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대한 10가지 질문 [신앙기사 1부]

제1부 회개에 대한 10가지 질문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할 때 회개하라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을 때, 듣는 무리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묻자 즉시 대답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외쳤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회개한다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회개는 성경에서 자주 접하는 주제이지만 여전히 아리송할 때가 많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게 되는 것이다. 또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이며, 그것은 학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회개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려고 할 때, 간단한 것 같지만 난감함을 느끼는 경우가 좀 있다. 회개를 올바르게 알아야 내가 올바른 회개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번 월간지를 통해 회개를 알고 회개를 하게 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1. 회개란 무엇인가?

잘못한 일에 대하여 눈물로 고백하는 것일까? 눈물이 회개의 한 모습일 수 있지만, 그것이 회개의 본질이 아니고 전부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회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회개를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라고 했는데, “돌이키다” “방향을 바꾸다”는 뜻이다. 어떤 잘못에 대하여 “용서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가던 방향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
성경에서는 죄를 “하마르티아”(ἀμαρτία)라고 한다.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이다. 가야 할 방향으로 안 가고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났기 때문에, 올바른 길을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메타노에오” 돌이켜야 한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 차려서 가던 길에서 돌이켜 바른길로 가는 것이 회개다.

 

2. 그런데 왜 회개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바른길, 옳은 길, 도덕적인 길로 가고 있다고 하는데, 왜 돌이켜야 하는가? 회개를 논하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회개는 죄를 버리는 것이며,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3. 그러면 또 질문이 생긴다. 내가 왜 죄인인가?

“내가 왜 죄인인지 모르는데 무엇을 회개한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들인가?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올바르고 확실한 대답을 제시한다.
세상에서 죄라고 하면 여러 범주가 있을 것이다. 정치범, 경제 사범, 형사/민사상의 범죄 등등,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죄를 주로 죄라고 말한다.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인 죄들을 성경도 죄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죄들은 결과적인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인 죄가 무엇인지 계시해주고 있다. 성경이 이것을 계시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죄 자체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나 도덕은 죄를 도덕적인 잘못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4. 도덕적인 죄들 외에 성경이 계시한 죄는 무엇인가?

본질적인 것은 생명과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했고, 사람도 선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딤전 4:4)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지은 사람이 그 상태 그대로 영생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랑과 행복으로 지내기를 원하셨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선함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동의를 구하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한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과 존재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자기 의지로 결정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스스로 선택해야 하나님이 주신 행복이 진정으로 자신의 행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의지를 스스로 활용할 기회를 만들어 주셨고, 그것이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그 결정은 단순하고 쉬운 것이었다. 두 나무 열매 중에 생명 나무 열매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야 하였다. 먹으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존재를 거절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먹으면 그는 당연히 생명과 존재를 하나님께 반납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사탄의 개입으로 우리의 시조는 선악과를 먹고 생명과 존재를 반납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생명과 존재를 반납한다는 의미는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시조는 하나님을 거절하므로 죽게 되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원히 사는 삶을 벗어나 죽게 된 상태, 바른길에서 떠나 있는 상태를 “죄”라고 하며, 그런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죽게 된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아담 안에서 죽은 자”(고전 15:22),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 2:1)라고 계시한다. 또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죽은 자들”(마 8:21)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들이다.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썩고 있으며, 그 썩는 모습이 바로 도덕적인 죄들이다. 성경은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며(롬 8:21), 모든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들이다(엡 4:22).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의 결과를 물려받게 되었다. 아담이 범죄한 그 “죄의 책임”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죄의 결과”가 유전되었다. 유전된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 번째, 우리는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는데, 그 이유는 아담의 죄의 결과 때문이다.
두 번째, 죄에 끌리는 죄에 대한 성향이 유전됐다. 인간 본성의 순수함을 상실한 것이다.
세 번째,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아담처럼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없게 됐다.
네 번째, 지구 환경에 변화가 왔다. 아름답고 풍족했던 에덴에 죄의 그림자가 덮였고, 이것은 갈수록 심해져 오늘날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 죄로 말미암아 지구가 파괴되어 가고 있다.

사탄은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대로 살지 못하도록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 변질시켰다. 그 변질이 바로 죽음, 사망이다. 이 죽음은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만든 것이 아니라 범죄함으로 생겨난 결과이다. 이제 죽게 된 사람은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이 되어서 사탄 쪽으로 기울어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사탄의 형상대로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원래의 상태로 고치는 것이 “메타노에오” 회개이다. 어떤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죄의 결과를 지닌 채 죽을 몸을 가지고 태어난 것,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한 것도 아니다. 죄인 하면 우리는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존재가 이렇게 태어난 것에 대해 내 책임이 없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회개의 참된 의미는 용서가 아니라 이렇게 죽을 몸으로 태어나서 썩어짐의 종노릇 하다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이 회개요, 구원이다.
이렇게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전하며 모범적인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올바른 회개를 할 수 없으며,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와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점이다. 자기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회개는 시작된다.

 

5. 참된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상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지라도 그 죄가 정서적으로 싫게 느껴지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죄인 줄 아는 것을 넘어 죄를 싫어해야 한다. 죄가 자기의 정서에 역겨운 것이 되지 않으면 단순히 그 죄로 인해 오는 결과, 곧 형벌을 피하려는 목적으로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만일 그 죄에 따른 형벌이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죄일지라도 계속 지을 것이다. 죄를 죄인 줄 안다는 것과 죄를 싫어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이 왜 죄를 저지를까? 죄가 주는 일시적인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참으로 이루어지려면 정서적으로 어떠한 쾌감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또 다른 정서적 능력이 생겨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정서의 경향이 바뀌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바라는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취향과 동기와 사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전에는 세상의 쾌락이 좋았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7,8).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든 좋아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배설물! 먹은 것이 입으로 나오든 뒤로 나오든 배설물은 역겹다. 그것처럼 죄에 속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정서적으로 역겹고 거부하는 감각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성과 감정의 선택에 놓였을 때, 이성보다는 정서적 경향에 따라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성적 판단, 원칙, 의지보다는 “죄”인 줄 알지만, 본능적으로 끌리는 그것을 더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정서와 감정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 정서와 감정의 경향이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지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죄를 죄로 인식하는 것은,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본능, 정서, 감각이 이성을 압도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의 정서가 예수 그리스도 편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이 이 정서의 경향이 바뀌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 일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그 일이 잘못인 줄 알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그 욕망이 자신의 이성을 압도하기 때문에, ‘너무 율법주의자처럼 그럴 필요는 없어.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또는 ‘이번 한 번만 하고 나중에 회개하지. 예수님이 용서해 주실 거야’ 그렇게 수많은 변명과 핑곗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죄인 줄 알지만, 죄를 싫어하지 않고 죄에 끌려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삶이다.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이런 나약한 죄인들이 계속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도록 마음에 안도감을 주는 면허증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에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 감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회개는 이성이나 지성뿐만 아니라 바로 이 감정, 정서적 경향이 하나님 편에 이끌리게 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옳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일이 좋아서 믿게 되는 경험에 이를 때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된 회개를 하게 되면, 예전에는 그렇게도 좋았고 그것이 주는 자극 없이 못 견뎠으나 오히려 지금은 그것이 괴로운 것이 된 것이다. 정서의 경향이 바뀌었고 생각과 마음과 동기가 바뀌었다. “메타노에오” 한 것이다.

 

6. 회개에 필요한 3가지 요소

1) 이성적&지적으로 죄가 무엇인지 인식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아야 회개할 수 있다.
2) 정서적으로 죄를 싫어하고, 영적인 것을 좋아하게 되어야 한다.
3) 의지적으로 죄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렇게 회개한 사람은 회개의 결과가 삶 속에 나타나게 된다. 많은 신자가 죄가 죄인 줄 지적으로 알고, 또한 정서적으로도 싫어하는데 문제는 그 죄들을 계속 짓고 산다면 아직도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8).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말한다.
성경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눅 19:1~10).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집으로 모셨을 때 그의 마음에 회개가 이루어졌고 그는 회개에 합당한 태도를 나타내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이처럼 회개는 인간의 3가지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 지정의(知情意) 모두가 결합하는 것이다.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완전한 일치로 이루어지며 이 모든 과정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이끄시나 우리의 결단이 필요하다.

 

7. 회개를 한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개가 진정으로 이루어지면 유쾌하게 되는 일, 새롭게 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행 3:19). 별 감흥이 없었던 자연이 아름다워 보이고, 그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능력을 보면서 감사하게 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하며, 찬양하게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은 그의 가치관, 인생관, 도덕관, 선악관 등등 사고방식 전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전에는 세상적이더니 지금은 신앙적이며, 전에는 세상 쾌락이 좋았으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즐거움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 즉 중생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다시 사는 것이다.

 

8. 회개할 때는 무엇이 뒤따르는가?

참된 회개를 통해 거듭나게 되면, 죄인의 자복(自服)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말은 죄인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자복의 두 가지 의미 중 첫 번째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인데,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물론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그 전에 먼저 있어야 하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시며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길을 마련하지 아니하셨으면 나의 생명과 존재도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시인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굳이 자복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허물을 이미 아신다. 하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태도를 고치려는 선택과 결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했다. 이렇게 시인하는 것이 신앙 고백이요 자복이다. 예수님 없이 살았던 모든 순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예수님을 슬프게 하지 않기로, 지금 이 세상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예수님이 사셨을 바로 그 생활을 살기로 고백하고 결심하는 것이다.

 

9. 자복의 두 번째 측면

첫 번째 자복은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고 자복의 두 번째 면은 사람들에게도 자복해야 할 경우가 있다. 상대방에게 죄를 범했다면 당연히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회개는 회복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자기 마음의 짐을 해결하기 위해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그 일이 너무 양심에 가책이 되고, 구원을 못 받을 것 같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한다. 사실 이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때는 2가지가 동반되어야 한다. 첫째는, 자기가 지은 잘못에 대한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복이 진실한 것이다. 그저 눈물 흘리면서 “내가 당신에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것만 하는 것은, 자기 양심의 짐을 덜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이 크다. 돈 1억을 빌려서 도망쳤다가 용서해 달라고 돌아왔으면, 이제 한 달에 10만 원씩이라도 갚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냥 “나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끼친 손해에 대한 회복이 필요하다.
험담을 해서 사람들의 관계에서 불신과 분열이 일어났다면 “내가 당신에 대하여 악담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억울하게 만든 것에 대하여 회복해야 한다. 자신이 벌인 일들에 대한 복구를 위한 노력이 동반돼야 그 자복이 진실한 것이다. 회개는 울면서 용서해 달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 즉 회복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도덕적 용기와 결단, 그로 인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잘못한 것이 있을 때 그 잘못을 자복하고 용서를 구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야 한다. 그래서 자복에는 첫째는, 잘못을 회복하는 것, 둘째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 이 2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계속해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려는 마음이 있으면서 용서해 달라고 고백한다면, 이런 것은 자복일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또 이런 경우가 있다.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자기 혼자서 상대방에 대해 오해했거나 나쁜 생각을 품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잘못을 고백할 때가 있다. “내 쓰레기를 태우다가 남의 빨래를 더럽힐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의 고백이 상대방을 괴롭히고 그를 해롭게 하는 경우가 될 때 이런 자복은 신중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시기 질투하거나 생각으로 죄를 지었는데,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있다면 굳이 그것을 고백해서 상대의 마음에 시험을 주고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당사자에게 고백하기보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상대방에게는 더욱 사랑을 베풀고, 더욱 선을 베풀고, 더욱 아껴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 미안함과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상대에게 선을 행하는 것으로 갚아주라.

 

10.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이 살게 해주지 않으면 결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해 주신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맡긴 사람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이제는 예수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전에 예수님 없이 살았던 사실을 회개하여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다. 나의 전 인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어 가도록 맡기었다. 내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이요, 나의 길은 예수님의 길이요, 예수님 안에 내가 살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기로 굳게 언약한 것이 회개이다. 이렇게 할 때 이전의 모든 허물은 예수님 안에서 다 용서되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 사함을 얻는 것이며(행 2:38; 3:19; 눅 24:47),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다시는 기억되지 않게 된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우리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였으면 회개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결코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확신을 가져도 좋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이것이 성경의 확실한 약속이요 보증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려고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신다. 예수님 안에서만 참된 생명과 존재가 있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넉넉히 도우신다. 그리하여 이제 바울의 고백대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 지정의(知情意)가 성령을 따라 행하며, 예수님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복과 만족을 누리게 하신다.
1부에서는 회개에 대한 10가지 질문의 답을 찾아보았다. 오늘날 회개에 대한 이론은 많지만, 회개한 자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슬픈 현실인가? 자기도 회개하지 않았으면서 남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니 회개의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회개에 관한 공부로 끝나지 말고, 회개한 자가 될 수 있도록, 참된 회개를 소망하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참된 회개의 생애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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