고 거의 증오 수준까지로 싫어했다.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였다. 영화 “쥬다 벤허”에서 복수심에 가득 찬 벤허가 예수님께서 큰 십자가를 끌며 골고다 언덕길을 오를 때 목이 말라 하자 주변에서 물을 떠와 건네려 할 때 눈을 마주치자 가슴에 깊이 박힌 칼날이 뽑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을 묘사한 장면이 있는데, 나는 이런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가 타인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먼저인 건지, 내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 먼저인 건지조차 몰라서 헤매었는데, 일단 관계 회복, 그리고 고통스러운 미움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날 위해서, 일단 용서하자 해봤는데, 그 담부터는 실타래가 알아서 술술 풀렸다.

누군가를 죽이려 손에 칼을 들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른다면, 감정이 삭혀야 칼을 놓는 것이 아니다. 칼을 놓으면 감정이 삭혀지고, 감정이 가라앉으면 차분함에 상대와 날 그리고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며, 이해하고 나면 측은지심이 들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 거의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위험한 것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

또 더 나아가 우리의 뇌에 “마귀의 착륙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주님의 푸른 초원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의 문제이다. 이런 경험 하나를 타인과의 모든 관계에 접목하고 대인 관계의 패턴에 적용해 날 신앙인으로 성숙시켜가고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끄니 이로써 나는 칭의와 인의 과정에 들어와 훈련과정에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타인에게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건은 그대로이다. 그리고 갈수록 더해지면 더해지지 덜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과 나의 관계, 나의 오늘, 지금은 주님의 가장 큰 축복된 선물로 돌이킬 시간이 주어짐을 의미하니 지금이라도 당장 십자가의 두 도둑을 기억하며 찰나라고 우습게 여기지 말고 더 긴장하며 감사함과 동시에 실천력 있게 행함 있는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영어로 Present는 뜻이 선물이자 현재를 뜻한다.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난 어려서 어머니를 위하여, 어머니는 후에 날 위하여 기도를 하여, 각자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모두를 축복하셔서 품 안으로 이끄셨다고 믿는다. 이제 남은 가족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나, 이끄시는 이는 하나님이라 믿고 맡겨 그로 인하여 내가 힘들게 여기고 고통받지 않는다.

하나를 하고 나면 그 담으로 할 것이 보이나니, 모든 빛은 점진적으로 한 번에 하나씩 다가오는 법이다. 주님은 우리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천천히 그분께로 인도하신다.
시련은 축복이라 여기며, 우리에게 다가올 주님의 재림이 곧 있기에 우리의 남은 때가 얼마 없음을 자각하여 나의 성품이 주님 닮길 더더욱 소망하고 소망하여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11시 교회, 손계문 목사님, 고 강병국 목사님, 황형제님, 여러 형제자매님들 그리고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무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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