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회개가 이루어지는 과정 [신앙기사 3부]

제3부 용서와 회개가 이루어지는 과정

 

 

탕자의 고백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다. 사실 그분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엄청난 사랑인데, 인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비유로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해 주셨다. 그중 하나가 집 나간 탕자의 이야기다(눅 15:11~24).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먼 나라에 갔다. 물론 지역적으로 먼 나라이기도 하겠지만, 영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곳,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 곳,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뜻한다. 그것은 거리가 멀거나 가깝거나 상관할 것이 없다. 오늘날 한집에 살면서도 대화가 단절되고, 소통이 단절되고, 마음이 단절되고 먼 나라에 사는 것 같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 주님과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주님의 뜻이 내 인생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집 나간 탕자와 다를 바 없다.
탕자가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허비하는 동안 그 흔하던 친구는 돈이 없어지는 것과 함께 다 떠나가고 외롭고 가난한 삶이 되었다. 먹여주는 사람도 없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 구차한 삶을 그래도 유지하기 위하여 들에 나가 돼지를 돌보게 되었다. 그는 돼지와 함께 자고 돼지의 음식을 돼지와 함께 먹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의 비참한 모습이다. 어느 날 돼지로 변해 있는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그 아들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18)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너무나 좁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9)라고 말하기로 작정한다. 허약해져 비틀거리며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몸으로 결연히 자기의 집으로 길을 떠난 탕자, 그의 가련한 신세가 그의 교만을 꺾었다. 본래 아들의 신분이었던 그가 종의 직분을 얻으려고 급히 달려간다.

 

 

회개로 인도하는 아버지의 사랑

 

탕자의 아버지는 그토록 잘못한 아들이라도 역시 아들로 생각했고, 아들이 집을 나가는 날부터 한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고 염려하며 어떤 형편으로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모든 허물을 이미 용서해 놓고 있었다. 아들은 돌아와 이 넉넉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자기 것으로 받으면 되었다. 아버지는 날마다 대문에 나와서 아들이 오는지 살피고 또 살폈다. 사실 아들이 돈을 달라고 요청하는 날부터 아버지는 근심에 싸였다. 죄는 아버지를 근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을 그렇게 고통당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죄가 아니겠는가?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직 상거가 먼데도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다. 사랑은 눈을 밝게 한다.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의 목을 오랫동안 꼭 안고 있었다.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를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었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주었다. 이 얼마나 큰사랑인가! 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의 회개를 열매 맺게 했다(롬 2:4).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한다.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는, 죄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언제나 사랑으로 용납하여 아들의 신분으로 대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에 이끌리어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되 완전히 잊어버리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을 환대하여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맞아 기쁜 잔치를 벌이기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 즐거운 잔치를 위하여 송아지는 생명을 바쳤다. 스스로 도망가서 짐승처럼 되어버린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맞아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게 하고 기쁜 연회를 베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이다.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이고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즉시 자기들이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다. 그때 먼저 아담을 찾아와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먼저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가 아담을 회개로 이끌었다.
오늘날 아담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아담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 숨었는데, 오늘날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않고, 죽는 것도 그저 생물학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인생은 죽어가는 인생이고, 썩어가는 인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강권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우리를 위해 대속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회개로 이끄시고 강권할 때, 우리는 그 이끄심에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 사실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회개를 전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복음의 시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외친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특별히 하신 말씀이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심판의 날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 이 오래 참으심을 아무 심판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행하고 살면 망할 수밖에 없다. “주의 약속이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이러므로 죄인에게 회개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회개는 죄인 된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만 죄인이 회개할 수 있도록 그 조건을 만들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죄인을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이고,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보증 – 십자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겠다는 보증이 없으면, 죄인이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죄인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용서하겠다는 보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우주적인 용서의 선포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표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땅에서 들리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들리는 것을 뜻한다(요 3:14참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죽음에 매인 죄인을 이끌어 회개케 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길이 완전히 마련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은 이 일을 성령으로 이루게 하셨다. 누구든지 성령의 권고를 무시하고 거절하면 회개할 수 없게 된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이 말은 회개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권고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주적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용서의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여도, 죄인이 이 권고를 거절하는 것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며, 결국 이 용서를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으므로 용서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하늘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 수 없는 것이다. 너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늘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한 자리는 하늘에 없다.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 하리라”(마 12:31,32).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무슨 죄인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곧 회개하지 않는 것이며,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계속 저항하면서 자기의 길을 가다가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지점까지 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께서 그를 위해 하실 일이 없게 된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인의 회개가 있기 전에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서에 근거하여 우리는 회개할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용서의 길을 마련하셨다.

 

 

준비되어 있는 용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허물을 가지고 주께 나가면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씻어 주신다. 이 피는 이미 준비된 용서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회개하므로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이 풀려서 용서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지 않으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용서와 구원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죗값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갚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함으로 그 용서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결코 정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라는 단서가 있으니 이제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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