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신앙기사 1부]

제1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4~18).

 

히브리서 1장에서 아들의 가장 고귀한 본질 곧 초월성을 말한다면 2장은 그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형제”로 소개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하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제대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형제”가 되신다는 놀랍고 고귀한 진리를 살펴보자.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인성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하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은 명백하게 예수님이 신성을 지녔다고 논증한 것처럼 그분이 인성을 지녔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한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관한 첫 번째 말씀이 2장 9절에 나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이것은 시편 8편을 인용한 말씀이다. 2장 14절에서는 혈연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2장 9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창조하고 그 생명을 유지하는 천사보다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2장 14절은 그분이 실제로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장 호소력 있는 논증은 2장 11~13절에 나온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 2:11~13).
두 가지 중요한 표현이 여기에 나타난다. 첫 번째는 “다 하나에서”(11절), 두 번째는 “형제”이다(12,13절). 첫 번째 표현은 “모두 하나의 기원을 가진”(개정표준), “모두 하나의 혈통에서”(새영어), “같은 인성을 공유한”(필립스)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여기서 사도는 인성을 쓰신 아들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하고 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

 

아들과 우리가 “하나에서” 나왔다고 말함으로써 그분은 자신과 우리를 동일시한다. 그분은 자신이 사람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우리를 피하지도 않으신다. 진심으로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형제라고 발표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아픔을 하나님으로서 아는 것 말고, 실제 인간으로서 경험해 보셨을까? 나의 이 눈물과 고통을 아실까? 멀게만 느껴지던 하나님께 대한 질문에 이제는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새롭게 이해된다. 영원히 가까워졌다는 사실, 그것을 절대 잊지 말자!
신이 인간이 되어 살았다는 것도 놀라운데, 인간으로 살면서 사탄으로부터 무수한 유혹과 시험과 고통과 고난을 견디시고 이기셔야만 하는, 우리와 동일한 입장에서 사신 분이다! 인간을 사랑해서 그렇게 인간이 되신 신께서, 우리가 멸망 받기를 바라실까?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인간이 되신 분이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기가 힘든 위대하심이다. 하나님은 단 한 명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형제가 됨을 감사하는 한 우리를 하늘까지 붙들고 이끄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하셨는데,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는가? 우리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 한 형제로 인정될 것이다.

 

 

육체에 계실 때 겪은 인간으로서의 경험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2:17). 여기서 2장의 위대한 사상들이 흘러나온다.
1) 그가 인간이 “되셨다.”
2) 천사가 아니라 인간을 그의 형제로 삼으셨다(16절).
3) 그는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
예수님은 입양이 아니라 출생을 통해 우리의 가족이 되셨고, 온 우주 앞에서 우리를 형제로 기꺼이 발표하신다. 성경은 아들이 “육체에 계실 때” 겪은 그분의 경험을 말한다. 그분이 고통받고, 시험당하고, 온전케 되신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으로서의 경험이다.

 

1.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의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히브리서의 여섯 곳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말하는데(2:9,10,18; 5:7,8; 9:26; 13:12), 그분의 고통에는 영적인 면이 결합해 있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의 병고나 참사나 아픔 같은 인간의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영적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고통의 성질은 무엇이었는가? 그분이 느낀 죽음의 고통은 인류가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인가? 아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맛보신 죽음이므로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 고통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고통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더는 우리의 몫이 아닌 대속적 고통이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한 죽음의 문턱 안을 들여다보면서 절망 중에 무서워 부르짖는 “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가 아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우리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들어있다. 그분의 죽음은 단순히 법적 오심으로 인한 무고한 자의 죽음 그 이상이며, 순교자의 죽음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십자가의 절규(마 27:46)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분의 죽음에는 신비로운 국면이 있음을 느낀다. 아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버림 받음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완전히 홀로됨에서 오는 공포 속에 빠진 것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그분은 “둘째 사망”의 고통을 겪으셨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10). 이 구절은 예수님의 긴박하고도 강렬한 탄원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경험을 가리키는 이 장면은 복음서의 기사에서 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그분이 겪은 경험이 가상이 아니라 실제임을 확증한다. 만물을 만드시고 붙드시는 분,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이 탄원자가 되셔서, 자신을 십자가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성문 밖은 종교적 의식의 영역에서 벗어난 곳, 불경스러운 곳이었고 예수님은 거룩한 지경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죄인이 당하는 마지막 형벌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다는 것이다.

 

2.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의 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첫 번째,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여기서 성경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자격을 선포한다. 시험받는 자를 도울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은 몸소 시험을 받았던 그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다. 예수님의 시험은 분명 실제였다. 만일 그분이 실패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더라면, 그리고 그분의 시험이 단순히 가상적이었다면,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시험은 사실인데 그분이 어떻게 우리가 시험받을 때 도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니까 그냥 다 안다면 그런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진 신이다.
두 번째,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성경은 예수님의 시험에 대하여,
1)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시험받았다고 말한다.
2)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을 때뿐이었다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리스도의 시험이 일시적인 것이나 제한적이거나 광야나 겟세마네 경험에만 국한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예수님이 인간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3) 그분은 시험들을 통과하는 동안 죄를 짓지 않았다. 불같은 온갖 시험에도 한결같이 꿋꿋하셨고,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 결국 예수님이 시험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시험이 예수님께 굴복했다.
4) 우리와 예수님이 갖는 공통점은 시험에 넘어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투쟁을 충분히 체휼, 즉 경험적으로 동정하고 이해한다는 데 있다. 그분께서 견디셨기 때문에 우리의 시련과 견디려는 노력을 이해하고 어떻게 도울지도 아신다.
5) 16절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시험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말한다. 넘어진 자를 위한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이기는데 필요한 힘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제시한다.

오늘날 삶의 방식과 2천 년 전 삶의 방식이 매우 다른데, 어떻게 예수님이 모든 점에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가?”의 여부이다. “나는 과연 삶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께 충실한가?” 이런 점에서 그분의 시험은 우리의 영원한 모본이다. 예수님의 인간 되심! 그리고 그분이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셨고, 시험을 받는 동안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받을 때 그분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중요하다.

 

3.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은 어떻게 완전하게 되었는가?
히브리서는 아들이 “온전케 되었다”라는 개념을 세 번이나 제시한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 2:10) 되셨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히 5:9)셨다.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히 7:28)다.
원래 완전하신 분인데, 완전케 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이 죄를 점진적으로 극복해서 완전해졌다는 것인가? 히브리서는 인간의 죄 됨과 예수님의 오염되지 않은 부분을 뚜렷이 대조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 5:2,3). 아론 같은 제사장들이 지닌 도덕적 결함이 그분 안에는 없다.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히 7:26)신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예수님은 아론 같은 제사장들처럼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히 9:14)이시다.
문맥에 비추어 보면, 아들의 완전케 됨이라는 표현에 나타난 히브리서의 의도를 파악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완전케 됨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분의 역할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분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차원, 즉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는 자격을 얻으셨다는 것이다.
아들의 “완전케 되심”이란 배워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배움은 실수를 통해서 얻어진다. 실패는 우리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다. 그분은 넘어지고 일어나는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끊임없이 순종함을 통해 배운 것이다.
순종은 점진적이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대로 우리를 인도해 가신다. 주님의 뜻에 우리를 굴복시키는 이 과정을 날마다 배우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주님을 닮을 것이고, 주님의 말씀 속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될 것이며, 주님과의 관계도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주님이 점점 우리에게 실재가 되셔서, 예전엔 미처 몰랐던 분처럼 느끼게 된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주님은 이 땅에서의 삶의 경험이 펼쳐져 가는 동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계속 배우셨다. 순종이 그분에게 고난을 불러온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종하려는 예수님을 끊임없이 사탄이 시험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순종에는 고난이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진했고, 끊임없이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면서 그 대가가 무엇이든 거기서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다. 마지막 시험은 결정적인 것이었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십자가로 나아갔다!
고난, 시험, 순종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가리키는 신학의 3중주다. 즉,
하나님은 고난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시험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순종이 필요 없다.
오직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만 이 3가지가 의미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에 공통점이 있듯이 그분의 경험도 그렇다고 말한다. 그분은 고민의 깊이, 시험의 혹독함, 그리고 그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셨다. 예수님은 현재에도 하나님이듯이 과거에도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이 되셨고, 고난받는 자, 탄원하는 자, 의존하는 자가 되셔서 배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친히 경험한 것으로 인해, 아니 그 배움을 통과하셨다는 의미에서 “온전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자 그분 자신이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셨다. 그분의 인간적 경험은 강렬하고 사실적이고 진짜였으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에 따라 하늘 대제사장의 봉사를 위해 그분을 온전케 만들었다. 예수님의 완전은 고난과 시험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 이루어진 3가지

 

첫 번째는 그분의 대속적 죽음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2:9). 어떤 천사도 죽어야 했던 적이 없다. 십자가에서뿐만이 아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에 이르는 그 어두운 공포의 방에 들어가 본 자가 아무도 없다. 영원한 비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맛본 분! 그래서 희망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님의 인성이 이룬 두 번째 업적은 인간의 삶을 두려움 가운데서 해방시킨 것이다.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죽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마귀의 노예요 포로이며, 죽음의 공포에 매여 살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죽으심으로 두려움 가운데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셨다. 죽음! 그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가? 그러나 주님께서 그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히 비존재가 되는 잔혹한 멸망과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우리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히브리서에서는 세 번째 업적이 가장 강조된다.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우리와 “하나”되신 것(2:11), 그분이 우리의 혈육에 속하신 것(2:14) 그리고 고난과 시험과 완전케 됨의 경험(2:10,17,18; 4:14~16; 5:1~10)은 히브리서가 최고의 관심을 두는 점이다. 이것들로 인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둘째 사망”의 공포를 맛봐야 하고, 영원히 비존재가 되는 공포 속에서 살 것이며, 우리에겐 하늘 대제사장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확신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 성육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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