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 269호 매일의 만나

269호 매일의 만나

 

1. 하나님의 말씀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신 11:18, 19)

사탄은 항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왜곡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이해력을 어둡게 하여 그들을 죄악으로 인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매우 명백하게 말씀하시고 그분의 요구를 매우 알기 쉽게 만들어 아무도 실수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그분의 보호의 날개 아래로 끌어들이사 사탄이 그들에게 잔인하고 기만적인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사탄은 주의 언약과 요구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고 그것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게 하려고 몹시 노력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하여 뜻을 굳게 하고 그것들을 마음에 새기는 일을 더욱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와 교사들은 성경 역사에 나타난 사실과 교훈은 물론 여호와의 경고와 요구에 대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일에 보다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들을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한 말로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성경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있는지를 주시하는 것이 목사와 부모들의 사업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거룩한 페이지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지식으로 자녀들의 흥미를 일으킬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의 흥미를 일으키려면 자신들이 먼저 그것에 흥미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하나님 말씀의 교훈에 익숙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바와 같이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신 11:19) 이 말씀을 강론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창조 사업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분의 선하심과 위엄과 능력에 대해 말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하면 이 말씀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2. 기브온과의 동맹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시 15:4)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겜에서 그들의 진영이 있는 길갈로 돌아와서 얼마 후 이스라엘과 조약 맺기를 희망하는 사신들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그들의 고향은 팔레스틴 국경 저편 먼 나라인데 그들의 동포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경이로운 일에 관하여 듣고 이스라엘과 동맹을 체결하기 위하여 자기들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의 우상 숭배자들과는 어떠한 동맹도 체결하지 말라는 특별한 경고를 받았으므로 “너희가 우리 중에 거하는 듯하”(수 9:7)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사신들은 “우리의 이 떡은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낡아졌나이다”(수 9:12, 13)라고 진술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는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사흘 후에 그들은 근린에 거주하는 자로, 히브리인을 대항하기 불가능함을 안 기브온 사람들은 술책을 써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였습니다.
기만당하였음을 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하며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였으나 족장들은 비록 기브온인들의 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한 까닭에 조약을 깨뜨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기브온인들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여호와를 경배하기로 서약하고 그들의 생명을 보존한 것은 우상숭배 하는 가나안인들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저희가 서약한 맹세로 인하여 스스로 범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말로 서약한 의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된 행동을 하도록 속박하지 않는 한 신성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득이나 복수와 사욕 등 그 어떤 것도 그들이 한 맹세나 서약을 깨뜨릴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3. 기만적인 동맹이 주는 교훈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레 19:33, 34)

기브온인들은 죽음은 면하였으나 노예로서 성막에 매여서 온갖 천한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기쁨으로 응하였습니다. 기브온인들의 영토는 네 성읍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한 왕의 통치하에 있지 않고 장로 혹은 원로들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성읍 중에 가장 중대한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성읍이요”, “그 사람들은 다 강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읍의 백성들이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이처럼 굴욕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거민들에게 끼친 공포심에 대한 현저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기브온인들이 정직하게 이스라엘과 교섭하였다면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복종함으로 생명의 보존은 얻었으나 그들의 기만은 그들에게 굴욕과 노역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교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이스라엘과 연합하는 자들은 모두 다 언약의 축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과 희생 제물을 헌납하는 데 관하여 “회중 곧 너희나 우거하는 타국인이나…너희의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민 15:15)고 하신 것처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계급의 사람들도 이스라엘인과 동등한 은총과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만일 기브온인들이 기만적인 수단을 쓰지 않았더라면 위에 말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자손손이 내려가며 나무패는 자와 물 긷는 자가 된 것은 결코 가벼운 굴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만의 대가로 빈곤이란 의복을 채택하였고 그것은 그들을 영원한 종살이의 표로 속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노예의 상태는 오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거짓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4. 환난을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 41:10)

한편 기브온인들이 이스라엘에게 굴복한 일로 가나안 왕들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침략자와 화친한 자들에 대한 복수에 착수하고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의 지휘하에 가나안의 다섯 왕들은 기브온을 토벌할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들이 신속히 행동을 시작하자 기브온인들은 방어할 아무 준비가 없었으므로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수 10:6)라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위험은 기브온 백성에게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이르러 왔습니다. 이 기브온 성읍은 중부와 남부 팔레스틴의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고수해야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즉시 기브온을 구원하러 갈 준비를 했습니다. 포위된 성읍의 거민들은 저희가 행한 기만으로 인하여 여호수아가 그들의 간청을 거절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복종하고 하나님을 섬길 것을 받아들인 이상 여호수아는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하나님의 지시 없이 움직이지 않았고 여호와께서는 이 거사에 대하여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밤새도록 행군하여 아침에 그의 군대를 기브온 앞까지 인솔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도착했을 때 동맹군의 왕들은 그들의 군대를 성 주위로 소집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돌연한 공격은 적들을 완전히 패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막대한 군사들이 여호수아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으로 가는 산길로 올라갔고 산꼭대기에 올라간 후 그들은 반대편의 깎아 세운 듯한 내리막길로 급히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무서운 우박이 그들에게 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수 10:11).

 

5. 창조주의 능력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합 3:11)

아모리인들이 산성에 피난처를 찾으려고 무모하게 도망하기를 계속하고 있을 때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여호수아는 자기의 과업을 마치기에는 해가 너무 짧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적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힘을 얻어 역습해 올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수 10:12)고 기도하였습니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수 10:13)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날의 사건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4).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여호수아의 기도에 영감을 주셔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한번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위대한 지도자의 이 요구는 주제넘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의 원수를 분명히 멸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는 승리가 오로지 이스라엘의 군대에 달린 것처럼 그 싸움에 열렬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인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노력이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최대의 결과를 성취하는 자는 가장 열렬히 전능하신 자의 팔에 매달리는 자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은 능력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 큰 기적은 온 우주 만물이 창조주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사탄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사람들에게 감추려 하고 있으며 이 최초의 대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끊임없는 역사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적으로 자연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자는 모두 견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6.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수 11:9)

이스라엘의 벧호론에서의 승리는 신속히 남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게 하였고, 이 승리를 보고 두려워한 북방 팔레스틴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대항하기 위하여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동맹의 두령은 메롬 호수 서편 영토를 가진 하솔 왕 야빈이었습니다. 이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가나안에서 만났던 어떤 군대보다 큰 군대였으나, 여호수아는 메롬 호수 가까운 동맹군의 진지를 습격하여 그들의 군대를 완전히 전멸시켰습니다. 가나안인들의 자랑이었던 병거와 말들을 이스라엘은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병거들은 불사르고 말들은 힘줄을 끊어 전쟁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거와 말들을 사용하지 말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비록 가나안인들의 세력은 꺾였지만, 그들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팔레스틴 서쪽 해안을 따라 펼쳐진 비옥한 평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북쪽에는 시돈인들의 영토가 있었습니다. 레바논도 역시 시돈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애굽 쪽에 있는 남쪽 땅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전쟁을 계속하지 않았고 지도자의 직임을 양도하기 전에 수행하여야 할 또 다른 일이 있었는데, 이미 정복한 부분도 있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 땅을 전부 각 지파에 분배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분배된 기업의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은 각 지파의 의무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수를 그들의 앞에서 몰아내실 것이며, 백성들이 그분의 언약을 충실히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영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의 분배는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각 지파 족장들의 도움을 받아 행하도록 여호수아에게 위임되었고 각 지파의 구역은 추첨으로 결정해야 하였습니다.

 

7.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 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하게 될 때 각 지파에 분배될 전 영토의 경계는 모세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었고 분배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지파마다 1명씩 족장이 임명되었습니다. 토지 분배에 들어가기 전에 갈렙은 자기 지파의 두령들과 함께 나아와 특별한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정탐꾼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고 그들은 허락의 땅에 대한 좋은 보고를 가져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올라가 그곳을 정복하자고 백성들을 격려한 자들이었습니다. 갈렙은 헤브론을 그의 소유로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헤브론은 여러 해 동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집이 있었으며 그곳 막벨라 동굴은 그들이 장사된 곳이었습니다. 헤브론은 무서운 아낙인들의 본거지였고 그들의 무서운 외모는 정탐꾼들을 몹시 무서워 떨게 하였으며 그로 인해 온 이스라엘의 용기는 꺾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 갈렙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바로 그곳을 그의 기업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갈렙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수 14:10, 11)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갈렙과 같은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 사역에 있어서 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를 선호하는 정신에 경각심을 주는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갈렙의 이 요구는 유다 두령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자기 지파로부터 토지를 분배하는 데 참여하도록 임명된 자였으므로 그의 요구를 제출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위를 행사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8. 갈렙의 믿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헤브론 산지를 택한 갈렙의 요구는 즉시 수락되었습니다. 갈렙 이외에는 이 거인의 성채를 정복하도록 안심하고 맡길 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갈렙의 신앙은 지금도 그가 다른 정탐꾼들의 악한 보고를 반박하는 증언을 하던 그때의 신앙과 똑같았습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점령하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의 오랜 방랑 생활을 견디었으며 범죄한 형제들로 인하여 실망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하여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오히려 광야에서 그의 형제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자기를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때의 모든 난관과 위험과 재앙 중에서는 물론이고 가나안에 들어와 전쟁하는 여러 해 동안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보호하셨으며 이제 그는 80세가 지났으나 그의 기력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이미 정복된 땅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정탐꾼들이 정복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그곳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앙심을 동요시켰던 큰 세력을 가진 바로 그 거인들에게서 그들의 요새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탈취하고자 하였습니다. 갈렙의 요구는 그가 명예나 세력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용감한 노 전사(老戰士)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모본을 보여 각 지파를 격려하여 저희 조상들이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땅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갈렙은 40년 동안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기업을 얻었고 마침내 “거기서 아낙의…세 아들을…쫓아내었”(수 15:14)습니다. 이처럼 갈렙은 자기 자신과 자기 집을 위하여 기업을 얻었으나 그 열심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업을 얻은 것을 만족히 여겨 주저앉지 않고 민족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더 정복하고자 전진하였습니다.

 

9. 믿음의 백성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비겁한 자들과 반역자들은 광야에서 멸망 당했으나 의로운 정탐꾼들은 에스골의 포도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저희 신앙에 따라 상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저희가 두려워하던 대로 사건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들은 그들의 앞길에 가로놓인 어려움보다는 전능하신 조력자의 능력을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름다운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옛 위인들이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한”(히 11:33, 34) 것은 다 믿음으로 행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성실성을 시험받을 때를 대비하여 그들의 영적인 분별력이 계속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고난과 시련을 견딘 것 같이, 그리고 갈렙이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것처럼 우리도 옳은 일을 행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동료들의 계략에 귀를 기울이며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우리도 그들과 하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하늘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면 세상은 우리와 심한 마찰을 일으킬 것입니다. 땅의 권세가 개입하여 우리는 고초를 겪을 것이며,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이며, 거친 말과 조롱과 박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으로 가는 길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10. 다른 요구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

토지의 분배에 관하여 갈렙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정신을 드러낸 다른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 요구는 요셉의 자손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의 반 지파가 제출했습니다. 저희 수가 많은 것을 고려하여 이 지파들은 두 몫의 영토를 요구하였습니다. 제비로써 그들에게 할당된 곳은 가나안에서 가장 부요한 곳이며 샤론의 비옥한 평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골짜기에 있는 많은 중요한 성읍들은 아직도 가나안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이 지파들은 그들의 소유를 점령하는 수고와 위험을 피하고 이미 정복된 영토에서 다른 부분을 더 요구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여호수아 자신이 속한 지파로서 이스라엘 중에 가장 큰 지파 중 하나였습니다. 그 수로 볼 때 그들은 당연히 특별한 고려를 받을 만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수 17:14~18)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확고부동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엄격한 공의에서 떠난 일이 없었으므로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수 17:15)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철병거가 있나이다”(수 17:16)고 말한 그들의 대답에서 불평의 참 원인이 무엇임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인들을 쫓아내려는 믿음과 용기가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시리라고 보증하셨으므로 에브라임 사람들이 갈렙과 같은 용기와 신앙을 소유하였더라면 그들 앞에는 어떠한 원수도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난관과 위험을 피하려는 그들의 명백한 욕망은 여호수아의 단호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큰 민족이었으므로 저희 형제들처럼 충분히 자신들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실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수 18:1)

영토 분배가 끝나기 전까지 길갈이 이스라엘 민족의 본부였고 성소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그것이 영구적으로 안착할 곳으로 선택된 장소로 옮겨야만 하였습니다. 그곳은 에브라임 땅에 있는 작은 성읍 실로였습니다. 이곳은 가나안 땅의 거의 중앙에 있었고 모든 지파가 출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완전히 정복한 땅의 일부였으므로 예배자들이 출입하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성막을 길갈에서 옮길 때에 각 지파는 성막을 따라가 실로 가까이에 장막을 치고 저희 소유지로 분산될 때까지 실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엘리의 죄악으로 블레셋인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 후 실로가 망하기까지 법궤는 3백 년 동안 실로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법궤는 그 후 이곳 성막으로 되돌아오지 않았으며 마침내 성소 봉사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옮겨지고 실로는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렘 7:12~14)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땅 나누기를 마치고” 모든 지파가 저희 기업을 배당받은 후에 여호수아는 자기의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갈렙처럼 그에게도 기업에 관한 특별한 약속이 주어져 있었으며 여호수아는 광막한 지역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읍을 하나 요구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을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수 19:50). 이 성읍에 “남은 분깃”이란 뜻으로 딤낫세라란 명칭이 주어졌는데 이는 정복한 땅을 제일 먼저 취하는 대신에 자기 백성 중 가장 미천한 자들까지 다 분배 받기까지 자기의 요구를 연기한 정복자 여호수아의 고상한 인격과 무아적 정신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12. 도피성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민 35:11)

레위인에게 배당된 성읍 중 여섯 성읍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어 살인자가 도피하여 신변의 안전을 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민 35:12)고 말하였습니다. 이 자비스러운 제도는 사적복수(私的復讐)의 관습이 있던 옛날에는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때에는 죄의 증거가 분명한 경우에는 법관의 취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며 복수자는 어디든지 죄인을 추적하여 발견하는 대로 그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가나안 땅 어느 곳에서든지 한나절 안에 갈 수 있는 곳에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히브리인이나 이방인이나 우거하는 자들이나 누구든지 이 도피성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죄한 자를 성급히 죽이지 말아야 하는 반면에 실제로 죄가 있는 자는 결코 형벌을 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올바른 집권자가 도피자의 사건을 공정히 심판하여 고의적으로 살해하지 않은 일이 분명한 자만을 도피성에서 보호하였으며, 범죄자는 복수자의 손에 넘겨 주었습니다.
또한 살인죄에 대하여 심문할 때 비록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피고인을 정죄하지 말아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민 35:30)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와 같은 지시를 모세에게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위대한 교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에게 범죄자를 처리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마 18:16)고 하셨습니다.
국가의 안전과 순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인죄를 엄중히 처벌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게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3.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고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정된 도피성은 그리스도 안에 준비된 피난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땅의 도피성을 마련하셨던 자비로우신 구주께서는 그분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을 위하여 저희가 둘째 사망에서 피하여 안전함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를 준비하셨습니다. 어떠한 권세도 용서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하는 자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직업을 모두 버려야 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안전한 땅으로 피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이해관계를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도피자는 피로도 잊고 어려움도 돌아보지 못했으며 그 성벽 안에 도달하기까지는 감히 한순간도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신처를 찾을 때까지는 영원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피자가 불필요한 배회나 부주의로 인하여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빼앗기는 것처럼 지체함과 무관심이 영혼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적 사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모든 사람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위험에 민감하지 못하고 영원한 피난처에서 보호받으려고 열렬히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사탄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언제고 도피성 밖으로 나가는 죄인은 복수자의 손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믿음과 순종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 27).

 

14. 귀향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신 대로 얻은 땅 곧 그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수 22:9)

이스라엘의 두 지파 갓과 르우벤은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그들의 기업을 받았습니다. 유목민들에게 광활한 고원 지대와 길르앗과 바산의 풍부한 삼림이 그들의 양 떼와 소 떼를 위하여 가나안 본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광대한 방목지를 제공해 주는 데 매력을 느껴 이곳에 정착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두 지파와 반 지파는 그들의 몫에 해당한 군사를 보내어 다른 지파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서 다른 지파 모두가 기업을 얻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싸울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고자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저희 동포들 곁에서 용감히 싸웠으며 이제 그들이 저희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저희 동포들과 연합해서 싸웠으므로 노획물을 분배받아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여호수아 22장 참조)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족과 가축과 함께 현재 남아 있었던 자들과 분배해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여호와의 성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으며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목격한 여호수아는 그들의 고독한 유랑 생활 중에 저희 변경에 사는 이방 족속들의 관습에 빠지게 될 유혹이 얼마나 강할 것인지를 알고 마음속 깊이 근심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다른 지도자들의 마음이 아직도 불길한 예감에 눌려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이상스러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적적으로 강을 건넌 곳에서 멀지 않은 요단 강변에 두 지파와 반 지파는 실로의 번제단과 비슷한 큰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성전 이외에 다른 예배하는 곳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고 그렇게 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이 제단의 목적이 그런 것이고 그것을 그냥 둔다면 백성들을 참 신앙에서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

 

15. 증거의 제단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7, 8)

길르앗으로 돌아간 세 지파의 범죄 소식이 전해지자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들이 실로에 모이고 그들의 흥분과 분노가 고조되어 곧바로 범죄자들을 대항해서 싸움을 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신중히 생각하는 자들의 감화를 받아 먼저 대표자들을 보내어 두 지파와 반 지파에게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듣기로 하고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방백 열 명을 선택했습니다. 그 우두머리는 비느하스였는데 그는 브올의 사건에서 열성으로 이름을 떨쳤던 자였습니다.
두 지파와 반 지파가 그처럼 큰 의심을 받을 행위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공연히 행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대사들은 저희 동포가 죄를 범한 것으로 생각하고 날카로운 책망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 대사들은 그들이 여호와께 반역하였다고 비난하고 바알브올과 연합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형벌이 내렸는지를 기억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비느하스는 온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갓과 르우벤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희생 제단이 없는 땅에 거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건너편 너희 동포들의 소유지에서 분깃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피고인들은, 그들의 제단은 희생 제물을 드리려 함이 아니요 다만 그들이 요단강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지라도 가나안에 있는 동포와 동일한 신앙을 가졌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장차 그들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성막에서 제거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의 모형을 따라 세운 이 제단이 그것을 세운 자들 역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는 증거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수 22:34).

 

16. 관대한 태도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이스라엘의 대사들은 큰 기쁨으로 동족들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즉시 실로로 돌아갔습니다. 싸움하려던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백성들은 연합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그들의 제단에 그것을 세운 목적을 통해 미래의 오해를 방지하고 유혹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가치 있는 동기에 의하여 행동하는 자 중에서도 단순한 오해로 인하여 큰 어려움이 자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때 이러한 자들을 정중하고 관대하게 다루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결과로 번지게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열 지파는 아간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그들 중에 존재하는 죄악을 발견하기에 조심 없이 행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견책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신속하고 진지하게 행하기로 결심하였으나 먼젓번의 과오를 피하려는 노력 때문에 오히려 극단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하여 정중하게 문의하는 대신에 그들은 비난과 정죄로 저희 동포들을 대하였습니다. 만일 갓과 르우벤 사람들이 동일한 정신으로 반박하였더라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죄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단호하게 행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가혹한 형벌과 근거 없는 의심을 피하는 일 또한 다 같이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행위에 관하여 자책하는 데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을 매우 혹독하게 취급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일찍이 비난과 힐책으로 그릇된 태도를 교정받은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 바른길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저희 마음이 굳어져서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친절한 정신과 겸손하고 관대한 태도가 과오를 범한 자를 구원할 수 있고 많은 허물을 가릴 수 있습니다.

 

17.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르우벤 족속과 그 동료들이 나타낸 지혜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본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종교적인 사업을 추진시키고자 정직하게 노력하였으나 그들의 동족들로부터 잘못 판단을 받고 혹독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울분을 나타내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기 전에 저희 형제의 비난을 예의와 인내로 다 들은 후에, 자신들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저희의 무죄함을 나타냈습니다. 그리하여 자칫 전쟁의 결과를 가져올 뻔한 어려운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 비난 아래서라도 의로운 자들은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잘못 해석된 모든 것들을 잘 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사정을 안전하게 위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죄를 찾아내신 것처럼 분명히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의 사정을 옹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행하는 자들은 오래 참고 온유하게 행하는 사랑을 소유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사이는 연합과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에 드리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그분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분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한 원칙도 희생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이런 연합의 상태에 도달해야 함이 우리의 끊임없는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증거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교회에게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 9)고 권고합니다.

 

18. 다시 시작된 우상숭배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렘 9:4)

전쟁은 끝나고 여호수아는 딤낫세라에 있는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스러운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지가 여러 해 되었고,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형벌을 가져왔었던 동일한 죄악이 벌써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를 엄습하는 노쇠를 느끼고 그의 사업이 곧 끝나게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위하여 크게 염려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번 더 노지도자 주위에 모였을 때 그는 인자한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대하는 그 이상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간곡히 훈계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수 23:3)라고 말하였습니다. 가나안인들은 정복당하였지만 아직도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허락된 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일하게 거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을 완전히 쫓아내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잊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이방인을 축출하는 일을 완수하는 데 완만하였습니다. 각 지파는 저희 소유지로 분산되고 군대도 해산되었으므로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일은 어려웠고 수행하기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저희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조건에 순응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신 그분의 약속을 충실히 성취하신 일에 대하여 저희 자신이 증인이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수 23:14)고 하였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언약을 성취하신 것처럼 처벌하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19. 죄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원칙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수 24:1)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위협적인 말씀이 그분의 도덕 정치에 있어서 어떠한 목적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 말씀은 결코 문자 그대로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피조물을 취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죄를 그 참 성질 그대로 나타내심으로, 즉 죄의 분명한 결과는 비참함과 죽음이란 사실을 증거하심으로 의의 원칙을 유지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는 존재한 적이 결코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용서는 바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의의 원칙의 포기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하지 않은 우주를 경악(驚愕)으로 충만케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를 충실히 지적하셨는데 만일 이 경고가 참되지 않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공의를 무시하는, 이름만의 자비심이란 것은 참 자비심이 아니요, 다만 우유부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태초부터 모든 하나님의 법도가 생물에게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였고, 그리하여 불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죄악이 존속하는 한 고통과 사망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다만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의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인류는 자신에게 닥쳐올 죄악의 무서운 결과에서 피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각 지파의 두령과 대표자들은 그의 소집에 응하여 다시 세겜에 모였습니다. 온 가나안 땅에서 이곳처럼 매우 많은 신성한 연상을 일으키고 저희 마음에 아브라함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을 회상하게 하고 또한 저희 자신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맺은 엄숙한 서약을 기억나게 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20. 선택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실로에서 법궤를 가져왔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주고자 한 그 감명을 깊게 할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한 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이 섬길 자를 택하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우상숭배가 아직도 어느 정도 비밀리에 행하여지고 있었으므로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이 죄를 멸절시키도록 그들을 결심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강제로가 아니요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들을 인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참 종교의 기초입니다. 오로지 보상에 대한 희망에서나 형벌에 대한 공포심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위선과 형식적인 예배는 차라리 공공연한 배도보다 더 하나님께 불쾌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노령의 지도자는 그들에게 한 모든 말의 참뜻을 심사숙고하여 만일 그들이 참으로 그들 주위의 민족들처럼 참 비열한 우상숭배의 생애를 살고자 원하든지 결정하도록 백성들에게 강권하였습니다.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그날에 택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말은 이스라엘에게 신랄한 견책이었습니다. 아모리 사람의 신들은 그를 섬기는 자를 보호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가증하고 비열한 죄로 인하여 그 악한 민족은 멸망했고 한때 그들의 소유였던 아름다운 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바 되었습니다. 멸망 당한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기로 선택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까!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말했고, 지도자 여호수아의 마음을 감동하게 한 거룩한 열심이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21. 여호와의 종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구적인 개혁을 행하기에 앞서 저희 스스로는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이것은 그들을 범죄자로 정죄하였고 거기에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힘과 의를 의지하는 한 죄의 용서를 받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서약한 것은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그들은 죄의 사유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는 일을 멈추어야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얻고자 한다면 전적으로 허락하신 구주의 공로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백성들이 자신들이 하는 말을 잘 생각해서 하고 이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맹세를 삼가게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열성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선택했다는 증거에 엄숙히 동의하기 위하여 한 번 더 충성의 서약을 다음과 같이 반복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수 24:24).
이 엄숙한 계약의 전말을 기록한 여호수아는 이것을 율법책과 함께 법궤 곁에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념으로 돌기둥을 세우고 증거가 되게 한 후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수아의 사역은 다 이루었으며 그는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그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대중의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의 고결한 성품에 대한 증언은 그가 다스렸었던 세대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수 24:31).

 

22. 십일조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5)

히브리인의 제도에서 백성들의 수입의 10분의 1은 하나님께 대한 공중 예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소나 양의 십분 일은…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레 27:30, 32)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국가로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십일조를 요구하셨고 이 요구는 인정을 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야곱도 방랑자로 벧엘에서 방황할 때에 여호와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14:20, 28:22)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나라로서 세워지려고 할 때에 십일조가 하나님이 주신 제도 중 하나로서 그것을 순종하면 번영하게 될 것임이 재확인되었습니다.
십일조와 헌물 제도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시며, 그분께서 섭리하신 아름다운 선물에 대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명시키고자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시 50:1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신 8:18).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시로써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내려 주시는 것 중의 한 부분을 그분께 대한 예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십일조와 헌물로 드리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는…여호와의 것이다”라는 말에는 안식일 계명에 사용된 것과 같은 동일한 표현 방법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제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출 20:10)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시간과 재물 중에서 특별한 부분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셨습니다.

 

23. 헌물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신 26:10)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는 오로지 성소 봉사를 위하여 구별된 레위 지파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드리는 헌물의 한계가 십일조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전신인 성막은 전적으로 자원하는 헌물로 세워졌는데, 모세는 성전에 필요한 수리와 다른 비용을 준비하기 위하여 백성을 계수할 때마다 각 사람이 “회막의 봉사”를 위하여 반 세겔을 바치도록 명령하였습니다(출 30:13). 느헤미야 시대에는 이 목적을 위하여 매년 헌물을 바쳤습니다(느10:32). 때때로 속죄 제물과 감사의 헌물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이러한 헌물들은 연중 축제 때에는 매우 많이 드려졌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는 후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십일조 바치기 전일지라도 하나님의 요구를 인정하는 표시가 있었는데, 땅의 모든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하나님께 성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양털을 깎을 때의 처음 깎은 털과 밀을 타작할 때의 처음 얻은 곡식과 기름과 포도즙의 처음 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하였고 모든 짐승의 처음 난 것도 그러하였으며 처음 난 아들을 위하여서는 속전이 지불되었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성소로 가져가 여호와 앞에 드려서 제사장들이 쓰도록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의 들과 양떼와 소떼의 참 소유주라는 것과 당신께서 파종 때와 추수 때를 위하여 햇빛과 비를 보내셨다는 것과 그들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며 그분께서는 그들을 그분의 소유물의 청지기로 삼으셨다는 사실들을 항상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십일조와 헌물을 남용하는 교회도 문제지만, 하나님의 것을 드리지 않는 정신은 더욱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고 하신 경고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24. 헌물의 동기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히브리인들에게 종교적 목적과 자선 사업을 위한 목적으로 요구한 헌물은 결국 저희 수입의 4분의 1은 족히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그처럼 무거운 부담을 지우게 되면 그들이 빈곤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와 반대로 이 규칙들을 충실히 준수하는 것은 그들이 번영하는 조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조건으로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 3:11, 1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바쳐야 할 자원하는 헌물을 이기심을 가지고 바치지 않은 결과에 대한 현저한 예증이 학개 선지자 시대에 나타났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으나 원수들의 단호한 반대를 당하여 사업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그들은 실제로 빈곤에 빠져 심한 결핍으로 인하여 성전 건축을 완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선지자는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학 1:4~6)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학 1:9).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학 2:17). 이 경고를 듣고 분기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려고 애를 썼고 마침내 성전이 세워진 것입니다.

 

25. 청지기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눅 12:4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의 모든 거민에게 횃불을 든 자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공중 예배를 행함으로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최상권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사랑의 표현으로 그들의 특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선물을 받는 자들의 노력과 헌물에 의하여 이 세상에 빛과 진리가 전파되도록 정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무한하신 사랑과 지혜로써 사람들을 불러 이 사업을 행하도록 택하심으로 그분의 동역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시대에 십일조와 자원하여 드리는 헌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칙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물이 우리가 받은 빛과 특권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과 특권이 증가할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들의 비할 데 없는 영광스러운 희생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별을 전달할 수 있도록 더욱 많은 헌물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갈수록 확장되어 가는 복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는 옛날보다 더 큰 재물이 요구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법칙은 히브리인의 제도 때보다 오히려 지금 더 긴급하게 필요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금고를 채우기 위하여 자원하는 헌물로써 더 관대하게 드렸더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것이며 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성막을 건축하기 위한 모세의 모금에는 강권하는 일이 필요치 않았으며 오늘날 교회에서 채택하고 있는 어떤 방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분의 청지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청지기임이 밝혀지는 자들에게 더 큰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삼상 2:30)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 구제를 위한 헌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이스라엘은 종교적 예배를 위하여 백성들을 모으는 일을 촉진하고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하여 모든 수입의 제2 십일조가 요구되었습니다. 이 십일조나 거기에 상당한 재물을 백성들은 2년 동안은 성막이 서 있는 곳으로 가져와야 하였습니다. 바치는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제사장에게 지정된 몫을 준 후에 그 나머지를 종교적 연회를 위하여 사용해야 하였는데 이 연회에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참여시켜야 하였습니다. 매년 축제일에는 감사 예물과 연회를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였으며 백성들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교훈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 3년째 되는 해에는 제2 십일조를 모세가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 26:12)고 말한 바와 같이 집에서 레위인과 가난한 자를 접대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하였습니다. 이 십일조는 자선 사업과 접대하는 일을 위하여 사용될 자금을 공급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그 이상의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신 바를 인정한 다음에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관대하고 친절하고 후대하는 정신을 나타냄으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더욱 특출하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크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 중에 빈곤이 전혀 존재하지 않도록 계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땅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는 그들의 동정과 친절과 자비심을 받아야 할 대상이 항상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그때에도 사람들은 불행과 질병과 재산의 손실을 당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을 따랐더라면 그들 중에는 거지도 없고 배가 고파서 고생하는 자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27. 율법에 녹아 있는 사랑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하나님의 율법은 가난한 자들에게 땅의 소산의 얼마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배고플 때에 이웃의 밭이나 과수원에 들어가 허기를 때울 수 있을 만큼 곡식이나 과실을 먹을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 허락에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들을 지나가다가 곡식 이삭을 잘라먹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레19:9, 10)고 말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세심한 배려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칠 년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특별한 양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안식년이라고 불린 이 해는 수확이 끝난 후에 곧 파종기였는데 이때 백성들은 씨를 뿌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봄에 포도원도 가꾸지 말아야 했고 곡식이나 포도를 수확하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땅에서 스스로 난 것은 청청할 때에 먹을 수는 있었으나 곳간에 거두어들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 해의 소산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뿐 아니라 들짐승들이 자유로이 먹도록 놔두어야 했습니다(출 23:10, 11; 레 25:5).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가 명하여 제육 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 너희가 제팔 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구 년 곧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레 25:21, 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안식년의 준수는 땅과 백성들에게 모두 유익이 되었습니다. 1년 동안 경작하지 않고 둔 땅은 그 후에는 더욱 풍부한 수확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에는 이 기간 동안에 따르는 여러 가지 작은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큰 휴가를 누렸으며 다가올 여러 해 동안 쓸 수 있는 체력을 저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더욱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도에 바치고 여호와의 가르치심과 요구에 통달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교훈하였습니다.

 

28. 약자에 대한 배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 37:21)

하나님의 율법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세심하게 마련되어 있었는데,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신 24:14, 15)고 하였으며, 노역에서 도망하는 자들의 대우에 관해서도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돌리지 말고 그가 성읍 중에서 기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 거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신 23:15, 16)고 하였습니다.
제칠 년은 가난한 자들이 빚에서 놓이는 해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어느 때나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므로 곤궁한 동포를 도우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만일 빚을 면제 년까지 갚지 못할 때에는 원금까지도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도움이 필요되는 동포를 버리지 않도록 분명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칠 년 면제 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반드시 네 손을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9, 11, 8).
아무도 자신들의 너그러움이 그들을 빈곤하게 만들 것이라고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분명히 번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신 15:6)고 말씀하셨습니다.

 

29. 희년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일곱 안식년” 즉 “칠 년이 일곱 번” 지난 후에는 대면제 년 곧 희년이 되었습니다.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레 25:9, 10)니라.
희년의 나팔은 “칠월 십일…속죄일”에 불었고 유대 백성이 거하는 전국에 그 소리가 들려 모든 야곱의 자손들을 불러 면제 년을 환영하게 하였습니다. 대속제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속죄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희년을 환영해야 했습니다.
희년에는 안식년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 파종하거나 추수하지 말아야 하였고 땅의 소산은 가난한 자들의 정당한 소유로 간주되어야 했으며 안식년에 자유를 얻지 못한 히브리 노예들이 모두 풀려났습니다. 특별히 희년을 특출하게 만든 것은 모든 소유지를 그 본래의 소유자의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지시에 따라 가나안 땅은 추첨으로 분배되었고 그렇게 분배된 후에는 아무도 자기의 소유지를 팔 자유가 없었습니다. 가난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땅을 팔지 않았으며 팔았을지라도 그 후에 본인이나 그 친척이 다시 찾고자 할 때에는 언제든지 산사람은 그것을 다시 팔기를 거절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다시 찾지 못할 때에는 이 토지는 희년에 그 최초의 소유자나 그 상속인에게로 돌아갈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것이 당분간 그들이 소유하도록 허락된 하나님의 땅이며, 정당한 소유자요, 원지주이시므로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를 위하여 특별한 고려를 베푸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자비로우신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자들의 생애에 고통을 덜어 주고, 희망의 광선을 가져다주고 명랑한 빛을 비추시려고 이와 같은 대비책을 세우셨습니다.

 

30. 순종에 대한 축복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레 26:9)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재산과 권력에 대한 과도한 애착을 막고자 하셨습니다. 한 계층이 끊임없이 재물을 축적하고 다른 계층은 빈곤과 타락에 빠짐으로 인하여 큰 악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떠한 제재가 없다면 부자는 권력을 독점할 것이며 가난한 자들은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면에 매우 귀하다 할지라도 점점 번영하는 그들의 동포에 비해 열등한 사람들처럼 보이게 되고 또 그런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압박감은 보다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절망과 자포자기의 감정을 갖게 만들어 사회를 타락시키고 각종 범죄의 문호를 열게 만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법규는 사회적 평등을 유지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을 마련하신 것은 그동안에 발생된 온 국가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구조의 그릇된 점을 대폭 시정하시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법규들은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부자들에게도 축복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제정되었는데, 이것들은 허욕과 자고(自高)하는 성벽을 제어하고 고상한 박애 정신을 함양할 수 있으며 각 계급 사이에 호의와 신뢰심을 육성함으로 사회적 질서와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향상을 위하여 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처럼 상호 의존의 법칙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 다 적용됩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를 의지하는 것 못지않게 부자도 가난한 자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한 계층이 하나님께서 부요한 이웃에게 하사하신 축복의 일부를 요청하는 한편 다른 계층은 가난한 자의 자본인 뇌와 뼈와 근육의 힘으로 하는 노역을 필요로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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