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삶의 비결 [신앙기사 4부]

제4부 겸손한 삶의 비결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1. 죄인이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이 아님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살전 2:10).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으로써…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이 성경 절들은 바울의 이상이나 희망이 아닌 실제 삶이었다. 바울이 쓴 편지에는 죄의 고백이 없다. 그의 삶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성령 충만한 삶이었다.
지극한 겸손은 일상적인 범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기억에서 떠날 수 없는 심각한 죄의식에서 생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어떻게 취급하고, 어떻게 죄를 도말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그와 동시에 은혜의 체험이 넘칠수록 죄인이라는 의식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사람을 정말 겸손하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과거에 어떠한 죄인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죄의식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죄의식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풍성한 은혜를 입고 자기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며, 허물 많은 죄인을 그분의 은혜로 완전히 구원하신 구속주로 알고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사랑의 충만한 빛 가운데 거하면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오는 거룩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그러한 죄인이다. 그는 결코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에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께 점령된 그러한 죄인이다.

 

 

2. 거룩의 참 가치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6,17).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룩의 참 가치는 그것이 겸손으로 나타나는 것이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겸손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우리 마음속에 머물게 하고, 빛을 비추게 하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 어린 양 예수님의 거룩한 겸손은 그분 생애의 비결이요, 대속의 죽음의 근원이었고, 보좌의 영화를 이룬 비결이었다. 겸손은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지를 시험하는 정확한 시금석이다. 겸손은 거룩의 꽃이며, 향기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거짓 거룩의 제일 큰 표는 겸손의 결핍이다.
거룩하신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거룩하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수록 우리의 거룩의 정도도 커진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겸손하게 된다. 왜냐하면 겸손은 하나님만이 전부라는 생각으로서 자기를 전혀 나타내려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거룩한 자는 가장 겸손한 자이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전 13:4). 이 사랑의 정신이 흘러넘치는 곳에 겸손이 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사랑의 영이 두루 비춰서 거룩한 성품이 충만히 자라나는, 하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음 안에 꼴 지워지는 사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남을 축복하는 것을 자신의 축복으로 삼고, 연약한 사람을 돕고 세워주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 온전한 사랑의 능력이 주어진다.
이러한 심령에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능력으로 들어와서 그분의 완전하심을 계시하여 보여 주실 때, 인간의 초라한 모습은 자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초라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겸손치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임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 임재 아래 우리 영혼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심령이 지극히 겸손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 이러한 심령에 참 은혜의 말씀과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된다.

 

 

3. 위대한 믿음의 뿌리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교만과 믿음은 근본적으로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것을 안다면, 믿음과 겸손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도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 겸손을 갖지 못하면 결코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우리는 마음속에 교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진리에 대한 강한 지적 확신은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적 확신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산 믿음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전혀 무가치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킨 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만 기다리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지극히 겸손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와 그 나라의 은혜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감각 기관이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광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라는 데서 온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 구원은 그 십자가의 정신(겸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겸손의 행동) 그리스도와 사귀는 교제(겸손의 연합)를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에 동참하며 연합하는 것이다.
큰 믿음을 말할 때 성경은 항상 두 면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어떤 백부장의 위대한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내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눅 7:9)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백부장이 “오 주여! 당신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7:7)라고 말한 것은, 큰 믿음과 지극한 겸손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이다.
또 예수님께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는 칭찬을 들었던 한 어머니는, 개에 비유하는 말을 듣고도 오히려 “옳소이다. 주여,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라고 말했다. 이 여인의 믿음과 겸손은 분리될 수 없었다.
자기를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과 믿음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물리치게 하는 것은 오직 겸손이다. 혹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도 겸손뿐이다.
삶이 거룩해지지 못하는 원인이 있다. 믿음 생활이 그렇게도 피상적이고 순간 뜨거웠다가 식어버리는 이유를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그 원인은 자기 내면에 편만하게 활동하고 있는 교만과 육신에 속한 “나”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교만과 육신의 생각을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오셔서 그분의 능력으로만 될 수 있다.
거듭난 거룩한 성품만이 육신에 속한 옛사람의 자리를 치워버리고 우리를 겸손히 만들 수 있다. 거룩한 성품은 어떤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성품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 순종하는 신실한(충성스러운) 품격을 말한다.
이제 받으려 하지 말고 바치려고 하라.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영광만을 찾기 위해 자신을 바치라. 바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욕심을 없앨 수 없고, 우리의 감정과 아픔과 분노를 극복할 길도 없다. 고귀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의 전부가 되게 하라. 그러면 우리는 사람의 영광과 자기 영광만 구하는 데서 해방이 될 것이고, 나 자신이 없어져 버려도 기뻐할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믿음 안에서 강건히 자라날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질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서, 모든 신앙적 요구를 채워주실 것이다. 믿음은 겸손이고 겸손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임을 기억하라.

 

 

4. 자아가 죽는 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8).
겸손과 죽음은 본질상 하나이다. 겸손은 꽃의 봉오리다. 이 꽃은 죽어야 완전한 열매를 맺는다. 겸손은 죽음을 택한다. 겸손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의 뜻을 완전히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죽음으로서 증명하셨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쓴 잔을 받으시고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 그분도 우리가 가진 모든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죽음을 택하셨다. 그분을 유혹하던 죄악도 물러갔다. 이렇게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종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셨던 그 한없는 겸손이 아니었다면, 그분은 죽음을 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죄에 죽는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생명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함을 의미한다. 그때에야 나는 진실로 죄에 죽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성격과 행위에서 이 죽음의 능력이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능력을 얼마나 나에게 나누어주느냐 하는 분량에 따라 결정된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완전한 교통을 가지기를 원하고, 자아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기 원한다면 나 자신을 낮춰야 한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하나의 의무이다.
전적으로 무력한 자신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맡기라. 스스로는 자기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다는 그 무능력함을 절실히 느끼라. 자신은 먼지만도 못한 무익한 존재임을 반성하라. 온유와 참음과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라. 모든 굴욕을 받아들이라. 사람들이 괴롭게 할 때는 오히려 나를 겸손하게 하기 위한 은혜의 기회로 생각하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춰야 하는 기회가 올 때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찬스로 생각하라.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라. 겸손의 극치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풍성한 은혜의 모든 체험과 진정한 헌신과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모든 거룩한 사건들 밑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말 겸손해졌음을 실제로 증명하는 죽음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롬 6:3,11,13).
예수님은 무덤까지 자기를 낮추셨다. 매일 아침 자기를 낮추고 또 낮추라.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은 매일 내 심령 속에서 새로워질 것이다. 화평하고 즐겁고 행복한 그 겸손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침례의 표로 삼으라.

 

 

5. 어떻게 하면 교만을 이길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교만을 이기려면 첫째,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겠다고 하신 그 말씀이다.
자기를 낮추라는 그 명령은 확고한 계명이다. 물론 이 명령이,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교만한 성품을 내쫓을 수 있거나, 내 심령에 거룩하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내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 힘으로는 겸손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 명령의 교훈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기회마다 자기를 낮추라는 것이다.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든 방법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준비 기간이 있고, 성취의 때가 있다. 준비 기간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시기인데, 그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좀 더 높은 소망을 향하여 일어설 수 있도록 깨우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때이다. 이때는 물론 부분적인 성공과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실패와 무능으로 이뤄진 시련의 연속 기간이다. 그 후에 성취의 때가 온다. 이때는 우리의 믿음이 약속을 얻는 때이다. 우리가 힘써 얻고자 했지만 늘 실패했던 것을 즐길 수 있는 때이다.
겸손을 추구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낮추라”라는 계명을 주셨다. 그러나 이 계명을 열심히 순종하려고 노력할 때 두 가지 쓴 경험을 하게 된다.
첫째, 자기를 낮추기 싫어하고, 내세우기만 좋아하며,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기뻐하지 않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뿌리 깊은 교만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 악한 교만을 제거하려는 자기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기의 기도까지도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사실이다.
자신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인내하며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교만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사람은 복된 자이다. 인격 형성 과정을 우리는 잘 안다. 행위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질이 되고, 성질은 의지를 결정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의지는 인격을 이룬다. 이 원리는 영적 은혜의 단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계속 반복되는 행위가 습관과 성질이 되고, 그것들이 의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이, ①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 교만해 지려는 마음을 낮추면, ② 더 큰 겸손의 은혜가 임하게 되고,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승리를 얻게 된다. ④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심령은 완전히 새로운 성품을 이루게 된다. ⑤ 그때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 심령에 거하시게 된다.

 

 

6. 영화롭게 되는 길

 

“주님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시리라.”(약 4:10)
인간의 영화와 존귀는 어디서 오는가? 피조물의 최고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선포하며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릇이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만 전부가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데 있다. 물은 항상 가장 낮은 곳에 먼저 채워진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욱 낮아지고 비어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 빨리, 더 충만히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것은, 보상받을만한 상당한 행동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상급은 오직 우리 자신의 겸손의 결과이며 열매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겸손과 동화되어 일치된 겸손이 우리에게 있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상급이다. 그 상급 자체가 그 사람 속에 있는 거룩한 겸손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여진다. 이 말씀이 진리이며, 이 약속이 우리에게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실성은 예수님 자신이 그 보증이시다.
그리스도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을 배우라. 만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낮추신 것처럼 우리가 그분 앞에 낮추면, 그분은 또다시 우리 각 사람 앞에 그분 자신을 낮추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과 멍에를 같이 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우리의 멍에를 또다시 낮추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의 멍에를 메고 더 오래 그분과 사귀며 우리 자신을 낮출수록, 그분의 영광이 우리 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은 겸손한 심령 위에 임재하신다.
자신을 낮추어 주님의 영광을 높이도록 힘쓰라. 그러면 하나님은 나의 겸손을 더 완전하게 하셔서 나를 더욱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마음에 부으실 것이다. 모든 면에 스며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이 나를 소유하게 될 때, 내 자아는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매우 즐겁게 죽게 될 것이다. 결국 자아의 욕망도 생각도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것은 그분께 정복되고, 그분은 내게 모든 것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정복해야만 이루어진다. 아주 작은 먼지가 날리고 있는 것을 보려면 밝은 햇빛이 비쳐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나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따뜻한 빛 속에서 날리고 있는 한낱 먼지임을 깨닫고 그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그릇으로 삼으실 것이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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