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순종 [신앙기사 2부]

제2부 그리스도의 순종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5:19, 6:16).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가!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義)를 은혜로 얻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우리가 죄인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업으로 받는 수많은 보배 중에 가장 부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것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고 그 충만한 축복을 얻지 못해 왔다. 원컨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시고 또한 우리가 그 능력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1.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된 진리에 관하여 로마서 3:21~5:11에서 그 영원히 복된 기초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구속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그 방법과 조건을 제시하면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한 신앙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 축복 받은 열매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의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주저 없이 나아갈 수 있고 영광의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 후에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더욱 깊은 진리를 제시해 주었다. 바로 그 믿음 속에 의롭다고 하시는 칭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받아들이실 수 있다. 또한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 역사가 정당한 것이 된다. 바울은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가 아담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연합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결과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인지를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아담의 불순종과 그로 인하여 야기된 저주와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로 인하여 얻는 의와 생명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사역 가운데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바로 그 순종 속에 우리의 구속의 뿌리가 있음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에 순종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롬 5:19). 아담의 허리에서 나온 모든 가족은 법적으로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아담에 속해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와 같은 종의 신분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의 자손들은 각기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태어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이것은 죄의 저주에 속한 지위와 그 권세에 속한 본성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첫째 아담은 오실 자이신 둘째 아담, 즉 인류의 둘째 조상이라 불리실 분에 대한 표상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과 거의 동일한 효과가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또한 법적인 선고에 의하여 즉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선언되며, 받아들여진다. 법적인 관계는 혈연적인 관계와 연관이 있다. 그리스도의 의를 얻는 길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하고, 그 안에 거하는 길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직 잘 알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죄가 씻어졌고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혈연적인 관계를 알게 되며, 자신이 이전에 아담의 불순종에 동참하여 그에게서 나오는 사망과 죄 된 본성을 소유했던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죄인이 그리스도의 순종에 동참하여 의와 순종의 삶과 그분에게서 나오는 본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순종 하나뿐이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그분의 사랑과 축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순종밖에 없다. 이 세상에 죄의 권세가 지배하며, 파멸이 생겨난 것은 모두 불순종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방종과 이기주의, 불순종의 성향을 물려받았다. 우리에게 내려진 죄의 저주는 모두 우리 스스로 본받아 행하기도 했던 아담의 그 불순종 때문이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죄의 모든 권세는 결국 이것이다. 즉 우리가 아담의 타락한 성품을 물려받았듯이, 불순종이라는 이 성향도 물려받았다. 우리 스스로 선택해서 “불순종의 자식들”이 된 것이다. 불순종은 모든 죄와 불행의 뿌리였다.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분명한 이유는 바로 이 불순종의 그 저주, 그 지배, 그 악한 본성, 그 효과까지도 제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첫째 목표는 악한 근원을 제거하고 사람의 본래의 상태인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2. 불순종을 끝장내고 회복하시는 방법

 

그리스도는 어떻게 이 일을 하셨는가? 첫째,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첫째 아담이 해 놓은 일을 원 상태로 되돌려 놓으셨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 행하려고 늘 애쓰는 것이 굴욕적이라고 잘못 믿게 되었었다. 그리스도는 순종의 고귀함과 축복과 그 거룩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피조물이 입을 의복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 옷의 아름다움과 때 묻지 않은 순결함이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서 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옷을 친히 입으신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옷을 어떻게 입는지, 그 옷을 입고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불순종을 극복하고, 그렇게 그 불순종을 제거하고, 그 대신 자신의 순종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권세는 아담의 불순종의 권세처럼, 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며 강력하고 모든 것을 압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의 목적은 세 가지이다.
우리의 모본으로서 참 순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우리의 보증으로서 자신의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이루셨다.
우리의 대장으로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실 새로운 순종의 성품을 예비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심으로 자신이 끝까지 순종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고통을 당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아담의 불순종은 폐기되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대치되었다.
우리는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의롭게 되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인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즉시 완전하게 의롭다 함을 얻었다. 또한 즉시 완전하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함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법적인 것과 혈연적인 것은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혈연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그분과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같이 죄에 대해서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참으로 산 자가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는 삶이란 순종의 삶인 것이다.
순종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은 의와 구원의 비결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 순종은 의의 본질이다. 순종이 바로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무엇보다도 먼저 받아들여야 하고 신뢰해야 하며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순종은 나의 불순종을 덮고 끝장내버리는 부정할 수 없는 변치 않는 근거로 받아들이라. 아담의 불순종이 내 삶을 지배한 권세였으며, 내 속에 있는 사망의 권세였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은 내 속의 새로운 본성의 생명력이 된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의와 생명을 왜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는지를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롬 5:17).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간의 유사점을 잘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아담의 경우에 어떻게 사망과 불순종이 아담 자신은 물론 그 자손들에게 동일하게 왕노릇 했는지, 아담과의 연합을 통해서 그 사망과 불순종이 어떻게 동등하게 전해졌는지 관찰하면 할수록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나누어 받을 뿐 아니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소유함으로 그리스도의 순종도 똑같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순종은 그리스도와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영접하는 것은 곧 그분의 순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의를 우리가 받을 때 그 의는 즉시 의의 근원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순종으로 인도한다. 순종은 그 의를 살아 움직이고 꽃 피우게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우리 삶의 연합을 이야기한 다음, 처음으로 한 가지 명령을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 오직 너희 자신을 …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그리고 곧이어 이것이 바로 순종을 의미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우리가 순종과 관계를 맺는 일은 실제적이다. 우리는 아담과 우리 자신의 그 불순종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순종의 종이 되며, “의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의를 낳게 했으며, 그 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순종하는 것이다. 의에 이르게 하는 우리의 순종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준다.
대장이나 그 아래 무리나 하나의 법칙만 있을 뿐이다. 아담과 그의 자손에게 있었던 불순종과 사망이 확실했듯이, 그리스도와 그분 자손의 순종과 생명도 역시 확실하다. 아담과 그 자손을 하나로 묶는 띠, 곧 아담의 형상을 닮았다는 하나의 증표는 불순종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 자손을 연합시키는 한 가지 띠, 곧 그들이 주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하나의 증표는 순종이다. 예수님을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고(요 10:17,18) 우리의 구속주가 되게 한 것은 바로 그분의 순종이었다. 오직 순종만이 그 사랑 가운데 거하며(요 14:21,23) 그 구속을 즐거워하는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의를 충만히 즐기는 길이자 문이 되는 순종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동참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순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개심 시에 믿음에 의가 완전히 주어진다. 그렇지만 참으로 의를 믿고 그 의에 굴복하며 “의의 종”으로서 그 의에 완전히 다스림 받기 위해 나아간다면, 순종으로 얻은 그 의의 복된 본질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이다. 그 순종이 우리를 계속해서 신의 성품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진정으로 잡으면 잡을수록, 그 의를 분출시키는 순종을 함께 나누려는 열망이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연구하고 묵상하자.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종의 종으로 살며, 그 결과로 오는 의에 이르는 자가 되게 하자.

 

 

3. 예수님께 있어서의 순종

 

1) 예수님께 순종은 삶의 원칙이었다.
예수님의 순종은 가끔 행하는 순종의 행위나 이어지는 여러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온 삶의 정신을 의미한다.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요 6:38). “오, 하나님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려고 왔나이다”(히 10:9). 예수님은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만을 살았다. 예수님의 삶을 주장했던 최고의 원칙은 바로 순종이었다.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한 가정을 이루는 고리는 모든 가족이 공동으로 나누는 공동생활이며 가족의 형상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묶어주는 띠는 곧 그리스도와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2) 예수님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게 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그리스도에게 단번에 모두 다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순종의 삶에는 성장과 발전이 있었다. 즉 가장 힘든 것이 맨 나중에 왔다. 그때 그때마다 예수님은 순종하심을 통하여 그다음 계속되는 아버지의 명령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 40:6~8)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열심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기다리게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 뜻을 깨닫게 된다.

3) 예수님께 순종은 기쁨이었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 이것이니라”(요 4:34). 우리의 음식은 신선함과 생명력이다. 건강한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음식은 즐거움 이상이며 삶의 필수품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굶주림을 채워주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기쁨을 주었다. 그분은 그 뜻을 행하지 않고는 굶주리고 갈급해서 살 수 없으셨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하는 다윗의 고백도 이러한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우리도 이것이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지면, 순종은 더욱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더욱 필요한 것이 되며, 우리의 육신의 음식보다 더 활력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4) 예수님께 순종은 죽음까지 낮추셨다.
예수님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자기 뜻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7,38)고 말씀하셨다. 어느 하나라도 내 뜻을 행치 않고, 어떠한 희생을 치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순종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으며,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는 순종하는 것이 참된 순종이며, 우리를 이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능력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순종은 우리에게 기쁨과 강건함을 가져다준다. 만일 우리에게 순종에 대한 의심이 있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숨어 있는 한 승리를 보장해 주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적인 순종을 원하시면서 도와주신다는 약속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능력과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경험이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5) 그리스도께 순종은 가장 깊은 겸손의 표현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KJV, 빌 2:5~8).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그 순종의 아름다움과 그 능력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비우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순종의 종”으로 살기를 기꺼이 원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매우 낮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은밀히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도 순종하기 위해 애쓰는 그런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고, 철저히 자기 의지를 부정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되 절대적인 무력함과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고개를 숙이기를 기뻐하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전적으로 돌아설 때만, 이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피조물의 의무이며 축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6) 그리스도께 이 순종은 믿음의 순종이었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 “내 속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일하신다.” 아들이 단 하나도 남김이 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므로, 아버지께서도 끊임없이, 남김없이 자기 능력의 선물을 주셔서 아들 속에서 일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고 그렇게 하시길 원하신다. 하나님께 충만한 순종으로 굴복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전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완전히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 언약의 약속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부어주셔서 우리가 주님의 율례 가운데 행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우리도 사람의 아들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자. 그리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김없이 철저한 순종으로, 죽음을 각오한 순종에 굴복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해 주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의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면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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