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재림 운동의 태동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19세기 초의 유럽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부터 1840년대까지의 유럽은 대 변혁기였다. 역사 교과서들은 이 기간을 현대의 기점으로 잡고 있는데, 이때 유럽의 지도는 나폴레옹의 15년에 걸친 전쟁에 의해 계속 변경되었고, 나폴레옹 정권이 무너진 뒤 전쟁으로 복잡해진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15년 6월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의 주도로 빈 체제(Wiener System)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는데, 빈 체제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말살하고 옛 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폐위된 왕이나 왕조는 모두 부활되었으며, 자유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억압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 파괴되었던 로마 카톨릭도 서서히 영향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빈 체제에 대한 저항은 1820년대 초부터 유럽 각국에서 나타났다. 독일의 대학생들은 학생조합을 결성하여 자유를 향한 운동에 앞장섰다. 메테르니히는 학생조합을 해산시키고, 대학에 감독관을 파견하여 교수와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등 탄압을 강화했다. 무력으로 진압하면 할수록, 자유를 향한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는데, 19세기 전반부는 노동자들의 결집으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 같은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등은 모두 빈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이정표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은 유럽 민중의 자유에 대한 욕구는 여러 혁명을 통해 빈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19세기 초반은 구 질서의 붕괴와 신 질서의 수립이 서로 교차하는 대 변동의 기간으로서 구 질서의 붕괴에 따르는 안도와 비애 그리고 새로운 질서 수립에 따르는 기대와 불안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사건들과 성경의 예언들을 부지런히 대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인 재림 운동
AD 31년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서 천사들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한 약속과 함께 신약의 기자들이 300회 이상이나 언급한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았고, 따라서 재림신앙은 오리겐(Origenes)과 어거스틴(Augustinus) 등에 의해 점차 영적인 의미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플로라의 요아킴(Joachim of Flore)과 같은 학자가 다니엘과 계시록의 예언에 비추어 재림의 징조를 찾는 노력을 보인 일이 있었지만, 임박한 재림신앙이 다시 크게 대두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재림은 실현되지 않았고, 이로써 18세기 초부터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재림을 영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다니엘 휘트비(Daniel Whitby)는 예수님의 영적인 재림 이후에 개신교, 카톨릭, 유대인, 무슬림들이 완전히 기독교 신앙으로 연합해서 복천년 기간이 이를 것이며, 그 후에 예수님의 실제적인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체로 이러한 사상이 1750년대까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개신교 세계의 종말론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179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교황권을 폐위시키고 교황 피우스 6세를 포로로 잡아가면서 다니엘서에 예언된 1260일(단 7:25)과 2300주야(단 8:14) 같은 성경 예언 기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종말론의 대변혁이 이르러 왔다. 1800년대의 많은 성경 신학자들은 1260년의 기간이 교황이 세계를 지배했던 전성기로 보았고, 이제 교황이 권세를 누리던 시대가 끝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예언적인 관심은 드디어 성경 상 가장 긴 예언 기간인 2300주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 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문제를 거의 무시해 왔거나, 아니면 아득한 먼 미래의 사건으로 돌려놓고 있었지만, 18~19세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유럽, 남미, 아시아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1710년경 독일의 요한 벵겔(Johann Bengel, 1687~1752)은 다니엘 8장의 2300주야 예언이 1836년에 끝나며 그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재림에 대한 벵겔의 강조는 유럽지역, 곧 독일, 러시아, 프랑스,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등에서 경건주의자들과 요한 웨슬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어린이들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재림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약 50년 후 1768년 독일 칼빈파 목사인 요한 페트리(Johann Petri)에 의해 다니엘 9장의 70주일이 다니엘 8장 2300주야의 기간에 포함되며 2300주야는 1847년에 끝난다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또 거의 같은 시기에 아일랜드의 한스 우드(Hans Wood)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790년대에 예수회에서 추방당한 마누엘 라쿤자(Manuel de Lacunza)의 저서 “VENIDA DEL MESIAS(영광과 위엄 중에 임하는 메시아의 재림)”이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 상당한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천년왕국이 먼저 있고 그다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복천년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라쿤자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 난 후에 천년기가 있다는 그의 주장이 카톨릭의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을 염려하여 환 요사팟 벤 에즈라(Juan Josafat Ben-Ezra)라는 익명으로 자신의 저서를 배포시켰다. 이후 1812년 스페인에서 정식 출판되자, 삽시간에 남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 선풍적인 관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금서 처분을 받았고, 1824년에는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어떤 언어로든지 출판이 금지됐다.
영국에서는 이미 나폴레옹 시대부터 성직자들 사이에 일기 시작했던 예언 연구 운동이 라쿤자의 저서로 말미암아 더욱 고조되었다. 1802년 런던에서 출간되기 시작한 성공회 잡지 “크리스천 옵서버”(The Christian Observer)”에서도 2300주야와 1260년에 대한 예언 해석을 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크리스천 옵서버의 주필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커닝헤임(William Cunninghame)은 성경연대학과 예언에 관해 21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요한계시록 14장 6,7절의 첫째 천사가 복음을 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곧 둘째와 셋째 천사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1867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792~1834) 목사가 재림을 전파하자 그의 연구에 동조하여 700여 명의 영국 성공회 목회자들이 재림의 임박성을 전파했다.
드루먼드 저택에서 다수의 목사들과 성경학도들이 1주일 동안 집중적인 예언 연구를 개최했는데, 그 결과 참석자 전원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동의했고 시기를 정하기 시작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에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계 그리스도인 선교사 요셉 볼프(Joseph Wolff, 1795~1862)가 있었는데, 볼프는 14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1821년부터 아프리카,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페르시아 그리고 히말라야와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유대인, 무슬림, 힌두교, 조로아스터 교도들에게 재림을 전했다. 1837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미 상원에 초빙되어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 외 영국에서 재림을 전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브리스톨 고아원의 원장인 조지 뮬러(George Muller)가 있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경건한 목사요 교사인 가우센(Louis Gaussen, 1790~1863)이 일어나 재림의 임박을 강조하고 다니엘서의 예언을 널리 가르쳤다. 라인 선교협회(Rhenish Missionary Society)의 서기였고 6권의 성경주석을 편집한 독일의 요한 리히터(Johann Richter)와 레오나르드 켈버(Leornard Kelber), 요한 루츠(Johann Lutz) 등에 의해 재림에 대한 관심이 촉구됐다. 임박한 재림을 경고하는 예언 집회로 전 유럽에 영적 부흥이 뒤따랐다. 스웨덴에서는 국교회 목사들은 주의 재림에 무관심했던 반면, 평신도들이 숲속에서 집회를 하면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 이러한 집회로 허다한 평신도 설교자들이 체포, 구금,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특별히 1842, 1843년 기간에는 6세 어린아이들을 비롯한 많은 청소년이 재림을 전하면서 회개를 촉구해 깊은 충격을 주고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전할 때는 그들의 목소리가 매우 엄숙하게 선포되었다. 호주에서는 플레이포드(Thomas Playford), 인도에서는 드루먼드 저택 집회에 참석했던 윌슨(Wilson)에 의해 재림신앙이 개척됐다.
2300주야 예언 중에서 앞부분인 70이레 490년 예언은 한 치의 착오 없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BC 457년에 시작한 2300주야 예언은 AD 27년 예수님의 침례로 공생애 시작을 예언했고, 3년 반 후인 AD 31년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정확히 예언했고, 그 후 3년 반 후 AD 34년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임으로 유대인을 위한 490년의 은혜의 시기가 끝나고 드디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2300년 기간에 교황권의 1260년간의 통치와 1798년 교황권이 무너지는 예언이 역사로 성취됐다. 그렇다면 2300주야 예언이 끝나는 1844년 즈음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이 스케줄을 여러 사람이 연구했다. 나하웬디라는 사람은 9세기 벌써 알았고, 루터도 종교개혁 당시 300여 년 후에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했다. 뉴턴은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로서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26세에 캠브리지 대학 교수, 천체관측용 반사망원경 발명, 역학의 체계를 세워 물리학의 전기를 마련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뉴턴이 다니엘서의 2300주야 예언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니 1844년에 마쳐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독일의 존피틀, 한스우드, 장로교 목사였던 데이비스 등 많은 사람의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다니엘서의 2300주야 예언은 1844년을 지목하면서 결론 맺는데, 그것은 종결이라기보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자연계에 나타난 징조들
때맞춰 당시 10년 사이에 자연계에서 나타난 몇 가지 현상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임박한 종말의 징조로 해석됐다. 재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마태복음 24장 21절의 “큰 환난”을 이교 로마와 교황 로마라는 두 가증한 세력 아래서 겪은 교회의 고통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이제 “큰 환난” 다음에 일어날 것으로 되어 있는 마태복음 24장 29절의 천체의 징조로 집중하게 되었다. 때마침 1780년 5월 19일 북미의 동부 지역에 해와 달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이른바 “암흑일” 사태는 마태복음 24:29, 계시록 6:12, 요엘 2:31의 성취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마태복음 24:29, 계시록 6:12에 의하면 이 사건 다음에 나타날 사건은 별들이 떨어지는 사건이어야 한다. 그런데 1833년 11월 13일 서반구 일대에 장관을 이루는 유성우가 발생했고, 사람들은 이것을 마태복음 24장 29절의 성취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