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향한 책망 [신앙기사 2부]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침례 요한의 책망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음행과 귀신의 처소가 된 바벨론의 죄악을 폭로하고 거기에서 나오라고 외치며 참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펴보았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교회를 향해 경고하기 때문에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능력이 있는 이 사람들의 외침과 비슷한 장면을 사복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7~10,12).

침례 요한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지도 않고 거기에 합당한 열매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인데,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 그렇게 자만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돌들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에 찍혀 다 불태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랄하게 책망하는 모습이다. 이런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면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전해야 한다. 그래야 능력이 있고 사람들을 깨울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가득한 사람이 전해도 교회를 비판한다며 오해한다. 엘리야와 침례 요한이 전했던 이런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인기가 없다. 그러나 다수에게는 인기가 없는 메시지라도 마음이 진실한 소수의 사람에게는 회개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책망의 소리가 많다. 그런데 회개로 이끌기보다는 문제와 싸움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상대방을 깨우치고 돌이켜 회복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수와 부족함을 부각하여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복수하려는 동기에서 정죄하기 때문에 다툼과 분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막대기 같은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더럽습니다. 저를 새롭게 해 주옵소서!” 이러한 절규와 탄식이 나에게 먼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책망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침례 요한의 경고와 책망보다 예수님은 수위가 더 높은 발언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과 다니시며 하늘의 교훈을 전해주고 은혜로운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한정된 성경 지면에 은혜로운 말씀들로만 채우지 않고 마태복음 23장의 말씀도 하셨다. 마태복음 23장 전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들이다. 죄지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소망을 주시는 말씀들과 대조되는, 소리 내서 읽기도 민망할 정도의 무서운 말씀이다. 백성들을 포함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30대 젊은이가 모든 국민에게 존경받는 어르신들을 향해 도전적인 이야기를 한다. “여러분, 여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위치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저들은 말만 하지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마십시오. 사람들한테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이다 발언에 백성들은 열광했지만, 듣고 있던 종교 지도자의 표정은 어땠을까? 감히 그들의 자존심을 건든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경문을 넓게 하며”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십계명에 대하여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신 6:8). 십계명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라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실천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몸에 부착해야 한다는 문자적인 지시로 종교 지도자들은 해석했다. 그것을 차고 다니면 백성들에게 존경받았기 때문에 이방 종교의 부적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옷 술을 크게 하고”

​옷 끝 귀퉁이에 청색 실로 석류 모양의 술을 달았다. 순종을 상징하는 청색의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민 15:38~40). 그런데 이것까지도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 자기를 드러내는 홍보 수단으로 선행을 사용한다. 헌금을 많이 하고, 열심히 교회를 건축했으며, 전도를 많이 했고,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했다고 자랑하길 좋아한다.

옷 술을 크게 만들면 기만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하기에 감히 그들에게 조언하거나 충고하면 분을 참지 못한다. 또 새벽기도에 안 빠져야 장로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열심히 한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해 보이지만,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불법에 눈감아 돈 버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런 돈으로 헌금만 잘하면 더 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옷 술을 크게 달면 강도가 될 수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인지를 외적으로 드러내려고 애쓴다. 거짓된 거룩이요, 교만한 겸손인 경우가 많다. 옷 술을 크게 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내가 훔치고 있는 것이다.

옷 술을 크게 달면 노예가 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남들이 나를 추켜세워 주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자 하는 유혹은 금방 중독이 된다. 그래서 점점 더 큰 옷 술을 만들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옷 술을 크게 만들면 배우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거룩한 모습으로 보이려고 연출하고 스스로 배우로 활동한다. 종교적 거룩성을 드러내길 좋아하고, 표정도 거룩한 모습으로 위장한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니까,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삶을 살게 된다. 배우로 살면 관중은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사로잡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유대 교회와 현대 교회

 

​모세의 자리에 앉은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백성들은 유대 교회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그들의 가르침에 사상적 노예가 되어 있었다. 유대 교회 안에 있어야만 하고, 유대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탄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을 해석해주는 대로 그냥 따라 사는 것이다. 이치와 논리에 맞지 않고, 상식에 맞지 않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데도 교회를 관리하는 그들의 해석의 노예가 되어서 도무지 빛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이 편견의 사슬에 사로잡힌 백성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슬들을 끊으셔야만 했다. 교회가 백성들에게 얹어준 멍에를 끊어 내는 것도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야 백성들이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편견의 장벽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3장에서만 “화있을진저 이 위선자들아”라는 말씀을 7번 반복하신다. 반복적으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죄를 강력히 책망하신다. 이 책망은 그 자리에 있는 청중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부패한 교회를 보셨다면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의 심령이 떨려야 할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열심히 전도해서 교인 만들었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지옥 자식으로 양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성경을 곡해하고 잘못 가르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무서운 죄가 오늘날의 교회에도 있다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마 23:16).

제사장들도 성전의 주인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을 숭배한다. 면죄부가 중세 카톨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도 어떤 죄들은 가볍게 여기고 다른 죄는 거의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되는 듯 취급하면서 금전을 요구했다. 돈을 내면 죄를 면제해 주고, 돈을 안 내면 사소한 실수에도 엄중한 형벌을 내렸다. 특별히 유대 지도자들이나 유대 교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가 될 만한 그런 일들은 거의 용서받지 못할 죄로 취급되었다.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표준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를 해석했고, 돈을 받고 죄들을 용서해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4).

“너희가 소경이면서 누구를 인도한다고 하느냐? 하루살이는 삼킬까 봐 조심조심하면서 약대는 꿀떡꿀떡 삼키는 위선자들아!” 물을 마실 때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될 수 있는 가장 작은 곤충이라도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물을 걸러 마시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아니 못하면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준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무덤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혹시나 무덤과 접촉해서 부정하게 될까 봐 무덤을 희게 칠했다. 그런데 무덤이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 자체가 바로 부정한 시체덩어리다. 뿐만 아니라 썩은 시체를 감추려고 회칠한 무덤들이다. 위선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29~31).

바리새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 그들의 공언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다.

예수님의 강한 이 책망을 그 당시에만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았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즐거이 받아들였을 것이요 구주를 거절한 자들의 죄에 결코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이들처럼 예수님을 죽일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과 극기와 겸손을 요구할 때, 어떤 결정을 하는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순종을 거부하지는 않는가? “하나님 이건 너무 극단인 것 같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제가 진리를 따라 살면 가족에게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요구하실 리 없어요.”라며 적당히 타협하거나, 무시하거나 아니면 말씀대로 살기는 어렵다고 화를 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오늘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어렵다고 변명하면서, 새 마음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등한히 하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하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인간은 흔히 자존심에 상처받았을 때, 이를 갈며 복수하려고 한다. 자신의 평판과 체면 때문에 공공연하게 할 수는 없으니 어떤 명분을 만들어 합리화시키면서 그 일을 한다. 또한 그들은 이기적이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자기가 하지 못하는 일, 하기 싫은 것들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가? 종교지도자들은 탐욕적이었다. 우리도 돈 때문에 영생을 거래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들은 논쟁적이었다. 우리도 분냄과 다툼과 미움과 짜증이, 한방 먹여주고 싶은 복수의 마음이 있지는 않은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펴봐야겠다. 우리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을까? 유대 지도자들이 행한 그 일을 선택할까 두렵다.

 

운명의 선고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36).

창세기의 첫 번째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마지막 순교자 사가랴. 사가랴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를 정죄하다가 요아스 왕의 명령으로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이었다.

“[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 24:20~22).

오늘날의 성경은 말라기가 마지막 책인데, 히브리 성경 순서로는 역대기가 맨 마지막 책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창세기부터 마지막 책까지, 최초의 순교자부터 최후의 순교자를 언급하시며 그들을 너희가 죽였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지금 청중들은 선지자 사가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에서 말씀하고 있는가? 해변도 아니고 축복의 산도 아니라 바로 사가랴가 죽은 성전 뜰에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경고의 말씀이 선지자의 입에 있을 때에 배도한 왕은 사탄적인 격분에 사로잡혔고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다. 그의 피는 성전 마당의 매 돌마다 새겨져 지워질 수 없었고, 이것은 배도한 이스라엘에 대한 증거물로 남아있게 되었다. 지금 예수님께서 똑같은 성전 뜰에서 이 무서운 죄악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 의로운 피 값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공포가 청중들을 둘러쌌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아벨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죄악의 잔을 넘치도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너희가 지금까지 죽인 의인들과 선지자들의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마 23:33,36).

예수님은 지금 화가 나거나 억울해서 쏟아부은 것이 아니다. 주님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애쓰는 그 살기등등한 자들을 움츠리지 않고 바라보셨다. 온유하고 따뜻한 말씀만 하시던 예수님의 입술에서 심판의 음성이 울려 퍼진 것이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군중들의 반응이 기록에 없지만 어떤 분위기였을까? 책망을 당하는 당사자들은 물론이요 제자들까지도 아마 창백하게 질렸을 것이다. 심판의 소리를 듣는 청중들은 벌벌 떨었을 것이고, 아마 가룟 유다는 당시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과 심판의 말씀을 듣고 몹시 속상했을지 모르겠다.

​이런 책망을 우리 면전에서 했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부르르 떨면서 어떻게든 복수하겠다고 결심했을까? 아니면 “주여 그렇습니다. 저를 구원해 주소서!” 그렇게 매달릴까?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화요일 오후에 하셨는데, 그 후 3일 뒤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다. 결국 이들은 최초의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마지막 순교자 사가랴 그리고 메시아까지 죽임으로 죄악의 잔을 넘치도록 채우고 말았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지는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만족감이나 안도감을 얻는다면 오히려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님 제가 이들과 같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 적용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서 우리 안에 참된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혼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회개해야 한다. 그 결과로 거룩한 사람들이 준비되고, 거룩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시작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을 어떤 심정으로 말씀하셨을까?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모으려고 몹시 바랐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염려하는 마음이 이처럼 사무치고 부드러운 표현으로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적이 없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저주 섞인 말로 심판을 선고하신 것이 아니라 눈물로 호소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해 주므로 행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려고 청중들을 보실 때, 불꽃같은 눈으로 쳐다보며 저주를 쏟아부은 것이 아니라 동정의 눈빛으로 “너희가 살아야 할 것 아니냐” 하는 심정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의 깊은 고민과 쓰라린 눈물 때문에 목멘 음성으로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것은 죄를 선택해서 떠나는 이들을 보시며 안타까운 작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호소가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 삶이 이기심과 탐욕과 자아 사랑으로 더럽혀졌는데, 이 모든 것을 순결한 것처럼 보이는 겉옷으로 가려서 한동안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모든 목적을 아시고 모든 사람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이날 화요일 오후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3일 후에 예수님을 죽이게 된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던 많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씨앗을 남겨두셨다. 맹목적인 교단주의라는 교회관을 깨뜨리자, 진리의 빛이 그들의 삶 속에 비취기 시작했고, 새로운 소명이 일깨워졌으며,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사람들은 선두에 나와서 거룩한 사명을 성취하게 되었다.

이 글은 월간지 [열한시 262호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호소]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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