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 271호 [매일의 말씀]

271호 [매일의 말씀]

 

1. 신년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계문 목사입니다.
2022년을 열한시 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벅찬 감사와 행복이 가득합니다. 코로나로 어두운 지난해였지만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였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새롭게 주어진 올해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나아갈 길을 인도하시고 먹이시며 채우시고 함께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열한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 세워졌고 그동안 교회를 와해시키려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는 항상 넘치도록 충만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우리를 하늘까지 인도하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하늘 가족 여러분!
평생 참된 복음과 진리를 찾아 헤매다가 이제야 주님 품에 안겨 참 안식과 참 자유와 참 평안을 선물로 받게 되었지요. 그 감격, 그 감사, 그 은혜, 그 사랑에 겨워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은 한편의 설교처럼 은혜가 되어 이제 세상 모든 이의 마음에 오래도록 향기를 남기도록 합시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진리의 길로 들어섰으나 때론 여러 상황에서 범죄하게 되는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우리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앞으로 전진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성령의 필요를 느끼고 구합시다! 서로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하며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 됩시다! 서로 아껴주며 함께 하늘 가는 동행 이웃들이 됩시다! 마음의 그릇을 정결케 하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늦은 비를 맞을 준비를 합시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약속된 권능을 충만히 부어 주셔서 길고 길었던 구속의 역사를 마치는 그날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주님의 날이 가까웠습니다. 이 세상 역사를 곧 마치고 사랑하는 여러분과 손에 손을 잡고 하늘문에 들어가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아멘!

 

2. 한나의 서원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시 22:9)

한나는 브닌나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고 이 세상 친구와 나눌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였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치욕을 거두시고 그분을 위하여 양육하고 교육할 한 아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열렬히 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만일 자기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아이를 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였습니다. 한나는 성막 문 곁으로 가까이 나아가 마음이 괴로워 “기도하고 통곡하”였으나 그는 조용히 하나님과 교통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악한 시대에는 그와 같이 예배하는 광경을 보기가 매우 드물었는데, 종교적 축제에서까지도 불경한 연락과 술 취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엘리는 한나를 보고 술 취한 줄로 생각하고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 1:14)고 훈계할 때, 한나는 마음이 아프고 놀랐으나 온유하게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 이오니…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 됨이 많음을 인함이니다”(삼상 1:15, 16)고 대답하였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응답되어 그처럼 열렬히 간청하던 선물을 받았으며 그 아이를 “사무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구하였다”(삼상 1:20)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서 떨어질 수 있을 만큼 자라자 곧 한나는 그의 서원을 이행하였습니다. 그는 어머니로서의 온 정성을 다하여 그의 아이를 사랑하였습니다. 사무엘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바라보고 그의 재잘거리는 귀여운 소리를 들을 때에 한나의 애정은 날마다 사무엘과 더욱더 밀착되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의 외아들인 동시에 하늘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성별 된 보물로 받았으므로 그를 소유주이신 주신 분께 돌려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3. 엘리의 과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 2:12)

한나는 다시 한번 남편과 함께 실로에 가서 그의 귀중한 선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사장에게 바치면서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삼상 1:27, 28)고 말하였습니다. 엘리는 이 이스라엘 여인의 신앙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지나치게 방임하여 온 엘리는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에 바치기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과 헤어지는 이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을 바라볼 때에 두려워하고 수치를 느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이기적 사랑에 대하여 자책을 느끼며 면목이 없다는 생각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과 의무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들의 신실한 봉사에 따르는 보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매 순간 자녀들에게 미치는 어머니의 감화는 그들에게 영생을 얻을 준비를 시키든지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당할 준비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있는 어머니는 강단에 서 있는 목사보다, 심지어는 보좌에 앉아 있는 임금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의 처사, 곧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방임한 죄, 제사장으로서 임무를 태만히 한 죄는 꿋꿋하고 자기 부정적인 한나의 신실성과 고통스러운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뜻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받으시며 어떤 일을 정죄하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이들이 방자한 정욕과 삐뚤어진 식욕과 타락한 도의심(道義心)을 그대로 가지고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자녀들을 교훈하였고 자신의 생애로 선한 모본을 보였지만 이것만으로 그의 의무를 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아버지로서 또 제사장으로서 자녀들이 그들의 왜곡된 의지를 좇아 행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4. 한나의 기도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한나의 마음에는 기쁨과 찬양이 넘쳐흘러서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싶었습니다. 영감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한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유족(裕足)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 2:1~10).
한나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할 다윗과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인 말이었습니다. 처음에 오만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던 여인의 거만에 대하여 언급한 이 노래는 하나님의 원수들의 멸망과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후의 승리를 지적한 것입니다.

 

5. 어머니의 역할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잠 4:1)

한나는 아이의 지력이 싹트기 시작하는 초기부터 자기 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자신을 여호와의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쳤습니다. 한나는 아들 주위에 있는 모든 익숙한 사물을 통해 그의 생각을 창조주께 향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한나는 매일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매년 아들의 예복을 손수 만들어 남편과 함께 예배하러 실로에 갈 때 가지고 가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작은 예복은 올마다 그가 순결하고 고상하고 진실하기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기도로 짜여 있었습니다. 한나는 자기의 아들이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가 하늘이 귀중히 여기는 위대함,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웃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열렬히 탄원하였습니다.
이처럼 한나의 모본은 자녀를 위한 충실함에 큰 격려가 됩니다. 모든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이 값진 기회와 무한히 귀중한 역할이 위임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이 싫증 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대수롭지 않은 매일의 의무는 중대하고 고상한 사역으로 간주하여야 할 것입니다. 감화를 통하여 세상을 복되게 하는 일이 어머니들의 특권이며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마음에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기쁜 일과 궂은일을 통하여 저희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하늘로 가도록 길을 곧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만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성품을 거룩한 모본을 따라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부패한 감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행과 습관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만일 어머니들이 교훈하고 지도하고 제어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는 자녀들은 자연히 악을 용납하고 선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주 구주 앞에 나아가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모든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 가운데 주신 교훈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6. 사무엘의 어린 시절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 2:26)

사무엘이 젊은 시절을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였으나 악한 감화나 죄악의 모본이 없는 환경에서 살지는 못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고 제사장인 아버지를 공경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과 짝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악한 길을 따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대하신 바와 같이 된 것은 그가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젊은이의 특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섬기는 일에 헌신할 때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그의 사랑스러운 성품은 연로한 제사장 엘리의 뜨거운 애정을 끌었습니다. 사무엘은 친절하고 아량 있고, 순종하고 공손하였습니다. 제멋대로 고집하는 자기 아들들로 인하여 상심한 엘리는 그가 맡아 보호하는 이 아이에게서 안식과 위로와 축복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유용하고 애정이 깊었으며 엘리는 누구보다도 이 젊은이를 사랑했습니다. 국정(國政)을 맡은 자와 단순한 아이 사이에 이처럼 뜨거운 애정이 존재하게 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엘리는 고령으로 허약해지고 자기 아들들의 방탕한 행위로 인하여 근심에 싸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마다 위로받기 위하여 사무엘에게로 향했습니다.
레위인들의 규례로는 25세 전까지는 그들의 특별한 봉사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사무엘은 예외가 되었습니다. 해마다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임무가 위임되었으며 그가 아직 아이 때에 성소의 직무에 성별 된 증거로 세마포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 성막에서 수종 들도록 데려왔을 때 그는 매우 어렸지만, 그때에도 그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수행해야 할 의무를 줬습니다. 이 일들이 처음에는 매우 보잘것없는 일이었고 언제나 즐겁게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나, 그는 최선을 다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들을 수행하였습니다.

 

7. 하나님의 동역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고후 3:17)

사무엘은 그의 생애의 모든 의무에 그의 종교를 결부시키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고 그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성실한 소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우주의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사업을 완수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자녀들이 날마다 연속되는 하찮은 의무들을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정해 주신 과정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저희가 충실하고 효과적인 봉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받는 학교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일이 훨씬 더 즐겁고 명예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모든 의무를 주께 하듯 하는 것은 가장 천한 일에도 매력을 주고, 지상의 일꾼들을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룩한 자들과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현세에서 성공하고 내세를 얻는 일에 성공하는 것은 작은 일들을 충실히 하고 양심적으로 돌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세계들을 허공에 다신 하나님의 손은 섬세한 솜씨로 들의 백합화를 만드신 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영역에서 완전해야 합니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균형 잡힌 성품의 건물은 각자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행위로 건축됩니다. 우리가 작은 일을 충성스럽게 하고 친절하게 수행한다면 우리의 인생길은 즐거워질 것입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사역이 끝날 때 작은 의무들 하나하나마다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선한 감화를 끼쳤음이 판명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도 사무엘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하게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적 성실을 충실히 유지함으로 개혁 사업에 큰 감화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하며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는 자들의 성취는 가장 값진 성취가 될 것입니다.

 

8. 엘리의 아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

엘리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동시에 사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가장 높고 책임이 중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는 거룩한 제사장 직분과 최고의 재판권을 가지고 그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추앙되고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큰 감화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비록 온 백성을 다스리도록 임명을 받았으나 자기 가족들을 잘 다스리지 못했는데, 그는 아이들을 너무 귀여워하는 아버지였습니다. 평화와 안일을 사랑하는 그는 자녀들의 악한 습관과 정욕을 시정하는 데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자녀들을 나무라거나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뜻에 굴복하여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방임하였습니다. 그는 자녀들의 교육을 가장 중요한 책임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고 사소한 일처럼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보호 아래 두신 자기 자녀들을 억제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아들들의 뜻을 거스리고 그들을 체벌하고 어떤 것은 거절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는 그의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지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저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도록 하고, 그들로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생애의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 적합한 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일을 게을리하였습니다. 엘리는 자기의 자녀들이 자기를 지배하도록 허용하였으며 아버지는 자녀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그분의 율법의 신성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년 시절부터 성소와 그 봉사에 익숙하였으나 더욱더 경건하게 되는 대신에 그 거룩함과 중요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는데, 그 결과 성년이 되었을 때 그들은 회의와 반역의 치명적인 열매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9. 방종과 탐욕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觸犯)하였음이라”(사 3:8)

엘리의 아들들은 전혀 그 직무에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희생 제물들을 바치는 일에 대해 매우 특별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악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권위를 계속 무시하고 가장 엄숙한 방법으로 거행되어야 할 제사의 예법을 무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희생 제물들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오실 구세주에 대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관한 여호와의 지시를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화목 제물은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지만 이 제물 중에 기름만은 번제단에서 불태워야 하였고, 특정한 어떤 부분은 제사장들을 위하여 남겨 두었으나 대부분은 제물을 바친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어 그들로 희생 잔치를 베풀어 저희 친구들과 함께 먹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감사와 믿음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크신 희생 제물로 향해야 하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이 상징적 예배의 엄숙성을 깨닫는 대신에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것을 방종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화목 제물 중 저희에게 배당된 부분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부분을 요구하였으며 연중 절기 때마다 드리는 수많은 화목 제물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비용으로 치부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 이상을 요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서 기름을 태우기까지도 기다리지 않았고 저희가 좋아하는 부분은 무엇이든지 달라고 고집했으며 주지 않겠다고 하면 위협과 폭력으로 빼앗아 갔습니다.
이와 같은 제사장들의 불경이 마침내 제사의 거룩하고 엄숙한 의의를 상실케 하여 백성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삼상 2:17)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저희가 바라보아야 할 원형의 희생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컸습니다.

 

10.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엘리의 아들들 즉 이 불충실한 제사장들은 비열하고 욕된 행위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들의 신성한 직분을 욕되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성막은 그들이 들어감으로 계속 더럽혀졌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부패한 행로를 보고 분개하여 지정된 예배 장소에 올라가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는 악인들의 죄로 인하여 멸시와 무시를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불경과 방탕과 우상숭배가 무서울 정도로 유행하였습니다.
엘리는 그의 아들들이 거룩한 직분을 맡아 봉사하도록 허락함으로 큰 과오를 범하였으며 그들의 행동을 이 핑계 저 핑계로 변명함으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백성들은 그들의 난폭한 행위에 대하여 불평했고 대제사장은 그들의 죄악을 더 이상 눈감아 줄 수 없는 형편에까지 이르게 되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 밖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도록 성장했기 때문에 이제 어느 누구에 대해서 구애받지 않게 되었고 그들은 아버지의 슬픔을 보았으나 그들의 굳은 마음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부드러운 훈계를 들었으나 아무 감명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의 죄의 결과에 대하여 경고를 받았으나 그들의 악한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만일 엘리가 그의 악한 아들들을 공정하게 다루었다면 그들은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되고 사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정죄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는 그들로 하여금 가장 신성한 직무를 계속해서 수행하도록 놔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를 수행하는 데 그들의 부패를 곁들이게 함으로 인하여, 여러 해에 걸쳐서 지울 수 없는 손해를 진리의 사업에 끼치도록 묵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사사가 자기의 직무를 게을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직접 처리하셨습니다.

 

11. 권한과 책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6)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그의 아들들을 당신보다 더 중히 여긴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엘리는 그의 아들들의 사악하고 가증한 행위로 인하여 그들이 수치를 당하도록 하는 대신에,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물이 가증한 것이 되도록 놔뒀습니다. 그는 자녀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 때문에 그들의 죄를 책망하지 않았고 악을 시정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녀들로 하여금 저희의 이기적 욕망을 만족시키도록 버려두는 자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보다 악한 자녀들을 더 중히 여기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명성을 보호하기에 더욱 급급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고 사악한 일로부터 주님께 대한 예배를 지키기보다는 저희 자녀들을 더욱 기쁘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를 백성들의 도덕적·종교적 상태와 그의 가정의 자녀들의 성품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엘리는 처음에 온화한 방법으로 악을 제어하도록 시도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으로 되지 않을 때는 가장 단호한 방법으로 행악자들을 진압해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죄를 책망하지 않고 죄인을 형벌하지 않는 그에게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도록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악을 책망할 용기가 전혀 없는 자들이나 게으름과 관심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정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정결케 하는 일에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저희가 의무를 태만히 함으로 초래한 악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나 교회의 지도자로서 우리의 권위로 저지할 수 있었던 악에 대하여 그것이 마치 우리 자신의 죄악인 것처럼 똑같이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분의 교회를 위해 세워진 자들이 그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그들은 자신들을 가장 효과적인 사탄의 대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12. 지도자가 끼치는 감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고후 5:20)

엘리는 가족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그의 가족을 다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따랐습니다. 그 다정한 아버지는 그의 아들들의 유년 시절에 그들의 과오와 죄를 묵과하고 장차 그들이 자라나면 그들의 악한 성벽을 버릴 것이라고 혼자 속으로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와 같은 과오를 범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중에 주신 그것보다도 저희 자녀를 교육할 더 나은 길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녀들의 그릇된 성벽을 조장하면서 “저희들은 벌받기에는 너무 어리다. 저희가 커서 사리를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라고 핑계합니다. 그리하여 그릇된 습관들은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굳어지도록 방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은 제지를 받지 않고, 그들에게 평생 저주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기 쉬운 성품의 특성을 가지고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허락하는 것보다 가족들에게 더 큰 저주가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부모가 알기에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데 방종하게 할 때, 자녀들은 곧 부모들에 대한 모든 존경심과 하나님이나 인간의 권위에 대한 모든 존중심을 잃어버리고 사탄의 뜻에 복종하게 됩니다. 잘못 단속한 가족의 영향은 널리 퍼지고 온 사회와 국가에 해를 끼치는 악의 조수를 쌓아 올리게 됩니다.
엘리는 그의 지위 때문에 그의 감화는 보통 사람들의 감화보다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그의 가정생활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방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의 태만하고 안일을 사랑하는 생활 태도의 해로운 결과는 그의 모본을 따라 이루어진 무수한 가정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공언하는 부모의 자녀들이 악습에 방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 대한 가장 좋은 시금석은 그 가정의 감화로 이루어진 성품이 어떠냐에 있습니다.

 

13. 언약의 조건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민 3:10)

만일 신앙생활을 하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는 축복의 증거로서 잘 정돈된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열렬하고 꾸준하고 근실한 노력을 하는 대신에, 가정을 치리하는 데 완만하고 저희 자녀들의 악한 욕망에 대해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엘리처럼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수치를 가져오고 자신과 저희 가족들을 파멸시키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불충실로 인한 죄가 지도자로 임명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때 그것은 십 배가 더 커집니다. 자기 가족들을 다스리는 일에 실패하게 되면 그들의 그릇된 모본이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위가 다른 사람의 지위보다 더 중하게 되면 그들이 짓는 죄도 그만큼 무거워집니다.
아론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리라는 언약이 체결되었으나 그 언약은 저희가 자신의 사욕이나 사악한 성벽을 따르지 않고, 전심으로 성소의 일에 헌신하고 그들의 모든 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조건으로 체결된 것입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시험을 받았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그분을 섬기는 높은 제사장 직분에 부적당함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삼상 2:30)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하신 선을 이루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직에 종사하는 자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그분에게 범죄 하는 일을 무서워하도록 모본을 통해 깊은 감명을 주어야 합니다. 다른 집 자녀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해야 되느니, 무엇을 해야 되느니 하면서 스스로를 탁월한 재판관이나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 아들딸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한 지도자가 짓게 되는 죄는 옳고 그른 것, 순결하고 사악한 것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14.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얼마 동안은 악한 행위를 비밀리에 행할 수 있으나, 마침내 그들의 실상이 드러나게 될 때 백성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고, 그것이 흔히는 그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불신할 여지를 남겨놓게 됩니다. 그리하여 참 그리스도인 종의 메시지도 의심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사람도 우리가 매우 거룩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처럼 부패했음이 판명된 그 자와 같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그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마침내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가 그의 아들들을 책망한 말에는 엄숙하고도 무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 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삼상 2:25). 만일 그들의 범죄가 다만 그들의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었다면 법관이 형벌을 선고하고 손해 배상을 하도록 함으로 화해가 이루어지고 범죄자들이 용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만일 고범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을 위하여 속죄 제물을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을 드리는 그들의 직무와 연결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사역은 백성들 앞에서 크게 모독과 수치를 당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는 어떠한 속죄 제물도 가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신이 비록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감히 그들을 위하여 중재하지 못했고 그들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방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죄인들 중에 가장 중한 죄인은 하늘이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준비하신 방법을 멸시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을 보이”(히 6:6)는 자입니다.

 

15. 돌이킬 수 없는 경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렘 15:1)

엘리와 그 아들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경고를 받아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경고를 그들에게 직접 전하실 수 없으셨는데, 그들의 죄가 빽빽한 구름처럼 그분의 거룩한 성령의 임재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악이 난무하는 중에도 아이 사무엘은 하나님께 충실하였으므로,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엘리의 집에 정죄의 메시지를 전달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백발노인인 그분의 택하신 종을 버리시고 한 아이로 더불어 교통하신 이 일 자체가 엘리와 그 집에는 혹독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당연한 견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심중에는 시기나 질투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사무엘은 너무나 두려워 엘리가 그에게 말하도록 명한 말을 그대로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 메시지를 받기 전에는 사무엘은 선지자들에게 허락하신 바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의 직접적인 출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같이 엘리로 하여금 어린 사무엘을 통하여 그것을 들을 수 있도록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 여호와의 목적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위임된 그처럼 무서운 메시지를 생각할 때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침에 그는 평상시와 같이 그가 할 일을 하려고 나아갔으나 사무엘은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어떤 질문을 받지나 않을까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엘리를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그 기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집에 어떤 큰 재난을 예고하는 것임을 예감하고 사무엘을 불러 여호와께서 나타내신 바를 빠짐없이 말하도록 명했습니다. 소년은 그의 말을 순종했고 늙은 엘리는 머리 숙여 그 무서운 선고에 겸손히 복종하였습니다. 엘리는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고 말하였습니다.

 

16. 죄의 결과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사 50:1)

엘리는 하나님의 선고에 순종은 했지만 참된 회개의 열매를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죄를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무서운 형벌을 지체하셨을 때, 엘리는 과거의 실패를 속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노령의 제사장은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히고 무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죄악들을 시정하기 위한 아무런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홉니와 비느하스로 하여금 저희 마음을 굳게 하고 여전히 범죄 하는 일에 담대하게 하였습니다.
엘리는 자기의 집에 대한 경고와 책망의 메시지를 온 국민에게 알렸습니다. 이 방법으로 그는 자기의 과거의 태만이 끼친 악한 감화를 어느 정도 막아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를 제사장들이 무시한 것처럼 백성들도 무시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죄악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인근 국가의 백성들 역시 그들의 우상숭배와 범죄를 전보다 더 대담하게 감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실을 유지했더라면 그들이 느끼게 되었을 저희 죄의 흉악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응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무시되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태만히 여김과 멸시를 당했으므로 그분의 성호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고도 대제사장이나 선지자의 찬동도 없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기도하였으며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에게 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낙담한 군대가 진으로 돌아올 때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삼상 4:3)라고 말하였습니다. 온 나라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만큼 그들의 죄가 무르익었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죄가 이 무서운 재난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17. 법궤를 빼앗김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렘 7:16)

블레셋에게 패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삼상 4:3)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법궤를 진지로 가져가도록 명령하지도 않으셨고 허락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승리가 저희 것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엘리의 아들들이 법궤를 진 중으로 가져올 때 큰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블레셋 사람은 법궤를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셨던 모든 기적들은 법궤의 권세의 덕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법궤가 도착할 때의 기쁨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은 처음에는 두려워하였으나 오히려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용감하게 싸움에 임하였습니다. 블레셋의 맹렬한 공격에 이스라엘 군사 3만 명이 싸움터에서 죽어 넘어지고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들은 법궤를 방어하려고 싸우는 동안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장래의 모든 시대를 위한 증언,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죄악은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역사의 페이지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의 죄는 더욱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겨 원수의 소유가 되었으며 여호와의 임재와 능력의 상징이 저희 중에서 떠났을 때 실제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에 대한 가장 놀랄 만한 계시가 이 성스러운 법궤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전에는 이 법궤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기적적 승리를 얻곤 했습니다. 금으로 만든 그룹의 날개는 법궤를 덮었고, 눈에 보이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상징인 속죄소의 영광이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를 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법궤는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법궤가 방벽이 될 수 없음이 밝혀졌고 온 이스라엘은 통곡하였습니다.

 

18. 이스라엘의 법궤 숭배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이 다만 명목상의 신앙에 불과했고 하나님께서 들으실 만한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법궤 속에 간직한 율법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명을 멸시하고 그 요구를 경시하여, 그들 중에 계시는 여호와의 성령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거룩한 계명을 순종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위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법궤를 하나님과 관련시키지도 않고, 그분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그분께서 나타내신 뜻을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에는, 그 법궤가 그들에게 보통 궤짝보다 더 유용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바라보듯이 마치 법궤 자체가 능력과 구원을 가진 것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법궤에 넣어 둔 율법을 범하였습니다. 법궤를 숭배하는 그 일이 그들을 형식주의와 위선과 우상숭배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켰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죄악을 버리기까지는 그들에게 승리를 줄 수 없으셨습니다.
법궤와 성소가 이스라엘 중에 있는 것으로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희생의 제물을 드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심중에 죄악을 품은 자의 요구를 듣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에 나아갈 때 눈멀고 늙은 엘리는 실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엘리는 걱정스러운 예감을 가지고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리”는 까닭이었습니다. 엘리는 성막 문밖에 자리를 잡고 대로변에 앉아서 날마다 근심스럽게 전쟁터로부터 사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한 베냐민 사람이 군대의 진에서 나와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무리에게 패배와 손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19. 죄의 결과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시 137:5)

전쟁에서 패한 소식을 듣고 슬피 울고 통곡하는 소리는 마침내 성막 곁에서 지키고 있는 엘리에게도 들려왔습니다. 사자는 엘리에게 “이스라엘이 블레셋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육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삼상 4:17)나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엘리는 두려워 떨었으나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그 말을 듣고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가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라고 덧붙여 말했을 때 자기의 죄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그분의 임재를 이스라엘에게서 거두시게 한 것을 생각할 때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남편이 불경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경외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이 불운한 시간에 탄생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즉 “영광이 없다”라고 명명하고 숨을 거두면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 4:22)는 말을 슬프게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아주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이방인의 희열을 오랫동안 허락하지도 않으실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형벌하는 도구로써 블레셋 사람을 사용하시고 블레셋 사람을 형벌하는 데는 법궤를 사용하셨습니다. 과거 시대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분을 순종하는 백성들의 힘과 영광이 되시기 위하여 법궤와 동행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는 여전히 법궤와 함께 하셔서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공포와 파멸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때때로 그분의 가장 큰 원수를 그분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불충실을 벌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악인들은 이스라엘이 징계를 당하는 것을 보고 한동안 승리의 개가를 부를지 모르나, 그들도 역시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형벌을 당할 때가 올 것인데, 죄악을 품는 곳에는 어디든지 신속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형벌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20. 블레셋에서의 법궤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륙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겔 6:4)

블레셋 사람들은 의기양양하게 법궤를 그들의 중요한 다섯 성읍 중의 하나인 아스돗으로 옮겨 그들의 신인 다곤 신당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법궤와 동행하던 능력이 저희 것이 되고, 이 능력이 다곤의 능력과 연합하여 아무도 그들을 이겨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신전에 들어갈 때 그들은 깜짝 놀랄 만한 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그 우상을 공손히 일으켜 다시 제자리에 세웠으나 다음날 아침에 그들은 다시 그 신상이 이상하게 머리와 손이 끊어진 채 법궤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우상의 상반신은 사람의 그것과 같고 하반신은 물고기와 같았습니다. 이제 인간의 모양과 같은 부분은 모두 절단되었고 다만 물고기의 몸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제들과 백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이 신비스러운 사건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우상들이 히브리인의 하나님 앞에서 멸망 당할 것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로 생각하였습니다.
아스돗 거민들은 비참하고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침을 당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재앙을 기억하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그들 중에 법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법궤를 가드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앙은 법궤를 옮긴 곳으로 따라갔으므로 그 성읍 사람들이 법궤를 다시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백성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라고 부르짖으며 가드와 아스돗 백성들처럼 저희 신들에게 가서 보호를 구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으므로 그 법궤를 들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러자 그다음에는 쥐들의 재앙이 뒤따라 그것들이 토지를 해치고 창고와 들에 있는 모든 땅의 소산을 멸하였습니다. 이처럼 질병이나 기근으로 인한 철저한 파멸은 이제 온 민족을 위협하였습니다.

 

21. 굴복의 동기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7)

7개월 동안 법궤는 블레셋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 모든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전에 저희가 법궤를 취하려고 고심했던 것처럼 이제는 법궤를 없애려고 고심했는데,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힘의 근원이 되는 대신에 무거운 짐과 큰 저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궤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하나님의 형벌이 따랐으므로 그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그 나라의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함께 불러 진지하게 묻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삼상 6:2)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값진 속건제를 드려 법궤를 돌려보내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옛날에 이방인 중에는 재앙을 예방하거나 제거하기 위하여 금이나 은 등으로 파멸을 일으키는 것이나 특별히 침해를 받은 대상이나 몸의 일부분을 우상으로 만드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우상을 기둥 위에나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세워 두면 그것이 대표하는 해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직도 어떤 이교도들 중에는 이와 비슷한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그 당시 성행하던 미신에 따라 백성들에게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질병의 형상, 곧 그들이 말한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라고 명하면서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라”(삼상 6:4)고 하였습니다.
이 현명한 자들은 이 신비스러운 능력, 곧 그들의 지혜로는 도무지 대처할 수 없는 능력이 법궤와 같이 하는 능력임을 승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권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형벌에 못 이겨 억지로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했으나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증오하였습니다.

 

22. 형벌의 의미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헛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복종할지 모르나 그와 같은 복종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회개가 가납되기 전에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부드러워져야 하는 것이지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얼마나 큰가요! 우상을 숭배하는 블레셋 사람과 타락한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을 향유하였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무수한 은혜가 감사치 않고 반역만 하는 사람들의 길에 고요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축복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인간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참으심이 말할 수 없이 컸으나 그들이 완고하게 회개하지 않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그들에게서 거두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경고와 권고와 책망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 중에는 법궤를 그 본토로 돌려보내는 일을 반대한 자들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자존심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그와 같이 하면 자신들에게 더 큰 고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여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법궤를 속건 제물과 함께 새 수레에 실어 법궤의 신성성을 더럽힐 모든 위험을 제거하고, 이 수레를 목에 멍에를 멘 일이 없는 암소 두 마리에 메우고 암소들을 저희가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법궤가 가장 가까운 레위인의 성읍 벧세메스 길을 따라 이스라엘인에게로 돌아가면, 블레셋 사람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리셨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었습니다.

 

23. 신성 모독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하나님의 임재가 법궤와 동행하여 지정된 장소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법궤를 따라 “벧세메스 변경까지” 왔던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궤를 받아들이는 것을 목격하고 에그론으로 돌아가자 재앙이 멎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의 재난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형벌임을 확신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처음에 제단으로 쓰던 돌 위에 안치하고 그 앞에서 많은 희생 제물을 여호와께 드렸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충실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법궤가 돌아온 것이 좋은 일의 전조라고 기뻐한 반면에 법궤의 신성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받아들일 적당한 장소를 준비하는 대신에 그것을 추수하는 들판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하여 거룩한 궤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돌아오게 된 놀라운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중에 이 법궤의 신비한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호기심에 못 이겨 덮개를 걷어치우고 감히 법궤를 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경외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법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길 필요가 있을 때에도 그것을 옮기는 레위인들조차 법궤를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의 법궤를 바라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교도인 블레셋 사람들조차도 감히 법궤의 뚜껑을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벧세메스 백성들의 불경한 행동은 신속한 처벌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이 돌연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 형벌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다만 미신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법궤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갈망하고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법궤를 가져가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법궤를 그들의 성읍으로 옮겨 와 레위 사람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하고 법궤는 여러 해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24. 참된 신앙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선지자의 직분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그 의무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었지만 엘리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충실히 전달함으로 여호와의 사신으로서의 자신의 성실성을 입증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삼상 3:19, 20).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족적으로 여전히 참 종교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형벌로서 블레셋 사람들의 속박에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중 사무엘은 전국 각 성읍과 동리들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의 노력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20 년간 원수의 압박으로 고생을 당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사모하”였고 사무엘은 그들에게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행하여 그만 섬기라”(삼상 7:3)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치신 것처럼 사무엘의 시대에도 실제적 경건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생활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는 신앙의 외형적 형식은 고대 이스라엘에게도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고대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과 같은 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부흥이 필요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이 모두 내디뎌야 할 첫 계단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각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우리의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때 주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구원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25. 에벤에셀의 하나님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고후 1:10)

각 지파의 두령들의 협력으로 큰 무리가 미스바에 모여서 엄숙한 금식을 실시하고 백성들은 깊이 겸비하면서 저희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은 교훈을 순종한다는 결심의 증거로 사무엘에게 사사의 권한을 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은 이 모임을 전쟁을 위한 집결로 오인하고 강한 군대를 보내어 그들의 계획이 성숙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분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블레셋 인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우리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 7:8)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고 있을 때 블레셋 사람은 싸우기 위하여 다가왔습니다. 그때에 불과 연기와 우레 가운데서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요단강에 길을 내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맹렬한 폭풍이 진군하는 군대를 쳐서 땅은 강한 전사들의 시체로 덮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겁에 질렸으나 하나님께서 저들의 회개를 가납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아무 준비가 없었지만 살육된 블레셋 사람들의 무기를 탈취하여 도망하는 군대를 벧갈까지 추격하였습니다. 이 현저한 승리는 20년 전에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제사장들이 살해되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던 바로 그 전쟁 마당에서 거뒀습니다.
각 개인과 마찬가지로 민족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순종하는 길은 안전과 행복의 길인 반면 범죄의 길은 그들을 재난과 패배로 인도할 뿐입니다. 블레셋 사람은 이제 완전히 정복당하여 이스라엘에게서 탈취한 요새들을 도로 내주고 여러 해 동안 적대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그때 일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스바와 센 사이에 큰 돌을 기념비로 세웠고 사무엘은 이것을 “에벤에셀”이라 부르고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 7:12)고 말하였습니다.

 

26. 선지자 학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여호와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교육을 지도하셨습니다. 그분의 돌보심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심사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적 혹은 육체적 안녕에 영향을 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에게 그분의 요구를 저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을 취급하신 일에 대하여 잘 알게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들의 특별한 의무, 곧 다른 이들에게 위임하지 말아야 할 의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낯선 사람의 입술 대신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마음이 저희 자녀들에게 교훈을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생각은 일상생활의 모든 일과 관련돼야 하였습니다.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적과 오실 구주에 대한 언약들은 이스라엘인들의 가정에서 자주 자세히 설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표상과 상징을 통하여 그 교훈들이 더욱 잘 기억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내세에 대한 대진리가 젊은이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었습니다. 자연의 경치와 계시의 말씀에서 똑같이 하나님을 보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별들, 들의 나무와 꽃들, 높은 산, 잔물결을 일으키는 시내 이 모든 만물은 창조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소에서 거행되는 제사와 엄숙한 예배 의식과 선지자들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모세는 고센 땅의 천한 오두막집에서, 사무엘은 충성스러운 한나의 곁에서, 다윗은 베들레헴 언덕에 있는 거처에서, 다니엘은 포로가 되어 조상의 집을 떠나기 전에 그와 같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사렛에서의 그리스도의 초기 생애도 역시 그와 같았으며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는 말씀처럼 외조모와 어머니의 입술로부터 성경을 배운 아이 디모데도 그와 같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27. 교육의 중요성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스라엘에 선지자 학교를 설립함으로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한 준비가 한층 더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더욱 깊이 연구하고 하늘의 지혜를 구하여 이스라엘의 교사가 되고자 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학교는 열려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보편화된 부패에 대한 방벽이 되고 청년들의 도덕적 영적 복리를 도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와 고문으로 봉사할 자격 있는 사람들을 배출시킴으로 장래의 민족적 번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선지자 학교를 세웠습니다. 사무엘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경건하고 총명하고 배우기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무리를 모았습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의 아들들이라 불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연구했을 때 그들의 타고난 재주에 하늘의 지혜가 첨가되었습니다. 교사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친히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학식과 경건, 이 두 가지에 있어서 백성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 당시에는 이러한 선지자 학교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선지자의 고향 라마에, 다른 하나는 그 당시 법궤가 있던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다른 학교들은 그 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어떤 육체노동에 종사하여 자신들의 노력으로 자활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것은 이상하거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든 자녀들은 어떤 일을 배워야 했으며 비록 성직을 위하여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했습니다. 많은 종교적 교사들은 노작으로 자급하였습니다. 사도 시대와 같은 근대에도 바울과 아굴라가 장막을 만드는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로 인해 존경을 덜 받지 않았습니다.

 

28. 선지자 교육의 정신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선지자 학교의 주요 학과는 하나님의 율법과 모세에게 주신 교훈과 거룩한 역사와 거룩한 음악과 시가였습니다. 교수 방법은 많은 학생들이 입학할 때보다 하나님께 대한 참 지식과 종교적 진리를 덜 가지고 졸업하는 오늘날의 신학교들의 교수 방법과는 훨씬 달랐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학교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배우는 것이 모든 학과 중에 가장 으뜸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역사의 기록에서 여호와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었고 표상으로 설명된 큰 진리들이 나타났으며 그 모든 제도의 중심적인 대상, 곧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을 믿음으로 붙잡았습니다.
학생들은 헌신의 정신을 품었으며 기도의 의무에 대하여 배울 뿐 아니라 기도하는 법과 창조주께 접근하는 법, 창조주께 대한 신앙을 행사하는 법과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화된 지력은 하나님의 보고에서 새로운 것과 옛 것을 이끌어 내었고 하나님의 성령은 예언의 성가(聖歌) 속에 나타났습니다.
음악은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순결하고 고상하고 향상하도록 저들의 사상을 높이고 영혼 속에 하나님께 대한 헌신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일깨워 주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음악에 대한 고대의 관습이나 용도와, 오늘날 흔히 음악이 쓰이는 용도 사이에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선물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하늘 궁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일부를 이루므로 우리의 찬양의 노래를 가능한 한 하늘 합창대의 화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음성을 올바로 계발하는 일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교육의 한 부분입니다. 종교적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노래하는 것은 기도가 예배에서 중요한 것만큼 중요합니다. 마음은 그 노래의 정신을 느껴야 하며 그 정신은 올바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29. 참 교육의 목적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시 25:4, 5)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가르친 방법들과 현재 우리의 교육 기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학교는 올바른 제지와 현명한 훈육이 한심할 만큼 부족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백성 중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참으로 놀랄 만합니다. 천박한 담화, 단순한 감상주의가 품행과 종교의 교육으로 통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신성함의 아름다움, 옳은 일에 대한 분명한 보상, 죄의 흉악한 성질, 죄의 무서운 결과의 확실성 등은 젊은이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지 못합니다.
참 교육의 목적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고상한 특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온몸의 능력은 모두 잘 조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과 그 결과는 이 선물들을 그르쳤습니다. 죄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거의 말살시켰습니다.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이 세워지고 유예의 생명이 허락된 것은 이것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인간의 목적은 인간이 처음 창조 받을 그때의 완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청년들의 교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과 협력하는 것이 부모와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영혼과 몸의 여러 가지 재능들은 가능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기적으로나 배타적인 목적으로 연마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닮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와 사랑인 까닭입니다.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모든 재능과 특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형제자매들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이렇게 사용한 것이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복되게 사용된 것입니다.

 

30. 하나님을 아는 교육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만일 오늘날의 교육이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자비로 꼴 지워져 갈 수 있도록 그 중요성을 감안해서 유의했더라면 현행 교육 방법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교만과 이기적인 야심에 호소하거나 경쟁심을 불 붙이는 대신에 교사들은 선과 진리와 미에 대한 사랑을 분기시켜 미덕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개발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고 애쓰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의 목적을 성취하고 창조주의 형상을 닮고자 할 것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 표준에 따라 행하거나 자고(自高) 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행함으로 자신을 위축시키고 저하시키는 대신에,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와 같이 되기 위하여 저들의 마음이 창조주께로 향할 것입니다.
인생의 최대의 의미는 성품을 건설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참 교육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어 주고 그것과 일치하는 성품을 형성시키는 일이 교사의 본분과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성품의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시 119:172, 104)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창조하신 만물을 통하여 그분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영감으로 기록된 책과 자연의 책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명상하도록 훈련을 받은 주제에 점차로 순응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법칙입니다. 만일 마음이 평범한 것들만으로 차 있다면 마음은 위축되고 약하게 될 것이며 한 번도 어려운 문제와 씨름해 보지 못한 마음은 얼마 후에는 성장의 능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교육하는 능력으로 말하면 성경을 당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사람들의 마음은 가장 깊은 생각과 가장 높은 포부에 대한 주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31. 지혜의 근본은 성경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성경은 인간이 소유한 가장 교훈적인 역사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진리의 샘으로부터 신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손길이 각 시대를 통하여 그 순결을 유지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통찰하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던 아득한 옛날을 비춰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지상의 기초를 놓고 하늘을 펴신 능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만 우리는 인간의 편견이나 인간의 교만심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우리 인류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찍이 이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투쟁과 패배와 승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의무와 운명의 큰 문제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로막은 휘장이 들리우고, 우리는 처음 죄악이 들어온 때로부터 의와 진리가 영원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의 선의 군대와 악의 군대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진리를 경건하게 고찰할 때 학생들의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연구는 성품을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할 뿐 아니라 지력을 넓히고 고무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현세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인류의 번영에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 번영의 초석이 되는 원칙들, 곧 사회의 안녕과 가정의 방벽이 되는 원칙들을 제시합니다. 이 원칙들을 도외시하고는 아무도 현세에서 유용함과 행복과 영예를 얻을 수 없고 장래에 불멸의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한다면 인간의 모든 분야의 철학을 면밀히 연구한 것보다 더 뛰어난 지성인들을 배출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힘 있고 견고한 성품을 가진 사람, 예리한 지각과 건실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세상에 축복이 될 사람들을 배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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