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 [신앙기사 4부]

제4부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동일한 능력, 동일한 승리

 

그리스도인 중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메시아요, 그리스도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부인한다. “그분은 우리와 뭔가 다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땅에서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가능했지만 우리는 안 돼!”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체로 오셔서, 동일한 시험을 받으시고, 아니 더 힘든 시험을 받으셨지만 모든 죄에서 승리하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승리하셨고, 그리스도를 도우셨던 능력, 그리스도가 의지했던 능력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義)가 나의 의(義)가 된다는 이 진리가 바로 늦은 비의 빗방울이다. 이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생애가 아니라 매일매일이 기적의 생애, 하늘의 능력이 매일 우리 생애 가운데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생애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의 지식과 동의로 주님은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대신하여 의를 이루시므로 “내 안에 계신 영광스러운 소망”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두 국면

 

이른 비로 오시는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늦은 비로 오시는 모본자: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의 역할만 있다면, 굳이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실 이유가 없다. 오히려 AD 31년 1월 14일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신의 광채를 발하면서 하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오지 않으셨다. 오늘날 신자들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한다. 하지만 구세주와 모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함께 경험돼야 한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능력의 구세주와, 믿음으로 온전한 순종과 승리의 생애를 사시므로 우리에게 모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으로 사시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여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모본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모두 만나야 한다.

 

 

이른 비에서 늦은 비로

 

늦은 비의 복음은 단계적으로 임한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먼저 이른 비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회개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을 매일 만나야 한다. 이 고백은 거듭남의 생애를 지속하게 하며,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영적인 성장을 하게 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의 지속적인 은혜 속에 거했던 자들이 늦은 비의 복음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허물 많고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 감격에, 용서해 주신 그 은혜에 반응해서 모본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이른 비의 경험이 늦은 비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구세주를 만난 사람이 모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신자의 신앙고백은 더 깊은 경험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는데, 죄인을 회심시켰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그분의 생애가 나의 생애가 되도록 하는 것이 늦은 비의 빗방울의 역할이다.
하나님의 신성과 아담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만나게 되고, 그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은혜의 능력을 통해 연약한 우리가 예수님이 사셨던 생애를 살게 된다. 이 경험을 지속한 성도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영광스러운 소망을 꿈꾸게 되고, 결국 영광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도 갖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비밀이 바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골 1:27)이다.
이른 비의 빗방울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구세주에서, 늦은 비의 빗방울인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모본자를 알게 되므로 복음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까지 경험하게 되므로 우리는 그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비로소 체험하게 된다. 이 체험을 통해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딤후 1:12)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만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것이므로 이 빗방울에 적셔진 사람들, 즉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늦은 비의 소나기에 참여하여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주인공들이 된다.

 

 

그리스도, 우리의 의

 

인류 역사의 최후에 온갖 핍박과 반대 속에서 진리를 전파하는 능력을 위해 약속하신 늦은 비의 소나기와 별개로 지금도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의의 복음으로 늦은 비의 빗방울은 떨어지고 있다. 의는 관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롭고 온전하시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모시게 되면 경건의 비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 아니라 의롭게 살 수 있게 만드신다. 얼마나 놀라운 복음이며, 놀라운 약속인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주제는 마지막 시대를 사는 백성들에게 반드시 이해되고 경험되어야 하는 지극히 소중한 진리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축복들은 세상 끝까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한편, 곡식이 여물고 알곡으로 추수되기 위해선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사역의 국면이 우리의 신앙 초기에 필요하며, 두 사역의 국면이 거룩한 생활을 향해 전진하는 매 발걸음마다 필요하며, 예수님의 두 국면이 마지막 복음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의롭게 만드는 복음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해 보도록 하자. 답은 한 가지다.
1) 늦은 비의 소나기를 오게 하는 늦은 비의 빗방울은 무엇인가?
2) 온 땅을 환하게 할 늦은 비의 복음은 무엇인가?
3) 그리스도의 의(義)에 대한 계시는 무엇인가?
4)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5) 하나님의 비밀, 경건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에 한 가지 답은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타락한 인성을 쓰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기 위해, 예수의 증인을 만들기 위해, 지극히 소중한 복음을 늦은 비의 빗방울로 인류 역사 끝에 사는 우리에게 주셨다. 바로 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모든 죄에 대한 승리가 가능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침례 요한이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이 늦은 비의 빗방울이 늦은 비의 소나기를 받을 수 있게 우리를 준비시키는 의의 복음이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순종의 생애를 사셨으므로 “그리스도의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이 늦은 비의 소나기를 부르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마지막 시대에 반드시 이해되어야 하고 또한 전파되어야 하는 매우 소중한 진리이다. 늦은 비와 계시록 18장의 천사는 우리의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에 밀접히 연관돼 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순종의 모본이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할 능력을 주신다는 이 복음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백성을 준비시키는 복음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놀라운 능력, 즉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면서 살게 하는 이 능력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다. 이 놀라운 경건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것이 우리 안의 가장 큰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어 예수의 증인을 준비시키고, 이 복음으로 세상의 복음 사역이 완수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사도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라고 권면한다. 인간이 되셔서 고난과 시험을 통해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인간이었다는데 의심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분께 다가와 그분의 팔을 꼬집으며, “당신 진짜 인간이요, 아니면 허깨비요?”라고 물은 적이 없었다. 그분을 직접 보고 알고 지냈던 자들은 그분의 인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 교부시대에 그분은 인간 이상의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논쟁하기도 했다. 점차 신학이 오염되고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예수님께 대한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분이 죄를 승리하고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신 것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우리 연약한 인간은 할 수 없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기독교에 자리 잡게 되었다.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 되심을 성경이 강조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이 깨달아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요, 승리의 원천이고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할까 봐 두렵다. 신성의 개념이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쳐, 그분의 시험은 이미 계획된 것이고 그분의 봉사도 예정되고 보증된 것이며 심지어 십자가도 미리 작정된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입으로는 예수님의 인성을 시인한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능력과 특권으로 사신 슈퍼맨 같은 존재로 받아들였다.
신학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예수님의 투쟁과 시험과 위험의 실재성, 이 모든 것이 희석되었다. 오늘날 예수님은 힌두교의 크리슈나처럼, 사람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자신을 우주의 주인으로 뒤바꾸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우리와 예수님의 친밀성은 없어졌다. 그분은 놀라운 분이긴 하지만 저 멀리 떨어져 다른 세상에 계신 분이 되고 말았다. 위대하고 능력 있고 지혜롭고 높으신 분이지만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우리는 성경의 원래 시각을 다시 회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의존적이고, 기도할 필요가 있고, 탄원하고, 통곡하고 고민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형제라고 하니까, 우리와 동급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다. 우리를 지으신 분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형제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기가 막힌 사랑의 얘기다. 아버지이면서 형제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러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분

 

예수님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분이다. 모든 일에 인간들과 같이 되신 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슬픔과 시련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인간을 위하여 시험을 당하시고 또 이기셨기 때문에!
본인은 죄가 없었지만 인간의 죄와 수치와 죄의 무거운 짐을 지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대언자와 중보자가 되실 수 있다.
이것은 죄의 유혹과 시험을 당해 몸부림치는 영혼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인성을 쓰셔서 우리 인간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대언자가 될 자격을 갖추신,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셔서 몸으로 아시는 우리의 형제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지금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고 계신다. 예수님의 피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모든 죄악을 씻기시고 용서하신다. 예수님은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 처한 당신의 자녀들을 잊지 않으신다. 시험과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낙심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보시고 위하여 기도하신다.
신의 입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으로 어떻게 사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닮자”라고 할 때 예수님을 올바로 봐야 닮을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읽고, 주님께 기도하고 그리고 인간으로 사신 그분의 삶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보게 된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을 살게 된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사업의 실패, 방황하는 자녀들, 직장에서의 고달픔, 부부간의 갈등…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들에게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 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거기서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 들어도 어린아이로 보인다. “얘야 길조심해라, 차조심해라, 우산 챙겨라, 밥은 잘 먹냐?”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70대 노인이 50대 자식이랑 서울에 갈 일이 있었다. 기차 매표소에서 “어른 표 하나랑 아이 표 하나 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설날 아침, 마루에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이 마주 앉아 있었다. 마침 창가에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물었다. “얘야 저게 뭐냐?” “아버지, 까치예요.” “그래 오냐 고맙다.” 두 번째 또 물었다. “얘야 저게 뭐냐?” 아들은 툴툴거리며 “금방 까치라고 했잖아요!” “오냐 고맙다.” 세 번째 또 잊어버리고 또 물었다. “얘야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을 잔뜩 섞어 “금방 까치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못 알아먹어요?”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는 너무너무 서러워서 방으로 들어가서 옛날 일기장을 꺼내 왔다. 그 일기장은 서른세 살 때 쓴 일기장이다. 밖에 나와서 아들 보고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 일기장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세 살짜리 아들과 마루에 앉아있었다. 마침 창가에 까치가 날아왔다. 아들이 물었다. 아빠 저게 뭐예요? 얘야 까치란다. 아들은 연거푸 스물세 번을 물었다. 나는 스물세 번을 까치라고 답하면서 내 마음이 왜 이리 즐거운지 몰랐다. 사랑하는 아들을 너무 귀여워서 안아주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세 번 물었을 때 자식은 화를 냈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스물세 번 질문했어도, 부모는 마냥 그 자식이 사랑스럽다. 이것이 자녀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이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인간으로 오신 부모님! 우리와 형제가 되신 예수님!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을 때, 부모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자녀가 되자.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하늘과 연결시켜주는 황금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 그 엄청난 실재를 경험하고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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