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 275호 매일의 말씀

열한시 275호 매일의 말씀

 

1.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다윗이 블레셋 왕을 위하여 동포들과 싸움을 해야 하는 고민에 빠졌을 때, 블레셋 방백들이 아기스에게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삼상 29:3)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동맹자들을 놓기 싫어서 아기스는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삼상 29:3)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방백들은 분노하여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삼상 29:4)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 높은 용사 골리앗이 다윗에게 살육을 당하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둔 그때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자기의 백성을 대적하여 싸우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전쟁의 벽두에 그가 자기 백성의 편에 가담하면 사울의 전 군대보다 더 블레셋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아기스는 그들의 의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윗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지 말라”(삼상 29:7)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본심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삼상 29:8)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가 행한 비열한 기만들이 여호와의 종으로서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아기스의 대답을 듣고 그의 온 마음은 수치와 후회로 떨었습니다. 왕은 말하기를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쟁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얽매였던 덫이 풀리고 그는 놓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2. 환난 때 필요한 믿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3일 동안을 여행한 후에 다윗과 그의 부하 6백 명의 무리는 블레셋 땅에서의 그들의 거처인 시글락에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폐허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아말렉 사람들이 전에 다윗이 그들의 영토를 침입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 방비가 없는 틈을 타서 성읍을 기습하여 점령하고 약탈과 방화를 한 후에 많은 노획물과 함께 모든 부녀와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떠나 버렸습니다.
공포와 경악으로 말문이 막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삼상 30:4)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다시 한번 자신을 블레셋 사람 중에 처하게 한 그의 믿음의 부족에 대한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원수들 중에서 얻을 수 있는 안전이 어떠한 것인지를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거기에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재난의 원인을 다윗에게 돌리며 항의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을 공격함으로 인하여 그들의 복수심을 자극했었고 또 그의 원수들 중에서의 안전을 너무나 믿었기 때문에 성읍에 대한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떠났었던 것입니다. 슬픔과 분노로 미치게 된 다윗의 군사들은 어떤 과격한 조치도 서슴지 않을 태세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 다윗에게까지 돌로 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인간의 지지로부터 끊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애착을 가졌던 모든 것이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울은 그를 그의 나라에서 추방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진영에서 몰아냈고 아말렉 사람은 그의 성읍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은 포로가 되고 그의 친한 친구들은 단결하여 그를 대적하고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이 같은 극도의 궁지에 몰린 이 시간에 다윗은 그의 마음을 이 고통스러운 환경에 집착하지 않고 그 대신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열렬히 바라보았습니다.

 

3. 다윗의 믿음이 회복됨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다윗이 다사다난했던 과거의 생애를 회고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버리신 적이 있었던가? 그의 마음은 수많은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들을 회상하고 활기를 띠었습니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불만과 조급함으로 그들의 고통을 배나 더 크게 하였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슬퍼해야 할 이유가 더 컸을지라도 스스로 꿋꿋함을 드러내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라는 것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비록 다윗 자신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분별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다윗에게 어떻게 할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을 불러와서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좇아가면 미치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는 “좇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삼상 30:8)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의 말을 듣고서야 슬픔과 분노의 소동은 그쳤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도주하는 원수를 추격하기 위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들의 진군이 너무나 빨랐으므로 지중해로 흘러가는 가사 가까이에 있는 브솔 시내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리 중 2백 명은 기진맥진하여 뒤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함께 남아 있는 4백인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앞으로 전진하였습니다.
진군하다가 그들은 피곤하고 배가 고파 죽어가는 애굽인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 노예는 음식과 물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는 침략군에 속한 한 아말렉 사람의 종으로 잔인한 그의 주인이 그를 죽도록 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침략하여 약탈한 이야기를 모두 한 후에 그를 죽이거나 그의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 다윗의 무리를 그들의 원수의 진으로 인도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4.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사 27:8)

아말렉 진영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적군이 환락에 도취되어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승리한 대군은 큰 축연을 배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삼상 30:16). 즉시 공격 명령이 내려 추격자들은 그들의 원수를 맹렬히 공격하였습니다. 아말렉 사람들은 몹시 놀라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싸움은 그 온 밤과 다음날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전군이 거의 죽임을 당하고 4백 명의 무리만이 약대를 타고 도망했을 뿐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 왔”(삼상 30:18, 19)습니다.
이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영토를 침입했을 때 그는 수중에 떨어지는 거민은 모두 다 칼로 도륙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지하시는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말렉 사람들은 보복으로 시글락 백성을 모두 멸했을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은 많은 수효의 포로들을 고국으로 데려감으로 승리의 영광을 높이고 그 후에 노예로 팔기 위하여 그들을 살려 두기로 작정했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의식적으로 포로들을 해하지 않고 보호했다가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함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켰습니다.
이처럼 지상의 세력들은 모두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가장 강한 통치자에게, 또 가장 잔인한 압박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욥 38:1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의 세력을 깨뜨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멸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들을 바로잡아 보존하시려고 항상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 다윗의 탈취 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다윗을 비롯한 승리자들은 큰 기쁨으로 집으로 행진했습니다. 뒤에 남아 있던 저희 동료에게 이르자 4백인 중에 이기심이 많고 무법한 자들은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노획물을 나눠가질 몫이 없고 각자에게 아내와 자녀들만 돌려주는 것으로 넉넉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같은 배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삼상 30:23, 24)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해결되었고 명예스럽게 종군한 자는 누구나 실전에 참가한 자와 동등하게 노획물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 후에 이스라엘의 규례가 되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무리는 시글락에서 빼앗겼던 노획물을 모두 찾았을 뿐 아니라 아말렉 사람에게 속한 막대한 양 떼와 소떼를 사로잡았습니다. 이것들을 “다윗의 탈취한 것”(삼상 30:20)이라 불렀고 다윗은 시글락에 돌아와서 이 탈취물들을 그가 속한 유다 지파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습니다. 이 선물을 나누어 주므로 그가 그의 생명을 위하여 이리저리 도망하여 다닐 수밖에 없었을 때에 산들의 요새에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도와주던 이들을 모두 기억하였습니다. 쫓겨 다니던 피신자에게 매우 귀중하던 그들의 친절과 동정은 이와 같이 감사의 보답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시글락에서 폐허가 된 집들을 다시 재건하면서 저희가 아는 대로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 사이에 싸움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므로 그 전쟁의 소식을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연히 한 사자가 마을에 들어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삼하 1:2)었습니다. 그는 곧 다윗에게 나아가 그 앞에서 공손히 절하고 그를 강력한 군주로 인정하고 그가 그의 은총을 받고자 한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6.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다윗의 마음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다윗은 전쟁이 어찌 되었는지를 열심히 물었습니다. 도망하여 온 자는 사울의 패배와 죽음, 요나단의 죽음을 보고하였으나 그는 사실의 간단한 진술 그 이상을 말하였습니다. 다윗이 그의 무정한 박해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이 이방인은 자신이 왕의 살해자의 명예를 얻고자 했습니다. 자랑스러운 태도로 그 사람은 전쟁 중에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부상당하고 원수의 격렬한 추격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왕 자신의 요구를 듣고 그가 왕을 죽였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는 왕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는 이 소식이 크게 환영을 받고 그가 행한 일에 대하여 값진 상금이 주어지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였습니다.
무서운 소식의 처음 충격이 지나자 다윗은 스스로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그 이방인 사자를 생각했습니다. 두 번이나 사울은 다윗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를 죽이도록 요청을 받았을 때에 다윗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성별 된 사울을 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아말렉인은 그가 이스라엘 왕을 살해한 일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죽음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으므로 그에 대한 형벌은 곧 집행되었습니다.
사울의 죽음을 들은 다윗의 슬픔은 고상한 성질의 아량을 증명하는 진실하고도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원수의 멸망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나가지 못하게 막던 장애물이 제거되었으나 그는 그것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이름은 그와의 우정이 참으로 진실하고 참으로 무아적이었던 요나단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의 마음의 감회를 표현한 노래는 그의 민족과 후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배가 되었습니다.

 

7. 마침내 왕이 된 다윗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삼하 2:4)

사울의 죽음은 다윗을 유랑자가 되게 했던 위험들이 제거되므로 이제 다윗이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위하여 곡하는 기간이 끝났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헤브론은 브엘세바에서 북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장래의 예루살렘 터와의 중도에 있었습니다. 헤브론은 원래 아낙의 아비아르바의 성읍으로 기럇 아르바라 불리었으나 후에 마므레라 불리었고 이곳에 부조들의 장지 “막벨라 굴”이 있었습니다. 헤브론은 갈렙의 소유였었는데 이제는 유다의 제일 큰 성읍이었습니다. 헤브론은 비옥한 전원과 풍요로운 땅에 둘러싸여 있는 골짜기에 놓여 있었으며 팔레스틴의 가장 아름다운 포도원들이 감람원과 다른 과수들의 무수한 농원과 함께 헤브론 변두리에 있었습니다.
다윗과 6백 명의 무장한 군사들은 처자들과 함께 양 떼와 소떼를 거느리고 곧 헤브론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 무리들과 성읍에 들어갈 때에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환영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곧 다윗의 즉위식을 위한 준비를 하고 다윗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새로 왕위에 오른 군주 다윗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사울과 요나단의 명성에 대하여 그의 친절한 사려를 표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를 구출하여 명예로운 장례를 지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용감한 행위에 대하여 들은 다윗은 야베스에 사자를 보내어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삼하 2:5, 6)라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가 유다의 왕위에 오른 것을 통고하고 참으로 마음이 진실함을 나타낸 자들에게 신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8. 아브넬의 증오심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블레셋 사람은 사울의 나라를 괴롭히고 약하게 하려고 방랑 중에 있는 다윗과 친하였으므로 이제 저희가 전에 다윗에게 친절히 한 까닭으로 그의 권세의 확대는 마침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음모와 반역의 어두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은 반역자로서 왕위에 앉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으므로 불신이나 반대를 받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넬의 영향을 통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으로 추대되어 이스라엘에 다윗과 경쟁하는 다른 왕권이 세워짐으로 인해 다윗의 권위는 흔들릴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이스보셋은 연약하고 무능한 사울 집의 대표자인 반면에 다윗은 나라를 책임 질 수 있는 현저하게 뛰어난 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주모자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의 총사령관이었고 이스라엘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넬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도록 지명하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처럼 오랫동안 다윗을 추격한 고로 이제 그는 다윗이 사울의 다스리던 나라를 계승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브넬이 처한 상황은 그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했는데 그는 야심이 있고 절조가 없는 인물임이 드러났습니다. 아브넬은 사울 왕의 정신에 감화를 받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선택하신 자를 멸시하였습니다.
그가 진에서 잘 때에 다윗이 사울의 곁에서 물병과 왕의 창을 취한 그때에 그에게 가한 신랄한 비난으로 아브넬의 증오심은 증가하였습니다. 아브넬은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듣는 데서 다윗이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일 자니라”(삼상 26:15, 16)고 부르짖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였습니다.

 

9. 야망의 결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다윗의 이 신랄한 책망은 그의 가슴에 사무쳤고 그는 복수에 찬 그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분열시켜서 자기 자신을 높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 야망과 목적을 진전시키려고 죽은 왕가의 후계자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요나단을 사랑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죽은 후의 명성은 소중히 간직되었고 사울의 최초의 성공적인 전쟁을 군사들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용 가치가 있는 좋은 근거로 삼은 이 반역의 지도자는 그의 계획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단에서 멀리 떨어진 마하나임은 다윗과 블레셋 사람이 공격하기 어려운 곳으로 매우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에 왕의 도성으로 선택하고 여기에서 이스보셋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요단 동편에 있는 지파들만이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으나 마침내 유다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에 확대되었으며 2년 동안 사울의 아들은 격리된 수도에서 그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세를 온 이스라엘에 확대시키려고 계획한 아브넬은 침략 전쟁을 위하여 준비하였으나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 3:1).
마침내 악의와 야망으로 세워진 왕권은 반역으로 전복되었습니다. 약하고 무능한 이스보셋에 대하여 몹시 분노한 아브넬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다윗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의하였을 때, 그를 두려워한 왕이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용감하고 이름 높은 용사를 호의로 맞이한 것이 다윗의 군대의 총사령관 요압의 질투심을 자극하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전쟁 중에 아브넬이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인 까닭에 아브넬과 요압 사이는 혈원(血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아우의 죽음을 복수하고 장차 필적이 될 자를 제거할 기회를 본 요압은 비열하게 매복하였다가 아브넬을 살해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10. 진정한 리더십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 11)

이 반역적 습격에 대한 소식을 들은 다윗은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삼하 3:28, 29)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불안정한 상태와 살인자들 곧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그와 함께 범행하였으므로 그들의 권세와 지위를 고려하여 그 범죄를 공정히 처벌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공공연히 잔인하게 죽인 것에 대해 증오심을 나타냈습니다. 아브넬의 장사에는 백성의 존경이 함께 하였습니다. 군사들은 요압과 그들의 수령들과 함께 곡하는 예식에 참석하여 겉옷을 찢고 베옷을 입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왕은 장삿날에 금식함으로 그의 슬픔을 나타내고 상주처럼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다윗은 무덤에서 살인자들에게 신랄한 견책이 된 애가(哀歌)를 음독(音讀) 하였습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삼하 3:33, 34).
그의 큰 원수였던 자에 대한 다윗의 관대한 처사는 온 이스라엘의 신임과 칭송을 받았으며 “이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삼하 3:37). 그의 신임하는 모사들과 시종들의 비공식 회합에서 왕은 그 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가 원하는 바와 같이 살인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시인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보응에 맡기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 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삼하 3:38, 39).

 

11. 하나님의 섭리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4)

아브넬이 다윗에게 한 그의 제의와 진술에는 성실하였으나 그의 동기는 비열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명예를 얻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완고하게 하나님이 임명하신 왕에게 대항했습니다. 그가 그처럼 오랫동안 종사하던 일을 버리고 그의 직무 중에 최고의 지위를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간 것은 울분과 상한 자존심과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의 목적을 성공시켰다면 그의 재능과 야심과 그의 큰 감화력과 경건의 결핍은 다윗의 왕위와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태롭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삼하 4:1). 나라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이스보셋은 뒤따른 반역으로 기우는 왕권이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보셋은 그의 두 군장들에 의하여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그들은 그의 목을 잘라 급히 유다 왕에게로 가져가 저희가 왕의 총애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저희 범죄에 대한 유혈의 증거물을 가지고 다윗의 앞에 나타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삼하 4:8)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왕위를 세워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셨으므로 다윗은 반역자의 도움으로 자기의 권세를 확립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 살인자들에게 사울을 죽인 것을 자랑하던 자에게 임했던 운명을 말하고 첨가하여 말하기를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삼하 4:11 ,12).

 

12. 다윗 왕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이스보셋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다윗이 온 지파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삼하 5:3).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그가 왕위에 오를 길이 열렸습니다. 다윗은 개인의 야망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자기에게 이르러 온 영예를 구하지 않았던 까닭이었습니다.
아론과 레위인의 후손 8천 명 이상이 다윗을 시중들었습니다. 백성들의 감정의 변화는 현저했고 결정적이었습니다. 변혁은 저희가 행하고 있는 큰 사업에 적합하도록 조용하고 위엄을 갖추어 진행되었습니다. 전에 사울의 신하였던 거의 5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헤브론과 그 주위에 운집했습니다. 모든 들과 골짜기는 군중들로 생기가 돌았습니다. 즉위식 시간이 되자 사울의 궁정에서 쫓겨나 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산과 들과 토굴로 도망하여 다니던 다윗이 인간이 동포에게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받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성스러운 직무를 행할 때에 입는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과 장로들, 번쩍이는 창을 들고 투구를 쓴 장교와 병사들, 먼 곳에서 온 외국인들이 택함을 받은 왕의 즉위식을 보려고 서 있었습니다. 다윗은 임금의 의복으로 성장(盛裝) 하고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에 거룩한 기름을 부었으니 이는 사무엘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왕의 즉위식에서 행해질 것을 예표한 까닭이었습니다. 시간이 이르러 다윗은 엄숙한 의식에 의하여 하나님의 대리자의 직무에 성별 되었으며 그의 손에는 홀이 쥐어졌습니다. 의로 통치하겠다는 그의 서약이 기록되었고 백성들은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왕관이 씌어지고 대관식은 끝났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참을성 있게 기다린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았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13. 예루살렘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수 15:63)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의 왕국의 수도를 위하여 보다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고 헤브론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한 장소를 장래 왕국의 수도로 선택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는 이곳을 살렘이라 불렀습니다. 이 부근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충성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이곳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8백 년 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은 나라의 중앙부에 있는 높은 지대였고 주위의 산들에 둘러싸인 요지였습니다. 이곳은 베냐민과 유다 사이의 변경 지대로써 에브라임에 아주 접근해 있었으며, 다른 지파에 가기 쉬운 곳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장소를 얻기 위하여 시온산과 모리아산 위에 있는 요새에 살고 있는 가나안 거민의 남은 자들을 추방해야 하였습니다. 이 요새는 여부스라 불리었고 여러 세기 동안 여부스는 난공 불락의 성으로 보였으나 마침내 요압이 지휘하는 히브리인들에게 포위되어 함락되었고 요압은 그의 용맹의 보상으로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여부스는 이제 이스라엘 국가의 수도가 되고 이교 이름이었던 여부스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두로 성읍의 왕 히람이 이스라엘 왕과 동맹할 생각으로 다윗에게 예루살렘 궁전을 건축하는 사업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건축가와 직공들과 값진 목재와 백향목과 다른 귀중한 재료들을 실은 긴 배의 행렬이 두로에서 파송된 사신들을 동행하였습니다. 다윗의 영도 아래 이스라엘 나라가 연합되고 그 힘이 점점 강해지고 여부스의 요새를 탈취하며 두로 왕 히람과 동맹한 일 등이 블레셋 사람의 적개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강한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 나라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다윗은 군사들과 함께 시온의 요새로 물러나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14. 승리

“대저 여호와께서…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사 28:21)

다윗은 곧 원수를 향해 진군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그들로부터 저희 승리를 확증해 줄줄 믿고 가져왔던 신들을 탈취했습니다. 패배의 굴욕에 격분한 블레셋 사람들은 더욱 많은 군대를 모아 다시 싸우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때에 여호와가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삼하 5:23, 24)셨습니다. 만일 다윗이 사울처럼 자신의 길을 택하였더라면 그에게 성공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바와 같이 행하여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쳐서 기브온에서부터 게셀까지 이르렀더니 다윗의 명성이 열국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열국으로 저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대상 14:16, 17).
이제 다윗은 보좌를 굳게 세우고 외적(外敵)의 침입에서 해방되었으므로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목적 곧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는 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머물러 있었으며 법궤를 나라의 수도로 옮겨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로 영화롭게 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3만 명을 소집했습니다. 이는 법궤를 운반하는 일을 매우 기쁘고 당당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부름에 즐거이 응답했고 대제사장은 성직에 있는 그의 형제와 방백들과 각 지파의 지도자들과 함께 기럇여아림에 모였습니다. 다윗은 거룩한 열심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실은 다음 아비나답의 두 아들이 법궤를 수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쁨의 환성을 외치고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며 악기 소리의 곡조에 맞추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법궤 뒤를 따랐으며 엄숙한 기쁨으로 거대한 행렬이 산과 골짜기를 따라 나 있는 거룩한 성읍을 향해 가는 길을 메웠습니다.

 

15. 웃사의 죽음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민 4:15)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무리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경솔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삼하 6:6, 7). 기뻐하던 군중들은 돌연히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윗은 깜짝 놀라 몹시 당황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는 법궤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무서운 형벌을 내려 기쁨의 때를 슬픔과 애통의 시간이 되게 하셨는가? 다윗은 법궤를 자기의 곁에 모시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법궤를 지금 있는 그곳에 두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가까운 곳에 법궤를 안치할 장소를 발견했으니 그곳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이었습니다.
웃사의 죽음은 가장 명확한 명령을 범한 데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법궤의 운송에 관한 특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 외에는 아무도 법궤를 만지거나 덮여 있지 않은 법궤를 바라보아서도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는 고핫 자손이 멜 것이지만 성물은 만지지 말라고 분명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덮어야 했고 그 후에 고핫 사람들은 법궤 양면 고리에 꿰어 있는 채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채를 결코 빼지 말아야 했습니다. 성막의 휘장과 널판과 기둥을 맡은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에게 모세는 그들에게 맡겨진 것을 운송할 수레와 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민 7:9). 그런데 기럇여아림에서 법궤를 옮겨올 때에는 이 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무시했고, 거기에 대해 아무런 핑계도 할 수 없었습니다.

 

16. 웃사의 죽음이 주는 교훈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삼하 6:11)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성스러운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즐거움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일에 종사했으나 여호와께서는 그 봉사를 받으실 수 없었으니 이는 그분의 명령과 일치하게 그 일이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에 수레에 실었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행한 수고를 가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희 수중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저희가 이 명령을 게을리한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웃사에게는 오만이란 큰 죄가 놓였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으로 율법의 신성성에 대한 그의 감각이 둔화되어 웃사는 고백하지 않은 죄를 가진 채 하나님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에 손을 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적 순종이나 조심성 없는 태도로 그분의 계명을 취급하는 일을 가납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웃사를 벌하심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분의 요구에 엄격히 유의해야 할 중요성을 명심토록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한 사람의 죽음이 백성들을 회개토록 인도하여 무수한 사람에게 내릴 형벌을 미리 예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보고 자기의 어떤 죄가 그에게 형벌을 가져오지 않을까 하여 법궤를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은 기뻐 뛰면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증으로서 거룩한 상징을 환영하게 됨에 따라온 이스라엘의 주의가 이제 가드 사람과 그 권속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대한 하나님의 견책은 효력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가 전에 결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율법의 신성성과 엄격한 순종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내린 은총은 다윗에게 다시 법궤는 그와 그의 백성에게 축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17. 경배의 마음가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석 달 후에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이번에는 여호와의 명을 일일이 세심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몹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다시 국민의 지도자들이 소집되었고 큰 무리가 가드 사람의 집 주위에 모였습니다. 이제 거룩히 임명된 자들이 법궤를 경건하게 주의를 기울여 저들의 어깨에 메었고 군중들은 대열에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큰 행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여섯 걸음을 걸은 후에 나팔을 불어 행진을 멈추게 하고 다윗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제 기쁨이 떨림과 두려움을 대신했습니다. 다윗은 군주의 예복을 벗고 제사장들이 입은 것과 같은 수수한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그가 제사장의 직능을 받았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제사장 외에 다른 사람들도 에봇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예식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신하들과 함께 낮은 자리에 있고자 한 것은 그날에 여호와께서 경배의 유일한 대상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긴 행렬은 움직였고 수금과 소고와 양금과 제금의 주악 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노래 곡조와 어울려서 하늘로 퍼져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즐거움으로 노래의 박자에 장단을 맞추어 “여호와 앞에서…춤추”(삼하 6:14)었습니다. 그러나 연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경건한 기쁨으로 춤을 춘 사실을 빙자하여 현대에 유행하는 댄스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령한 사물에 대한 사랑을 약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경향으로 흐르는 오락을 그리스도인들은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궤를 옮길 때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와 춤은 현대 댄스의 유흥과는 전혀 닮은 점이 없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성호를 높이는 것이었고 후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게 한 사탄의 흉계인 것입니다.

 

18. 시편 24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승리의 행렬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의 거룩한 상징인 법궤를 따라 수도(首都)에 접근하였을 때, 성벽의 파수꾼들에게 거룩한 성읍의 문을 활짝 열도록 요구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7). 한 무리의 노래하는 자와 기악하는 자가 응답하기를, “영광의 왕이 뉘시뇨” 다른 무리가 화답하기를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 24:8). 그 후 다수의 음성이 합하여 승리의 합창이 드높게 울려 퍼졌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9) 다시 “영광의 왕이 뉘시뇨”라는 기쁨의 질문이 들렸습니다. “많은 물소리 같은” 큰 군중의 음성은 환희에 넘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시 24:10).
그다음에 문들이 활짝 열리고 행렬이 안으로 들어갔으며, 법궤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준비된 장막에 안치되었습니다. 이 성스러운 법궤 앞에 제단을 쌓고 화목제와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연기와 향연이 이스라엘의 찬양과 기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예식이 끝나자 왕은 친히 그의 백성에게 축복을 선언하고 왕의 하사물(下賜物)로 떡과 포도주를 주어 백성의 기력을 돋우었습니다.
각 지파는 모두 다윗의 치세의 특색을 나타낸 가장 신성한 사건을 축하하는 이 예식에 대표자를 보내어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거룩한 영감의 성령이 왕에게 임하였고 넘어가는 마지막 태양 광선이 성막을 거룩한 빛으로 가득 채울 때에 왕의 마음은 그분의 임재의 복된 상징이 이제 이스라엘의 보좌와 매우 가까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시편 24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순결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기본 조건이며 오직 마음이 순결한 사람들만이 하늘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노래였습니다.

 

19. 미갈과 다윗의 차이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으리라”(호 9:11)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궁궐로 향했을 때,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정신과는 현저히 다른 정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삼하 6:16). 그 여인은 심히 흥분하여 “이스라엘의 왕이…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다윗은 미갈이 멸시하고 욕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 예배임을 느끼고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 22)고 엄중히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견책이 첨가되어 그의 교만과 자만심 때문에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삼하 6:23)었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데 수반된 엄숙한 의식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래 지속되는 깊은 감명을 주어 성소 봉사에 대한 저들의 깊은 관심을 환기시키고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열심을 새로 불타오르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능력이 미치는 온갖 방법으로 이 감명을 깊게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종교적 예배의 필수적 부분으로 삼았고, 다윗은 시편을 만들어 성소 봉사에서 제사장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이 연중 절기에 성소를 향하여 여행할 때에 역시 부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애쓴 감화는 멀리까지 미쳤고 온 나라를 우상숭배에서 해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인근의 백성들도 이스라엘의 번영을 바라보고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그와 같은 위대한 일을 행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 성전 건축의 서막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2:8)

모세가 지은 성막은 법궤를 제외하고는 성소 봉사에 속한 모든 것과 함께 여전히 기브아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그 나라의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하여 궁궐을 지은 후에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장막 속에 두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위하여 매우 장엄한 성전을 건축해서 온 백성이 여호와 그들의 왕의 임재하신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뜻을 선지자 나단에게 전달한 다윗은 그로부터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삼하 7:3)라는 격려의 대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왕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 집을 건축할 특권을 받지 못할 것이나 그와 그의 후손과 이스라엘 나라에 내리실 하나님의 은총의 보증을 다음과 같이 허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리라”(삼하 7:8~10).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고자 갈망했기 때문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 7:11, 12)는 허락이 주어졌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지어서는 안 될 이유를 선언하시면서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그 이름을 솔로몬(평화로움)이라 하리니…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찌라”(대상 22:9, 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 진정한 순종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다윗은 비록 그 마음에 품고 있던 목적이 거절당했지만 그 명령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 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라고 하나님과 그의 언약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심중에 하려던 사업을 수행함으로 그의 이름이 영예롭게 되고 그의 나라의 영광이 될 것임을 알았으나, 곧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단념하는 일이 그리스도인 중에서까지도 매우 드물게 보입니다. 만일 다윗이 자기 의견에 대해 자긍심이 있었다면, 자기의 구상이 말살된 것에 몹시 격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의와 선지자의 판단 모두에 반대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희가 수행하기에 부적당한 어떤 큰 사역을 성취시키려는 희망을 굳게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윗에게 한 것처럼 저희가 그처럼 갈망하는 사역이 그들에게 위임되지 않았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성취하도록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에 만일 저희가 하고자 하는 한 가지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리라는 감정을 가지고 마치 모욕과 거절을 당한 것처럼 물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모한 정력을 가지고 저희가 감당할 능력이 없는 책임을 맡고 저희가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을 성취하고자 헛되이 노력하는 반면에 저희가 해야 할 일은 게을리하여 버려둡니다. 그리하여 저들 편의 이러한 협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더 큰 사역이 방해를 받거나 실패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종류의 응답을 들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메시지의 진실성에 대해 미심쩍다면 그 주장의 타당성을 시험할 수 있는 시금석이 명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면 됩니다.

 

22. 죄악의 틈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성경에는 사람들을 칭찬하여 말한 데가 거의 없습니다. 일찍이 세상에 산 가장 선한 사람들의 미덕까지도 자세하게 말해 주는 지면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침묵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좋은 자질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덕인 이상 그들의 위인(爲人)됨이 어떠하든지 무엇을 성취했든지 간에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성경 역사의 교훈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사람을 칭찬하거나 높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잘못하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을 의지함으로 결국에 가서는 타락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인류는 자기보다 강한 원수와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싸움을 계속하기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고 우리로 자고(自高) 하게 하거나 자신을 의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분명히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취지는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가 범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은 자신을 의뢰하는 정신과 자기를 높이는 정신이었습니다. 아첨과 권세와 사치의 미묘한 유혹이 다윗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주위의 민족과의 교제도 역시 악한 감화를 끼쳤습니다. 동방의 통치자들 사이에 성행하던 풍습에 따르면 신하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왕이 행했을 때에는 정죄하지 않았으며 왕에게는 신하가 행하는 그런 자제를 행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23. 교만의 시작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신 11:24)는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자 이 모든 성공들은 죄의 흉악성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무디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겸손히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탄은 영혼을 유일한 능력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게 되자마자 인간의 사악한 육체적 욕망을 충동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원수는 일을 돌발적으로 하지 아니합니다. 원수는 처음부터 몹시 놀랄 만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원칙의 요새를 침식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겉보기에는 매우 적은 일처럼 보이는 것들 즉 하나님께 충실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게을리하는 일이나, 세상의 풍속과 행습을 따르는 경향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암몬 사람과의 전쟁을 종결짓기 전에 다윗은 군대의 지휘권을 요압에게 맡기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아람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항복했고 암몬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도 분명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승리의 성과와 그의 지혜롭고 유능한 통치에 대한 존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다윗의 마음을 점령할 기회를 포착한 것은 그가 안일하고 방심하고 있던 이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취하여 그분과 매우 밀접한 교제를 하게 하시고 그에게 그처럼 큰 은총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이 그의 품성을 흠 없이 보존해야 할 가장 큰 동기가 되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안일과 스스로 안심하는 상태에 빠져 하나님 의지하기를 잊어버리므로 사탄에게 굴복하고 그 자신에게 범죄의 오점을 남기게 했습니다. 하늘이 임명한 민족의 지도자요, 하나님께서 그분의 율법을 집행하도록 택하신 다윗은 스스로 그 계명을 유린하였습니다. 행악자들에게 두려움이 되었어야 할 그는 자신의 행위로 행악자들의 손을 강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24. 우리아의 죽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다윗은 그의 초기 생애의 온갖 위험 중에서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그의 사정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여호와의 손길이 그를 인도하여 그의 발길에 놓였던 무수한 올무를 안전히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은 그는 하늘의 도움과 지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으로 범죄로 인하여 빠져들어간 위험에서 자기 자신을 구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절세의 미모로 왕에게 올무가 되었던 밧세바는, 다윗의 가장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장교 중의 하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만약 다윗의 범죄가 알려지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간음한 자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 같은 치욕을 당한, 자부심이 강한 무사는 왕의 생명을 취하거나 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복수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죄를 숨기기 위하여 취한 모든 노력이 다 소용없는 일임이 밝혀졌습니다. 위험은 그를 둘러 있었고 그의 앞에는 죽음보다 더 쓰라린 치욕이 있었습니다. 피할 길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여서 그는 절망 중에 신속히 간음 죄에 살인죄를 첨가했습니다. 사울의 멸망을 계획했던 사탄은 다윗도 역시 멸망으로 이끌어 가고자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유혹은 달랐으나 그 모든 것은 다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만일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의 죽음의 책임을 왕에게서 찾지 않을 것이며 밧세바는 자기의 아내가 되는 데 걸릴 것이 없으며 의심도 피할 수 있고 왕의 명예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아는 자기 자신의 사형 집행 영장을 가지고 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왕은 우리아의 손을 빌어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에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삼하 11:15)는 명령을 내렸으며 요압은 왕의 명을 순종하기에 주저하지 않았고 우리아는 암몬 자손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25. 다윗과 요압의 음모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이제까지 통치자로서의 다윗의 기록은 어느 군주도 필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에 대하여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삼하 8:15)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온 민족의 신뢰와 충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악한 자에게 복종시킴으로 인하여 그는 한동안 사탄의 대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위와 권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의 권위에 복종하는 자의 영혼을 파멸시키라는 요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보다도 왕에게 더 충의를 표했던 요압은 왕의 명을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도록 그것을 행사해야 하였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롬 13:1)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되는 것을 명했을 때에 그것을 순종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되는 권세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명령이 집행되었다는 보고를 다윗에게 보낼 때에 요압이나 왕이 연루되지 않은 것처럼 매우 주의 깊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밧세바는 그녀의 남편을 위하여 관습상 호곡(號哭) 하는 기간을 준수하였고 그 기간의 끝에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었”(삼하 11:27)습니다. 자기의 생명이 위태한 때에라도 그의 고운 양심과 명예에 대한 고상한 의식을 잃지 아니하고,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지 않았던 그가 자기의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용맹스러운 무사를 욕보이고 살해한 후 자기의 죄악의 보상을 방해받지 아니하고 향락하기를 바랄 만큼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정금이 광채를 잃었으며 어찌하여 최고의 정금이 변했는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6. 유혹의 실체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태초부터 사탄은 범죄 하면 이익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 왔습니다. 천사들도 그런 식으로 유혹했고 아담과 하와도 그 방법으로 유혹하여 범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군중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순종하는 길에서 떠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범죄의 길은 바람직하게 보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잠 14:12)인 것입니다. 대담하게 이 길에 들어섰다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쓰라린 것임을 알고, 일찍 거기를 떠나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다윗을 죄악의 기만적 대가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을 당하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밧세바에 대한 다윗의 범죄가 알려지고 다윗이 우리아의 죽음을 계획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일어나게 되면서 여호와께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그를 높이셨으므로 다윗의 죄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드러내었고 그분의 성호에 욕을 돌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경건의 표준을 낮추고, 많은 사람들의 심중에 죄에 대한 증오심을 둔화시켰고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대담하게 범죄 할 구실을 주었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책망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혹독한 메시지였습니다. 이와 같은 책망을 받고도 책망한 자로 하여금 반드시 죽음으로서 그 값을 치르게 하지 않을 군주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선고를 전했으나 왕의 동정심을 끌고 그의 양심을 환기시켜 자기의 입술로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그와 같은 하늘의 지혜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권리를 수호하는 자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다윗에게 호소하면서 선지자는 제거되어야 할 악과 압제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27. 드러나는 죄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나단은 말하기를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가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삼하 12:1~4)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분노하여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5, 6)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나단은 왕을 주목한 후 손을 하늘로 쳐들고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라고 엄숙히 선언하였습니다. 다윗처럼 범죄자들이 저희 죄를 사람들에게 감추려고 시도하고 저희 악한 행위를 인간의 안목과 지식에서 영원히 덮어두려고 노력할지 모르나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나단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 12:7~12).

 

28. 죄의 결과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선지자의 견책은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양심을 일깨웠고 그의 영혼은 굴복되어 하나님 앞에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고 회개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행한 모든 악은 모두 다 해 받은 자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우리아와 밧세바 양인에게 극악한 죄를 범하였고 그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더욱 그를 괴롭힌 것은 그 죄가 하나님께 범한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중에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사형에 처할 사람이 없지만 다윗은 자기가 범죄하고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신속한 심판으로 끊어짐을 당하지 않을까 하여 떨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에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 하”(삼하 12:13)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유지되어야 하였습니다. 사형 선고는 다윗에게서 그의 범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에게로 전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에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바 되었으나 자기 아들의 고통과 죽음이 그에게 자신의 죽음보다 훨씬 더 쓰라린 형벌이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삼하 12:14)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아이가 병들었을 때에 다윗은 금식하면서, 깊이 겸비하고 그 생명을 위하여 탄원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예복을 벗고 왕관도 벗어 두고 여러 날과 밤을 땅에 엎드려 애끓는 슬픔으로 자기의 죄 때문에 고통 당하는 무죄한 아이를 위하여 간구하였습니다. 때때로 사람이나 성읍들에 형벌이 선고되었을 때에 겸비하고 회개함으로 그 형벌이 물러가기도 했었고, 신속히 용서하시고 항상 자비스러운 하나님께서 화평의 사자들을 보내시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용기를 얻은 다윗은 그 아이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굽히지 않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것을 알자 그는 침착하게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였습니다.

 

29.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욜 2:13)

다윗의 타락의 역사를 읽은 매우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는 하늘이 그처럼 크게 영예롭게 한 자의 생애에서 이 어두운 대목을 세상에 공개하셨을까?”라고 질문합니다. 선지자는 다윗을 책망하는 말에서 다윗의 죄에 관하여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삼하 12:14)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후세대 이방인들은 이 어두운 오점을 가지고 다윗의 성품을 지적하면서 의기양양하고 조롱하는 뜻으로 “이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라고 부르짖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은 비난을 당하였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모독을 당했으며 영혼들은 불신에 굳어졌고 많은 사람들은 경건의 가면을 쓰고 범죄 하기에 담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역사가 범죄를 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불린 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고를 따라 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범죄 했을 때에 그는 그렇게 인정받을 수 없었고 그가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올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도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 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로부터 용서와 가납하심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심은 씨로부터 해로운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와 그의 집에 내린 형벌은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섭리로써 다윗을 그의 원수들의 모든 음모에서 보호하셨으나 다윗의 범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결단코 죄악을 시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사울의 적의에서 보호하셨지만 그가 지은 죄의 결과로부터 그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30. 죄에서 벗어나는 길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 8:3)

자신의 범죄를 통하여 다윗 자신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와 멀리까지 미칠 그 결과를 의식하고 상심하였는데, 이제까지 그가 번영한 것은 여호와의 계명을 양심적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죄를 알고 있는 그의 신하들은 더욱 거리낌 없이 범죄 하게 될 것이며 아들들에게 존경과 순종을 요구할 권위도 약화되었습니다. 그가 마땅히 죄를 정죄해야 할 때에도 자신의 범죄를 의식하고 그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집에서 공의를 집행해야 할 그의 팔을 약화시켰습니다. 그의 악한 모본의 감화가 그의 아들들에게 끼쳐졌고 하나님께서도 그 결과를 막으려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타락한 후 온 일 년 동안 다윗에게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신다는 아무런 외적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과 보응의 날은 신속하고도 분명히 다가오고 있었으며 그가 아무리 회개할지라도 그의 온 지상 생애를 어둡게 할 고민과 수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다윗처럼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 할지라도 죄악의 결과는 이 세상에서도 쓰라리고 견디기 어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의 역사를 비록 그분으로부터 크게 축복과 은총을 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깨어 있어 기도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계획하신 교훈을 겸손히 배우려고 노력한 자들의 생애에서 입증되어 왔습니다. 각 시대를 통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유혹자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위험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그처럼 크게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다윗의 타락은 그들의 마음에 자신을 믿지 않도록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그분의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실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안에 그들의 능력과 안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사탄의 영역에 첫발을 들여놓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31. 진정한 회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다윗은 하나님의 선고가 선언되기 전에도 그의 양심이 평안하지 않음으로 범죄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였으며 그때에 당한 정신적 고통을 시편 32편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의 메시지가 다윗에게 이르렀을 때에 그는 회개의 표현을 시편 51편으로 고백하고, 성가로 그의 백성의 공중 회집에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먼 후세대까지 자기의 타락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그의 타락의 슬픈 역사로 교훈을 받을 수 있기를 갈망하였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성실하고 깊은 회개였습니다. 자기의 죄악을 변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그의 기도에는 경고된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죄의 흉악함과 자기 영혼의 더러움을 보고 죄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는 용서뿐 아니라 마음의 정결을 얻고자 함으로 절망 중에 투쟁을 포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보기에는 훨씬 덜 악한 죄처럼 보이는 사울은 거절하시고 매우 큰 죄를 범한 다윗은 아끼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낮추고 죄를 자백한 반면에 사울은 책망을 멸시하고 마음을 굳게 하여 회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대목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범죄하고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려던 무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윗이 자기의 범죄로 고통을 당했다 할지라도 성실히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았던 일을 기억하고 그들도 역시 회개할 용기를 가지고 다시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행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다윗처럼 겸비하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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