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 274호 매일의 말씀

열한시 274호 매일의 말씀

 

1. 복수심에 불타는 사울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다윗의 도주로 인하여 사울은 그의 진중에 반역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이새의 아들에게 그의 접근과 계획을 알려 준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은 그의 신하들에게 자기를 대적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단정하고 값진 선물과 명예로운 지위를 주겠다는 약속으로 그들을 매수하여 그의 백성 중에 다윗의 편이 된 자를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에돔 사람 도엑이 고발자로 변신하였습니다. 야심과 탐욕과 자기 죄를 책망한 제사장에 대한 증오로 마음이 동한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을 방문한 일을 보고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 사울의 분노를 선동하는 그런 언사로 말하였습니다. 지옥을 불태우는 듯한 악의에 찬 혀에서 나온 말은 사울의 마음속의 최악의 감정을 분기시켰습니다. 미친 듯이 노한 사울은 제사장의 전 가족을 멸하라고 선언하고 아히멜렉뿐 아니라 “세마포 에봇 입은 팔십오인”을 왕의 명령으로 살기등등한 도엑의 손에 살해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삼상 22:19). 이것이 바로 사울이 사탄의 지배 아래서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사람의 죄악이 찼다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그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하셨을 때에 사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선고를 집행하기에는 너무 인정이 많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멸해야 할 것을 남겨두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명령도 없이 사탄의 지배하에서 그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고 놉 주민들을 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도를 거절한 인간의 마음의 완고함은 이와 같습니다. 이 행위는 온 이스라엘을 공포로 떨게 하였습니다. 이런 난폭한 일을 한 것은 그들이 택한 왕이었고 그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른 나라 왕들의 방법을 답습한 데 불과하였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었으나 그들을 가르치던 제사장들은 검으로 피살되었던 것입니다.

 

2.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시 11:4)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중에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인 것을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인 것이 나의 연고로다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이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삼상 22:20~23).
여전히 왕에게 쫓기는 다윗은 쉴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일라에서 그의 용감한 무리는 그 성읍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였으나 그들은 저희가 구원한 백성 중에서까지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로 옮겼습니다.
다윗이 가는 길에는 밝은 곳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에 그의 피신처를 알고 찾아온 요나단의 예기치 않은 방문은 그를 매우 기쁘게 하였습니다. 이 두 친구가 서로 교제하면서 지낸 순간들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저희가 당한 여러 가지 경험을 말했으며 요나단은 다윗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삼상 23:17)고 말하였습니다. 저희가 다윗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경이로운 처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쫓겨 다니는 도피자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상 23:18).
다윗은 요나단의 방문이 있은 후에 시편 11편을 노래함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계속 도망 다니는 자신의 영혼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였습니다.

 

3. 양심의 소리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 5:15)

다윗이 그일라에서 십 사람들의 황무지로 갔는데, 그들은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기별을 보내어 저희가 다윗이 숨어 있는 것을 알므로 그의 피신처로 왕을 안내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에 대하여 경고를 받은 다윗은 그 자리를 옮겨 마온과 사해 사이에 있는 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다시 사울에게 기별을 보내어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삼상 24:1)라고 말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 염소 바위로 갔”(삼상 24:2)습니다. 다윗은 그의 무리 육백 명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사울은 삼천 명의 군사를 데리고 다윗을 향하여 진군할 때 격리된 동굴에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일이 어찌 될지에 대해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산을 헤치고 올라가다가 옆으로 비껴 홀로 다윗과 그 무리가 숨어있는 바로 그 굴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이것을 보고 저희 지도자에게 사울을 죽이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왕이 저희 권세 하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저희 손에 붙여 그를 멸할 수 있게 하신 분명한 증거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다윗도 그 일을 그렇게 보려는 유혹을 받았으나 양심의 소리는 그에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해하지 말라”(삼상 24:6)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아직도 사울을 평안히 돌려보내려는 것을 원치 않고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삼상 24:4)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 대장에게 상기시켰지만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와 다윗을 추적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귀를 놀라게 하는 “내 주 왕이여”라고 말하는 음성이 들리자 사울이 돌아 보니 오랫동안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다윗이었습니다.

 

4. 다윗과 사울의 화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다윗은 왕에게 엎드려 절 함으로 먼저 왕이 그의 주임을 인정하고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고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 한 일이 없나이다”(삼상 24:9~11)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의 말을 들을 때에 그의 마음이 겸비해졌으며 그의 말이 진실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죽이기 위해 찾아다니던 자의 세력 아래 완전히 들어갔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양심상 거리낌 없이 왕 앞에 섰습니다. 사울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삼상 24:16) 하고 부르짖으며 그는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 후에 사울은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삼상 24:17~20). 그리하여 다윗은 그가 왕이 될 때에 사울의 집을 선대하고 그의 이름을 끊어 버리지 않을 것을 사울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과거의 경력을 아는 다윗은 그의 보증을 신임할 수 없었고 그의 회개하는 상태가 오래 계속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그의 집으로 돌아갈 때에 다윗은 산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5. 사무엘의 죽음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삼상 25:1)

사탄의 세력에 굴복한 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적의가 때때로 화목과 호의의 감정으로 변화되나 그 변화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악한 마음을 품은 자들이 여호와의 종들을 대적해서 악하게 말하고 악한 말과 행동을 한 후에 때때로 저희가 잘못했다는 확신을 마음속 깊이 느끼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성령께서 그들과 싸우시고 그들은 하나님 앞과 저희가 그들의 감화를 멸하려던 자들 앞에서 저희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그들에 대한 저희 태도를 바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마귀의 암시에 문을 열게 될 때에 옛날의 의심은 다시 살아나고 옛 적의는 다시 분기되어서 그들은 저희가 뉘우치고 한동안 버렸던 동일한 행위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그들은 악한 말을 하고 저희가 가장 겸손히 자복한 바로 그 사람들을 가장 신랄한 방법으로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사탄은 이런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경로를 겪은 후에 그전보다도 더 큰 권세로 그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더 큰 빛을 받고도 범죄한 까닭입니다.
사무엘의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할 수 없는 손실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위대하고 선량한 선지자요 탁월한 사사가 죽었습니다. 백성들의 슬픔은 깊고도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청년 시절부터 성실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출입하였고 비록 사울이 공인된 왕이었으나 사무엘이 사울보다 더 큰 감화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생애의 기록이 충실과 순종과 헌신으로 일관되었던 까닭입니다. 백성들이 사울의 생애를 사무엘의 생애와 대조하여 볼 때에 그들은 저희가 저희 주위의 민족들처럼 되려고 왕을 구함으로 얼마나 큰 과오를 범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속하게 무종교와 불신의 물이 들고 있는 사회의 상태를 놀라움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6. 사무엘이 끼친 감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이스라엘 민족은 그 거룩한 학교의 창시자요 교장인 사무엘을 잃었지만 잃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큰 문제들을 가지고 으레 찾아가던 자 곧 백성들의 최대의 이익을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중재하던 자를 잃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왕은 미친 사람과 다를 바 없었고 공의는 구부러지고 질서는 혼란으로 변했습니다.
백성들이 내부의 싸움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곧 침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무엘의 권고가 가장 필요되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노령의 종에게 휴식을 주셨습니다. 저희가 사무엘의 말 없는 무덤을 바라보면서 그를 거절하여 통치자가 되지 못하게 한 어리석음을 회고하고 백성들은 몹시 비통함을 느꼈습니다. 이는 사무엘이 하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보좌와 결속시켰던 사실을 안 까닭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친 자는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무엘은 죽었고 백성들은 사탄과 연합하여 그들을 하나님과 하늘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는 왕의 지배하에 버려둔 바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는 충실한 아들이 헌신적인 아버지를 위하여 깊고도 애절하게 슬퍼하는 것처럼 사무엘을 위하여 슬퍼하였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의 죽음으로 사울의 행동을 제어하는 다른 한 속박이 깨어졌음을 알고 선지자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안전하지 못함을 느꼈습니다. 사울의 주목이 사무엘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집중되고 있는 동안 다윗은 보다 더 안전한 곳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바란 광야로 도망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시편 120편과 121편을 지었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2~8)

 

7. 다윗과 나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 4:9)

다윗과 그 부하들이 바란 광야에 있는 동안 그들은 그 지역에서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 나발의 양 떼와 소떼를 약탈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나발은 갈렙의 후손이었으나 그 성품이 야비하고 인색하였습니다. 때는 양털을 깎는 시기였고 손님을 후히 대접하는 계절이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식량이 매우 궁색하였습니다. 그때의 풍속에 따라 이새의 아들은 열 명의 소년들을 나발에게 보내어 저희 주인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나발에게 문안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입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 25:7, 8).
다윗과 그 부하들은 나발의 목자와 양 떼를 보호하는 방벽이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부자는 그에게 귀중한 도움을 주었던 자들의 곤궁을 구제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그 양 떼나 소떼에서 그들의 필요를 취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친절은 나발에게 효과가 없었으며 그는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 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 25:10, 11)라고 말했습니다.
소년들이 빈손으로 돌아와 다윗에게 그 사연을 말했을 때에 다윗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그를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시킨 자를 멸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부하들에게 싸울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같은 충동적인 행동은 다윗의 성품보다는 사울의 성품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아들은 아직도 고난의 학교에서 인내의 공과를 배워야 하였습니다.

 

8.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會計)하라”(몬 1:18)

나발의 종 중에 하나가 다윗의 소년들을 보낸 후에 급히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가서 그 일의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이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삼상 25:14~17)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과 상의하거나 그의 의도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량의 식량을 준비하여 나귀에 싣고 종을 시켜 먼저 보내고 자신도 다윗의 무리를 만나려고 출발하였습니다. 여인은 산의 유벽한 곳에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삼상 25:23, 24)라고 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마치 왕관을 쓴 군주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존경하는 말로 다윗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발은 경멸하는 말로 “다윗은 누구냐?”라고 부르짖었으나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친절한 말로 다윗의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남편을 위하여 그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허식이나 교만심이 없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남편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의 불친절한 행동은 결코 계획적인 인신 모욕이 아니요 다만 비참하고 이기적인 그의 본성이 폭발한 것이라고 다윗에게 설명하고 다윗을 그의 성급한 의도에서 돌이키려는 이 설득으로 자신의 면목을 세우려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렸습니다.

 

9. 화평케 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 후에 아비가일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화목 제물로 풍부한 식량을 제공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대장의 분노를 일으킨 장본인처럼 간청하였습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삼상 25:28)라고 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은근히 다윗이 해야 할 일을 제시하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였습니다. 다윗은 비록 반역자처럼 박해를 받고 있을지라도 개인의 과오에 대하여 복수하려 하지 말아야 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했습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삼상 25:29~31).
이 말들은 하늘의 지혜를 받은 자의 입술에서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꽃향기와 같은 아비가일의 경건은 얼굴과 말과 행동에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풍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여인의 마음에 거하고 계셨습니다. 은혜가 깃들고 친절과 평화로 가득 찬 그의 말은 하늘의 감화를 끼쳤습니다. 다윗은 좋은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의 조급한 의도의 결과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떨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의 일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이 이스라엘 여인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한 충동을 막고 조용한 말과 때에 적합한 지혜로 큰 악을 억누를 수 있는 성품으로 꼴 지워져야 합니다.

10. 책망에 대한 태도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찌라”(시 141:5)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항상 빛과 위로와 평화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결, 기지, 단순, 유용성으로 분명히 식별되고 감화를 신성하게 하는 무아적 사랑에 지배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이것을 가진 자는 가는 곳마다 빛의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현명한 책망자요 권고자였습니다. 다윗의 격분은 여인의 감화와 설득의 능력으로 가라앉았으며 그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마음의 자제력을 잃었음을 수긍하였습니다. 다윗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 책망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감사히 생각하고 축복하였으니 이는 그 여인이 그를 의롭게 충고한 까닭이었습니다. 책망을 받을 때에 안달하지 않고 그 책망을 받기만 해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책망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책망하여 악한 길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나발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마터면 그의 어리석음이 그에게 돌연한 죽음을 가져왔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나발은 중풍에 걸린 사람 같았습니다. 나발은 다윗이 전과 같이 복수할 결심을 가지고 추격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가망 없는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져서 10일 후에 그는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생명은 세상에 저주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발이 환락과 환희에 빠져 있을 때에 비유 중에서 한 부자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찾으리라”(눅 12: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후에 아비가일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한 아내의 남편이었으나 그 시대의 민족들의 풍습이 그의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그의 행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록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세상의 습관을 따르는 과오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아내와 결혼한 쓰라린 결과를 다윗은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느꼈습니다.

 

11.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사무엘이 죽은 후 다윗은 몇 달 동안 평안히 거하였습니다. 다시 그는 십 사람의 황무지로 갔으나 왕의 총애를 얻고자 하는 이 원수들은 왕에게 다윗의 숨은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정보는 사울의 가슴속에서 잠자던 분노의 정신을 깨웠습니다. 다시 한번 사울은 무장한 부하들을 소집하여 그들로 다윗을 추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편의 정탐꾼들이 다윗에게 사울이 다시 그를 추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가져왔으므로 다윗은 몇몇 그의 부하들과 함께 원수의 위치를 탐지하러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 적진에 이르러 저희 앞에 왕과 그 수종자들의 장막이 있는 것을 발견한 때는 밤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수행원들은 깊은 산그늘에 몸을 숨기며 원수의 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원수의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려고 하다가 마침내 사울이 자고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의 창은 땅에 꽂혀 있고 그의 머리 곁에는 물병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곁에는 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 누웠고 그 주위에는 군사들이 잠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아비새는 창을 높이 쳐들고 다윗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삼상 26:8)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삼상 26:9~12)라고 말하며 조용히 사울의 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가장 강한 자를 약하게 하시며 가장 지혜로운 자의 지각을 무디게 하시고 가장 조심스러운 자의 솜씨를 좌절시키시는 그분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 원수를 대하는 다윗의 성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다윗은 사울의 진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성들과 아브넬에게 큰 음성으로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중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삼상 26:15, 16)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삼상 26:17)라고 말했을 때 다윗은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삼상 26:18)라고 대답하자 왕은 다시 그 입술로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삼상 26: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울의 약속이 있었을지라도 다윗은 자신을 사울의 권세 아래 두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국왕의 생명을 존중히 여긴 이 두 번째의 경우는 사울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로 하여금 더욱 겸손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친절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마음을 낮추었습니다. 다윗과 작별한 때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삼상 26:25)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 오랫동안 계속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리라고 바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화해를 단념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가 마침내 왕의 원한의 제물이 될 것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다시 블레셋 땅에서 피신처를 찾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수하에 있는 6백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건너갔습니다.

 

13. 연약한 믿음의 결과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 40:27)

사울이 살해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이룰 것이라는 다윗의 결론은 하나님의 권고 없이 내린 것이었습니다. 비록 사울이 다윗을 멸하려고 음모하고 노력하고 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그 나라를 얻도록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획이 인간의 안목에는 신비 속에 덮여 있을지라도 그 계획을 성취시키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외관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도록 허락하시는 시련과 시험과 체험은 그들을 해하는 것이며 다만 그들의 멸망을 초래할 뿐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와 같이 다윗도 형세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보좌에 오르리라는 것을 의심하였습니다. 오랜 시련들은 그의 믿음을 약하게 하였고 그의 인내심을 소모시켰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 블레셋 사람에게 보호를 받도록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민족은 그의 가장 큰 원수로 끝까지 남아 있었으나 다윗은 자기가 곤궁한 때에 도움을 얻으려고 그들에게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는 사울과 사울을 섬기는 자들을 전혀 믿지 못하여 자신을 그의 백성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의 지배에 맡겼습니다. 다윗은 용감한 장수요 자신이 현명하고 성공적인 전사임을 나타내 보였으나 블레셋 사람에게로 갔을 때에 그는 자신의 이익에 직접 반대되게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명하여 유다 땅에서 그분의 기를 세우도록 하셨으나 그는 믿음의 부족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없는데도 그 임무를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났던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이스라엘에 남았더라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라는 말씀이 성취 되었을 것입니다.

 

14. 올무를 자초한 다윗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의 군대보다도 다윗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블레셋 사람의 보호 아래 둠으로 자기 백성의 약함을 그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냉혹한 원수들로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다윗은 일어나 하나님의 백성을 방어하도록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종들이 그분의 백성의 약점을 나타내거나 그들의 행복에 대해 무관심함을 보임으로 악인들을 격려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더욱이 그의 동포들로 하여금 그가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기 위해 이방 나라로 갔다는 인상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그의 행위를 오해할 여지를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해가 되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탄이 그로 하게 하고자 갈망하던 바로 그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 중에서 피난처를 구함으로 다윗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원수들에게 대 환희를 안겨 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버리거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그의 헌신을 그치지 않았으나 그의 신상의 안전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심을 버림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이 소유하기를 바라시는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성품을 더럽혔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왕의 친절한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 후대는 한편으로는 그 왕이 다윗을 좋아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편으로는 한 히브리인이 자기의 보호를 구한다는 것이 그의 허영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의 지배하에서 밀고에 대해 안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의 가족들과 식구들과 모든 소유를 가지고 갔으며 그의 부하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볼 때에는 그가 블레셋 땅에 영주하러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기스를 만족하게 했고 그는 이스라엘의 망명객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5. 다윗의 갈등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수 13:13)

왕도(王都)에서 시골로 거처를 옮기기를 원한다는 다윗의 요구를 듣고 왕은 친절하게 시글락을 소유지로 허락하였습니다. 다윗은 우상 숭배자들의 감화 아래 사는 것은 자신과 그 부하들에게 위험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거처로 사용된 완전히 분리된 이 마을에서 그들은 악의 근원이 되는 이교도의 의식이 편만한 가드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한적한 마을에 거하는 동안 다윗은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여 모두 진멸하고 그 소식을 가드에 전할 사람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와 다윗은 그가 자기의 민족 유다 사람들과 싸웠다고 아기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 기만으로 왕은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삼상 27:12)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이 이교의 족속들을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가 이 일을 하도록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삼상 28:1). 다윗은 손을 들어 그의 백성을 해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태가 일어나 그의 의무를 지시해 주기까지는 어떻게 해야 될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하여 다소 그의 믿음이 흔들렸으나 아직도 그는 사무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과거에 원수를 이기게 하셨던 일들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사울의 손에서 그를 보호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회고하고 신성한 임무를 배반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6. 블레셋의 침략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사 7:2)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 사이에 다시 전쟁이 선포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모여” 이스라엘 평야의 북쪽 변두리에 있는 “수넴에 이르러 진쳤”습니다. 한편 사울과 그의 군대는 몇 마일 떨어진 그 평야의 남쪽 변경에 있는 길보아산 기슭에 진을 쳤습니다. 기드온이 그의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미디안 대군을 패배시킨 곳이 이 평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자 기드온을 고무시킨 정신은 지금 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정신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기드온은 강하신 야곱의 하나님께 대한 굳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으나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까닭에 자기 홀로 있고 아무런 방비가 없음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그는 멀리 블레셋 대군을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삼상 28:5).
사울은 다윗과 그의 군대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있음을 알고 이새의 아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가 당한 학대에 대하여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왕은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충동적 감정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멸하도록 박차를 가하여 온 나라를 매우 큰 위험에 휩쓸리게 하였습니다. 왕은 다윗을 추격하기에 열중한 나머지 나라의 방비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무방비 상태를 이용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중심부까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사울을 강권하여 다윗을 추격하는 데 모든 정력을 기울이게 해서 다윗을 멸하도록 하는 한편 그와 동일한 악의에 찬 정신은 블레셋 사람을 선동하여 사울을 멸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릴 기회를 포착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대원수 마귀는 자주 동일한 정책을 쓰고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는 어떤 성화되지 않은 자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 중에 시기와 다툼의 불을 붙여 놓은 후에 하나님의 백성의 분열된 상태를 이용하여 그의 대리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멸망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17.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너희가…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마침내 사울은 블레셋 사람과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절박한 운명의 그늘이 그의 주위를 어둡게 하였고 그는 도움과 지도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권고를 구하였으나 헛된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 하”(삼상 28:6)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성실과 겸손으로 그분에게 나오는 자는 한 영혼이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울을 외면하신 것은 왕이 스스로의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박탈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의 권고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다윗을 추방하였으며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늘이 제정한 교통의 통로를 차단하고도 그리고 은혜의 성령을 멀리 떠나 범죄하고도 여호와께로부터 꿈이나 계시를 통하여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울은 겸손과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갈망한 것은 죄에 대한 용서도 하나님과의 화해도 아니요, 오직 그의 원수에게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신다”(요 9:3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완고와 반역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절교하였습니다. 회개와 참회의 길밖에는 되돌아갈 길이 없었으나 교만한 군주는 고통과 절망 중에 다른 근원에서 도움을 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종들에게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삼상 28:7)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강신술(降伸術)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강신술을 금하셨고 그 거룩치 않은 술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모든 박수와 신접한 자를 죽이라고 명령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성급히 자포자기하여 그가 가증한 것으로 정죄하였던 그 접신자에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18. 멸망의 길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사 8:19)

왕은 신접한 여인이 엔돌의 은폐소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탄과 맹약하여 자신을 사탄의 지배에 맡겨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는 대신에 사탄은 그를 위하여 이적을 행하고 그에게 은밀한 일들을 나타내었습니다. 사울은 변장을 하고 두 시종만을 데리고 밤에 마녀의 은신처를 찾아갔습니다. 이 비참한 정경과 같이 이스라엘의 왕이 사탄의 뜻대로 노예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감화를 거절하고 자기의 마음대로 하기로 고집한 자가 택한 길보다 더 어두운 인생의 길은 없습니다. 최대의 폭군인 사탄의 지배에 자신을 맡긴 자보다 더 무서운 속박을 당하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만일 그의 치세를 통하여 이 조건에 응하였더라면 그의 나라는 안전했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의 인도자가 되시고 전능하신 자가 그의 방패가 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비록 그의 반역과 완고는 그의 마음속에 거의 하나님의 음성을 침묵시켰으나 아직도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당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 사탄의 공모자로부터 빛을 얻고자 함으로 사울은 조물주와 그를 묶은 마지막 줄을 끊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그를 괴롭히고 마침내 그를 멸망의 지경으로 몰아갈 악마의 세력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덮이자 사울과 그 시종들은 엔돌의 마녀가 사는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신접한 여인은 하나님께 모독적인 이교의 주문(呪文)을 계속해서 은밀히 외우려고 숨어 있었습니다. 비록 변장하기는 하였으나 사울의 큰 키와 군주다운 풍채는 그가 보통 병사가 아님을 나타내었고 그 여인은 찾아온 자가 사울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19. 강신술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 11)

사울은 죽은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 여인에게 “청하오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삼상 28:8)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문을 외운 후 그는 말하기를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삼상 28:13, 14). 그러나 신접한 여인의 주문을 듣고 올라온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그 악한 신들이 거하는 곳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초자연적 현상은 오로지 사탄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사탄은 그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유혹할 때에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쉽사리 사무엘의 모습으로 가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로 가장한 악신이 행한 최초의 일은 이 악녀와 은밀히 교통하여 그가 당한 기만을 그에게 알린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삼상 28:15)는 메시지를 전하였고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이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삼상 28:15)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사울이 그의 권고를 멸시하고 그의 책망에 분개하더니 이제 고통과 재난의 때에 그는 선지자의 지도가 유일한 희망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대사와 교통하기 위하여 지옥의 사자를 헛되이 의지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완전히 사탄의 세력 하에 두었고 불행과 멸망을 초래하는 것을 유일의 즐거움으로 삼는 사탄은 이제 이 불행한 왕을 멸하려고 그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였습니다.

 

20. 여호와의 명을 거역한 자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렘 48:10)

사울의 고통스러운 간청의 응답으로 소위 사무엘의 입술에서 다음과 같은 무서운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28:16~19).
그의 모든 반역의 길을 통하여 사울은 사탄의 아첨과 기만을 당하였습니다. 죄를 얕잡아 보게 하고 범죄의 길로 쉽게 마음이 끌리게 만들고 여호와의 경고와 훈계에 대하여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 유혹자가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그의 매혹하는 능력으로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의 책망과 경고를 무시하고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탄은 궁지에 빠진 사울을 향하여 그의 죄의 흉악함과 용서받을 가망이 없음을 나타내어 그로 자포자기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의 용기를 꺾고 그의 판단을 혼란시키고 그로 절망과 자멸에 빠지게 하기 위하여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습니다.
사울은 피로와 단식으로 쇠약하였고 공포와 양심의 가책에 휩싸였습니다. 이 무서운 예보가 그의 귀를 울렸을 때에 그의 몸은 태풍에 흔들리는 참나무처럼 흔들렸으며, 그는 땅에 엎어졌습니다. 날이 새기 전에 사울은 그의 시종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돌아와 전쟁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절망적인 공포에 억눌려 있었으므로 그의 군대에게 용기를 고취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능력의 근원에서 떨어진 그는 저희 조력자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이스라엘의 마음을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악마의 예언은 성취될 것입니다.

 

21. 사울의 최후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렘 9:26)

마침내 수넴 평야와 길보아산 비탈에서 이스라엘 군사와 블레셋 대군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엔돌의 동굴에서 본 무서운 광경이 사울의 마음에서 희망을 모두 몰아내었으나 사울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맹스럽게 그의 보좌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삼상 31:1). 왕의 용감한 세 아들이 그의 곁에서 죽었고 자기 자신도 부상을 입어 싸울 수도 도망할 수도 없었으므로 블레셋 사람에게 생포되지 않기를 결심하고 사울은 병기 든 자에게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삼상 31:4)고 명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거절할 때에 사울은 그의 칼 위에 엎드러져 죽음으로 자기 영혼에게 자살의 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실패의 생애였고 그는 절망 가운데서 불명예스럽게 죽었으니 이는 그가 자신의 괴팍한 뜻을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까닭이었습니다.
싸움이 있은 그 다음날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사울의 목을 자르고 그의 갑옷을 벗겨 승리의 기념물로서 블레셋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영광은 이 이방 신들의 능력에 돌려지게 되었고 여호와의 이름은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는 길보아에서 멀지 아니하고 요단강에서 가까운 성읍 벧산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이 시체들을 사슬에 매달아 두어 맹금(猛禽)들이 뜯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이 그의 치세 초기 곧 강성하던 시절에 저희 성읍을 구원한 일을 기억하고 이제 왕과 왕자들의 시체를 구출하여 명예로운 장사를 지내 주므로 그들의 감사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0년 전에 행한 고상한 행위는 사울과 그의 아들들로 하여금 패배와 치욕의 어두운 때에 친절과 동정의 손으로 장사 지냄을 받게 하였습니다.

 

22. 강신술의 증거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애 2:9)

예로부터 사울과의 회견에서 사무엘이 실제로 그곳에 나타났다는 견해를 가진 자들이 더러 있으나 성경 자체가 그 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사무엘이 하늘에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든, 사탄의 능력에 의해서든 거기서 소환당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잠시나마 사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를 하늘에서 불러내려 버림받은 한 여인의 주문(呪文)을 높이게 할 능력을 가졌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무녀의 동굴에 보내셨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여호와께서 이미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사울과 교통하시기를 거절한 까닭이었습니다(삼상 28:6). 이러한 방법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교통의 매개체들이며 그것을 무시하고 사탄의 대리자를 통하여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메시지 자체가 그 근원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사울을 회개시키려는 것이 아니요, 그를 멸망으로 밀어 넣는 것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요 사탄이 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무녀에게 의견을 청한 사울의 행위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멸망을 받게 된 이유라고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대상 10:13, 14). 여기에 직접 사울이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신접한 자에게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과 교통하지 아니하고 무녀를 통하여 사탄과 교통한 것입니다. 사탄은 참 사무엘을 나타내게 할 수 없었으나 위조의 것을 나타내어 그의 기만의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23. 강신술의 유래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거의 모든 형태의 고대 마술과 요술은 죽은 자와 교통할 수 있다는 신념에 기초되어 있습니다. 강신술을 행하는 자들은 죽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통하여 장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죽은 자에게 의견을 듣는 이 풍습은 이사야의 예언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죽은 자와 교통한다는 이 같은 신념이 이교의 우상숭배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이교의 신들은 죽은 영웅들의 신격화된 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교의 종교는 죽은 자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벧브올에서 범죄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민 25:1~3). 시편 기자는 이 제사를 어떤 유의 신에게 드렸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동일한 이스라엘의 배도에 언급하여 그는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시 106:28)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즉 죽은 자에게 드린 제사였습니다. 죽은 자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그 죽은 자와 교통하는 것은 거의 모든 이교 체계에 나타나는 현저한 현상입니다. 신들이 저희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또한 사람들이 그 신들의 의견을 구할 때에 권고를 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그리스와 로마의 신탁이 이런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와 교통한다는 신념은 기독교 국가라고 공언하는 나라에서까지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강신술이란 이름 아래 죽은 자의 영이라는 존재와 교통하는 행위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24. 강신술의 실체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강신술은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한 자들의 호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영적 존재들이 죽은 친구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 그들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을 말하고 저희가 살아 있을 때에 행하던 행위를 행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저희 친구들이 천사가 되어 저희 위를 날고, 저희와 교통한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이와 같이 죽은 자의 영인 체하는 자들은 확실히 맹목적인 숭배를 받고 그들의 말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한편 강신술이란 인간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강신술이 초자연적 성격의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할 수 있는 현상을 보고도 그것을 영매(靈媒)의 속임수로 돌립니다. 그러나 물론 진정한 것처럼 보이되 실상은 속임수인 것이 많이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초자연적 놀라운 기적이 행하여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강신술을 인간의 기교나 속임수의 결과라고 거절하는 많은 사람들도 저희가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직면할 때 그 주장을 승인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 강신술과 여러 형태의 고대 요술과 우상숭배는 모두 죽은 자와의 교통을 필수 불가결의 원칙으로 삼는 것으로 에덴에서 사탄이 하와를 기만한 다음과 같은 최초의 거짓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하나님과 같이” 될 것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 5). 그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거짓에 기인하고 있으며 동일하게 모두 다 거짓말의 아비에게서 유래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죽은 자와 교통하는 체하는 행위를 명백하게 금지 당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分福)이 없느니라”(전 9:5, 6).

 

25. 경고의 말씀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 4:1)

신접한 자는 죽은 자의 영이 아니요, 악한 천사 즉 사탄의 사자입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죽은 자의 예배와 죽은 자와 교통하는 체하는 것으로 구성된 고대 우상숭배를 성경에는 마귀의 예배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포들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저희 이웃인 이교도의 우상숭배에 가담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하여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시 106:37)라고 말하고 다음 절에서 그는 저희가 저희 자녀를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죽은 자를 예배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마귀를 예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기초 위에 놓인 현대 강신술은 하나님께서 옛날에 정죄하시고 금지하신 마술과 마귀 숭배를 새로운 모양으로 부활시킨 데 불과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사건으로서 사탄이 강신술을 행할 것에 대하여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살후 2:9)이 일어나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말세에 교회가 당면해야 할 위험들을 묘사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을 죄악으로 인도한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장차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벧후 2:1)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를 거절합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요일 2:22, 23)느니라. 성경은 강신술을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고 선언합니다.

 

26. 사탄의 기만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렘 14:14)

사탄은 이미 주어진 사울의 운명을 엔돌의 여인을 통해 말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녀를 신뢰하고 그녀에게 묻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권고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 스스로 사탄의 지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신술이 군중을 매혹시키는 미끼는 그것이 소위 미래의 휘장을 걷어버리고 하나님이 감춰 두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낼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 중에 장래의 대사건들, 즉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모든 일을 우리 앞에 공개하시고 그 모든 위험 가운데서 우리가 안전하게 행할 수 있도록 안전한 안내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신뢰를 파괴하고 그들로 하여금 삶의 조건에 불만을 갖게 하고 하나님께서 현명하게 가리신 바를 꼬치꼬치 캐게 하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 중에 나타내신 바를 멸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의 분명한 결과를 알 수 없을 때에 침착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의문을 수용하지 못하고 참을성이 없으므로 기다려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를 거절하고 재앙을 염려하여 견디지 못하고 반역적 감정에 빠져 나타내지 않은 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깨어 기도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발견하고 그들의 정신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진정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했더라면 피곤하고 무거운 짐 진 마음이 쉼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위를 위하여 제정하신 방법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으신 것을 알려고 다른 근원을 의지하다가 사울이 저지른 죄를 범하고 결국에는 악의 지식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7. 하늘의 빛을 거절하는 자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 도모는 그의 파하신 바가 되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사 19:3)

미래의 휘장을 찢어버리는 이 참을성 없는 경솔함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고 영혼은 대기만자의 암시를 받도록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신접한 자에게 묻게 하고 과거의 감추어진 일들을 나타냄으로 그는 자기가 다가올 일을 예언할 능력이 있음을 사람들이 신뢰하도록 그들의 정신을 고취시킵니다. 사탄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얻은 경험을 가지고 원인에서 결과까지를 논할 수 있으며 때때로 사람의 생애에 나타날 장래의 어떤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련하고 잘못 인도된 영혼들을 기만하고 그들을 자기의 권세 아래 두어 자기의 뜻에 그들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셨습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사 8:19, 20)리라.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우리 주님의 원수와 친교하여 지식을 얻는 마술사들에게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분의 백성의 빛이 되시고 그들에게 믿음으로 인간의 안목에는 가리어져 있는 영광을 바라보도록 명하십니다. 의의 태양이 그 밝은 빛을 그들의 마음에 비추실 때, 그들은 하늘의 보좌에서 발하는 빛을 가졌으므로 빛의 근원에서 돌이켜 사탄의 사자들에게 가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할수록 허탄한 미신이 판치고 광신적인 종교 집단이 활개를 칩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그 어느 것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28. 악한 마음을 가진 자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사울에게 보낸 악마의 메시지는 비록 그것이 죄의 탄핵과 형벌의 예언이긴 하였으나 사울을 개혁시키고자 함이 아니요 그를 절망과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혹자는 흔히 아첨으로 사람들을 멸망에 빠지도록 유혹함으로 자기의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마귀의 가르침이 가장 비열한 방종을 조장했습니다. 죄악을 정죄하고 의를 행하도록 강권하는 하나님의 교훈은 파기되고 진리는 무시되었으며, 음란이 허락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도록 명령 되었습니다. 강신술은 죽음도 없고 죄도 없으며 심판도 없고 형벌도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은 “타락하지 않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이며, 욕망은 최고의 법이요 인간은 자신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와 순결과 경외심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우신 울타리가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담대하게 죄를 범합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마귀 숭배의 가르침과 근본이 동일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인들의 가증한 행위 중에 특별히 악신과 교제한 결과를 이스라엘 백성 앞에 다음과 같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애정이 없는 자들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요, 간음하고 살인하고 모든 부패한 사상과 몸서리치는 행위로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은 알지 못하나니 이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렘 17:9)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인간의 성질의 경향을 아십니다. 사탄은 지금처럼 그때에도 반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가나안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미움을 사도록 하였습니다. 영혼의 원수는 우리 속에 억제되지 않은 악이 흘러갈 통로를 열려고 항상 경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고 멸망 당하기를 갈망하는 까닭입니다.

 

29.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백성들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 12:12)

사탄은 가나안 땅을 계속 지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이스라엘 자손의 거처가 되고 하나님의 율법이 그 땅의 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잔인하고 악의에 찬 증오심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미워하고 그들의 멸망을 음모하였습니다. 악령의 대리자들을 통해서 이상한 신들이 들어오고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민들이 마침내 약속의 땅을 떠나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 역사를 오늘날에도 반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세상의 가증한 것으로부터 인도해 내셔서 그들로 그분의 율법을 지키게 하십니다. 이 일로 인해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의 분노는 끝이 없습니다. 실제(實際)의 허락의 땅이 바로 우리 앞에 있고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여 그들로 유업을 받지 못하게 하기로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는 권고가 지금처럼 더 필요한 때가 전에 결코 없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9:31),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신 18:12)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역시 이 시대에 사는 그분의 백성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과 흑암의 왕의 깃발 아래 서 있는 사람들로 나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아마겟돈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중에서 아무도 조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우리의 등과 그릇에 기름을 채우고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성령의 능력이 우리 삶에 충만함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 보다 엄숙한 사건이 닥쳤을 때 미련한 처녀와 같이 그제서야 이리저리 기름을 구하려고 방황할 것입니다.

 

30. 길을 잃은 다윗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다윗과 그 부하들은 비록 블레셋 사람과 함께 전쟁 마당으로 진군하기는 했으나 사울과 블레셋 사람 사이의 싸움에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군대가 전투에 임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에 이새의 아들은 자신이 크게 난처한 입장에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을 위하여 싸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싸움 중에 그에게 배정된 진지를 포기하고 전쟁 마당에서 물러간다면 그는 자신을 겁쟁이로 낙인을 찍을 뿐 아니라 그를 보호하고 신임한 아기스를 배신하고 반역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위는 그의 이름을 더럽힐 것이며 그는 사울보다 더 무서운 원수들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잠시라도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자기 나라의 반역자,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원수가 될 것이며 그 일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를 얻으려는 그의 길을 영원히 막을 것이며 혹시나 사울이 전쟁에서 죽게 되면 그의 죽음의 책임이 다윗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여호와와 그의 백성의 공공연한 원수들에게서 피난처를 찾기보다 하나님의 강한 산성에서 피신처를 찾았더라면 그에게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크신 은혜를 베푸사 이 같은 잘못에 대하여 그분의 종을 형벌하지 않으셨으며 그를 고통과 곤란 중에 버려두지도 아니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는 손을 놓고 돌이켜 온전한 성실의 길에서 떠나갔으나 그의 마음의 의도는 여전히 하나님께 충실하려고 한 까닭이었습니다. 사탄과 그의 대군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도와 하나님을 저버린 왕을 대적하려는 계획으로 분주한 반면에, 여호와의 천사들은 위험에 빠져 있는 다윗을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사자들은 블레셋 방백들을 움직여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그들과 같이 전쟁에 나아가는 것을 반대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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